롼링위 사람들 시비가 두렵다

▣ 출판사서평

롼링위에 대한 평가들
- ‘그녀는 불꽃보다 적막했네’

이상(理想)을 찾으려 하나 권태에 겨워 묻네, 어찌 몸을 숨기리,
한때의 미모여 ― 찬란한 빛은 생기를 잃은 지 오래
어찌 길을 떠나리, 마음은 남김없이 가져가버렸는데 ―
적막과 고독을 어찌할까
피로에 지쳐 환상에 잠겨 불꽃처럼 사라지네.
― 매염방, (「그녀는 불꽃보다 적막 했네」의 노래가사)

롼링위의 천재적인 연기는 중국 무성영화 시대의 긍지이다.
― 쑨위(「기녀」 감독)

롼링위 자살에 관해서 나는 그녀를 변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다른 이의 자살을 찬성하지 않거니와, 나도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자살하든 현재 강직한 평론가의 호된 질책을 받아야만 하고 롼링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자살이 본래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처럼 자살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멸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손쉽게 해치울 수 없다. 만약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보시라! ― 루쉰

롼링위(阮玲玉), 그녀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 롼링위를 거론하면 아마도 모르는 이가 더 많을 듯하다. 오히려 관금붕(關錦鵬, 영문명 Stanly Kwan)이 감독하고 장만위(張曼玉)가 주연한 동명(同名)의 영화 《롼링위》가 인상 깊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1930년대 중국 영화계의 프리마 돈나였던 실존 인물 롼링위의 내면세계를 절묘하게 묘사해내 찬사를 받았던 장만위는 이 영화로 1992년 2월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롼링위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는 장만위보다 훨씬 더 많은 대중적 인기와 사랑을 받았던 국민 배우로서, 당대에 같이 활동했던 한국계 배우 진옌(金焰 - 한국명은 김염. 쑨위가 감독한 「기녀(野草閑花)」에 롼링위와 함께 출연했다. 진옌과 롼링위의 성공적인 조합은 영화에 적지 않게 빛을 더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롼링위와 진옌은 많은 영화에서 공동 주연을 맡아 ‘황금 콤비’를 이루었다. 훗날 롼링위의 명성이 영화계를 뒤흔들 때 진옌 역시 ‘영화계의 황제’로 불렸다)과 더불어 중국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전설적인 배우’로 평가받고 있다.

롼링위는 1920-30년대에 ‘동양의 헐리웃’으로 불릴 만큼 중국 영화계의 중심 무대가 되었던 상하이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톱스타’ 자리에 오를 만큼 대중의 인기와 사랑을 독차지했던 무성영화 시대의 ‘국민 배우’였다. 게다가 빼어난 아름다움과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불꽃처럼 빛나던 이 대중적인 스타는 1935년 3월 8일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살로써 ‘불꽃같은 생’을 마감한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으로서도 전설적인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하급 기계노동자와 하녀의 딸에서 최고의 예술인 대접을 받는 지위에까지 오르는 영예와 기쁨을 누렸던 것이다.

배우로서 롼링위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경극식의 연기가 아니라 근대적 예술 장르로서의 영화에 걸 맞는 자연스럽고도 내면에서 우러나는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영화 예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그녀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는 당대의 시대적-사회적 흐름을 잘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영화사적으로 상당한 의미와 평가를 부여받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롼링위는 실제 생활에서도 비교적 자유분방했고, 또 건강한 몸매와 순진한 이미지로 그 시대의 사회적 표상이 될 만한 ‘신여성’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측면을 종합해보자면, 그녀는 분명 근대적 시대정신을 구현한 한 예술가이자 여성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점이 바로 그녀의 삶을 비극으로 마감하게 한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과 슬픔의 배우, 롼링위

