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1998년 〈전태일문학상〉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정탁 시인이 〈늙은 사과〉라는 첫 시집을 출간했다. 유정탁의 시는 쉽고, 깊고, 정갈하다. 유정탁은 천년 세월의 두껍고 척박한 지표를 파헤치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숨죽여 지내고 있던 감성들을 마치 고고학자처럼 하나 둘 일으켜 세운다. 노련한 석공이 오랜 망치질 끝에 바위 속에 숨어 있던 부처와 보살을 드러내는 것 같다.
표제작 ‘늙은 사과’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평범한 일상에서 예기치 못한 뜻밖의 시상을 이끌어냄으로써 공감의 두께를 더했다.
아침에 먹는 사과는 어떤 보약보다 좋다는 아내의 말 듣고 추석 전 사다 논 사과를 꺼낸다 눈떠도 보이지 않는 청맹과니, 골방 같은 삶에서 사과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더디게, 더디게 가는 냉장고 속 세월을 살다 나온 사과, 넉 달 세월이 사람 사십 년 세월만큼이나 길었을까 어머니 젖가슴도 이보다 나으리라 생각하며 사과를 깎는데 주름이 너무 깊다 미안하구나 사과여, 네 기다림 이다지 깊은 줄 모르고 나는 변죽의 세월을 살아왔구나 톡, 칼집을 내는 칼마저 머뭇거리는, 늙은 어머니 같은 사과를 깎는 이 아침
―「늙은 사과」 전문
최근작 「아침메뉴」 연작시에서는 무엇보다 밤을 지탱한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숱한 미디어의 소식들이 유정탁에게 일상이란 더 이상 평화로움이 아니라 불길한 예감들이 사실로 확인된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히잡 쓴 팔레스타인 여성이 국기를 들고 있는 이미지에서 아름다움을 보다가도 “설익은 평화를 썰고”(「아침메뉴1」) 마는 것도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평화와 전쟁이 동시적으로 내습하는 역설적 구조의 반복. 그러므로 깨어날 때마다 들리는 이 세계의 부정적 소식에 대해서 그는 비판적(「아침메뉴2」, 「아침메뉴5」, 「아침메뉴8」)으로 응답하거나 이 부정성을 딛고 일어설만한 존재들(「아침메뉴3」, 「아침메뉴4」, 「아침메뉴7」)의 소식을 반갑게 맞이한다. 물론 이 응답의 방식들은 모두 “트라우마”가 된다는 점에서 시인으로 하여금 수저를 들고 자신의 배를 채우지 못하게 만드는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달리 말해, 시인의 이러한 응답들에도 불구하고 “아침 밥상에는 화살과 대포가 날아다”(「아침메뉴9」)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행 혹은 여행
정주적 삶의 불가능성이 지속적인 이동과 운동을 생성해내지만, 이 이동과 운동이 곧 삶의 불가능성에 닿아 있는 묘한 역설의 상태가 유정탁의 시에는 내재해 있다. 이른 바 이를 유정탁 시가 가닿아 있는 내적 역설의 상태로 간주할 수 있을 터이다. 이 세계가 운동 중이라는 사실, 그 운동이 삶을 죽음에 내모는 것이라는 점, 그럼에도 이 운동과 다른 방식의 이행 혹은 운동 그리고 여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 일촉즉발의 바퀴 아래/ 목을 쭉 빼놓고/ 소실 적 마실가는 할아버지처럼/ 밤길 걷는/ 저 고양이의 행적은 어디일까?”(「고양이를 살리다」)라는 질문하는 것은 죽음을 비켜서면서도 지속하는 저 고양이의 묵묵한 걸음이라는 것이다. 저 이동과 여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가방 속에
옷가지보다 먼저
마음을 접어 넣는 것은
마음속에 넣어 두었던
생각을 꺼내는 일
―「가방을 여는 일」 부분
삶이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재난/재해로 반복될 때, 여행을 떠나는 것은 현실을 일탈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자기의 현실을 드러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여행은 다른 삶의 영토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루는 근원적인 동력이다. 재난과 재해 그리고 이 세계가 초래하는 전쟁으로부터 압사되지 않기 위해 그는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길에서 삶의 가능성을 궁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동과 여정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운동과 다르지 않다. 하여, “길 끝을 찾아 길”을 나서면서 그림자로부터 “불심검문”을 받거나 달빛으로부터 “검문”을 받으면서 “난세를 살다가 승천하지 못한 혼들의 울부짖음”(「길 끝에 머물다」)을 들으며 속세로 되돌아 갈 때, 그는 더 이상 여행을 떠나기 전의 그 일 수 없다.
