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우리들의 여여(如如)한 삶을 위해
도종환 시인이 산에서 보내온 60통의 연서(戀書)
도종환 시인의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가 재출간됐다. 동명의 제목으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다가 오랜 기간 절판 상태에 놓였던 이 책을 도종환 시인이 몇 년에 걸쳐 하나하나 다듬고 새로이 증보하여 근 10년 만에 다시금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2004년 지병으로 교단을 떠난 시인이 보은 법주리 산방에 머무는 동안 쓴 산문을 엮은 것으로, 자기 자신을 도시라는 이름의 사막에서 구해내 숲속의 청안(淸安)한 삶으로 되돌려보낸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담아낸 기록의 산실이다.
시인에게 도시는 “도처에서 모래바람 같은 것이 몰려와 눈을 뜰 수가 없”는 사막 같은 곳이었다. 도시에서 그는 뜻이 있어 세상의 큰일을 도모했으나 원한 바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몸은 온전치 못하고, 마음도 균형을 잃은 채 밥벌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숲으로 들어갔다. 깊은 산중에 집을 짓고 홀로 텃밭을 일구며 몇 해를 지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사막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떠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모래 도시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벗어나고 싶습니다. 파도치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숲 우거진 그늘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나무 아래 진종일 누워 있고 싶습니다.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나무의 그림자나 비릿한 물 냄새를 덮은 채 누워 잠들고 싶습니다. (217~218쪽)
숲에서 시인은 직접 쌀을 씻어 밥을 지어 먹었고, 텃밭에 푸성귀를 심어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으며, 끼니를 세끼에서 두 끼로 줄여야 했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다. 겨울에는 짐승들 먹을 시래기와 밤을 내다놓았고, 봄에는 할머니들을 따라다니며 나물 뜯는 걸 배우다 산천이 온통 먹을 것으로만 보일까 두려워했다. 여름에는 아까시나무 꽃, 조팝나무 흰 꽃을 보며 빛깔로 화려하기보다 향기로 진하기를 소망했고, 가을에는 가을바람 한줄기가 마음을 다독이는 걸 알았다.
사과 한 개와 어제 먹다 남은 대추차를 곁들여 아침을 먹고 마당 끝에 음식 쓰레기 놓는 곳에다 시래기와 밤을 갖다놓았습니다. 눈 위에 가져다놓은 이것들을 짐승들이 발견하고 허기를 메꾸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돌아서 몇 발짝 걸음을 떼는데 앞산 비탈에서 버스럭하는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어린 고라니 두 마리가 산을 넘어 내려오다가 나를 보고 멈칫합니다. 내 딴에는 내가 안 보이게 자리를 피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얼른 몸을 움직였더니 고라니는 고라니대로 내 몸짓을 보고 놀라 흩어집니다. 한 마리는 계곡 있는 아래쪽으로 빠르게 달려 내려가고 한 마리는 덤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287쪽)
숲속에서 자연과 동물과 함께 지내는 일상을 통해 시인은 천천히 삶의 주인 자리를 되찾는 기쁨을 느꼈다. 자신이 “먹을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낭비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삶의 기쁨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기쁨은 생명의 기쁨이자 고통 속의 기쁨이다. 우주의 일부이자 전체가 되는 기쁨이다.
그렇습니다. 신체의 욕망에 갇힌 채 새로우면서도 쾌락적인 것, 자극적이면서도 크고 많은 어떤 것을 찾아가다가 만나는 흡족함과 이 기쁨은 다릅니다. 고통을 최소화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육신이 본능적으로 움직여 가는 길과 생명의 길은 다릅니다. 이 기쁨은 고통 속에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고통을 만나 그 고통 속에서 나를 해체하고 다시 태어나면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찬물에 손을 담그며, 땀을 흘려 일을 하며, 험한 길을 걸으며, 내 하루치의 목숨에 대해 뼈저리게 생각하며 내 삶의 주체를 바꿔가는 동안 내게 찾아오는 기쁨입니다. (272쪽)
지행합일의 삶을 살려는 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
비 내린 다음의 숲처럼 맑고 평안하기를?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삶에서도 그대로 행하고자 노력한다. 지난 세월을 보아도, 앞으로 걸어갈 길을 짐작해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이 책은 철저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살고자 하는 한 인간의 간절한 물음이다. 기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라는 문장은 숲에 있던 그가 사막에 있는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절절한 물음을 품고 사는 것은 곧 기도다. 그렇게 기도가 된 물음만이 타인에게로 가 닿는다. “그대가 사막에 있다면 다시 숲으로 오시도록 부르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와 닿는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책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막에 있는 이들을 영혼의 거처인 청안의 숲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시인 도종환의 초대장이자 기도문이다.
