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외할매의 이야기보따리, 철도 공작창 기차 소리, 신간 만화 《카르타》,
희섭이네 골방 아지트, 좌충우돌 문예반, 유신 철폐 페인팅 벽서…….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을 만난다.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때 그 시절 따뜻했던 이야기
1970~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이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쓴, 소설적 성격이 강한 자전적 에세이다. 작가가 들려주는 스물여덟 가지 에피소드에는 그때 그 시절을 환기하는 따뜻한 이웃들과 친구들의 이야기, 자신의 성장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따뜻하고 유쾌함에 배꼽 잡으며 웃기도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짓기도 하고, 함께 슬퍼하며 아파하기도 한다.
넙데데한 얼굴에 바른 새빨간 구찌베니가 인상적이었던 이웃집 형섭이 엄마, 일 원에 네 권 볼 수 있던 만화책을 더 보려고 친구들과 짜고 속였던 만화방 아저씨, 하얀 블라우스에 멜빵 달린 진남색 주름치마가 예뻤던 첫사랑 경옥이, 라면 한 봉지씩 손에 흔들며 희섭이가 앞장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맞춰 희섭이네 골방 아지트로 몰려다녔던 우리들, 유신 철폐를 외치다 가게 된 징역살이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이 모든 사람들과 맺은 관계와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이었음을 작가와의 시간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이렇게 젊은 날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에 대한 가치들을 꺼내 놓는 작가의 옛날이야기는 그 시절을 함께 겪어냈던 지금의 동년배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그 시절의 따뜻했던 이야기들, 친구들 간의 우정,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같은 그 당시의 가치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거라는 작가의 고백은 그래서 더 유의미해 보인다.
젊은 날 품었던 꿈, 열정, 야성, 가치…… 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천명(知天命),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다.
쉰이라는 나이를 ‘천명(天命)을 안다’라고 표현한 공자님의 말씀처럼 오십이 됐다고 해서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 식견이 확 늘거나 하진 않지만 그 나이쯤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한다.
“나는 뭔가?”, “잘 살아오기는 한 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에는 살아온 삶에 대한 반추의 과정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1970~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산업화의 격랑에 휘말리고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 세대에게 이런 생각들은 특히 더 간절하다. 점점 커져 가는 빈부의 차이, 여전히 얼어붙은 남북 관계……와 같은 젊은 날 고민했던 거시적인 문제들은 가뿐히(?) 넘겨 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 삶에 해당하는 일상의 무게는 버겁기만 하다. 자꾸 주변부로 밀어내려고만 하는 사회, 경제적 부담, 가족 간의 소통, 주변의 시선들……,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게 없다. 긴 인생, 자칫 낙오하는 거 아냐, 라는 염려가 가슴 끝을 파고들기도 한다.
이 책을 쓴 작가 이상경도 비슷하다.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년 동안 징역 산 것을 시작으로, 1980년 5월에 5개월, 1981년 세칭 ‘부림 사건’으로 2년 남짓, 그리고 건너뛰어 1988년 초에 출판사를 하면서 낸 책이 국가보안법에 걸려 5개월 남짓까지 20대가 걸쳐진 청년기를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무던히도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눈 한 번 껌뻑거리고 우두망찰하며 시간을 다 보내 버리고,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느껴질 즈음 스스로 묻게 된다. “나는 도대체 뭔가?”, “젊은 날 품었던 꿈, 열정, 야성, 가치…… 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책에서 작가가 풀어 놓는 스물여덟 개의 에피소드, 쉽게 말해 옛날이야기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을 만나러 가는 일종의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한 현재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논리로는 삶이 점점 더 공허해질 뿐이다. 작가와 함께하는 시간 여행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잊고 있던 가치의 참 모습이 어떠했는지 찾아야 한다.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때 그 시절 따뜻했던 이야기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해 낸 그 시절의 기억!
