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누군가와 똑같은 시를 쓴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
자연의 감수성이 체화된 언어, 삶의 정리를 예술로 승화한 서정시
몽골 현대시를 대변하는 락그와수렌의 시선집 출간
“다른 이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이 대초원/ 다리를 뻗어 차고 태어난 후손을/ 신까지 질투하는/ 고귀한 여인이 몸을 풀어 자식을 낳는 초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에게 아버지는 ‘푸른 영원의 산’을 ‘아들의 산’으로 정해 준다. 소년은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을 마시고, 자연을 숨 쉬는 몽골인으로서 가축과 함께 뛰놀며 동물과 동화되어 성장한다. 화가의 길을 걷던 평범한 소년은 1962년 처녀작 〈가을 달〉을 발표하여 시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시를 읽은 사람들은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나왔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의 나이 고작 18살 때의 일이었다.
흰 서릿발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 부는 밤
달이 대지를 비추며 여기저기서 밤을 지냈다
건초 더미 옆에 고인
갑자기 퍼부은 빗물 고인 웅덩이에서 밤을 지냈다
누런빛이 밴 흰 게르 안측으로
쑥 들어와 이리저리 배회하며 밤을 지냈다
세 번 찬물을 부어 증류한 도수 높은 소주 냄새에 비틀거리며
서른세 개 오아시스에 크게 취해 밤을 지냈다
-《가을 달》 전문
락그와수렌은 이후 몽골을 대표하는 3대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첫 작품을 발표한 이래 20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권의 시집도 낼 수 없었다.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의 첫 시집 《서정의 궤도》는 198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다시 10년이 되는 1991년에 《이중주》, 또 10년 뒤인 2000년에 《쓴 풀》을 발표한다. 이렇게 시간의 간격을 두고 시집을 냈지만 시인은 시가 삶의 중심이라 할 정도로 글을 썼다. “살아 있으되, 죽는 것처럼 나쁜 것은 없다. 살아 있지만 좋지 않은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의 생명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다.”고 말하며 무릎관절을 해칠 정도로 쪼그리고 앉아 창작에 매진했으며, 창작이 ‘감옥’이 될 정도로 치열하게 글을 썼다. 그리고 그런 치열함을 시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말한다.
시인은 《묘지》에서 “사라지는 이유를 별들로 둘러대도/ 생성하는 근원은 풀줄기로 나온다”고 말한다. 죽음의 원인은 별과 관련이 있고, 새로운 생명은 그 별이 떨어진 대지에서 풀로 다시 소생한다. 자연과 천체, 생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단순히 시적인 상상이 아니라 몽골인들의 보편적인 생명관이다. 《우리》에서는 너와 내가 산이 되고, 물이 되자고 한다. 비가 되어 초원 위에 쏟아진 물은 땅속에 스며들어 샘이 되고, 어떤 작은 미동에도 흔들리는 민감한 샘물은 시적 화자의 몸에 들어가 작은 것에도 아파하는 민감한 성격을 만든다.
민감하다 해도 너무 민감한
차가운 샘물
사나이 몸 안으로
색이 변해 흐르는
나의 차가운 샘물
대지의 속삭임
-《차가운 샘물》 부분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는 “몽골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옛날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시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라는 인상적인 고백을 남겼다. 유목이라는 이동 생활에서 비롯된 자연 친화적 정서와, 초원이라는 열린 공간을 어머니의 품이자 존재의 근원적 터전으로 체화하는 몽골 특유의 서정시 전통은 1930년대 ‘데. 나착도르지’, 1960년대 ‘야보홀랑’에 이어 1980년대 ‘바오긴 라그와수렌’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삶에 대한 긍정적 성찰과 자기 정체성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하늘에 대한 겸허함,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표출되고, 이것은 곧 조국애로 확대된다. 그러나 시인 바오긴 라그와수렌의 시는 이전 시대의 시보다 서정이 자아화되고 비판적이며, 개성적인 목소리를 강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참신하고 섬세한 비유와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 민족의 정서가 호흡하는 소재와 운율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준다.
“온몸에 스며드는 몽골의 바람 없이 난 살아갈 수 없다”
존재의 순환적 본질을 감각적으로 꿰뚫는 시의 원형적 숨결
몽골인의 삶, 문화 자체를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확장시킨 대표 시인
시인 도르지팔라민 소미야가 지적했듯 락그와수렌의 시 창작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꼽히는데, 첫째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로이 개척한 점, 둘째 거의 모든 시마다 몽골 생활과 풍속을 하나의 소재로 삼아 문학적으로 형상한 점, 셋째 시 한 편마다 하나의 완결된 서사적 줄거리를 갖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편을 하나의 연속적인 그림으로 그리거나 연극으로 공연할 수 있다.