롼링위의 기구한 운명의 역사는 1910년 상하이의 한 가난한 기계노동자 가정에서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가난한 노동자 아버지마저 롼링위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죽음으로써 그녀는 더욱 가난한 과부 집안의 안쓰러운 외동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하인으로 들어가 있던 부잣집의 막내아들 장더민과의 연애와 동거는 롼링위의 일생에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롼링위는 여중학교 시절인 16세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인집 도련님’ 장더민과 연애를 하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동거를 시작했다. 게다가 그녀는 18세 처녀의 몸(비록 장더민과 동거 이후였으나 아직 정식으로 결혼한 적이 없었던 상태였다)으로 빈민가에서 버려진 아이 샤오위를 양녀로 삼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도 감행했다. 당시 롼링위와 장다민은 동거 중으로 정식 부부가 아니었다. 만약 합법적인 신분이 아닌 이때 아이를 가지면 사람들의 무시나 당할 처지였지만, 롼링위는 그러한 사실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1926년 16세의 나이에 ‘밍싱(明星)’ 영화사에 들어가 좌익 영화에서 롼링위의 연기가 신속히 발전하고 있을 때,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더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도박과 타락한 생활로 롼링위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장다민의 그림자가 점점 엷어질 무렵, 한 중년 남자가 그녀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중년 남성은 이후 롼링위와 동거하게 된 탕지산으로, 그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 생활의 전경(前景)에 드리웠고 그녀는 이 때문에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탕지산의 구애 공세와 당시 새롭게 등장한 타블로이드판 가십 기사의 협공 속에서, 롼링위는 사랑과 일시적 충동으로 경솔하게 그와 동거하기로 결심했다. 롼링위가 탕지산을 사귄 지 3개월을 갓 넘겼을 때였다. 탕지산은 아름답고 성공한 부인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하고 롼링위의 자유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가 회사에 가서 영화 촬영하는 것조차 엄격하게 심문했다. 당시 그녀의 모든 외부 활동은 그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롼링위의 본성은 맑고 깨끗하며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를 사랑했다. 그러한 그녀에게 탕지산의 변덕은 장다민의 타락만큼이나 큰 타격을 주었다. 그녀는 그 두 남자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보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1930년대 중국 무성 영화계의 긍지

롼링위는 10년이 채 안 되는 활동 기간 중 연이어 29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모두 무성영화였다. 신체 언어와 연기만으로 영화를 설명해야 하므로 그녀가 연기에 들인 노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롼링위는 언젠가 “연기는 곧 미치는 것과 같아요. 배우는 미치광이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창조의 희열에 들뜬 표정으로 거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제가 바로 미치광이죠.” 롼링위는 중국 영화사상 각종 여성상을 진실하게 묘사한 최초의 여배우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또 그 가운데에서도 뛰어났던 배우로 평가받는다. 1930년대에 롼링위는 활동이 가장 왕성했고 연기가 가장 성숙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롼링위의 왕성한 활동과 원숙한 연기를 촉진했을까?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야흐로 막 전개되기 시작한 ‘좌익 영화창작 운동’을 꼽을 수 있다. 그녀가 출현한 영화 가운데서 좌익 문예와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는 1930년 이후 출연한 「세 모던 여성」 「사랑과 의무」 「작은 장난감」 「신성한 여인(神女)」 「신여성(新女性)」 등의 작품들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세 모던 여성」은 중국 영화사상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며 좌익 영화운동의 자부심을 높인 작품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롼링위 연기의 최고봉은 무성영화의 황금기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롼링위의 연기는 무성영화 시대를 초월했다. 본격적인 유성영화의 시대가 되면서 무성영화에서 사투리를 쓰는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어쩔 수 없이 연극배우를 대량 고용하게 되자 영화계에 갑자기 연극식 표현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롼링위의 연기가 무성영화 시기는 물론 뒷날 유성영화와 비교해도 한층 자연스럽고 질박할 뿐더러 영화 연출의 특성에 적합한 연기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가령, 롼링위는 「세 모던 여성」에서 혼자 힘으로 생활하고 이상과 신념이 있는 신여성상 수징(淑靜)을 맡아 ‘모던 여성’의 한 전형을 연기했던 것이다.
황색 언론에 희생당한 ‘신여성’

