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a) 누군가 제멋대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b) 평소엔 친절하게 응대하다가도 큰일이 생기면 전화를 안 받는다. c) 상담원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주 바뀐다. d) 책상을 내려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다. e) 입소문과 달리 물건의 크기가 왜소하고 볼품이 없다. f) 광고지의 그림처럼 멋진 성충으로 자라 우화하지 않고 계속 애벌레로 지내며 아마존젤리만 축낸다. g) 약정기간 동안 반품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고지받지 못한 경우(단 공동 구매자에 한함). h) 발육이 늦고 밤이 되면 불안해하며 문틈을 긁는다. i) 색깔이나 무늬가 마음에 안 든다: 반품설명서의 지시에 따라 라벨을 뜯지 말고 그대로 재포장해 문밖에 놓아두십시오. 택배기사 K(「민주주의」 전문)
9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이전 시집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이번 시집은 ‘서사적 진술의 시’라고 일컬을 만하다. 사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다양한 서사적 진술의 방법을 통해 한층 강화된 풍자적 시선으로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개인사의 심층적 내면세계보다는 세상의 모든 경계가 사라진 공동체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절룩이며 돌아오는 패자를 맞는/착한 애인은 더이상 없”을지라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사용자와 고용자,/정복자와 희생자”가 어우러지는 “완전한 세계”(「‘파이팅’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꿈꾸며 시인은 “코딱지만 한 땅덩어리를 놓고 아옹다옹하는 국제분쟁 따위는 우습게 여기는 사유의 광대함”(「소유와 다국적기업의 기원」)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확산’을 꾀하며 외부 세계로 시야를 넓혀간다.
겨울이 오면 이 땅의 어머니들은 누구나 한두번쯤 아침 밥상을 차리다 말고 무슨 액땜이라도 하는 양, “야, 밤새 눈이 하얗게 쌓였네” 하고 들릴락 말락 하게 내뱉는다. 그릇 부딪는 소리, 얌전한 도마소리에 취해 두툼한 솜이불 한 귀퉁이씩 붙들고 늦잠을 즐기던 아이들은 무엇엔가 홀린 듯 단잠을 훌훌 벗어던지고 내복 바람에 성에 낀 창가에 매달려 그 맑고 찬란한 겨울 아침을 맞곤 했다는데, 이런 거짓말의 풍습은 밤새 눈 내린 춥고 컴컴한 첫새벽에 삶은 눌은밥 한사발 들이켜고 홀로 먼 길 떠난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이 눈물겨운 족속의 오랜 전통이라고(「겨울 아침의 역사」 전문)
시인은 또 자본주의의 “전략 컨설팅”(「오늘의 시」) 기획에 휘둘리는 문화적 세태를 비판하면서 상업성에 물들어가는 ‘우리 시대의 시’를 냉소적인 어조로 풍자한다. 이 비판과 풍자의 대상 속에는 “나 자신에 대해서만 궁금했으므로/세상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주먹아, 나는 통곡한다」)던 시인 자신도 포함시킴으로써 자기반성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제 살을 찢는 고통 속에서 언어의 실을 뽑아올”리며 “지역과 민족, 국가를 뛰어넘어 한 시대를 풍미하는, 누구나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한편의 대표 시”를 지향하면서 “가장 고도로 집중된 이미지”와 “과거와 미래의 지혜와 정신, 감각을 총망라한 오늘의 시를 불러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오늘의 시」)는다.