그의 시 《왼섶 델》에서는 아이가 자주 유산되거나 자식이 일찍 죽게 되면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성을 상징적으로 바꾸거나, 아이 이름을 이것아님(엔비쉬)’, ‘저것아님(테르비쉬)’, ‘나아님(비비쉬), ‘사람아님(훈비쉬)’, ‘누렁이(샤르노허이)’ 등으로 별다르게 짓는 몽골의 풍속이 잘 묘사되어 있다. 《머플러로 씌워 두었던 마두금 2》에서는 초상이 나면 집 안에 있는 마두금을 싸 두는 풍속을 독특한 문학적 상상력과 선명하고 탁월한 묘사로 서사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마두금은 악기 머리를 말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말 털을 꼬아 굵고 가는 두 개의 현을 만들어 여러 가지 말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말한다. 보통 초상이 났을 때 49일 동안 마두금을 싸 두는데, 이것은 마두금 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즉, 마두금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몽골인들에게 찬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던 《새끼 뱀》에서는 마지막 남은 육신과 마음을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내주는 인간과 동물계를 뛰어넘는 모성의 극한을 보여 준다.
락그와수렌은 시를 쓰는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노래와 시를 짓기 때문에 규모가 큰 장편시나 가극, 연극 작품을 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물론 나중에 가극이나 장편시를 썼지만, 그가 시와 노래 가사를 썼던 동기는 바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데서 비롯된다. 특히 시인의 어머니는 하루 이틀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누워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항상 아파서 자리보전을 하고 계셨던 어머니를 걱정하며 지낸다.
편찮으신 어머니의 창백한 베개 옆에
밤낮을 연민의 끈에 묶여
그 많은 놀이를 거절하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기에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습니다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습니다》 부분
그의 시세계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자연 그 자체이자 생명의 원천, 시적 감수성의 원초적 실마리라 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의 젖줄을 “모든 어머니의 가슴에서 흐르기 시작한 풍부한 젖의 강, 자식을 따라 흐른 인연의 희디흰 강, 어머니의 강이라고 노래한다.” 《서정의 궤도》는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하여 모성과 태양, 하늘을 향해 열린 게르를 직조하여 아이의 생명력과 성장을 놀랍도록 투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아이가 게르의 끈을 잡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둥글게 돈 생애 첫 번째 걸음마의 족적은 해와 달의 궤도, 어머니의 젖과 모성으로 연결된 서정의 궤도이다. 이 한 편의 시 속에 몽골인의 삶과 인생관, 자연관이 온전히 녹아들어 그 자체로 하나의 빛나는 작은 우주를 이룬다. 행과 불행, 빛과 어둠 등 상대적인 것은 그 자체에 반대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전체를 이룬다. 이러한 삶의 이치를 시인은 여러 시에서 철학적인 어조로 표백한다.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에서
아파하는 행복을 들었네…
…… (중략) ……
높은 산등성이에서
인내하는 고통을 보았네
-《이중주》 부분
순환하는 큰 고통의 틈새에
행복이 있다고 난 믿는다
내 순진한 믿음은
비 온 뒤에 무지개가 뜨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둠 뒤에 빛이 밝아 오기 때문인지 모른다
-《순진한 믿음》 부분
락그와수렌은 또한 한국에도 네 차례나 방문한, 한국을 잘 아는 시인이다. 그는 단 한 편의 시로 시단의 선구자로 등장하며 시인으로서의 천재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다른 이의 마음과 피가 배인 아름다운 시에서 나는 한 줄도 베끼지 않았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보편적으로 시에 사용되는 주제나 관념이 갖는 일반적 이해를 무너뜨리고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롭게 개척했으며, 1960년대 사회주의 시대의 표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창작 기법으로 새로운 시 물결을 일으켰다. 그의 시는 다른 젊은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몽골 시단의 한 원류가 되었다.
내가 죽어-사람들이 나를 잊을 때
그림자로 빛을 깨고
내 무덤에 한번 오소서
내 영혼이 당신을 알아보리니
(……)
사랑했노라 진정으로 … 라고
가장 마지막 내 뼈들이 모여 외치리라
-《내가 죽어》 부분
뛰어난 문학성, 극적인 생애, 그럼에도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적 시인들을 소개하는 ‘문학의숲’ 《세계숨은시인선》 시리즈
이란의 포루그 파로흐자드, 러시아의 오시프 만델슈탐, 폴란드의 아담 자가예프스키, 일본의 나나오 사카키,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모네다에 이어 아르헨티나의 후안 헬만, 몽골의 바오긴 락그와수렌, 네팔의 두르가 랄 쉬레스타를 소개하는 문학의숲 《세계숨은시인선》은 해당 언어권 문학가와 연구자는 알고 있지만, 시를 쓰거나 문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조차 여전히 낯선 이름의 시인과 작품들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소개된 해외 시의 대부분은 영미 시와 프랑스ㆍ독일의 근대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시가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세계숨은시인선》 시리즈는, 세계 어느 곳에나 최고의 시가 있고 최고의 시인들이 있다는 전제 아래 시작되었다. 시인들이 읽고 싶은 시집들을 펴낸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이 시리즈에서 소개하려는 시인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첫째, 뛰어난 문학적 성취가 있을 것. 비록 우리에게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당 언어권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와 작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는 제외한다.