아니, 그는 길 끝 혹은 칼 끝에서만 살아남는 그러한 존재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계를 열심히 지탱하는 존재라고 읊조린다.
매일 엎드려 칼 맞는 사람이 있다
칼금 또렷이 빛날수록 그 이름 되살아나는 사람
칼 맞으면 죽는다는 편견을 깬 사람
쓸모없어 죽기 전 가난한 화가 화실 현판이라도
기꺼이 돼 주겠다는 사람
죽어서 영원히 사라는 사람이 있다
―「도마」 전문
죽음을 통해서 영원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와 달리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가동되는 생�畸퓐쩜�실제로 죽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에너지가 소진할 때까지 살아가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말하자면, 죽음으로써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리는 이 시스템이 허용하지 못한다. 죽음조차도 자본화할 때에만 죽음으로 승인되는 이 현실에서 ‘사용가치’조차 정지된 “도마”, 즉 ‘인간’에게 죽음은, 도마처럼 “현판”으로 이행할 수 있는 권리를 이 시스템 속에서의 인간에게는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철저한 종속과 가혹한 착취의 반복. 그래서 시적 화자의 내밀한 독백, “내 아무리 걸레처럼 살아온 生이라지만 구멍 한번 나보지 않았음을 안다”고 말하지만 “나도 언젠가 그렇게 가는 것”(「안다」)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수건으로 태어나도 걸레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전락은 일어나도 긍정적 삶으로 이행할 수 있는 방식은 그리 쉽게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비록 낭만적이긴 하지만, “성필씨 왼손은/ 오른손을 데리고 산다./ 오른손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아름다운 손」)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부터 그러한 가능성을, 전망을 예감하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예감은 불구적 “오른손”이 폐기해버린 “왼손”으로부터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왼손”의 끝없는 열정과 노력들을 동반해야 하고 그들의 고통을 수반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삶의 무게, 주름살, 살아남은 자의 고투와 다르지 않으며 그 무게와 중량(「저울」)이 이 세계가 처해 있는 한계를 넘어서게 만드는 동력(「와촌에서 헤어지다」)일 터이다. 노동자이자 시인인 그가 지난 세기의 노동자의 삶에서 비롯된 분투와 정서적 유대에 대해 애정을 표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가령, “주름이 너무 깊”은 사과를 보면서 “미안하구나 사과여, 네 기다림 이다지 깊은 줄 모르고 나는 변죽의 세월을 살아왔구나 톡, 칼집을 내는 칼마저 머뭇거리는, 늙은 어머니 같은 사과를 깍는”다.(「늙은 사과」) 말하자면, 깍아서 그것을 서둘러 먹어 소화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이들의 삶의 이행으로부터 희망이나 전망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이 세계를 격렬하게 버틴 존재들에게 마치는 헌사이자 찬사이기도 할 터. 물론 오래 살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눈여겨보는 것은 “뻗어야 할 자리 가릴 줄 아는 자만이/ 오래 살아남는다”(「감나무의 처신」)는 진술이 보여주듯, 생을 지탱해온 존재들의 삶이 뻗는 방식, 삶의 자리를 보존하는 열렬한 생의 의지에 있다. 