이야기는 1960년대 가족 공동체ㆍ농촌 공동체가 온전하게 작동하던 시절 그 무렵부터 시작한다. 외할매와 함께 지내며 그 쏟아붓는 듯하던 사랑을 받았던 기억, 외갓집 초가지붕에 새 이엉을 얹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던 그날의 풍경, 동네 아낙들 앞에서 맛깔스런 솜씨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던 외할매, 그리고 큰댁에서 사촌 형제들과 자치기, 연날리기에 하루해가 짧았던 에피소드 들은 모두가 따뜻하고 그리운 정이 넘치는 풍경들이다. 이웃 간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사는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예전에는 이렇게 살았었지.”라고 환기시킬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이다. 마치 낡은 앨범을 후루룩 넘길 때 색 바랜 흑백 사진들이 흰색과 검은색, 뿌연 회색으로 점점이 지나가다 다시 천천히 넘겨보면, 그 안에 지금은 옛 모습을 찾기 힘든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들이 풋풋함과 촌스러움으로 수줍게 손 흔드는 모습을 만날 때처럼 향수를 자극하는 아련하고도 따뜻한 기억들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때까지, 작가가 경험한 꼭 그 나이에 걸맞은 학창시절 에피소드들은 복고 박물관을 구경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생생하다. 일흔 명이 넘어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던 교실 풍경, 신간 만화 《카르타》 표지가 걸려 있던 만화방 유리창, 50원 하던 자장면의 잊을 수 없는 맛, 고구마 삐득이 먹던 기억……. 최근 쎄시봉 열풍을 보며 그때를 추억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검정 교복, 책가방, 교련복, 도시락, 버스, 택시, 흑백텔레비전, 엘피판……과 같은 작은 소품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희미한 웃음을 짓던 독자라면 누구나 작가가 복원한 옛 기억에 무릎을 칠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이야기들은 마치 영화 <친구>에 나오는 사내애들을 보는 기분이 들만큼 유쾌하고 청춘의 힘이 끓어 넘친다. 희섭이네 골방 아지트에서 우정을 논하고, 친구들과 음악회를 개최하며, 문예반 활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모습들은 경쟁에 찌든 요즘 사회와는 다른 낭만이 느껴지기도 한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화가 시작되고, 유신이라는 암흑의 사회 체제가 공고해지던 시절, 작가가 풀어 놓는 이야기들에는 세상을 향해 오만 가지 촉수를 뻗쳐 날 선 비판 의식을 가져 보려던 나름의 세상 읽기가 담기기 시작한다. 군사 문화의 잔재로 폭력이 난무하던 고등학교의 살풍경들, 불공정한 학생회장 선거를 겪으면서 느끼게 된 부조리, 부정한 독재 권력에 저항했던 대가로 영어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합천 아재 사건 들에서 비폭력, 공명정대,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고 조금씩 성장하는 작가는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잊고 있던 청춘의 꿈을 다시금 꾸었을지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느라 잊었던 가치,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생각들 말이다.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느라 감옥에 가고, 그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에 대해 큰 가르침을 얻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지천명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얻은 깨달음은 분명 아닐 것이다. 자유와 정의, 평등의 깃발 아래 무리 지어 흐르는 은하수가 있다면 그 은하수를 노래하겠다던 젊은 시절의 결기를 다시 떠올린 덕분일 것이다.
지나고 나면 따뜻함으로만 기억되는 그 시절로의 시간 여행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자유, 평등, 정의, 가족ㆍ이웃 간의 정, 우정……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인생 2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와 용기
“갈팡질팡하더라도 갈 만큼은 간다.”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청춘을 불살랐던 세대, 세대 구분으로 뭉뚱그리고 통틀었을 때에는 이 사회의 주류로 대접받지만, 개인별로 봤을 때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삶의 목표ㆍ희망을 되찾아 줄 따뜻한 위로와 용기가 필요하다.
출판 일을 평생 업으로 삼아 밥을 벌던 작가 역시 똑같이 이 시기에 용기와 위로가 필요했다. 어느 날 자신의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탈 서울을 감행할 때 주류 사회의 질서와 시선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던 것처럼, 사회, 회사, 가정에서 자꾸 등 떠밀리는 동년배들에게 나를 만든 시간들을 만나는 과정이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데 밑바탕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 전반전을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우리를 옥죄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들, 앞으로의 인생에 이러한 생각들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소중한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작가에게 큰 축복이었다. 아마 작가는 이런 의미 있는 시간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가 살아온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는 그 평범함으로 인해 같은 시기 청춘을 불태웠던 동년배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갈지 모른다. 되돌아본 시간이 앞으로 살아갈 시간과 맞닿아 있음을 역설하며, 현재의 삶을 좀 더 끌어안을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작가와 함께 그때 그 시절을 함께 돌아보며 치기어리지만 그 시절의 향수를 느껴보길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도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기를…….