둘째, 극적인 생애의 작가. 시인의 삶 또한 드라마틱하고, 사상적ㆍ철학적으로 특별함과 깊이가 있는 경우.
셋째, 작가가 살아가는(또는 살아간) 시대와 역사, 지역의 특성이 작품에 반영되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 것.
영미 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는 다수의 희곡을 남겼지만, 그 원천은 소네트로 대표되는 ‘시’였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은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근대 소설가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 국민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인도인들이 존경하는 구루 타고르는 시를 통해 구도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송되며 사랑받는 장르다. 시는 사물과 의식, 물질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도로 집약된 언어 세계를 다루지만 심장 박동처럼 인간에게 친숙한 ‘리듬’을 타고 전해진다는 장점을 갖는다. 이 점에서 물질주의가 만연한 현대에도 ‘시’의 가치는 쉽게 교환가치로 환산하기 어렵다. 희소하기에 가치가 있고, 소수에 의해 창작되기에 고유한 세계를 보여 준다. 시안詩眼이 열린 소수만이 시를 향유하지만, 그 소수에 의해 쓰인 훌륭한 시는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문학의숲’에서 새롭게 펴내는 《세계숨은시인선》은 뛰어난 문학성을 보였고 작가로서 극적인 생애를 살았으나 아직도 우리에게 생소한, ‘세계의 숨어 있는 시인’을 발굴하여 세계 어디에나 좋은 시, 좋은 시인이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영미 문학에 편중된 우리의 세계 시 읽기의 편식을 지양하고, 터키, 몽골, 네팔 등 제3세계 언어권의 시인도 적극 소개할 예정이다.
첫 시인은 이란의 여성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 파로흐자드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를 만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 영감을 준 시인으로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다.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이란을 움직이는 그녀의 강렬한 시 세계를 맛볼 수 있다.
두 번째 시인은 러시아의 릴케라 불리는 오시프 만델슈탐. 그의 부인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상록이 없었다면 시집 한 권 제대로 남지 못했을, 스탈린 시대에 감옥에 갇혀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만델슈탐의 서정시 세계를 주목한다.
세 번째 시인은 폴란드의 시성 아담 자가예프스키. 체스와프 미워시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명성을 이으며 한국의 고은 시인과 함께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그의 시 세계가 처음 소개된다.
네 번째 시인은 일본의 시인이자 우주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나나오 사카키. 그의 시에 대해 게리 스나이더(미국 시인, 수필가, 환경운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사상과 영감의 근원은 동양과 서양의 근원보다 더 오래되었고 또한 새롭다. 이러한 풍미를 가진 시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정이 깊고 익살스러우며 얼핏 단순해 보이나 우주적이고 철저하게 근원적이며 자유로운 시. 이는 손과 머리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발로 쓴 것이다. 지성이나 교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을 위해, 살아 있는 생의 궤적으로서 여기에 존재한다. 나나오의 시를 신발 속에 넣고, 몇 킬로미터이든 걸어 보자!”
다섯 번째 시인은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모네다. 그는 가난으로 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채 집에 있던 단 한 권의 책인 아버지의 시집을 보며 글자를 배웠다. 자신의 시가 ‘빈곤의 문화’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그는 동시대 시인들이 보여주는 부르주아적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그에게서는 노동자 냄새가 난다. 평생 스페인 북부 레온을 떠나지 않은 그는 자신만의 발판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시 세계를 전개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독특한 시적 개념을 은밀히 노출시킨다. 아직 해석되지 않은, 그래서 무한한 해석의 문을 가진 작품이 바로 그의 시다.
여섯 번째 시인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헬만이다. 아주 어렸을 때 열성적인 독서가였던 형이 헬만에게 러시아어로 된 시를 읽어 준다. 러시아어를 전혀 몰랐지만 이 영향으로 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아홉 살 때 도스토옙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읽은 뒤 며칠 동안 열병을 앓는다. 그 소년은 이후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데 위험할 만큼 대담하고, 차라리 서글플 만큼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자세, 자신의 외침이 바로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절규하는 시, 그것이 바로 후안 헬만의 시다.”(미겔 코레아, 쿠바 망명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곱 번째 시인은 몽골의 락그와수렌이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발표한 시로 시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천재성을 입증받은 그는 이후 몽골을 대표하는 3대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사회주의 시대의 표현의 탄압으로 그의 첫 시집은 첫 시 발표 후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개성적인 목소리를 강하게 드러내는 그의 독특한 창작 기법은 다른 젊은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몽골 시단의 한 원류가 되었다.
이어 네팔의 두르가 랄 쉬레스타가 뒤를 이을 예정이다. 해당 언어권의 전문가를 번역자로 선정하여 원시에 충실한 번역을 하되 가독성을 고려했고, 각 권마다 박형준, 이장욱, 진수미, 김경주, 이문재, 손택수 등 영향력 있는 한국 시인의 에세이를 따로 실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시인 또는 시집을 읽어 나가는 데 이들의 해설과 에세이가 나침반 역할을 해 줄 것이며, 시를 본격적으로 창작하거나 공부하는 독자들에게는 보다 유익한 부록이 될 것이다.