너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사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싫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살고 싶어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황폐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풍요로워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독한 사람이 되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선하게 변하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309쪽)
작가의 말
산에서 보내는 편지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이 문장은 숲에 있던 내가 사막에 있는 내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자주 목이 마르고 불안하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하루를 살고 있다면 사막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앞사람을 따라가지만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모르겠고, 길에서 낙오하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득차 있다면 사막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어디가 길인지 모르겠고, 길을 잃을 때가 많은데 도처에서 모래바람 같은 것이 몰려와 눈을 뜰 수가 없다면 그대도 사막에 있는 것입니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살립니다. 떡갈나무 연초록 잎이 내쉬는 숨결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의 일부가 되어 나를 살아 있게 합니다. 그늘을 만들어주고 열매를 주며 지친 몸을 쉬게 해주고 영혼의 거처를 만들어줍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합니다. 그게 숲입니다.
우리가 삶을 시작했던 곳이 숲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그곳이 숲입니다. 폭염에 저를 버렸던 이파리가 두어 달 뒤 다시 푸르게 살아나는 곳도 숲입니다. 십일월에 끝난 듯싶었다가 사월에 다시 시작하는 곳이 숲입니다. 생명력이 살아 있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는데 금방 죽음으로 변하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사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싫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살고 싶어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황폐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풍요로워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독한 사람이 되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선하게 변하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그대가 있는 곳은 숲입니까? 사막입니까?
절판된 책을 다시 내는 이유도 그대가 사막에 있다면 다시 숲으로 오시도록 부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2017년 이월의 숲에서
도종환
▣ 작가 소개
저 : 도종환
1954년 9월 27일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을 거쳐,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외 5편의 시를,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박하고 순수한 시어를 사용하여 사랑과 슬픔 등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결백(潔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첫 시집인 『고두미 마을에서』(1985)는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등, 리얼리즘적인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접시꽃 당신』(1986)에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 시집은 독자의 큰 호응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와 같은 시집에는 교사로 재직하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 투옥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시, 옥중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슬픔의 뿌리』(2002), 『해인으로 가는 길』(2006) 등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관조를 통한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화해와 조화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창작과비평사, 1985), 『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몸은 비록 떠나지만』(실천문학사, 1989),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제삼문학사, 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창작과비평사,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1994), 『부드러운 직선』(창작과비평사, 1998), 『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2005),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푸른나무, 1990),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한양출판, 1994),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사계절, 1998), 『모과』(샘터사, 2000),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계절, 2000),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좋은생각, 2004) 등이 있다. 그 외 『바다유리』(현대문학북스, 2002), 『나무야 안녕』(나무생각, 2007)과 같은 동화를 쓰기도 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 활동으로 해직 · 투옥되었다가, 1998년 복직되어 2004년까지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에 재직했다.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상, 2009년 제22회 정지용 문학상, 2010년 제5회 윤동주상 문학 대상, 2011년 제13회 백석문학상, 2012년 제20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16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다.
▣ 주요 목차
1부 나는 꽃그늘 아래 혼자 누워 있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11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16
꽃그늘 20
외롭지 않아요? 25
소풍 29
청안한 삶 34
이 봄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39
여기 시계가 있습니다 46
사람도 저마다 별입니다 50
산도 보고 물도 보는 삶 56
저녁 기도 61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68
마음으로 하는 일곱 가지 보시 75
2부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
쪽잠 81
우거짓국 84
누가 불렀을까 87
갇힌 새 91
꽃 보러 오세요 95
잘 익은 빛깔 99
집 비운 날 103
겨울잠 106
배춧국 110
첫 매화 113
햇살 좋은 날 116
꽃 지는 날 120
나를 만나는 날 123
아름다운 사람 126
소멸의 불꽃 130
동안거 134
산짐승 발자국 138
제일 작은 집 141
3부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십시오
나는 지금 고요히 멈추어 있습니다 147
찢어진 장갑 152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156
봄의 줄탁 162
주는 농사 166
여름 숲의 보시 170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세요 176
쓰레기통 비우기 180
대인과 소인 185
끝날 때도 반가운 만남 190
귤 두 개 196
치통 201
죽 한 그릇 207
4부 우리가 사랑한 꽃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요
바람이 분다, 떠나고 싶다 217
깊이 들여다보기 222
가장 아름다운 색깔 229
산나물 235
조화로운 소리 241
가을 숲의 보시 246
고통을 담는 그릇 254
낙엽 이후 258
우리가 사랑한 꽃은 다 어디 있는가 262
생의 한파 268
참나무 장작 276
짐승들에게 말 걸기 281
겨울 산방 285
아름다운 암컷 289
가까이 있는 꽃 295
남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요 301
작가의 말 산에서 보내는 편지 308
우리들의 여여(如如)한 삶을 위해
도종환 시인이 산에서 보내온 60통의 연서(戀書)
도종환 시인의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가 재출간됐다. 동명의 제목으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다가 오랜 기간 절판 상태에 놓였던 이 책을 도종환 시인이 몇 년에 걸쳐 하나하나 다듬고 새로이 증보하여 근 10년 만에 다시금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2004년 지병으로 교단을 떠난 시인이 보은 법주리 산방에 머무는 동안 쓴 산문을 엮은 것으로, 자기 자신을 도시라는 이름의 사막에서 구해내 숲속의 청안(淸安)한 삶으로 되돌려보낸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담아낸 기록의 산실이다.