<책 속으로 추가>
남부민동 희섭이네 집이 우리 아지트였다. 마침 그때 희섭이가 고물 트럼펫을 하나 구해서 뿜빰빠라빰빠 소리를 밀어내는 연습을 하던 중이기도 해서 우리가 거기에 모이는 날이면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한 줄로 서서 희섭이가 앞장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맞춰 제 먹을 라면 한 봉지씩을 흔들어 대며 그 집으로 몰려가고는 했다. 동네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웃었고 우리도 마주 웃었다.
우리는 자주 소풍도 다녔다. 선들선들 바람이 불어 놀기 좋아하는 머슴애들 콧구멍이 빵처럼 부풀면 어김없이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해운대로, 송도의 혈청소 부근 해안으로, 범어사 계곡으로 몰려다녔다.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마라토너처럼 달려서 가기도 했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모래를 쌓아 상처럼 만들고 작은 홈을 파서 간장을 담은 비닐봉지를 그 안에 넣고 봉지의 입구를 잘 벌려 놓으면 작은 종지처럼 되었다. 시장통에서 사 온 튀김이나 부침개에다 소주를 돌리며 ‘예술’과 ‘혁명’을 주워섬기던 그때, 드물게 누리는 좋은 시절이었다. (본문 230~231쪽)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7월 6일 밤 11시 50분쯤, 도서관에서 향학열을 불태우고 쏟아져 나오는 선량한 학생들을 거슬러 학교로 숨어들었다. 괴괴한 정적만이 감도는 컴컴한 본부석에서 나는 팔을 움직여 쓸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로 또박또박 격물을 써 나갔다.
유신 철폐 / 교련 반대 / 박정희 물러가라
글자의 크기가 1미터가 넘고 격문의 전체 폭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벽서였다. “치익, 치익” 하는, 페인트 내뿜는 소리가 굉음처럼 들리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그것도 잠깐, 우리는 점점 간이 커졌다. 페인트 통을 흔들어 보니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게 아닌가. 기왕에 시작한 거, 페인트가 바닥 날 때까지 닥치는 대로 써 갈기고 싶은 충동이 와락 생겼지만 후퇴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운 김에 운동장 옆 개구멍으로 나가기 전에 야구장 백네트와 관람석도 두 친구가 각각 큼직한 필적을 남기고 무사히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통금 시간인 밤 12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학교로 가 보니 우리가 쓴 벽서는 커다란 종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짭새들 대여섯 명만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럴 수가! 학생들이 그 앞에 구름 떼처럼 몰려서 웅성거리며 주동자만 나서기를 기다리는 그런 장면을 상상했는데 이런 허무한 일이 있단 말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렸다. 오전 10시쯤 짭새들이 지키는 가운데 페인트공이 밀대 붓을 들고 전지를 한 장 한 장 떼어 내며 글씨들을 쓱쓱 문대 버렸다. 그곳에서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 채 학생들은 무심히 그 곁을 지나다녔고 흉하게 덧칠한 자국만이 관중석 벽에 남았다. (본문 278~279쪽)
▣ 작가 소개
저자 : 이상경
저자 이상경(李相炅)은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다녔다. 20대가 걸쳐진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독재자들과의 악연이 사뭇 질겨서 감옥에 들락거리는 것으로 그 시절을 다 보냈다. 그 뒤로는 줄곧 출판 일을 업으로 삼아 밥을 벌었다.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긴 어느 날, 남의 원고를 마름질하며 시시콜콜한 시비를 가리는 일에 허둥대며 사는 일이 문득 덧없게 느껴져 스스로의 글을 쓰리라 작정하고 ‘무모하게도’ 탈 서울부터 감행했다. 지금은 지리산 능선이 바라다 보이는 산자락에 엎드려 가난을 벗 삼아 글 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 주요 목차
엄마 생각
작은 초가집
이엉 얹던 날
못곳댁, 이바구 한 자리 하소
부산으로 돌아오다
뒷마당가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 들어가다
1학년 시절
임마, 니 때문에
돈을 훔치다
아버지
이정표 두 개
맛있는 추억
내 가슴에도 봄은 왔습니다
힘의 논리를 깨닫다
합천 아재 사건
꿀단지
우정이 뭐기에
진짜 좆 될 뻔한 이야기
가장 큰 변곡점
희섭이
살풍경들
좌충우돌 문예반
연애 속으로
대학에 들어가다
감옥에 갇히다
꽃다운 시절
글을 마치며
외할매의 이야기보따리, 철도 공작창 기차 소리, 신간 만화 《카르타》,
희섭이네 골방 아지트, 좌충우돌 문예반, 유신 철폐 페인팅 벽서…….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을 만난다.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때 그 시절 따뜻했던 이야기
1970~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이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쓴, 소설적 성격이 강한 자전적 에세이다. 작가가 들려주는 스물여덟 가지 에피소드에는 그때 그 시절을 환기하는 따뜻한 이웃들과 친구들의 이야기, 자신의 성장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따뜻하고 유쾌함에 배꼽 잡으며 웃기도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짓기도 하고, 함께 슬퍼하며 아파하기도 한다.