라면이 끓는 사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낸다. 무정란이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다. 누군가 그를 낳은 것이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그가 누굴 닮았건, 그가 누구이건 인 마이 마인드, 인 마이 하트, 인 마이 소울을 외치면 곧장 가격표가 붙고 유통된다. 소비는 그의 약속된 미래다. 그는 완전한 무엇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누군가를 애끓게 사랑했던 기억도 없다. 그런데 까보면 노른자도 있다. 진짜 같다.(「시의 시대」 전문)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대목은 인유와 패러디의 기법이다. 시인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상록수」), 「푸른 하늘을」(「도토리에 관한 명상」), 이상의 「오감도」(「통계 속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빈센트 밀레이의 「시인과 그의 책」(「시인과 그의 책」) 등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는가 하면, 김소월의 「개여울」의 시행을 갖다 쓰거나(「홀로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을 땐」) 김종삼의 「물통」의 한 구절을 아예 제목으로 차용하기도 하고(「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마야꼽스끼의 「오월」의 형식을 빌려오기도(「‘파이팅’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한다. 또한 오규원의 산문과 시를 인유하고 변용하면서(「벌레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잎과」) 시적 풍자의 방식을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로 구사한다.
평양냉면을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평양냉면을 먹는 동안에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시장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진보와 개혁은 발라내 분리수거하라 주적도, 인문학의 풍토도, G20도, 경제민주화도, FTA도 수육 반접시에 털어넣는다 올겨울 크리스마스캐럴은 한미연합사에 맡겨라/그러나/신용불량, 중고차, 짭새, 준비생, 공시촌, 포인트 카드, 심부름센터, 농촌 총각, 불법체류자, 비정규직, 고공 농성, 분신, 화염병, 불법 다운로드, 노숙자, 성매매, (…) 무료 급식소, 대리운전, 연체료, 가격 파괴, 잡상인, 카드빚, 날치기, 무보증,//나는 이 모든 무수한 반동과 수시로 내통한다/매일매일/이 땅에 빌붙어 살아남기 위해서/21세기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상록수」 부분)
그런가 하면 인터넷 싸이트의 글을 고스란히 옮겨와 “눈물로 얼룩진 자의 삶을 위로하는 행사를 인류애 또는 사회공헌 활동이라 부”(「부자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르는 허위의식을 고발하기도 하고, “부당하거나 무례하다고 느꼈을 때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모금의 시대」) 되물으며 “거친 운명에 빵 조각을 떨어뜨리며 저항하던 지혜는 오래전에 퇴화되었”고 “불평등한 자본”(「GDP가 달과 인간의 진화에 미친 영향」)의 굴레에 얽매인 시대를 비판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상록수」)하며 “스무살의 눈과 귀는 흐려지고/흰머리 귀밑에 가득”해졌으나 “다시 희망에 대해/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 묻고 또 물어”(「학교에 가자」)본다.
우린 서로 만난 적이 없으므로/침묵이 먼저다/왜 그래야 했는지 동기가 불분명하므로/침묵이 먼저다/검찰이 수사하고 있으므로/침묵이 먼저다/내부 고발자의 진술을 배제했다 해도/침묵이 먼저다/결정적인 증거가 조작되었다 해도/침묵이 먼저다/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므로/침묵이 먼저다/정부의 발표를 듣고 난 뒤에도/침묵이 먼저다/침몰하는 배에서 보내온 학생들의 문자와/모든 약속/그들이 함께 나눈 이야기가/증거 불충분으로/파기 환송된다 해도/우리 안에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어/괜찮다 다 괜찮다/다시 시작하자고 울부짖어도(「이것은 내게 던져진 질문이 아니다」 전문)
올해로 등단 30년을 맞이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적 아이러니와 풍자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을 사실과 허구, 동일성과 타자성,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와해되는 혼재향의 시간 구조와 긴밀히 결부시킴으로써 사회적 비판 및 정치적 풍자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는 “새로운 실험”(해설)을 시도한다. “한낮에도 도깨비를 보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듣는” 시인의 “삐딱하고 황당한 면모”(김형윤, 추천사)를 엿볼 수 있는 이번 시집은 또한 30년의 시력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뜻이 세워져 있지 않고, 학문은 설익고, 공명심이 많아 문인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오래된 가계부에 덧붙여」)는 시인의 자평은 공연한 겸손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창기 李昌起
1959년 서울에서 나서 인천에서 자랐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4년『문예중앙』에 시를, 1990년 『문학과사회』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李生이 담 안을 엿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밖의 저서로 『스무살의 수사학』 『김삿갓이라 불리는 사내』 등이 있다.
