책 소개
▣ 출판사서평
그토록 사소한 ‘그리움’의 문장들
박후식 시인의 ‘언어’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물들의 깊은 속을 들춰내고, 사물 자체의 공백을 채워주며, 그것들의 원근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운명과도 같은 이 ‘바라봄’의 시작(詩作)은 그가 시인으로서 추구했던 40여 년의 깊이이자 통찰이며, 극도로 숙련된 실존적 표상들이다. 그가 ‘마라도’를 “물 위에/떠 있는 시”(「마라도」)로 치환하거나, ‘귀뚜라미’를 “가을 이맘때면 풀밭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살점 에듯 여친 그려 울던 그 소리, 그 풍각쟁이/산골 두메 마을이 싫어/첫사랑 그리움 두고 고향 떠난 이야기”(「귀뚜라미」)로 변용할 때도, 그의 감각적 언어는 시 전체를 통해 작동한다.
참 곱다
어려서 떠난 누님 이름처럼
송홧가루 냄새가 난다
소매 끝 적시던 우리 어린 날의 소꿉놀이 강물
누님아, 나는
오늘도 그 강변에 서 있다
-「송화강(松花江)」 부분
그는 그 송화강 어디쯤에서 누이와 소매 끝을 적시며 소꿉놀이를 했고, 그때의 분위기는 광물질처럼 남아 시인의 몸을 흘려 다니다가 ‘첫사랑 그리움’(「보세란(報歲蘭)」)을 불러내듯 누이의 표정 하나하나를 불러낸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심급이 기도 하며, 이제는 더 이상 되돌리거나 두 번 다시 갈 수 없다는 절망에서 터져 나오는 페이소스의 결정체라 해도 무방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상이라도 그것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순간 자신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시인이 집중했던 유년에 대한 ‘언어_분위기’가 얼마만큼의 강도와 무게를 가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설지 않다
강아지와 햇볕이 장난을 친다
우체통이 서 있던 자리
아무나 보면
골목 한 구석에서 뛰어나와 꼬리를 친다
그놈, 천성인가보다
빨간 우체통이
허술한 세월의 문 앞에 서 있다
까마득하다
세상이 온통 쥐 잡듯 시끄러울 때
공부하다 말고 쫓겨 온 아들놈 군대 보내놓고
문 밖에 나가 옷가지 기다리던
어미 맘이 저러했을까
우체통이 서 있던 자리
하얀 낮달 그림자
-「우체통」 전문
이 시의 구조가 매우 독특하다. 3연이 ‘우체통’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병치되는데, 각 연의 서사가 모두 다른 방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균질한 병치가 아닌, 어긋남과 균열, 확장을 아우르는 병치로서 말이다. 첫 연의 ‘우체통이 있던 자리’는 현재_시간을 통해 ‘유년’을 지향하며, 둘째 연은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표상하고, 마지막 연은 그 두 삶을 중첩해 다시 현재로 되살려놓는 변증법적 이미지로 확장된다.
박후식 시인은 언어의 살과 결을 빼어나게 고르고 다듬으며 시의 영역을 넓혀 왔다. 그의 문장은 움직이는 듯 하나 이미 멈춰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멈춰 선 듯 하나 이미 능선을 넘어서 멀리 가고 있다. 그만큼 특히, 그가 운명처럼 쏟아낸 시는 ‘아주 사소한 그리움의 문장’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다.
산골 운동장에 태극기 나부끼고
늦도록 아이들 너덧이 남아
엎치락뒤치락 영락없는 축구를 하고 있다
우리 저맘때도 그랬지
어스름토록 태극기 나부꼈지
커서 보니 아파트 높은
암벽에 태극기 하나 매달려 있다
친구도 없이 혼자 베란다 밖에 나와 손을 흔드는
그 아스라함이 너무 위태롭고 씁쓸하다
다들 어디 갔을까
암벽을 흐르는 독백이 너무 차다
-「풍경을 훔치다」 전문
시인은 말한다, 지금껏 “슬픔을 보면 커지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한다 초승달처럼 떠 있다가 돌아설 뿐 슬픔을 말하지 않”(「눈물 1」)았다고. 그러나 그것은 ‘슬픔’을 온전히 드러내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다. 사소한 문장들은 아주 사소해짐으로써 본질을 역설한다. 그가 노래했듯, ‘나 하나 감추니 모두가 눈 산이고 무애’다.
시인의 말
그것은 분실이 아니라 버스종점에
누군가 그냥 놓고 온 것이다.
비 온 날의 이별이거나
젖은 타인처럼,
여정의 종점에 유기된 한 켤레의 사유가
세상 구석구석을 헤엄치다가 다 닳아서 돌아갈 때까지
자정을 넘어 토닥거리는 불씨처럼
누군가는
그렇게 기다리며 있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박후식
1935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성장했다. 1978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다 그리고 사랑』 『손금』 『그녀의 집에는』 『흐르는 강』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도시의 저쪽』이 있다. 공주사대 국문학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나와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광주문학상 및 작품상을 수상했다.