시인과 작품에 대한 평
락그와수렌은 첫 번째 작품으로 천재성을 지닌 특별한 시인임을 보여 주었다. 젊은 시인이 처녀작으로 시단에 선구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처녀작은 다른 작가를 모방해 자신의 재능을 보여 주고, 나름대로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락그와수렌은 처녀작으로 이런 일반적 이해를 무너뜨리고 독특한 창작 기법으로 다른 젊은 시인들을 추종하게 했다. 그의 시들은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롭게 개척했으며, 독특한 문학적 상상력과 선명하고 탁월한 묘사로 1980년대 시적 긴장이 없던 시대에 시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호르로긴 샘필덴데브 (문학비평가, 구비문학연구가)
락그와수렌의 시 창작의 새로운 특징은 첫째,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로이 개척한 점, 둘째, 거의 모든 시마다 몽골 생활과 풍속을 하나의 소재로 삼아 문학적으로 형상한 점, 셋째, 시 한 편마다 하나의 완결된 서사적 줄거리를 갖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편을 하나의 연속적인 그림으로 그리거나
연극으로 공연할 수 있다.
-도르지팔라민 소미야 (시인)
▣ 작가 소개
저자 : 바오긴 락그와수렌
저자이자 풀들을 울리며 부는 바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바오긴 락그와수렌(Bavuugiin Lhagvasuren)은 몽골 초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 들판의 바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주 좋은 분이었다. 대상에 대한 사람의 기억은 마음과 정신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뼛속 골수에서 시작된다. 그는 많아야 다섯 마디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과묵하고 평범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아내 없이, 나는 어머니 없이 많은 세월을 함께 지냈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가며, 삶의 굴곡을 넘어 왔다. 많은 천 조각으로 만든 델 같은 세월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내답게 보내 왔다.” 그는 인간이 이 세상에 행복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맛보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고통은 행복보다 더 깊은 맛이 있기 때문에. 몽골의 문학평론가 곤치긴 바트소리가 말했듯이 락그와수렌은 사회주의 시대를 살면서 창작활동을 했지만, 자신의 시에 진실하게 서 있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당이라든가 우호 등을 표방하는 시대 상황에 편승하지 않고, 그러한 시대...적 영향에서 벗어나 드물게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인이다. 사회주의 시대에 태어나 그 속에서 성장하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사회의 관념에서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작가적 본질을 드러내 준다. 그는 시에서 이룬 탁월한 성취와 독창성으로 20세기 몽골 시단의 3대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적지 않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아 왔다. 아쉽게도 나는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내 인생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나는 1962년 처음 시를 발표했다. 그때 사람들은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한 권의 시집도 낼 수 없었다. 이념적으로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역자 : 이안나
역자 이안나는 1960년 서울 출생. 상명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어문학연구소(국립 울란바타르대학교 부설)에서 어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명대학교 다문화사회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과 객원교수로 있다. 「몽골 현대시의 흐름과 전망」, 「현대 몽골의 시동향」, 「자유로운 영혼 단장아라브자」 등의 글을 발표했으며, 저서로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2005), 《몽한사전》(공저, 2009), 《몽골 민간신앙 연구》(2010)가 있다. 《샤먼의 전설》(2012), 《눈의 전설》(2007),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라 생각할 때까지》(2007), 《몽골의 설화》(2007), 《말을 타고 가는 이야기》(동화, 2006), 《칭기스칸 영웅기》(2005), 《몽골 현대시선집》(2003), 《몽골민족의 기원신화》(2001)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우리
순진한 믿음
늑대
얻고 떠나는 시
다람쥐
묘지
산을 보고
보르즈긴 갈색 평원
2점
삶의 메모
고요
무제
이별
먼 호수
무사태평
내가 죽어
신앙이 아니라 사랑으로
새는 깃으로 운다
향수
가을바람
겨울에
무지개예요 나는
저 푸른 영원의 산-내 아들의 산
말
부드러운 풀
그 어느 여인에게
서정의 궤도
꽃 묵주
사슴의 소리
비가悲歌
살육
알 수 없는 멜로디
엄마와 함께 본 그해 나담 축제
왼섶 델
어둠
홀로 된 원앙
한밤중 말이 투르르 콧소리를 내다
가을 달
초원의 가을
고비
에튀드
재수 있는 신음 소리
고요
반려와 함께하니 행복하네
나의 연인
시골 여인
소리의 바람
봄달이 뜨면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신다
손톱만한 작은 해 1
머플러로 씌워 두었던 마두금 2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습니다
론도
당신
까치
시에 대한 산과 사람의 대화
이중주
시작점 끝점
몽골의 대초원
국경에서 쓴 시
고향 생각
하늘의 수색
남자들이 없던 여름
안개 속에서
차가운 샘물
꿈의 고비
장님 이야기
새끼 뱀
해설 어머니 초원 위에 쓴 바람과 태양, 달, 서정의 하모니ㆍ이안나
에세이 게르와 시, 신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ㆍ손택수
출전
“누군가와 똑같은 시를 쓴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
자연의 감수성이 체화된 언어, 삶의 정리를 예술로 승화한 서정시
몽골 현대시를 대변하는 락그와수렌의 시선집 출간
“다른 이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이 대초원/ 다리를 뻗어 차고 태어난 후손을/ 신까지 질투하는/ 고귀한 여인이 몸을 풀어 자식을 낳는 초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에게 아버지는 ‘푸른 영원의 산’을 ‘아들의 산’으로 정해 준다. 소년은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을 마시고, 자연을 숨 쉬는 몽골인으로서 가축과 함께 뛰놀며 동물과 동화되어 성장한다. 화가의 길을 걷던 평범한 소년은 1962년 처녀작 〈가을 달〉을 발표하여 시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시를 읽은 사람들은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나왔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의 나이 고작 18살 때의 일이었다.