넙데데한 얼굴에 바른 새빨간 구찌베니가 인상적이었던 이웃집 형섭이 엄마, 일 원에 네 권 볼 수 있던 만화책을 더 보려고 친구들과 짜고 속였던 만화방 아저씨, 하얀 블라우스에 멜빵 달린 진남색 주름치마가 예뻤던 첫사랑 경옥이, 라면 한 봉지씩 손에 흔들며 희섭이가 앞장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맞춰 희섭이네 골방 아지트로 몰려다녔던 우리들, 유신 철폐를 외치다 가게 된 징역살이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이 모든 사람들과 맺은 관계와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이었음을 작가와의 시간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이렇게 젊은 날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에 대한 가치들을 꺼내 놓는 작가의 옛날이야기는 그 시절을 함께 겪어냈던 지금의 동년배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그 시절의 따뜻했던 이야기들, 친구들 간의 우정,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같은 그 당시의 가치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거라는 작가의 고백은 그래서 더 유의미해 보인다.
젊은 날 품었던 꿈, 열정, 야성, 가치…… 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천명(知天命),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다.
쉰이라는 나이를 ‘천명(天命)을 안다’라고 표현한 공자님의 말씀처럼 오십이 됐다고 해서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 식견이 확 늘거나 하진 않지만 그 나이쯤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한다.
“나는 뭔가?”, “잘 살아오기는 한 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에는 살아온 삶에 대한 반추의 과정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1970~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산업화의 격랑에 휘말리고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 세대에게 이런 생각들은 특히 더 간절하다. 점점 커져 가는 빈부의 차이, 여전히 얼어붙은 남북 관계……와 같은 젊은 날 고민했던 거시적인 문제들은 가뿐히(?) 넘겨 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 삶에 해당하는 일상의 무게는 버겁기만 하다. 자꾸 주변부로 밀어내려고만 하는 사회, 경제적 부담, 가족 간의 소통, 주변의 시선들……,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게 없다. 긴 인생, 자칫 낙오하는 거 아냐, 라는 염려가 가슴 끝을 파고들기도 한다.
이 책을 쓴 작가 이상경도 비슷하다.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년 동안 징역 산 것을 시작으로, 1980년 5월에 5개월, 1981년 세칭 ‘부림 사건’으로 2년 남짓, 그리고 건너뛰어 1988년 초에 출판사를 하면서 낸 책이 국가보안법에 걸려 5개월 남짓까지 20대가 걸쳐진 청년기를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무던히도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눈 한 번 껌뻑거리고 우두망찰하며 시간을 다 보내 버리고,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느껴질 즈음 스스로 묻게 된다. “나는 도대체 뭔가?”, “젊은 날 품었던 꿈, 열정, 야성, 가치…… 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책에서 작가가 풀어 놓는 스물여덟 개의 에피소드, 쉽게 말해 옛날이야기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을 만나러 가는 일종의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한 현재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논리로는 삶이 점점 더 공허해질 뿐이다. 작가와 함께하는 시간 여행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잊고 있던 가치의 참 모습이 어떠했는지 찾아야 한다.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때 그 시절 따뜻했던 이야기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해 낸 그 시절의 기억!
