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원시의 감정이 아로새긴 세계, 마력의 언어로 터져 나오는 가슴 벅찬 노래
강정의 새 시집 <키스> (문학과지성사, 2008)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1992년 만 21세라는 나이로 등단한 지 16년째가 되는 ‘중견시인’이지만 이제야 세번째 시집 출간이다. 첫시집 <처형극장> 과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건만,> 사이 간극이 10년 가까이 된다는 것은 감안하자면, 2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쓰인 시들로 꾸려진 이번 시집 <키스> 는 그러나, 강정의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세계의 구성의 가능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각별한 시집이 될 것이다.
평론가 조연정은 해설에서 “(첫 시집) <처형극장> 의 강렬도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키스’라는 세련되고도 선정적인 제목의 시집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그러나 “나는 나는 여기서 곱게 미쳐 죽을 거랍니다.”(「處刑劇場」)라고 외쳤던 스무살의 독기를 “즐거워 죽을 수 있도록”(「노래」)이라는 말랑말랑한 연애 감정과 뒤바꾸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강조한다. “ <키스> 의 강정은 <처형극장> 의 분방한 에너지를 그러모아 숙성시켜 애무의 순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정은 <처형극장> 속에 난무하던 에너지를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이라는 과도기적 여과를 통과하여 <키스> 라는 시집 안에 응집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와의 ‘깊은 키스’를 통해 오랜 시간 소년으로 살아오던 시인이 단숨에 어른으로 올라서는 순간이며 매력의 언어가 마력의 언어로 탈바꿈하는 ‘새로운 인식/시쓰기’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死後의 바람」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시집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시에서 이를 노래하고 있다.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死後의 바람」 전문
이 오래된 바람의 내력엔 서로 피를 나눠 먹던 종족의 역사가 흐른다
강물의 붉은색은 노을에 닿아 바다가 되고
발끝에 묻은 파도의 소금기가 지문으로 번질 때
기필코 사람은 지느러미와 날개를 갖는다
또 다른 궤를 그리며 땅속에 덮이는 하늘
맨발로 뛰쳐나가 생의 지도를 다시 찍으니
펄럭이는 파도 끝 자락에 마지막 詩가 불붙는다
─「死後의 바람」 전문
강정은 위 시들에서 “오래전 詩”의 끝을 알리고 “마지막 詩”의 타오름을 선언한다. “인간의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쓰던 시인은 이제 “맨발로 뛰쳐나가 생의 지도를 다시 찍으”며 새로운 시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다. 이 기묘해 보이는 개인사적 선언은 선언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이 되”는 한편 지나간 “한 세상이 저만치 다른 상처에 닿”으며 경험하는 이러한 한 세계와의 결별과 다른 세계와의 조우의 추동력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쓰인 시편들은 세계를 무한히 확장하며 새로운 세계에 닿는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상이 반드시 새로운 경험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하였으며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는 ‘전혀 새롭지 않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카메라 한 대로 모든 시간을 포획하려는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한다
당신의 얼굴을 담으려다가
두 개의 망막을 거쳐 내 심장에 가설된 집에는
당신이 떠난 자리만 휑뎅그렁 살아 있는 나보다
더 크고 살갑다
대개 과장법이 잘 통하는 나의 카메라는
사람 여자의 몸에 공룡 머리를 얹은 모습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은 내 기억보다 훨씬 먼 시간의 지층 아래
흙과 나무의 처소로
봄마다 아름답게 환생하지만
[……]
사람 여자의 몸을 내던진 당신이
살금살금 뒷물 흘리며 봄의 훈향을 대륙의 모래먼지로 뒤바꾼다 한들
어떤 한계를 넘어서려는 듯
제 속의 사악한 것을 토하려는 듯
낮게 찰랑거리는 허공에서
낯선 풍경으로 상영되는 내 마음의 돌연한 사건들이
지난한 욕정의 형식을 試演하는 걸 막을 순 없다
봄이면 귀환하는 먼 미래의 악취 속에서
나는 이미
당신이 찍어놓은 과거의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키메라, 카메라」 부분
강정 특유의 리듬이 잘 살아 있는 위 시에서 강정은 ‘내’가 기억하는 ‘당신’은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일 뿐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나’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 “낮게 찰랑거리는 허공에서 낯선 풍경으로 상영되는 내 마음의 돌연한 사건들”마저 이미 “찍어놓은 과거의 얼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정은 이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바라만 보고 있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사유 이전에 그는 당신이라 아로새긴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세계’를 찢고, 들여다보고, 삼켜, 자신 속으로 편입시킨다. 이렇게 삼켜진 세계는 ‘차이와 반복’이 생기기 전, 언어를 통해 하나가 되고, 그러므로 ‘당신’은 막막함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세계’를 들이마심으로써 시인은, 스스로 ‘완전히 특별한 세계’가 된다.