흰 서릿발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 부는 밤
달이 대지를 비추며 여기저기서 밤을 지냈다
건초 더미 옆에 고인
갑자기 퍼부은 빗물 고인 웅덩이에서 밤을 지냈다
누런빛이 밴 흰 게르 안측으로
쑥 들어와 이리저리 배회하며 밤을 지냈다
세 번 찬물을 부어 증류한 도수 높은 소주 냄새에 비틀거리며
서른세 개 오아시스에 크게 취해 밤을 지냈다
-《가을 달》 전문
락그와수렌은 이후 몽골을 대표하는 3대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첫 작품을 발표한 이래 20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권의 시집도 낼 수 없었다.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의 첫 시집 《서정의 궤도》는 198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다시 10년이 되는 1991년에 《이중주》, 또 10년 뒤인 2000년에 《쓴 풀》을 발표한다. 이렇게 시간의 간격을 두고 시집을 냈지만 시인은 시가 삶의 중심이라 할 정도로 글을 썼다. “살아 있으되, 죽는 것처럼 나쁜 것은 없다. 살아 있지만 좋지 않은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의 생명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다.”고 말하며 무릎관절을 해칠 정도로 쪼그리고 앉아 창작에 매진했으며, 창작이 ‘감옥’이 될 정도로 치열하게 글을 썼다. 그리고 그런 치열함을 시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말한다.
시인은 《묘지》에서 “사라지는 이유를 별들로 둘러대도/ 생성하는 근원은 풀줄기로 나온다”고 말한다. 죽음의 원인은 별과 관련이 있고, 새로운 생명은 그 별이 떨어진 대지에서 풀로 다시 소생한다. 자연과 천체, 생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단순히 시적인 상상이 아니라 몽골인들의 보편적인 생명관이다. 《우리》에서는 너와 내가 산이 되고, 물이 되자고 한다. 비가 되어 초원 위에 쏟아진 물은 땅속에 스며들어 샘이 되고, 어떤 작은 미동에도 흔들리는 민감한 샘물은 시적 화자의 몸에 들어가 작은 것에도 아파하는 민감한 성격을 만든다.
민감하다 해도 너무 민감한
차가운 샘물
사나이 몸 안으로
색이 변해 흐르는
나의 차가운 샘물
대지의 속삭임
-《차가운 샘물》 부분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는 “몽골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옛날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시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라는 인상적인 고백을 남겼다. 유목이라는 이동 생활에서 비롯된 자연 친화적 정서와, 초원이라는 열린 공간을 어머니의 품이자 존재의 근원적 터전으로 체화하는 몽골 특유의 서정시 전통은 1930년대 ‘데. 나착도르지’, 1960년대 ‘야보홀랑’에 이어 1980년대 ‘바오긴 라그와수렌’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삶에 대한 긍정적 성찰과 자기 정체성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하늘에 대한 겸허함,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표출되고, 이것은 곧 조국애로 확대된다. 그러나 시인 바오긴 라그와수렌의 시는 이전 시대의 시보다 서정이 자아화되고 비판적이며, 개성적인 목소리를 강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참신하고 섬세한 비유와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 민족의 정서가 호흡하는 소재와 운율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준다.
“온몸에 스며드는 몽골의 바람 없이 난 살아갈 수 없다”
존재의 순환적 본질을 감각적으로 꿰뚫는 시의 원형적 숨결
몽골인의 삶, 문화 자체를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확장시킨 대표 시인
시인 도르지팔라민 소미야가 지적했듯 락그와수렌의 시 창작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꼽히는데, 첫째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로이 개척한 점, 둘째 거의 모든 시마다 몽골 생활과 풍속을 하나의 소재로 삼아 문학적으로 형상한 점, 셋째 시 한 편마다 하나의 완결된 서사적 줄거리를 갖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편을 하나의 연속적인 그림으로 그리거나 연극으로 공연할 수 있다.