a) 누군가 제멋대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b) 평소엔 친절하게 응대하다가도 큰일이 생기면 전화를 안 받는다. c) 상담원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주 바뀐다. d) 책상을 내려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다. e) 입소문과 달리 물건의 크기가 왜소하고 볼품이 없다. f) 광고지의 그림처럼 멋진 성충으로 자라 우화하지 않고 계속 애벌레로 지내며 아마존젤리만 축낸다. g) 약정기간 동안 반품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고지받지 못한 경우(단 공동 구매자에 한함). h) 발육이 늦고 밤이 되면 불안해하며 문틈을 긁는다. i) 색깔이나 무늬가 마음에 안 든다: 반품설명서의 지시에 따라 라벨을 뜯지 말고 그대로 재포장해 문밖에 놓아두십시오. 택배기사 K(「민주주의」 전문)
9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이전 시집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이번 시집은 ‘서사적 진술의 시’라고 일컬을 만하다. 사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다양한 서사적 진술의 방법을 통해 한층 강화된 풍자적 시선으로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개인사의 심층적 내면세계보다는 세상의 모든 경계가 사라진 공동체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절룩이며 돌아오는 패자를 맞는/착한 애인은 더이상 없”을지라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사용자와 고용자,/정복자와 희생자”가 어우러지는 “완전한 세계”(「‘파이팅’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꿈꾸며 시인은 “코딱지만 한 땅덩어리를 놓고 아옹다옹하는 국제분쟁 따위는 우습게 여기는 사유의 광대함”(「소유와 다국적기업의 기원」)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확산’을 꾀하며 외부 세계로 시야를 넓혀간다.
겨울이 오면 이 땅의 어머니들은 누구나 한두번쯤 아침 밥상을 차리다 말고 무슨 액땜이라도 하는 양, “야, 밤새 눈이 하얗게 쌓였네” 하고 들릴락 말락 하게 내뱉는다. 그릇 부딪는 소리, 얌전한 도마소리에 취해 두툼한 솜이불 한 귀퉁이씩 붙들고 늦잠을 즐기던 아이들은 무엇엔가 홀린 듯 단잠을 훌훌 벗어던지고 내복 바람에 성에 낀 창가에 매달려 그 맑고 찬란한 겨울 아침을 맞곤 했다는데, 이런 거짓말의 풍습은 밤새 눈 내린 춥고 컴컴한 첫새벽에 삶은 눌은밥 한사발 들이켜고 홀로 먼 길 떠난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이 눈물겨운 족속의 오랜 전통이라고(「겨울 아침의 역사」 전문)
시인은 또 자본주의의 “전략 컨설팅”(「오늘의 시」) 기획에 휘둘리는 문화적 세태를 비판하면서 상업성에 물들어가는 ‘우리 시대의 시’를 냉소적인 어조로 풍자한다. 이 비판과 풍자의 대상 속에는 “나 자신에 대해서만 궁금했으므로/세상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주먹아, 나는 통곡한다」)던 시인 자신도 포함시킴으로써 자기반성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제 살을 찢는 고통 속에서 언어의 실을 뽑아올”리며 “지역과 민족, 국가를 뛰어넘어 한 시대를 풍미하는, 누구나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한편의 대표 시”를 지향하면서 “가장 고도로 집중된 이미지”와 “과거와 미래의 지혜와 정신, 감각을 총망라한 오늘의 시를 불러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오늘의 시」)는다.