방안에서 문득 꺼내본 당신의 얼굴이 젖어 있다
머뭇거리던 당신의 마음이 한순간 멎는다
불빛이 죽은 먼지처럼 이글거린다
벽면을 바라보던 눈알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금싸라기처럼 만개한다
내 몸과 공간 사이에 경계가 사라진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
이 우주에 더 이상 밀월은 없다
─「불탄 방」- 너의 사진 전문
‘키스’의 순간 “몸과 공간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고 당신과 내가 흡착되는 순간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난다. 그것은 유일무이함으로 “이 우주에 더 이상의 밀월은” 존재할 수 없다. 강정의 키스는 타인을 확인하는 씁쓸하고 가슴 아린 몸부림의 언어가 아니라, ‘밖을 안으로 들이고 안을 밖으로 내어놓는’ 적극적이고 집요한 태도의 언어이며, “세계와 나를 가로지르고 있는” “살갗을 벗겨내어” 세계를 들이마시는 행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인이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시인에 편입된다는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삼킴’ 행위는 즉각적이며 본능적이고, 관능적이다. 어떤 판단 이전의 ‘원시’의 감정들이 이 시집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강정은 이 넘치게 흐르는 감각을 한꺼번에 끌어안음으로써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세계’를 단숨에 전혀 새로운 세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강정의 시들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서 채집한 감각들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강정만의 서정성이 더해져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질서의 노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강정의 이번 시집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며 우리가 그의 새시집을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강정의 이번 시집에는 ‘또 다른 의미로서의 시’인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혜승 씨가 그리고 시인이 직접 고른 이 그림들은 시의 ‘재해석’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시’가 되어서 강정의 시들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 해설 속으로
강정은 타자와 만나는 새로운 윤리를 전파하는 하나의 물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타자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자 앞에서 미끄러지고 있을 수만도 없다는 것이 그만의 ‘키스’의 윤리이다. 시집 <키스> 에서 강정은 표면을 맴도는 애무를 넘어 결국에는 그 표면을 찢고 들어가 당신과 뒤섞여 하나의 물질로 용해되는 방식을 고안해 보고 있다. 그 모든 것이 ‘키스’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혀는 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입술을 스치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녀의 살갗을 찢고 씹고 급기야 그녀를 씹어 먹어 ‘나’라는 물질과 동화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녀와의 그 지독한 ‘키스’가 “잘 뒤섞여 반죽된 어떤 사생아 같은 걸 낳”(「밤의 확장」)게 될지언정, 시인은 두려움 없이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착한 짐승’이라고 자신을 일컫는다.