시인에게 도시는 “도처에서 모래바람 같은 것이 몰려와 눈을 뜰 수가 없”는 사막 같은 곳이었다. 도시에서 그는 뜻이 있어 세상의 큰일을 도모했으나 원한 바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몸은 온전치 못하고, 마음도 균형을 잃은 채 밥벌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숲으로 들어갔다. 깊은 산중에 집을 짓고 홀로 텃밭을 일구며 몇 해를 지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사막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떠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모래 도시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벗어나고 싶습니다. 파도치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숲 우거진 그늘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나무 아래 진종일 누워 있고 싶습니다.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나무의 그림자나 비릿한 물 냄새를 덮은 채 누워 잠들고 싶습니다. (217~218쪽)
숲에서 시인은 직접 쌀을 씻어 밥을 지어 먹었고, 텃밭에 푸성귀를 심어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으며, 끼니를 세끼에서 두 끼로 줄여야 했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다. 겨울에는 짐승들 먹을 시래기와 밤을 내다놓았고, 봄에는 할머니들을 따라다니며 나물 뜯는 걸 배우다 산천이 온통 먹을 것으로만 보일까 두려워했다. 여름에는 아까시나무 꽃, 조팝나무 흰 꽃을 보며 빛깔로 화려하기보다 향기로 진하기를 소망했고, 가을에는 가을바람 한줄기가 마음을 다독이는 걸 알았다.
사과 한 개와 어제 먹다 남은 대추차를 곁들여 아침을 먹고 마당 끝에 음식 쓰레기 놓는 곳에다 시래기와 밤을 갖다놓았습니다. 눈 위에 가져다놓은 이것들을 짐승들이 발견하고 허기를 메꾸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돌아서 몇 발짝 걸음을 떼는데 앞산 비탈에서 버스럭하는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어린 고라니 두 마리가 산을 넘어 내려오다가 나를 보고 멈칫합니다. 내 딴에는 내가 안 보이게 자리를 피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얼른 몸을 움직였더니 고라니는 고라니대로 내 몸짓을 보고 놀라 흩어집니다. 한 마리는 계곡 있는 아래쪽으로 빠르게 달려 내려가고 한 마리는 덤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287쪽)
숲속에서 자연과 동물과 함께 지내는 일상을 통해 시인은 천천히 삶의 주인 자리를 되찾는 기쁨을 느꼈다. 자신이 “먹을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낭비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삶의 기쁨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기쁨은 생명의 기쁨이자 고통 속의 기쁨이다. 우주의 일부이자 전체가 되는 기쁨이다.
그렇습니다. 신체의 욕망에 갇힌 채 새로우면서도 쾌락적인 것, 자극적이면서도 크고 많은 어떤 것을 찾아가다가 만나는 흡족함과 이 기쁨은 다릅니다. 고통을 최소화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육신이 본능적으로 움직여 가는 길과 생명의 길은 다릅니다. 이 기쁨은 고통 속에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고통을 만나 그 고통 속에서 나를 해체하고 다시 태어나면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찬물에 손을 담그며, 땀을 흘려 일을 하며, 험한 길을 걸으며, 내 하루치의 목숨에 대해 뼈저리게 생각하며 내 삶의 주체를 바꿔가는 동안 내게 찾아오는 기쁨입니다. (272쪽)
지행합일의 삶을 살려는 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
비 내린 다음의 숲처럼 맑고 평안하기를?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삶에서도 그대로 행하고자 노력한다. 지난 세월을 보아도, 앞으로 걸어갈 길을 짐작해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이 책은 철저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살고자 하는 한 인간의 간절한 물음이다. 기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라는 문장은 숲에 있던 그가 사막에 있는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절절한 물음을 품고 사는 것은 곧 기도다. 그렇게 기도가 된 물음만이 타인에게로 가 닿는다. “그대가 사막에 있다면 다시 숲으로 오시도록 부르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와 닿는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책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막에 있는 이들을 영혼의 거처인 청안의 숲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시인 도종환의 초대장이자 기도문이다.