망치로써의 이 세계가 두들겨 온 존재인 아버지를 “못”으로 비유한 시에서 그는 “휘어짐을 허락하지 않던/ 당신의 그 꼿곳한 자태는/ 장중하게 세상의 벽을 밀고 들어간/ 시멘트 못이었다”(「못」)고 고백함으로써 그네들의 삶이 그저 수동적이고 자기 생존에만 골몰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이는 억압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음으로써 이 세계의 전쟁에 대한 응전을 거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계적 시간이 아니라 삶과 기억의 시간이 생을 버티게 만들어준다는 인식도 이 때문에 비롯된다. “너와 똑 같은 시간이, 너와 똑 같은 이름으로/ 돌고 있는 다른 얼굴이 있기 때문에”(「시계」) 그의 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고 그의 시간 속에서 새롭게 새겨진다. 즉, 죽음이 거듭되어도 그 죽음은 반복해서 다음 세대로 이행하고 그 세대의 세계에서 새롭게 응답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 세계를 바라보는 슬픔과 아픔의 독법을 배우는데,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게딱지 같은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노래하는/ 아버지 어슴푸레 기억들이/ 사아나아이 가슴을 울리는 걸까”(「아버지의 노래」)라고 기억하면서 그것을 현실로 투영해서 바라본다. 혹은 “어머니의 눈은 호롱불처럼 조용”(「어머니의 눈」)하다며 “아버지 돌아가시고/ 흐르지 않는 세월”, 곧 죽음은 멈춤과 정지가 아니라 운동과 삶의 지평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발목지뢰, 구르는 바퀴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더 격정적으로 응답하는 죽음은 그와 함께, 그와 더불어 삶을 모색하던 자의 죽음이다. 한 존재의 죽음과 그 죽음을 애도하지 않기 위해, 그 죽음을 부활시키기 위해 치르던 전투에서의 무기력을 그는 잊지 않는다. 한 노동자의 죽음 이후 “우리는 발목의 상처로 스스로 위로하고 실망했지만” 그는 혹은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이름 이슬처럼 얹고 살아간다”(「그 날 우리는」)고 노래한다. 이동과 운동을 저지하는 다양한 발목지뢰가 삶을 가로막고 삶과 삶이 이어지는 것을 방해하지만, 그 죽음은 “하룻밤 자고 나면/ 누군가 또 거리로 내몰리는 이 살벌한 세상에/ 실업과 생계의 불안한 공기를 마시며/ 하나 둘 죽어 가는데 남아 있는 우리는/ 한 시대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이제야 똬리를 푼다”(「그 날 이후」)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게 기억이란 “먼지 같은 것이어서/ 후 불면 일어나고/ 첫사랑은 꼬리가 되어/ 문틀에 길게 늘어놓으니/ 밟히고 마는”(「꼬리에 관하여」) 그런 것이다. 달리 말해, 그가 기억을 불러 오는 게 아니라 사실 기억이 시인을 깨우는 것이다. 유정탁의 시에서 시적 화자의 내면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고 아주 정적이고 차갑게 식어 있는 뉘앙스를 주는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내면 조작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언어를 직조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는데, 일종의 비유와 수사를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이 세계의 실상을 확인하게 하고 그 너머를 견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의식적 의지가 아니라 삶 혹은 기억으로 대변되는 역사가 부여하는 명령에 따라, 그리하여 삶이 일으키는 명령을 듣고 그것을 옮겨 적는다고 해야 할 터.