강정의 <키스> 를 애무에 관한, 아니 애무를 넘어서는 것에 관한 시라고 했지만, 기실 강정의 시쓰기 역시 그의 ‘날카로운 키스’를 닮았다. 목적도 순서도 없는 영원한 더듬기가 애무라고 한다면, 강정의 시는 애무하는 시다. 그는 전체 구도를 염두에 두고 첫 구절을 시작하거나, 앞 뒤 구절을 생각하며 단어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고르는 제작자는 아니다. 제작된 애무는 어쩐지 민망하다. 그는 그저 쓰기 위해 쓰고 시작도 끝도 없이 쓴다. 그래서 자간 사이 행간 사이에 곧 폭발할 것 같은 그의 에너지가 흥건하다. 강정은 메마른 언어도 하나의 축축한 물질이 될 수 있다는 명제까지도 실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언어의 문을 열고 언어의 외부와 내부를 용해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정의 <키스> 는 그야말로 팽창되어 폭발하기 직전의 하나의 덩어리이다. 동공을 비우고 견고한 살갗을 벗어던진 채로 행간을 넘나들 때, 강정의 <키스> 는 ‘당신’과 함께 우연히, 완벽한 전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조연정 해설 「애무의 윤리」 부분
♣시집 소개
시집 <키스> 는 그야말로 팽창되어 폭발하기 직전의 하나의 덩어리이다. 자간 사이 행간 사이에는 곧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흥건하다. 동공을 비우고 견고한 살갗을 벗어던진 채로 행간을 넘나들 때, 강정의 <키스> 는 ‘당신’과 함께 우연히, 완벽한 전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표지·본문 그림: 이혜승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지우는 데 골몰한다. 그러다보면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나 자신을 허구로 만드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돌이켜보면 ‘나라는 사건’은 많은 이야기들의 뒤끝에 묻어나온 어두운 이명과도 같다. 그림자는 허공에 가득하고 세상 모든 사물의 경계엔 접착력 강한 누군가의 혀가 날름거린다. 나는 그 비구상의 물질에 내 오랜 거짓의 혀를 섞는다.
*
헛것을 잉태하는 소문들이 강의 물줄기를 따라 태양을 부식시킨다. 발에 채는 돌멩이들이 오래도록 부화하지 못한 짐승의 알처럼 굳게 입 다물고 있다.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아 몸 안의 내장들을 걸러낸다면 나는 어떤 물질로 환생해 대기의 빛깔을 바꾸게 될까. 진실의 껍질엔 언제나 자연발화한 가공의 미가 있다. 그 위대한 위장술에 비한다면 나의 몸짓은 벽에 걸리다만 옷처럼 위태롭게 처연할 뿐,
*
터져라, 내시경 안에 붙들린 세계의 장막이여.
가라앉아라, 물 위에 띄운 수천 수백 일의 고단한 戀書들이여.
작가 소개
1971년 겨울, 부산에서 태어났다. 말로 표현해야 할 걸 눈물로만 터뜨렸던 아이였으나 서른을 넘기면서 뒤늦은 푼수끼(?)가 발동했다. 그렇게 웃음과 울음, 분노와 자책이 뒤섞인 양서류 변온동물이 되었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으나 스물두 살에 덜컥 시인이 되어버렸다. 이후 25년 동안 어리둥절·좌충우돌 하면서 『백치의 산수』 등 여섯 권의 시집과 『콤마, 씨』 등 세 권의 산문집을 냈다. 이 책이 열 번째 책이다. 노래를 부르면 몸이 덜 아프고 스스로를 놓아버리면 영혼이 덜 아프다는 걸 이제는 조금 깨닫는 중이다. 늘 ‘0살’을 지향한다. 제4회 시로여는세상 작품상, 제16회 현대시작품상, 제3회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목 차
시인의 말
제1부 죽음 몸에 白夜 가 흐르고
죽음 몸에 白後가 흐르고
키스
키스
번개를 깨물고
안녕
자멸의 사랑
사실, 사랑은…
길 위의 구멍
급정거한 바퀴에 대한 단상
노래
아픔
이사
몸 안의 음악
마술사의 아이
오래된 그림이 있는 텅 빈 식탁
영화
물빛이 저 세상의 얼굴처럼 환해질 때
白沈
낯선 짐승의 시간
암소와의 첫사랑
밤의 동물원
제2부 카메라, 키메라
불탄 방
불탄 방
카메라, 키메라
등에 가시
풍경 속의 비명
그녀라는 커다란 숨구멍, 혹은 시선의 감옥
아침의 시작
고등어 연인
나비 떼가 떠 있는 방
한낮, 정사는 푸르러
티브이 시저caesar
달빛을 받는 체위
텔레비전
텔레비전
바지의 전설
침입자
코끼라 간다
무덤이 떠올라 별이 되니 세상은 한참이나 적막하더라
血便을 보며
밤의 확장
스무 살
死後
해설 _애무의 윤리.조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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