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는 영화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짐에 따라 영화배우의 지위도 덩달아 높아졌고 광적인 영화 팬들도 출현했다. 각종 고급 사교 모임에서 영화인들이 정부, 재계 요인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았던 것이다. 당시 영화배우 숭배를 부추긴 것은 대중 신문과 대량으로 출현한 영화 간행물들로서, 여기에 관련된 이들은 영화와 관련된 행사를 점점 늘려나갔던 것이다. 이 와중에 장더민과 탕지산으로 인한 불행한 개인사의 다른 한편에서는 롼링위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1930년대 초 중국에서 영화 내용을 트집 잡아 항의하는 사건이 종종 있었는데, 「꽃잎 흩날리는 마을(飛花村)」(1934년 제작: 차이추성, 감독: 정잉스[鄭應時], 배우: 후핑, 가오잔페이)이라는 작품이 당시 모 철도 직원이 마약을 판매하고 부녀를 유괴한 범죄를 묘사해 철도직원회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롼링위가 출연한 「신여성」(1934년)의 일부 내용이 신문기자의 뻔뻔한 행동을 다루자 기자조합회의 항의를 받았다. 사실상 롼링위가 「신여성」을 연기한 뒤 상하이 영화 간행물의 발행량은 대량으로 증가하여 각 주요 신문 역시 영화 부록이나 영화와 관련된 글을 싣지 않는 경우가 �V의 없었다. 당시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영화 간행물 역시 한바탕 광풍이 몰아치듯 계속 출간되어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특히 각종 타블로이드 신문은 영화 관련 소식을 싣는다는 핑계로 앞 다투어 많은 배우와 감독의 사생활을 대대적으로 떠벌려 소시민 독자의 입맛에 영합했다. 롼링위의 사생활은 이러한 황색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롼링위는 음독자살로써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아마도 ‘그녀는 불꽃보다 적막 했네’라는 말보다 롼링위의 삶을 더 잘 수식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이수(亦舒 - 인물의 감정을 잘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홍콩의 대표적인 여류 소설가)가 《그녀는 불꽃보다 적막 했네》(롼링위 생애를 바탕으로 써 홍콩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여주인공 야오징(姚晶)의 좁고 아름다운 어깨에서 사람들이 박복한 운명을 느끼게 한 것도 이와 같고, 관금붕이 애잔함으로 충만한 렌즈를 통해 장만위를 그린 것도 이와 같으며, 차이추성의 「신성한 여인(神女)」에서 롼링위가 보인 모습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그녀는 불꽃보다 적막했네」라는 노래의 가사는 일생 동안 진정한 사랑을 추구했던 또 다른 여성이 부른 것이다. 매염방(梅艶芳, 1963- 2003: 홍콩의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 소설 《그녀는 불꽃보다 적막 했네》가 홍콩에서 크게 인기를 끌자 같은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역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가 애잔한 목소리로 그려낸 롼링위의 아름답고도 슬픈 삶과 죽음은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듯하다.

“이상(理想)을 찾으려 하나 권태에 겨워 묻네, 어찌 몸을 숨기리, / 한때의 미모여 - 찬란한 빛은 생기를 잃은 지 오래 / 어찌 길을 떠나리, 마음은 남김없이 가져가버렸는데 - 적막과 고독을 어찌할까 / 피로에 지쳐 환상에 잠겨 불꽃처럼 사라지네.”

▣ 작가 소개

저자 : 다이옌
저널리스트, 전기작가다.

역자 : 안재연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수잔 손탁, 현대미학사, 2004)『황금 노트북 1-3』(도리스 레싱, 뿔, 2007) 외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 주요 목차

시론
루쉰, ‘사람들 시비가 두렵다’를 논함

제1장 롼씨네 딸
1 슬픈 출생 2. 아름다운 꼬마 펑건 3. 자상한 아버지의 때 이른 죽음 4. 불쌍한 과부와 안쓰러운 딸 5. 충더여학교의 여학생 6. 특별한 사랑

제2장 피할 수 없는 악연
1. 그대는 다정도 병이어라 2. 만남 3. 부지불식간에 싹튼 불행

제3장 스크린에 첫발을 내딛다
1. 은막의 첫 오디션 2. 슬픔과 기쁨을 바닥까지 맛보다 3. 처량한 혼례

제4장 밍싱에서 비약하다
1. 밍싱회사의 스타 2. 다중화회사로 옮기다 3. 사라진 동거의 사랑 4. 죽음의 유혹

제5장 무성영화의 긍지
1. 「고도춘몽」 2. 「기녀」 3. 「사랑과 의무」 4. 무성영화의 긍지 5. 영화 황후보다 더 훌륭하네

제6장 새로운 돌파
1. 원숙함에 이르다 2. 「세 모던 여성」 3. 「작은 장난감」 4. 「신성한 여인」

제7장 은막의 비극에서 비극의 인생으로
1.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네 2. 버드나무 우거지고 백화가 만발 했네 3. 인연은 꿈과 같이

제8장 사람들 시비가 두렵구나
1. 최후의 절창, 「신여성」 2. 가장 아프고 쓰린 것은 감정

제9장 영원한 아름다움
1. 최후의 만찬 2. 상하이의 아픔 3. 향기로운 영혼은 모두 흩어지고, 생사가 영원히 갈리네 4. 그리움인가 가식인가 5. 진짜 유서와 가짜 유서 6. 그녀는 불꽃보다 적막 했네

후기

부록 1 ― 롼링위 연표
부록 2 ― 롼링위 필모그래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