이야기는 1960년대 가족 공동체ㆍ농촌 공동체가 온전하게 작동하던 시절 그 무렵부터 시작한다. 외할매와 함께 지내며 그 쏟아붓는 듯하던 사랑을 받았던 기억, 외갓집 초가지붕에 새 이엉을 얹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던 그날의 풍경, 동네 아낙들 앞에서 맛깔스런 솜씨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던 외할매, 그리고 큰댁에서 사촌 형제들과 자치기, 연날리기에 하루해가 짧았던 에피소드 들은 모두가 따뜻하고 그리운 정이 넘치는 풍경들이다. 이웃 간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사는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예전에는 이렇게 살았었지.”라고 환기시킬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이다. 마치 낡은 앨범을 후루룩 넘길 때 색 바랜 흑백 사진들이 흰색과 검은색, 뿌연 회색으로 점점이 지나가다 다시 천천히 넘겨보면, 그 안에 지금은 옛 모습을 찾기 힘든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들이 풋풋함과 촌스러움으로 수줍게 손 흔드는 모습을 만날 때처럼 향수를 자극하는 아련하고도 따뜻한 기억들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때까지, 작가가 경험한 꼭 그 나이에 걸맞은 학창시절 에피소드들은 복고 박물관을 구경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생생하다. 일흔 명이 넘어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던 교실 풍경, 신간 만화 《카르타》 표지가 걸려 있던 만화방 유리창, 50원 하던 자장면의 잊을 수 없는 맛, 고구마 삐득이 먹던 기억……. 최근 쎄시봉 열풍을 보며 그때를 추억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검정 교복, 책가방, 교련복, 도시락, 버스, 택시, 흑백텔레비전, 엘피판……과 같은 작은 소품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희미한 웃음을 짓던 독자라면 누구나 작가가 복원한 옛 기억에 무릎을 칠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이야기들은 마치 영화 <친구>에 나오는 사내애들을 보는 기분이 들만큼 유쾌하고 청춘의 힘이 끓어 넘친다. 희섭이네 골방 아지트에서 우정을 논하고, 친구들과 음악회를 개최하며, 문예반 활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모습들은 경쟁에 찌든 요즘 사회와는 다른 낭만이 느껴지기도 한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화가 시작되고, 유신이라는 암흑의 사회 체제가 공고해지던 시절, 작가가 풀어 놓는 이야기들에는 세상을 향해 오만 가지 촉수를 뻗쳐 날 선 비판 의식을 가져 보려던 나름의 세상 읽기가 담기기 시작한다. 군사 문화의 잔재로 폭력이 난무하던 고등학교의 살풍경들, 불공정한 학생회장 선거를 겪으면서 느끼게 된 부조리, 부정한 독재 권력에 저항했던 대가로 영어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합천 아재 사건 들에서 비폭력, 공명정대,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고 조금씩 성장하는 작가는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잊고 있던 청춘의 꿈을 다시금 꾸었을지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느라 잊었던 가치,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생각들 말이다.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느라 감옥에 가고, 그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에 대해 큰 가르침을 얻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지천명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얻은 깨달음은 분명 아닐 것이다. 자유와 정의, 평등의 깃발 아래 무리 지어 흐르는 은하수가 있다면 그 은하수를 노래하겠다던 젊은 시절의 결기를 다시 떠올린 덕분일 것이다.
지나고 나면 따뜻함으로만 기억되는 그 시절로의 시간 여행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자유, 평등, 정의, 가족ㆍ이웃 간의 정, 우정……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인생 2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와 용기
“갈팡질팡하더라도 갈 만큼은 간다.”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청춘을 불살랐던 세대, 세대 구분으로 뭉뚱그리고 통틀었을 때에는 이 사회의 주류로 대접받지만, 개인별로 봤을 때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삶의 목표ㆍ희망을 되찾아 줄 따뜻한 위로와 용기가 필요하다.
출판 일을 평생 업으로 삼아 밥을 벌던 작가 역시 똑같이 이 시기에 용기와 위로가 필요했다. 어느 날 자신의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탈 서울을 감행할 때 주류 사회의 질서와 시선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던 것처럼, 사회, 회사, 가정에서 자꾸 등 떠밀리는 동년배들에게 나를 만든 시간들을 만나는 과정이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데 밑바탕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 전반전을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우리를 옥죄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들, 앞으로의 인생에 이러한 생각들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소중한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작가에게 큰 축복이었다. 아마 작가는 이런 의미 있는 시간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가 살아온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는 그 평범함으로 인해 같은 시기 청춘을 불태웠던 동년배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갈지 모른다. 되돌아본 시간이 앞으로 살아갈 시간과 맞닿아 있음을 역설하며, 현재의 삶을 좀 더 끌어안을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작가와 함께 그때 그 시절을 함께 돌아보며 치기어리지만 그 시절의 향수를 느껴보길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도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기를…….