▣ 주요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신록 / 13
풀잎 / 14
산울림 / 15
송화강(松花江) / 16
마라도 / 18
작은 새 / 19
귀뚜라미 / 20
무제(無題) / 22
친구 / 23
배롱나무 / 24
파도 소리 / 25
그녀를 두고 왔다 / 26
옛집 응달에는 / 28
겨울 강 / 29
기억의 다리 / 30
나 하나 감추니 / 31
파랑도 / 32
기다림 / 34
그대 오신다기에 / 35
밤의 시 / 36
환상의 섬 / 37
꽃무릇 / 38
아름다운 고전 / 40
제2부
누군가 울고 있을 때 / 43
가로수 / 44
시인의 잠 / 45
낮이 없는 밤 / 46
계곡 물소리 / 48
부재 / 49
저만큼 있었지 / 50
낙엽의 밀항 / 52
산이라는 이유만으로 / 53
아픔의 강 / 54
용산역을 떠날 때 / 55
이것은 아닌데 / 56
손녀꽃 / 58
계곡의 아침 / 59
자작나무 길목 / 60
왕버들 군락 / 62
눈물 1 / 63
눈물 2 / 64
낙엽에게 다가서다 / 65
DMZ / 66
문득 어느 아침 / 68
하늘을 보아라 / 70
제3부
고향이라는 말 / 73
멀리 가지 마라 / 74
어려서는 몰랐네 / 75
이젠 길이 없네 / 76
그대 고향이 있는가 / 77
겨울 보리밭 / 78
까치집 / 80
국제시장 / 81
섣달그믐날 / 82
오일장 / 83
막내와의 여행 1 / 84
막내와의 여행 2 / 86
사진을 읽다 / 88
보세란(報歲蘭) / 89
풍경을 훔치다 / 90
뒷모습 / 91
변경에 핀 풀꽃 / 92
중년, 하늘을 날다 / 94
솔부엉이 / 95
우체통 / 96
팥죽의 추억 / 97
시장 사람들 / 98
누군가 떠나고 / 100
손톱 깎는 노인 / 102
두만강 / 103
입춘 / 104
[해설] 그토록 사소한 ‘그리움’의 문장들 / 105 박성현(시인)
그토록 사소한 ‘그리움’의 문장들
박후식 시인의 ‘언어’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물들의 깊은 속을 들춰내고, 사물 자체의 공백을 채워주며, 그것들의 원근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운명과도 같은 이 ‘바라봄’의 시작(詩作)은 그가 시인으로서 추구했던 40여 년의 깊이이자 통찰이며, 극도로 숙련된 실존적 표상들이다. 그가 ‘마라도’를 “물 위에/떠 있는 시”(「마라도」)로 치환하거나, ‘귀뚜라미’를 “가을 이맘때면 풀밭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살점 에듯 여친 그려 울던 그 소리, 그 풍각쟁이/산골 두메 마을이 싫어/첫사랑 그리움 두고 고향 떠난 이야기”(「귀뚜라미」)로 변용할 때도, 그의 감각적 언어는 시 전체를 통해 작동한다.
참 곱다
어려서 떠난 누님 이름처럼
송홧가루 냄새가 난다
소매 끝 적시던 우리 어린 날의 소꿉놀이 강물
누님아, 나는
오늘도 그 강변에 서 있다
-「송화강(松花江)」 부분
그는 그 송화강 어디쯤에서 누이와 소매 끝을 적시며 소꿉놀이를 했고, 그때의 분위기는 광물질처럼 남아 시인의 몸을 흘려 다니다가 ‘첫사랑 그리움’(「보세란(報歲蘭)」)을 불러내듯 누이의 표정 하나하나를 불러낸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심급이 기도 하며, 이제는 더 이상 되돌리거나 두 번 다시 갈 수 없다는 절망에서 터져 나오는 페이소스의 결정체라 해도 무방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상이라도 그것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순간 자신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시인이 집중했던 유년에 대한 ‘언어_분위기’가 얼마만큼의 강도와 무게를 가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설지 않다
강아지와 햇볕이 장난을 친다
우체통이 서 있던 자리
아무나 보면
골목 한 구석에서 뛰어나와 꼬리를 친다
그놈, 천성인가보다
빨간 우체통이
허술한 세월의 문 앞에 서 있다
까마득하다
세상이 온통 쥐 잡듯 시끄러울 때
공부하다 말고 쫓겨 온 아들놈 군대 보내놓고
문 밖에 나가 옷가지 기다리던
어미 맘이 저러했을까
우체통이 서 있던 자리
하얀 낮달 그림자
-「우체통」 전문
이 시의 구조가 매우 독특하다. 3연이 ‘우체통’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병치되는데, 각 연의 서사가 모두 다른 방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균질한 병치가 아닌, 어긋남과 균열, 확장을 아우르는 병치로서 말이다. 첫 연의 ‘우체통이 있던 자리’는 현재_시간을 통해 ‘유년’을 지향하며, 둘째 연은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표상하고, 마지막 연은 그 두 삶을 중첩해 다시 현재로 되살려놓는 변증법적 이미지로 확장된다.