두드릴수록
더 넓은 지도를 그리는 땀방울
방울방울 맺힌
알을 깨고 나와
부화되는 퇴근길 아침
저마다 둥근 바퀴를 굴리며
집으로 가고 있다
―「둥근 밤」 부분
삶과 노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삶-노동은 그러므로 동시적인 것이지, 컨베이어 벨트에서처럼 분리되어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삶의 바퀴와 노동의 바퀴는 같은 지도를 그리는 것이지 서로 다른 지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삶을 꾸려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는 일상적 삶에서 노동이 사라지거나 지워짐으로써 일상에서는 오직 이데올로기적 판타지가 가득하기 때문에 이 판타지를 걷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상적 삶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경계란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닐뿐더러 일상적 삶에서조차 망치질을 거듭하거나, 망치로부터 두들겨 맞으면서 새로운 삶의 지도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여, 그는 “새로 자라난/ 손톱은 때를 밀어내고/ 먼지 촘촘히 박힌 햇살/ 하루 종일 머물다가는/ 냉방에서 자는 잠이여/ 그대도 더 이상/ 떨지 않기를”(「손곱」)이라고 노래하면서 삶-노동의 접속과 냉방에서 얼지 않고 진전하기를 기원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발목 오기만 남아” 있는 실업의 상태에서도 비록 “공돌이 십 년 이력은 휴지처럼 구겨지”더라도 삶-노동을 손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옛 출근길 함께 달리던 두 바퀴마저 떠나보내고/ 아내의 배는 보름달처럼 불러오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실업일기」) 그는 “못난 놈 삶에 지쳐 흔들릴 때마다 힘이 되어 줄 통장” 즉, “때론 채찍이 되어, 때론 슬픈 그리움”(「아버지의 통장」)이 되는 강력한 삶-노동의 경험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노동의 삶이 비록 “처진 어깨”이고 마치 과거의 일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에겐 광포한 현실이라는 “밤물결 깊게 흘러갈수록 더욱 빛”(「양정동」)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돈을 주어도 오늘 밤 우리는 시내로 나갈 줄”(「양정동 블루스」) 모르고 쉬 공장지대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삶과 노동이라는 이 어찌할 수 없는 바퀴를 폐기하지 않고 묵묵히 느리게 진전하고 있는 이 시집에는 일상과 노동의 연대기가 아프게 가로지른다. 물론 부모의 삶-노동으로부터 그가 경쾌하게도 “꿈길에 퐁당퐁당, 징검다릴 놓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것이 무조건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은 지적해 두어야 한다. 즉, 오히려 그것은 생명을 발견하는 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텃밭이야기1」)에서, 죽음이 웃자란다는 차원(「텃밭이야기2」)에서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건강함이라고 불러야 할 세계로 이끄는 원천이라고 판단해야 할 지 모른다. 삶-노동의 징검다리가 없었다면, 철은 어떻게 강철이 되었을 것이며 유정탁은 어떻게 노래하는 법을 익혔겠는가. 그는 어떻게 발목을 잘라버리는 시대의 폭압적 구조를 살아나올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용서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이 세계의 부정한 건강한 세계가 가진 주름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어떻게 현실이라는 전쟁과 재난/재해로부터 다른 삶을 사고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그의 목소리가 조사弔辭처럼 들려도 그것은 생명의 노래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터.
바다는 나무다
물결,
그 넓은 나이테를 벗기며
바람이 대패질을 한다
오늘 죽은 한 사람을 위하여
하얗게 대패 밥을 밀어내며
棺을 짠다
▣ 작가 소개
저자 : 유정탁
1968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998년 ‘양정동 블루스’로 제8회 전태일문학상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울산광역시 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
▣ 주요 목차
1부_붉은 화살 / 병 속의 아우슈비츠 / 가방을 여는 일 / 세계지도 / 바람은 언제 부나 / 아내의 신발 / 아침메뉴 1 / 아침메뉴 2 / 아침메뉴 3 / 아침메뉴 4 / 아침메뉴 5 / 아침메뉴 6 / 아침메뉴 7 / 아침메뉴 8 / 아침메뉴 9
2부_고양이를 살리다 / 여름밤 / 길 끝에 머물다 / 도마 / 벌 詩 / 빨래집게가 붙드는 희망 / 새와 거울 / 와촌에서 헤어지다 / 아름다운 손 / 어느 새벽에 용서받다 / 단소 / 종이화분 / 안다 / 종이는 왜 무거운가 / 太和江을 읽다 / 집이 자라고 있다
3부_감나무의 처신 / 겨울들판 / 그 애 / 늙은 사과 / 못 / 물방울꽃 / 빈집 / 달팽이 / 시계 / 詩人과 독수리 / 아버지의 노래 / 어머니의 눈 / 어머니의 손 / 표적 / 저 눈
4부_그 날 우리는 / 그 날 이후 / 꼬리에 관하여 / 둥근 밤 / 손곱 / 실업일기 / 아버지의 통장 / 양정동 / 양정동 블루스 / 어머니의 봉급날 / 징검다리 / 바다에서 / 텃밭 이야기 1 / 텃밭이야기 2 / 파리똥을 닦으며
해설·시인의 말
1998년 〈전태일문학상〉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정탁 시인이 〈늙은 사과〉라는 첫 시집을 출간했다. 유정탁의 시는 쉽고, 깊고, 정갈하다. 유정탁은 천년 세월의 두껍고 척박한 지표를 파헤치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숨죽여 지내고 있던 감성들을 마치 고고학자처럼 하나 둘 일으켜 세운다. 노련한 석공이 오랜 망치질 끝에 바위 속에 숨어 있던 부처와 보살을 드러내는 것 같다.