<책 속으로 추가>
남부민동 희섭이네 집이 우리 아지트였다. 마침 그때 희섭이가 고물 트럼펫을 하나 구해서 뿜빰빠라빰빠 소리를 밀어내는 연습을 하던 중이기도 해서 우리가 거기에 모이는 날이면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한 줄로 서서 희섭이가 앞장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맞춰 제 먹을 라면 한 봉지씩을 흔들어 대며 그 집으로 몰려가고는 했다. 동네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웃었고 우리도 마주 웃었다.
우리는 자주 소풍도 다녔다. 선들선들 바람이 불어 놀기 좋아하는 머슴애들 콧구멍이 빵처럼 부풀면 어김없이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해운대로, 송도의 혈청소 부근 해안으로, 범어사 계곡으로 몰려다녔다.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마라토너처럼 달려서 가기도 했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모래를 쌓아 상처럼 만들고 작은 홈을 파서 간장을 담은 비닐봉지를 그 안에 넣고 봉지의 입구를 잘 벌려 놓으면 작은 종지처럼 되었다. 시장통에서 사 온 튀김이나 부침개에다 소주를 돌리며 ‘예술’과 ‘혁명’을 주워섬기던 그때, 드물게 누리는 좋은 시절이었다. (본문 230~231쪽)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7월 6일 밤 11시 50분쯤, 도서관에서 향학열을 불태우고 쏟아져 나오는 선량한 학생들을 거슬러 학교로 숨어들었다. 괴괴한 정적만이 감도는 컴컴한 본부석에서 나는 팔을 움직여 쓸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로 또박또박 격물을 써 나갔다.
유신 철폐 / 교련 반대 / 박정희 물러가라
글자의 크기가 1미터가 넘고 격문의 전체 폭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벽서였다. “치익, 치익” 하는, 페인트 내뿜는 소리가 굉음처럼 들리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그것도 잠깐, 우리는 점점 간이 커졌다. 페인트 통을 흔들어 보니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게 아닌가. 기왕에 시작한 거, 페인트가 바닥 날 때까지 닥치는 대로 써 갈기고 싶은 충동이 와락 생겼지만 후퇴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운 김에 운동장 옆 개구멍으로 나가기 전에 야구장 백네트와 관람석도 두 친구가 각각 큼직한 필적을 남기고 무사히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통금 시간인 밤 12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학교로 가 보니 우리가 쓴 벽서는 커다란 종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짭새들 대여섯 명만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럴 수가! 학생들이 그 앞에 구름 떼처럼 몰려서 웅성거리며 주동자만 나서기를 기다리는 그런 장면을 상상했는데 이런 허무한 일이 있단 말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렸다. 오전 10시쯤 짭새들이 지키는 가운데 페인트공이 밀대 붓을 들고 전지를 한 장 한 장 떼어 내며 글씨들을 쓱쓱 문대 버렸다. 그곳에서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 채 학생들은 무심히 그 곁을 지나다녔고 흉하게 덧칠한 자국만이 관중석 벽에 남았다. (본문 278~279쪽)
▣ 작가 소개
저자 : 이상경
저자 이상경(李相炅)은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다녔다. 20대가 걸쳐진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독재자들과의 악연이 사뭇 질겨서 감옥에 들락거리는 것으로 그 시절을 다 보냈다. 그 뒤로는 줄곧 출판 일을 업으로 삼아 밥을 벌었다.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긴 어느 날, 남의 원고를 마름질하며 시시콜콜한 시비를 가리는 일에 허둥대며 사는 일이 문득 덧없게 느껴져 스스로의 글을 쓰리라 작정하고 ‘무모하게도’ 탈 서울부터 감행했다. 지금은 지리산 능선이 바라다 보이는 산자락에 엎드려 가난을 벗 삼아 글 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 주요 목차
엄마 생각
작은 초가집
이엉 얹던 날
못곳댁, 이바구 한 자리 하소
부산으로 돌아오다
뒷마당가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 들어가다
1학년 시절
임마, 니 때문에
돈을 훔치다
아버지
이정표 두 개
맛있는 추억
내 가슴에도 봄은 왔습니다
힘의 논리를 깨닫다
합천 아재 사건
꿀단지
우정이 뭐기에
진짜 좆 될 뻔한 이야기
가장 큰 변곡점
희섭이
살풍경들
좌충우돌 문예반
연애 속으로
대학에 들어가다
감옥에 갇히다
꽃다운 시절
글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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