라면이 끓는 사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낸다. 무정란이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다. 누군가 그를 낳은 것이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그가 누굴 닮았건, 그가 누구이건 인 마이 마인드, 인 마이 하트, 인 마이 소울을 외치면 곧장 가격표가 붙고 유통된다. 소비는 그의 약속된 미래다. 그는 완전한 무엇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누군가를 애끓게 사랑했던 기억도 없다. 그런데 까보면 노른자도 있다. 진짜 같다.(「시의 시대」 전문)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대목은 인유와 패러디의 기법이다. 시인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상록수」), 「푸른 하늘을」(「도토리에 관한 명상」), 이상의 「오감도」(「통계 속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빈센트 밀레이의 「시인과 그의 책」(「시인과 그의 책」) 등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는가 하면, 김소월의 「개여울」의 시행을 갖다 쓰거나(「홀로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을 땐」) 김종삼의 「물통」의 한 구절을 아예 제목으로 차용하기도 하고(「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마야꼽스끼의 「오월」의 형식을 빌려오기도(「‘파이팅’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한다. 또한 오규원의 산문과 시를 인유하고 변용하면서(「벌레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잎과」) 시적 풍자의 방식을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로 구사한다.
평양냉면을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평양냉면을 먹는 동안에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시장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진보와 개혁은 발라내 분리수거하라 주적도, 인문학의 풍토도, G20도, 경제민주화도, FTA도 수육 반접시에 털어넣는다 올겨울 크리스마스캐럴은 한미연합사에 맡겨라/그러나/신용불량, 중고차, 짭새, 준비생, 공시촌, 포인트 카드, 심부름센터, 농촌 총각, 불법체류자, 비정규직, 고공 농성, 분신, 화염병, 불법 다운로드, 노숙자, 성매매, (…) 무료 급식소, 대리운전, 연체료, 가격 파괴, 잡상인, 카드빚, 날치기, 무보증,//나는 이 모든 무수한 반동과 수시로 내통한다/매일매일/이 땅에 빌붙어 살아남기 위해서/21세기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상록수」 부분)
그런가 하면 인터넷 싸이트의 글을 고스란히 옮겨와 “눈물로 얼룩진 자의 삶을 위로하는 행사를 인류애 또는 사회공헌 활동이라 부”(「부자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르는 허위의식을 고발하기도 하고, “부당하거나 무례하다고 느꼈을 때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모금의 시대」) 되물으며 “거친 운명에 빵 조각을 떨어뜨리며 저항하던 지혜는 오래전에 퇴화되었”고 “불평등한 자본”(「GDP가 달과 인간의 진화에 미친 영향」)의 굴레에 얽매인 시대를 비판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상록수」)하며 “스무살의 눈과 귀는 흐려지고/흰머리 귀밑에 가득”해졌으나 “다시 희망에 대해/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 묻고 또 물어”(「학교에 가자」)본다.
우린 서로 만난 적이 없으므로/침묵이 먼저다/왜 그래야 했는지 동기가 불분명하므로/침묵이 먼저다/검찰이 수사하고 있으므로/침묵이 먼저다/내부 고발자의 진술을 배제했다 해도/침묵이 먼저다/결정적인 증거가 조작되었다 해도/침묵이 먼저다/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므로/침묵이 먼저다/정부의 발표를 듣고 난 뒤에도/침묵이 먼저다/침몰하는 배에서 보내온 학생들의 문자와/모든 약속/그들이 함께 나눈 이야기가/증거 불충분으로/파기 환송된다 해도/우리 안에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어/괜찮다 다 괜찮다/다시 시작하자고 울부짖어도(「이것은 내게 던져진 질문이 아니다」 전문)
올해로 등단 30년을 맞이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적 아이러니와 풍자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을 사실과 허구, 동일성과 타자성,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와해되는 혼재향의 시간 구조와 긴밀히 결부시킴으로써 사회적 비판 및 정치적 풍자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는 “새로운 실험”(해설)을 시도한다. “한낮에도 도깨비를 보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듣는” 시인의 “삐딱하고 황당한 면모”(김형윤, 추천사)를 엿볼 수 있는 이번 시집은 또한 30년의 시력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뜻이 세워져 있지 않고, 학문은 설익고, 공명심이 많아 문인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오래된 가계부에 덧붙여」)는 시인의 자평은 공연한 겸손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창기 李昌起
1959년 서울에서 나서 인천에서 자랐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4년『문예중앙』에 시를, 1990년 『문학과사회』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李生이 담 안을 엿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밖의 저서로 『스무살의 수사학』 『김삿갓이라 불리는 사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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