표제작 ‘늙은 사과’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평범한 일상에서 예기치 못한 뜻밖의 시상을 이끌어냄으로써 공감의 두께를 더했다.
아침에 먹는 사과는 어떤 보약보다 좋다는 아내의 말 듣고 추석 전 사다 논 사과를 꺼낸다 눈떠도 보이지 않는 청맹과니, 골방 같은 삶에서 사과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더디게, 더디게 가는 냉장고 속 세월을 살다 나온 사과, 넉 달 세월이 사람 사십 년 세월만큼이나 길었을까 어머니 젖가슴도 이보다 나으리라 생각하며 사과를 깎는데 주름이 너무 깊다 미안하구나 사과여, 네 기다림 이다지 깊은 줄 모르고 나는 변죽의 세월을 살아왔구나 톡, 칼집을 내는 칼마저 머뭇거리는, 늙은 어머니 같은 사과를 깎는 이 아침
―「늙은 사과」 전문
최근작 「아침메뉴」 연작시에서는 무엇보다 밤을 지탱한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숱한 미디어의 소식들이 유정탁에게 일상이란 더 이상 평화로움이 아니라 불길한 예감들이 사실로 확인된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히잡 쓴 팔레스타인 여성이 국기를 들고 있는 이미지에서 아름다움을 보다가도 “설익은 평화를 썰고”(「아침메뉴1」) 마는 것도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평화와 전쟁이 동시적으로 내습하는 역설적 구조의 반복. 그러므로 깨어날 때마다 들리는 이 세계의 부정적 소식에 대해서 그는 비판적(「아침메뉴2」, 「아침메뉴5」, 「아침메뉴8」)으로 응답하거나 이 부정성을 딛고 일어설만한 존재들(「아침메뉴3」, 「아침메뉴4」, 「아침메뉴7」)의 소식을 반갑게 맞이한다. 물론 이 응답의 방식들은 모두 “트라우마”가 된다는 점에서 시인으로 하여금 수저를 들고 자신의 배를 채우지 못하게 만드는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달리 말해, 시인의 이러한 응답들에도 불구하고 “아침 밥상에는 화살과 대포가 날아다”(「아침메뉴9」)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행 혹은 여행
정주적 삶의 불가능성이 지속적인 이동과 운동을 생성해내지만, 이 이동과 운동이 곧 삶의 불가능성에 닿아 있는 묘한 역설의 상태가 유정탁의 시에는 내재해 있다. 이른 바 이를 유정탁 시가 가닿아 있는 내적 역설의 상태로 간주할 수 있을 터이다. 이 세계가 운동 중이라는 사실, 그 운동이 삶을 죽음에 내모는 것이라는 점, 그럼에도 이 운동과 다른 방식의 이행 혹은 운동 그리고 여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 일촉즉발의 바퀴 아래/ 목을 쭉 빼놓고/ 소실 적 마실가는 할아버지처럼/ 밤길 걷는/ 저 고양이의 행적은 어디일까?”(「고양이를 살리다」)라는 질문하는 것은 죽음을 비켜서면서도 지속하는 저 고양이의 묵묵한 걸음이라는 것이다. 저 이동과 여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가방 속에
옷가지보다 먼저
마음을 접어 넣는 것은
마음속에 넣어 두었던
생각을 꺼내는 일
―「가방을 여는 일」 부분
삶이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재난/재해로 반복될 때, 여행을 떠나는 것은 현실을 일탈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자기의 현실을 드러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여행은 다른 삶의 영토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루는 근원적인 동력이다. 재난과 재해 그리고 이 세계가 초래하는 전쟁으로부터 압사되지 않기 위해 그는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길에서 삶의 가능성을 궁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동과 여정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운동과 다르지 않다. 하여, “길 끝을 찾아 길”을 나서면서 그림자로부터 “불심검문”을 받거나 달빛으로부터 “검문”을 받으면서 “난세를 살다가 승천하지 못한 혼들의 울부짖음”(「길 끝에 머물다」)을 들으며 속세로 되돌아 갈 때, 그는 더 이상 여행을 떠나기 전의 그 일 수 없다.