그의 시 《왼섶 델》에서는 아이가 자주 유산되거나 자식이 일찍 죽게 되면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성을 상징적으로 바꾸거나, 아이 이름을 이것아님(엔비쉬)’, ‘저것아님(테르비쉬)’, ‘나아님(비비쉬), ‘사람아님(훈비쉬)’, ‘누렁이(샤르노허이)’ 등으로 별다르게 짓는 몽골의 풍속이 잘 묘사되어 있다. 《머플러로 씌워 두었던 마두금 2》에서는 초상이 나면 집 안에 있는 마두금을 싸 두는 풍속을 독특한 문학적 상상력과 선명하고 탁월한 묘사로 서사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마두금은 악기 머리를 말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말 털을 꼬아 굵고 가는 두 개의 현을 만들어 여러 가지 말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말한다. 보통 초상이 났을 때 49일 동안 마두금을 싸 두는데, 이것은 마두금 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즉, 마두금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몽골인들에게 찬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던 《새끼 뱀》에서는 마지막 남은 육신과 마음을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내주는 인간과 동물계를 뛰어넘는 모성의 극한을 보여 준다.
락그와수렌은 시를 쓰는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노래와 시를 짓기 때문에 규모가 큰 장편시나 가극, 연극 작품을 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물론 나중에 가극이나 장편시를 썼지만, 그가 시와 노래 가사를 썼던 동기는 바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데서 비롯된다. 특히 시인의 어머니는 하루 이틀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누워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항상 아파서 자리보전을 하고 계셨던 어머니를 걱정하며 지낸다.
편찮으신 어머니의 창백한 베개 옆에
밤낮을 연민의 끈에 묶여
그 많은 놀이를 거절하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기에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습니다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습니다》 부분
그의 시세계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자연 그 자체이자 생명의 원천, 시적 감수성의 원초적 실마리라 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의 젖줄을 “모든 어머니의 가슴에서 흐르기 시작한 풍부한 젖의 강, 자식을 따라 흐른 인연의 희디흰 강, 어머니의 강이라고 노래한다.” 《서정의 궤도》는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하여 모성과 태양, 하늘을 향해 열린 게르를 직조하여 아이의 생명력과 성장을 놀랍도록 투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아이가 게르의 끈을 잡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둥글게 돈 생애 첫 번째 걸음마의 족적은 해와 달의 궤도, 어머니의 젖과 모성으로 연결된 서정의 궤도이다. 이 한 편의 시 속에 몽골인의 삶과 인생관, 자연관이 온전히 녹아들어 그 자체로 하나의 빛나는 작은 우주를 이룬다. 행과 불행, 빛과 어둠 등 상대적인 것은 그 자체에 반대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전체를 이룬다. 이러한 삶의 이치를 시인은 여러 시에서 철학적인 어조로 표백한다.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에서
아파하는 행복을 들었네…
…… (중략) ……
높은 산등성이에서
인내하는 고통을 보았네
-《이중주》 부분
순환하는 큰 고통의 틈새에
행복이 있다고 난 믿는다
내 순진한 믿음은
비 온 뒤에 무지개가 뜨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둠 뒤에 빛이 밝아 오기 때문인지 모른다
-《순진한 믿음》 부분
락그와수렌은 또한 한국에도 네 차례나 방문한, 한국을 잘 아는 시인이다. 그는 단 한 편의 시로 시단의 선구자로 등장하며 시인으로서의 천재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다른 이의 마음과 피가 배인 아름다운 시에서 나는 한 줄도 베끼지 않았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보편적으로 시에 사용되는 주제나 관념이 갖는 일반적 이해를 무너뜨리고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롭게 개척했으며, 1960년대 사회주의 시대의 표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창작 기법으로 새로운 시 물결을 일으켰다. 그의 시는 다른 젊은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몽골 시단의 한 원류가 되었다.
내가 죽어-사람들이 나를 잊을 때
그림자로 빛을 깨고
내 무덤에 한번 오소서
내 영혼이 당신을 알아보리니
(……)
사랑했노라 진정으로 … 라고
가장 마지막 내 뼈들이 모여 외치리라
-《내가 죽어》 부분
뛰어난 문학성, 극적인 생애, 그럼에도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적 시인들을 소개하는 ‘문학의숲’ 《세계숨은시인선》 시리즈
이란의 포루그 파로흐자드, 러시아의 오시프 만델슈탐, 폴란드의 아담 자가예프스키, 일본의 나나오 사카키,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모네다에 이어 아르헨티나의 후안 헬만, 몽골의 바오긴 락그와수렌, 네팔의 두르가 랄 쉬레스타를 소개하는 문학의숲 《세계숨은시인선》은 해당 언어권 문학가와 연구자는 알고 있지만, 시를 쓰거나 문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조차 여전히 낯선 이름의 시인과 작품들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소개된 해외 시의 대부분은 영미 시와 프랑스ㆍ독일의 근대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시가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세계숨은시인선》 시리즈는, 세계 어느 곳에나 최고의 시가 있고 최고의 시인들이 있다는 전제 아래 시작되었다. 시인들이 읽고 싶은 시집들을 펴낸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이 시리즈에서 소개하려는 시인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첫째, 뛰어난 문학적 성취가 있을 것. 비록 우리에게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당 언어권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와 작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는 제외한다.