너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사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싫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살고 싶어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황폐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풍요로워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독한 사람이 되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선하게 변하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309쪽)
작가의 말
산에서 보내는 편지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이 문장은 숲에 있던 내가 사막에 있는 내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자주 목이 마르고 불안하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하루를 살고 있다면 사막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앞사람을 따라가지만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모르겠고, 길에서 낙오하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득차 있다면 사막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어디가 길인지 모르겠고, 길을 잃을 때가 많은데 도처에서 모래바람 같은 것이 몰려와 눈을 뜰 수가 없다면 그대도 사막에 있는 것입니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살립니다. 떡갈나무 연초록 잎이 내쉬는 숨결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의 일부가 되어 나를 살아 있게 합니다. 그늘을 만들어주고 열매를 주며 지친 몸을 쉬게 해주고 영혼의 거처를 만들어줍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합니다. 그게 숲입니다.
우리가 삶을 시작했던 곳이 숲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그곳이 숲입니다. 폭염에 저를 버렸던 이파리가 두어 달 뒤 다시 푸르게 살아나는 곳도 숲입니다. 십일월에 끝난 듯싶었다가 사월에 다시 시작하는 곳이 숲입니다. 생명력이 살아 있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는데 금방 죽음으로 변하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사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싫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살고 싶어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황폐해지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풍요로워지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독한 사람이 되는 곳, 그곳이 사막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선하게 변하는 곳, 그곳이 숲입니다.
그대가 있는 곳은 숲입니까? 사막입니까?
절판된 책을 다시 내는 이유도 그대가 사막에 있다면 다시 숲으로 오시도록 부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2017년 이월의 숲에서
도종환
▣ 작가 소개
저 : 도종환
1954년 9월 27일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을 거쳐,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외 5편의 시를,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박하고 순수한 시어를 사용하여 사랑과 슬픔 등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결백(潔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첫 시집인 『고두미 마을에서』(1985)는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등, 리얼리즘적인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접시꽃 당신』(1986)에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 시집은 독자의 큰 호응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와 같은 시집에는 교사로 재직하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 투옥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시, 옥중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슬픔의 뿌리』(2002), 『해인으로 가는 길』(2006) 등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관조를 통한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화해와 조화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창작과비평사, 1985), 『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몸은 비록 떠나지만』(실천문학사, 1989),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제삼문학사, 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창작과비평사,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1994), 『부드러운 직선』(창작과비평사, 1998), 『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2005),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푸른나무, 1990),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한양출판, 1994),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사계절, 1998), 『모과』(샘터사, 2000),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계절, 2000),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좋은생각, 2004) 등이 있다. 그 외 『바다유리』(현대문학북스, 2002), 『나무야 안녕』(나무생각, 2007)과 같은 동화를 쓰기도 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 활동으로 해직 · 투옥되었다가, 1998년 복직되어 2004년까지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에 재직했다.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상, 2009년 제22회 정지용 문학상, 2010년 제5회 윤동주상 문학 대상, 2011년 제13회 백석문학상, 2012년 제20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16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다.
▣ 주요 목차
1부 나는 꽃그늘 아래 혼자 누워 있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11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16
꽃그늘 20
외롭지 않아요? 25
소풍 29
청안한 삶 34
이 봄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39
여기 시계가 있습니다 46
사람도 저마다 별입니다 50
산도 보고 물도 보는 삶 56
저녁 기도 61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68
마음으로 하는 일곱 가지 보시 75
2부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
쪽잠 81
우거짓국 84
누가 불렀을까 87
갇힌 새 91
꽃 보러 오세요 95
잘 익은 빛깔 99
집 비운 날 103
겨울잠 106
배춧국 110
첫 매화 113
햇살 좋은 날 116
꽃 지는 날 120
나를 만나는 날 123
아름다운 사람 126
소멸의 불꽃 130
동안거 134
산짐승 발자국 138
제일 작은 집 141
3부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십시오
나는 지금 고요히 멈추어 있습니다 147
찢어진 장갑 152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156
봄의 줄탁 162
주는 농사 166
여름 숲의 보시 170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세요 176
쓰레기통 비우기 180
대인과 소인 185
끝날 때도 반가운 만남 190
귤 두 개 196
치통 201
죽 한 그릇 207
4부 우리가 사랑한 꽃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요
바람이 분다, 떠나고 싶다 217
깊이 들여다보기 222
가장 아름다운 색깔 229
산나물 235
조화로운 소리 241
가을 숲의 보시 246
고통을 담는 그릇 254
낙엽 이후 258
우리가 사랑한 꽃은 다 어디 있는가 262
생의 한파 268
참나무 장작 276
짐승들에게 말 걸기 281
겨울 산방 285
아름다운 암컷 289
가까이 있는 꽃 295
남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요 301
작가의 말 산에서 보내는 편지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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