아니, 그는 길 끝 혹은 칼 끝에서만 살아남는 그러한 존재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계를 열심히 지탱하는 존재라고 읊조린다.
매일 엎드려 칼 맞는 사람이 있다
칼금 또렷이 빛날수록 그 이름 되살아나는 사람
칼 맞으면 죽는다는 편견을 깬 사람
쓸모없어 죽기 전 가난한 화가 화실 현판이라도
기꺼이 돼 주겠다는 사람
죽어서 영원히 사라는 사람이 있다
―「도마」 전문
죽음을 통해서 영원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와 달리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가동되는 생�畸퓐쩜�실제로 죽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에너지가 소진할 때까지 살아가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말하자면, 죽음으로써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리는 이 시스템이 허용하지 못한다. 죽음조차도 자본화할 때에만 죽음으로 승인되는 이 현실에서 ‘사용가치’조차 정지된 “도마”, 즉 ‘인간’에게 죽음은, 도마처럼 “현판”으로 이행할 수 있는 권리를 이 시스템 속에서의 인간에게는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철저한 종속과 가혹한 착취의 반복. 그래서 시적 화자의 내밀한 독백, “내 아무리 걸레처럼 살아온 生이라지만 구멍 한번 나보지 않았음을 안다”고 말하지만 “나도 언젠가 그렇게 가는 것”(「안다」)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수건으로 태어나도 걸레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전락은 일어나도 긍정적 삶으로 이행할 수 있는 방식은 그리 쉽게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비록 낭만적이긴 하지만, “성필씨 왼손은/ 오른손을 데리고 산다./ 오른손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아름다운 손」)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부터 그러한 가능성을, 전망을 예감하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예감은 불구적 “오른손”이 폐기해버린 “왼손”으로부터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왼손”의 끝없는 열정과 노력들을 동반해야 하고 그들의 고통을 수반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삶의 무게, 주름살, 살아남은 자의 고투와 다르지 않으며 그 무게와 중량(「저울」)이 이 세계가 처해 있는 한계를 넘어서게 만드는 동력(「와촌에서 헤어지다」)일 터이다. 노동자이자 시인인 그가 지난 세기의 노동자의 삶에서 비롯된 분투와 정서적 유대에 대해 애정을 표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가령, “주름이 너무 깊”은 사과를 보면서 “미안하구나 사과여, 네 기다림 이다지 깊은 줄 모르고 나는 변죽의 세월을 살아왔구나 톡, 칼집을 내는 칼마저 머뭇거리는, 늙은 어머니 같은 사과를 깍는”다.(「늙은 사과」) 말하자면, 깍아서 그것을 서둘러 먹어 소화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이들의 삶의 이행으로부터 희망이나 전망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이 세계를 격렬하게 버틴 존재들에게 마치는 헌사이자 찬사이기도 할 터. 물론 오래 살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눈여겨보는 것은 “뻗어야 할 자리 가릴 줄 아는 자만이/ 오래 살아남는다”(「감나무의 처신」)는 진술이 보여주듯, 생을 지탱해온 존재들의 삶이 뻗는 방식, 삶의 자리를 보존하는 열렬한 생의 의지에 있다. 