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만져지는 이곳에서
나는 또 한동안 지친 날개를 쉬고 싶다.”
낡은 둥지에 새겨진 유년의 아픔과
굴곡진 삶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을 말하다
정우련 작가는 일상의 이야기 가운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간다.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유년기, 가족들도 그리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등록금 청구서 앞에서 등을 보이던 아버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어머니의 뒷모습. 작가는 이렇듯 빈자리가 훨씬 컸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유년시절의 나는 늘 슬펐다. 할머니가 누룩을 빚어 만든 술 익는 냄새도 슬펐고, 검은 천이 덮여 있던 콩나물 시루에서 콩나물이 자라는 것도 슬펐다. (…) 엄마를 떠나오면서, 나는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내 안에서는 들끓는 언어가 소용돌이치는데 한 마디도 뱉어낼 수 없었다. -「송정 연가」 중에서
돌이켜보면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그 아픔마저도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겨진 옛 동네를 다시 걸으며 미소를 띨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며, 힘들었던 기억을 글로 쓰고 다독일 수 있을 만큼 마음도 차분해졌다. 오래 묵은 기억은 아픔인 동시에 선물이었다.
저자는 유년의 슬픔이 자신을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비록 가슴에 남은 수많은 기억들로 ‘시도 때도 없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안고 살게 되었지만, 저자는 그 기억에 감사한다. 기억 속에는 슬픔이 가득하지만, 이제는 청승스럽다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저자는 슬픔의 시간을 ‘가장 순수하고 진실해지는 순간’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예술의 기반이 된 그 오래된 감정을 모두 끌어안는다.
“길을 떠나는 누구나가 길 끝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도서관의 문학소녀, 작가가 되다
이 책에는 문학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착과 열정이 드러난다. 저자 자신의 본질이 소설에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냉담해서, 저자는 ‘돈 안 되는 소설’ 말고 드라마 대본을 써보라는 주변인들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민달팽이가 간다」). 첫 장편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 ‘다시는 소설 같은 거 쓰지 않을 거’라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동료 작가와 함께 고민하기도 한다(「토지문화관에서 보낸 한 철」). 한 줄 한 줄 쓰는 글이 독자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면서.
5년째 장편을 만지고 있는 소설가도 있었다.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 작가로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고. 그저 아무렇게나 소설 써서는 독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제 한 달만 주무르면 던져도 될 것 같다고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일상의 온갖 핑곗거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죽비 같았다. -「토지문화관에서 보낸 한 철」 중에서
학창시절 육성회비를 낼 돈으로 덜컥 세계문학전집을 사고,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갔던 문학소녀는 이제 작가가 되어 현실을 마주한다. ‘참담한 심정’으로 겪었던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 저자는 독자 앞에 내밀어도 부끄럽지 않을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록작「표절 유감」을 통해 저자는 창작자 스스로가 갖춰야 할 정직성과, 표절의 유혹을 과감하게 잘라낼 수 있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 소개
저 : 정우련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여대 문예창작학과를 거쳐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16년 동안 여러 대학에 출강하였다.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2000년 부산소설문학상을, 2004년에는 소설집 『빈집』으로 부산작가상을 수상하였다. 부산일보에 「그림에세이」, 「미술기행」 등을 연재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목 차
1부 아침 숲길을 걸으며
500마일즈보다 멀리
그 여자의 사과나무
민달팽이가 간다
구텐탁, 동백아가씨
호떡 한 개의 위안
우리들의 아름다운 선장
오동나무 아래에서
엄마와 딸
모르는 사람
소통하는 담장
늙은 페인트공의 노래
토지문화관에서 보낸 한 철
서해안 낙조
2부 세상 속으로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소리로 듣는 문장
이우환과 인문학적 상상력
돈에 물을 뿌리다
읽는 인간
긴 하루
표절 유감
3부 장소와 사람
송정연가
고향마을로 가는 마실
남원사람
4부 그림이 있는 풍경
노란 원피스와 인상주의
혼자 갑니다
까페 떼아뜨르에 걸린 그림
서양에선 동양화가 동양에선 서양화가
소실점이 있는 길
화가의 얼굴
가난에 대하여
펄펄 끓기 시작해서 4분간
빛의 바다
빈집
나목
째려보는 사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꽃, 페미니즘을 말하다
저 치통 같은 청춘
19세기 술집 풍경
몸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서
5부 책 읽는 오후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까
죽음은 자신의 삶만큼 맞게 된다
예술가 소설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트라우마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가다
진정한 성장의 의미
소설이란 무엇인가
종말로 치닫는 문명의 위험
이 불편한 진실
책 읽는 사람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사람들
오 바틀비여, 오 인간이여
결혼 생각
책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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