박후식 시인은 언어의 살과 결을 빼어나게 고르고 다듬으며 시의 영역을 넓혀 왔다. 그의 문장은 움직이는 듯 하나 이미 멈춰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멈춰 선 듯 하나 이미 능선을 넘어서 멀리 가고 있다. 그만큼 특히, 그가 운명처럼 쏟아낸 시는 ‘아주 사소한 그리움의 문장’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다.
산골 운동장에 태극기 나부끼고
늦도록 아이들 너덧이 남아
엎치락뒤치락 영락없는 축구를 하고 있다
우리 저맘때도 그랬지
어스름토록 태극기 나부꼈지
커서 보니 아파트 높은
암벽에 태극기 하나 매달려 있다
친구도 없이 혼자 베란다 밖에 나와 손을 흔드는
그 아스라함이 너무 위태롭고 씁쓸하다
다들 어디 갔을까
암벽을 흐르는 독백이 너무 차다
-「풍경을 훔치다」 전문
시인은 말한다, 지금껏 “슬픔을 보면 커지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한다 초승달처럼 떠 있다가 돌아설 뿐 슬픔을 말하지 않”(「눈물 1」)았다고. 그러나 그것은 ‘슬픔’을 온전히 드러내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다. 사소한 문장들은 아주 사소해짐으로써 본질을 역설한다. 그가 노래했듯, ‘나 하나 감추니 모두가 눈 산이고 무애’다.
시인의 말
그것은 분실이 아니라 버스종점에
누군가 그냥 놓고 온 것이다.
비 온 날의 이별이거나
젖은 타인처럼,
여정의 종점에 유기된 한 켤레의 사유가
세상 구석구석을 헤엄치다가 다 닳아서 돌아갈 때까지
자정을 넘어 토닥거리는 불씨처럼
누군가는
그렇게 기다리며 있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박후식
1935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성장했다. 1978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다 그리고 사랑』 『손금』 『그녀의 집에는』 『흐르는 강』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도시의 저쪽』이 있다. 공주사대 국문학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나와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광주문학상 및 작품상을 수상했다.
▣ 주요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신록 / 13
풀잎 / 14
산울림 / 15
송화강(松花江) / 16
마라도 / 18
작은 새 / 19
귀뚜라미 / 20
무제(無題) / 22
친구 / 23
배롱나무 / 24
파도 소리 / 25
그녀를 두고 왔다 / 26
옛집 응달에는 / 28
겨울 강 / 29
기억의 다리 / 30
나 하나 감추니 / 31
파랑도 / 32
기다림 / 34
그대 오신다기에 / 35
밤의 시 / 36
환상의 섬 / 37
꽃무릇 / 38
아름다운 고전 / 40
제2부
누군가 울고 있을 때 / 43
가로수 / 44
시인의 잠 / 45
낮이 없는 밤 / 46
계곡 물소리 / 48
부재 / 49
저만큼 있었지 / 50
낙엽의 밀항 / 52
산이라는 이유만으로 / 53
아픔의 강 / 54
용산역을 떠날 때 / 55
이것은 아닌데 / 56
손녀꽃 / 58
계곡의 아침 / 59
자작나무 길목 / 60
왕버들 군락 / 62
눈물 1 / 63
눈물 2 / 64
낙엽에게 다가서다 / 65
DMZ / 66
문득 어느 아침 / 68
하늘을 보아라 / 70
제3부
고향이라는 말 / 73
멀리 가지 마라 / 74
어려서는 몰랐네 / 75
이젠 길이 없네 / 76
그대 고향이 있는가 / 77
겨울 보리밭 / 78
까치집 / 80
국제시장 / 81
섣달그믐날 / 82
오일장 / 83
막내와의 여행 1 / 84
막내와의 여행 2 / 86
사진을 읽다 / 88
보세란(報歲蘭) / 89
풍경을 훔치다 / 90
뒷모습 / 91
변경에 핀 풀꽃 / 92
중년, 하늘을 날다 / 94
솔부엉이 / 95
우체통 / 96
팥죽의 추억 / 97
시장 사람들 / 98
누군가 떠나고 / 100
손톱 깎는 노인 / 102
두만강 / 103
입춘 / 104
[해설] 그토록 사소한 ‘그리움’의 문장들 / 105 박성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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