망치로써의 이 세계가 두들겨 온 존재인 아버지를 “못”으로 비유한 시에서 그는 “휘어짐을 허락하지 않던/ 당신의 그 꼿곳한 자태는/ 장중하게 세상의 벽을 밀고 들어간/ 시멘트 못이었다”(「못」)고 고백함으로써 그네들의 삶이 그저 수동적이고 자기 생존에만 골몰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이는 억압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음으로써 이 세계의 전쟁에 대한 응전을 거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계적 시간이 아니라 삶과 기억의 시간이 생을 버티게 만들어준다는 인식도 이 때문에 비롯된다. “너와 똑 같은 시간이, 너와 똑 같은 이름으로/ 돌고 있는 다른 얼굴이 있기 때문에”(「시계」) 그의 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고 그의 시간 속에서 새롭게 새겨진다. 즉, 죽음이 거듭되어도 그 죽음은 반복해서 다음 세대로 이행하고 그 세대의 세계에서 새롭게 응답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 세계를 바라보는 슬픔과 아픔의 독법을 배우는데,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게딱지 같은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노래하는/ 아버지 어슴푸레 기억들이/ 사아나아이 가슴을 울리는 걸까”(「아버지의 노래」)라고 기억하면서 그것을 현실로 투영해서 바라본다. 혹은 “어머니의 눈은 호롱불처럼 조용”(「어머니의 눈」)하다며 “아버지 돌아가시고/ 흐르지 않는 세월”, 곧 죽음은 멈춤과 정지가 아니라 운동과 삶의 지평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발목지뢰, 구르는 바퀴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더 격정적으로 응답하는 죽음은 그와 함께, 그와 더불어 삶을 모색하던 자의 죽음이다. 한 존재의 죽음과 그 죽음을 애도하지 않기 위해, 그 죽음을 부활시키기 위해 치르던 전투에서의 무기력을 그는 잊지 않는다. 한 노동자의 죽음 이후 “우리는 발목의 상처로 스스로 위로하고 실망했지만” 그는 혹은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이름 이슬처럼 얹고 살아간다”(「그 날 우리는」)고 노래한다. 이동과 운동을 저지하는 다양한 발목지뢰가 삶을 가로막고 삶과 삶이 이어지는 것을 방해하지만, 그 죽음은 “하룻밤 자고 나면/ 누군가 또 거리로 내몰리는 이 살벌한 세상에/ 실업과 생계의 불안한 공기를 마시며/ 하나 둘 죽어 가는데 남아 있는 우리는/ 한 시대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이제야 똬리를 푼다”(「그 날 이후」)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게 기억이란 “먼지 같은 것이어서/ 후 불면 일어나고/ 첫사랑은 꼬리가 되어/ 문틀에 길게 늘어놓으니/ 밟히고 마는”(「꼬리에 관하여」) 그런 것이다. 달리 말해, 그가 기억을 불러 오는 게 아니라 사실 기억이 시인을 깨우는 것이다. 유정탁의 시에서 시적 화자의 내면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고 아주 정적이고 차갑게 식어 있는 뉘앙스를 주는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내면 조작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언어를 직조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는데, 일종의 비유와 수사를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이 세계의 실상을 확인하게 하고 그 너머를 견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의식적 의지가 아니라 삶 혹은 기억으로 대변되는 역사가 부여하는 명령에 따라, 그리하여 삶이 일으키는 명령을 듣고 그것을 옮겨 적는다고 해야 할 터.