둘째, 극적인 생애의 작가. 시인의 삶 또한 드라마틱하고, 사상적ㆍ철학적으로 특별함과 깊이가 있는 경우.
셋째, 작가가 살아가는(또는 살아간) 시대와 역사, 지역의 특성이 작품에 반영되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 것.
영미 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는 다수의 희곡을 남겼지만, 그 원천은 소네트로 대표되는 ‘시’였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은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근대 소설가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 국민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인도인들이 존경하는 구루 타고르는 시를 통해 구도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송되며 사랑받는 장르다. 시는 사물과 의식, 물질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도로 집약된 언어 세계를 다루지만 심장 박동처럼 인간에게 친숙한 ‘리듬’을 타고 전해진다는 장점을 갖는다. 이 점에서 물질주의가 만연한 현대에도 ‘시’의 가치는 쉽게 교환가치로 환산하기 어렵다. 희소하기에 가치가 있고, 소수에 의해 창작되기에 고유한 세계를 보여 준다. 시안詩眼이 열린 소수만이 시를 향유하지만, 그 소수에 의해 쓰인 훌륭한 시는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문학의숲’에서 새롭게 펴내는 《세계숨은시인선》은 뛰어난 문학성을 보였고 작가로서 극적인 생애를 살았으나 아직도 우리에게 생소한, ‘세계의 숨어 있는 시인’을 발굴하여 세계 어디에나 좋은 시, 좋은 시인이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영미 문학에 편중된 우리의 세계 시 읽기의 편식을 지양하고, 터키, 몽골, 네팔 등 제3세계 언어권의 시인도 적극 소개할 예정이다.
첫 시인은 이란의 여성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 파로흐자드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를 만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 영감을 준 시인으로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다.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이란을 움직이는 그녀의 강렬한 시 세계를 맛볼 수 있다.
두 번째 시인은 러시아의 릴케라 불리는 오시프 만델슈탐. 그의 부인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상록이 없었다면 시집 한 권 제대로 남지 못했을, 스탈린 시대에 감옥에 갇혀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만델슈탐의 서정시 세계를 주목한다.
세 번째 시인은 폴란드의 시성 아담 자가예프스키. 체스와프 미워시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명성을 이으며 한국의 고은 시인과 함께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그의 시 세계가 처음 소개된다.
네 번째 시인은 일본의 시인이자 우주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나나오 사카키. 그의 시에 대해 게리 스나이더(미국 시인, 수필가, 환경운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사상과 영감의 근원은 동양과 서양의 근원보다 더 오래되었고 또한 새롭다. 이러한 풍미를 가진 시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정이 깊고 익살스러우며 얼핏 단순해 보이나 우주적이고 철저하게 근원적이며 자유로운 시. 이는 손과 머리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발로 쓴 것이다. 지성이나 교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을 위해, 살아 있는 생의 궤적으로서 여기에 존재한다. 나나오의 시를 신발 속에 넣고, 몇 킬로미터이든 걸어 보자!”
다섯 번째 시인은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모네다. 그는 가난으로 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채 집에 있던 단 한 권의 책인 아버지의 시집을 보며 글자를 배웠다. 자신의 시가 ‘빈곤의 문화’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그는 동시대 시인들이 보여주는 부르주아적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그에게서는 노동자 냄새가 난다. 평생 스페인 북부 레온을 떠나지 않은 그는 자신만의 발판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시 세계를 전개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독특한 시적 개념을 은밀히 노출시킨다. 아직 해석되지 않은, 그래서 무한한 해석의 문을 가진 작품이 바로 그의 시다.
여섯 번째 시인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헬만이다. 아주 어렸을 때 열성적인 독서가였던 형이 헬만에게 러시아어로 된 시를 읽어 준다. 러시아어를 전혀 몰랐지만 이 영향으로 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아홉 살 때 도스토옙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읽은 뒤 며칠 동안 열병을 앓는다. 그 소년은 이후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데 위험할 만큼 대담하고, 차라리 서글플 만큼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자세, 자신의 외침이 바로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절규하는 시, 그것이 바로 후안 헬만의 시다.”(미겔 코레아, 쿠바 망명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곱 번째 시인은 몽골의 락그와수렌이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발표한 시로 시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천재성을 입증받은 그는 이후 몽골을 대표하는 3대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사회주의 시대의 표현의 탄압으로 그의 첫 시집은 첫 시 발표 후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개성적인 목소리를 강하게 드러내는 그의 독특한 창작 기법은 다른 젊은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몽골 시단의 한 원류가 되었다.
이어 네팔의 두르가 랄 쉬레스타가 뒤를 이을 예정이다. 해당 언어권의 전문가를 번역자로 선정하여 원시에 충실한 번역을 하되 가독성을 고려했고, 각 권마다 박형준, 이장욱, 진수미, 김경주, 이문재, 손택수 등 영향력 있는 한국 시인의 에세이를 따로 실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시인 또는 시집을 읽어 나가는 데 이들의 해설과 에세이가 나침반 역할을 해 줄 것이며, 시를 본격적으로 창작하거나 공부하는 독자들에게는 보다 유익한 부록이 될 것이다.