두드릴수록
더 넓은 지도를 그리는 땀방울
방울방울 맺힌
알을 깨고 나와
부화되는 퇴근길 아침
저마다 둥근 바퀴를 굴리며
집으로 가고 있다
―「둥근 밤」 부분
삶과 노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삶-노동은 그러므로 동시적인 것이지, 컨베이어 벨트에서처럼 분리되어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삶의 바퀴와 노동의 바퀴는 같은 지도를 그리는 것이지 서로 다른 지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삶을 꾸려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는 일상적 삶에서 노동이 사라지거나 지워짐으로써 일상에서는 오직 이데올로기적 판타지가 가득하기 때문에 이 판타지를 걷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상적 삶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경계란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닐뿐더러 일상적 삶에서조차 망치질을 거듭하거나, 망치로부터 두들겨 맞으면서 새로운 삶의 지도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여, 그는 “새로 자라난/ 손톱은 때를 밀어내고/ 먼지 촘촘히 박힌 햇살/ 하루 종일 머물다가는/ 냉방에서 자는 잠이여/ 그대도 더 이상/ 떨지 않기를”(「손곱」)이라고 노래하면서 삶-노동의 접속과 냉방에서 얼지 않고 진전하기를 기원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발목 오기만 남아” 있는 실업의 상태에서도 비록 “공돌이 십 년 이력은 휴지처럼 구겨지”더라도 삶-노동을 손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옛 출근길 함께 달리던 두 바퀴마저 떠나보내고/ 아내의 배는 보름달처럼 불러오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실업일기」) 그는 “못난 놈 삶에 지쳐 흔들릴 때마다 힘이 되어 줄 통장” 즉, “때론 채찍이 되어, 때론 슬픈 그리움”(「아버지의 통장」)이 되는 강력한 삶-노동의 경험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노동의 삶이 비록 “처진 어깨”이고 마치 과거의 일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에겐 광포한 현실이라는 “밤물결 깊게 흘러갈수록 더욱 빛”(「양정동」)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돈을 주어도 오늘 밤 우리는 시내로 나갈 줄”(「양정동 블루스」) 모르고 쉬 공장지대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삶과 노동이라는 이 어찌할 수 없는 바퀴를 폐기하지 않고 묵묵히 느리게 진전하고 있는 이 시집에는 일상과 노동의 연대기가 아프게 가로지른다. 물론 부모의 삶-노동으로부터 그가 경쾌하게도 “꿈길에 퐁당퐁당, 징검다릴 놓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것이 무조건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은 지적해 두어야 한다. 즉, 오히려 그것은 생명을 발견하는 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텃밭이야기1」)에서, 죽음이 웃자란다는 차원(「텃밭이야기2」)에서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건강함이라고 불러야 할 세계로 이끄는 원천이라고 판단해야 할 지 모른다. 삶-노동의 징검다리가 없었다면, 철은 어떻게 강철이 되었을 것이며 유정탁은 어떻게 노래하는 법을 익혔겠는가. 그는 어떻게 발목을 잘라버리는 시대의 폭압적 구조를 살아나올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용서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이 세계의 부정한 건강한 세계가 가진 주름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어떻게 현실이라는 전쟁과 재난/재해로부터 다른 삶을 사고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그의 목소리가 조사弔辭처럼 들려도 그것은 생명의 노래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터.
바다는 나무다
물결,
그 넓은 나이테를 벗기며
바람이 대패질을 한다
오늘 죽은 한 사람을 위하여
하얗게 대패 밥을 밀어내며
棺을 짠다
▣ 작가 소개
저자 : 유정탁
1968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998년 ‘양정동 블루스’로 제8회 전태일문학상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울산광역시 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
▣ 주요 목차
1부_붉은 화살 / 병 속의 아우슈비츠 / 가방을 여는 일 / 세계지도 / 바람은 언제 부나 / 아내의 신발 / 아침메뉴 1 / 아침메뉴 2 / 아침메뉴 3 / 아침메뉴 4 / 아침메뉴 5 / 아침메뉴 6 / 아침메뉴 7 / 아침메뉴 8 / 아침메뉴 9
2부_고양이를 살리다 / 여름밤 / 길 끝에 머물다 / 도마 / 벌 詩 / 빨래집게가 붙드는 희망 / 새와 거울 / 와촌에서 헤어지다 / 아름다운 손 / 어느 새벽에 용서받다 / 단소 / 종이화분 / 안다 / 종이는 왜 무거운가 / 太和江을 읽다 / 집이 자라고 있다
3부_감나무의 처신 / 겨울들판 / 그 애 / 늙은 사과 / 못 / 물방울꽃 / 빈집 / 달팽이 / 시계 / 詩人과 독수리 / 아버지의 노래 / 어머니의 눈 / 어머니의 손 / 표적 / 저 눈
4부_그 날 우리는 / 그 날 이후 / 꼬리에 관하여 / 둥근 밤 / 손곱 / 실업일기 / 아버지의 통장 / 양정동 / 양정동 블루스 / 어머니의 봉급날 / 징검다리 / 바다에서 / 텃밭 이야기 1 / 텃밭이야기 2 / 파리똥을 닦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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