시인과 작품에 대한 평
락그와수렌은 첫 번째 작품으로 천재성을 지닌 특별한 시인임을 보여 주었다. 젊은 시인이 처녀작으로 시단에 선구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처녀작은 다른 작가를 모방해 자신의 재능을 보여 주고, 나름대로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락그와수렌은 처녀작으로 이런 일반적 이해를 무너뜨리고 독특한 창작 기법으로 다른 젊은 시인들을 추종하게 했다. 그의 시들은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롭게 개척했으며, 독특한 문학적 상상력과 선명하고 탁월한 묘사로 1980년대 시적 긴장이 없던 시대에 시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호르로긴 샘필덴데브 (문학비평가, 구비문학연구가)
락그와수렌의 시 창작의 새로운 특징은 첫째,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로이 개척한 점, 둘째, 거의 모든 시마다 몽골 생활과 풍속을 하나의 소재로 삼아 문학적으로 형상한 점, 셋째, 시 한 편마다 하나의 완결된 서사적 줄거리를 갖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편을 하나의 연속적인 그림으로 그리거나
연극으로 공연할 수 있다.
-도르지팔라민 소미야 (시인)
▣ 작가 소개
저자 : 바오긴 락그와수렌
저자이자 풀들을 울리며 부는 바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바오긴 락그와수렌(Bavuugiin Lhagvasuren)은 몽골 초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 들판의 바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주 좋은 분이었다. 대상에 대한 사람의 기억은 마음과 정신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뼛속 골수에서 시작된다. 그는 많아야 다섯 마디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과묵하고 평범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아내 없이, 나는 어머니 없이 많은 세월을 함께 지냈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가며, 삶의 굴곡을 넘어 왔다. 많은 천 조각으로 만든 델 같은 세월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내답게 보내 왔다.” 그는 인간이 이 세상에 행복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맛보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고통은 행복보다 더 깊은 맛이 있기 때문에. 몽골의 문학평론가 곤치긴 바트소리가 말했듯이 락그와수렌은 사회주의 시대를 살면서 창작활동을 했지만, 자신의 시에 진실하게 서 있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당이라든가 우호 등을 표방하는 시대 상황에 편승하지 않고, 그러한 시대...적 영향에서 벗어나 드물게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인이다. 사회주의 시대에 태어나 그 속에서 성장하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사회의 관념에서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작가적 본질을 드러내 준다. 그는 시에서 이룬 탁월한 성취와 독창성으로 20세기 몽골 시단의 3대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적지 않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아 왔다. 아쉽게도 나는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내 인생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나는 1962년 처음 시를 발표했다. 그때 사람들은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한 권의 시집도 낼 수 없었다. 이념적으로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역자 : 이안나
역자 이안나는 1960년 서울 출생. 상명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어문학연구소(국립 울란바타르대학교 부설)에서 어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명대학교 다문화사회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과 객원교수로 있다. 「몽골 현대시의 흐름과 전망」, 「현대 몽골의 시동향」, 「자유로운 영혼 단장아라브자」 등의 글을 발표했으며, 저서로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2005), 《몽한사전》(공저, 2009), 《몽골 민간신앙 연구》(2010)가 있다. 《샤먼의 전설》(2012), 《눈의 전설》(2007),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라 생각할 때까지》(2007), 《몽골의 설화》(2007), 《말을 타고 가는 이야기》(동화, 2006), 《칭기스칸 영웅기》(2005), 《몽골 현대시선집》(2003), 《몽골민족의 기원신화》(2001)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우리
순진한 믿음
늑대
얻고 떠나는 시
다람쥐
묘지
산을 보고
보르즈긴 갈색 평원
2점
삶의 메모
고요
무제
이별
먼 호수
무사태평
내가 죽어
신앙이 아니라 사랑으로
새는 깃으로 운다
향수
가을바람
겨울에
무지개예요 나는
저 푸른 영원의 산-내 아들의 산
말
부드러운 풀
그 어느 여인에게
서정의 궤도
꽃 묵주
사슴의 소리
비가悲歌
살육
알 수 없는 멜로디
엄마와 함께 본 그해 나담 축제
왼섶 델
어둠
홀로 된 원앙
한밤중 말이 투르르 콧소리를 내다
가을 달
초원의 가을
고비
에튀드
재수 있는 신음 소리
고요
반려와 함께하니 행복하네
나의 연인
시골 여인
소리의 바람
봄달이 뜨면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신다
손톱만한 작은 해 1
머플러로 씌워 두었던 마두금 2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습니다
론도
당신
까치
시에 대한 산과 사람의 대화
이중주
시작점 끝점
몽골의 대초원
국경에서 쓴 시
고향 생각
하늘의 수색
남자들이 없던 여름
안개 속에서
차가운 샘물
꿈의 고비
장님 이야기
새끼 뱀
해설 어머니 초원 위에 쓴 바람과 태양, 달, 서정의 하모니ㆍ이안나
에세이 게르와 시, 신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ㆍ손택수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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