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오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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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박판석
출판사항시와사람, 발행일:2018/10/15
형태사항p.173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56655222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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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생의 간곡함 또는 촘촘한 언어의 집
-“초가집 한 채”가 궁궐처럼 덩실하다

 김 종/시인·화가

 일기(日記)처럼 자꾸만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어/세상 눈치 보지 않고/내 갈 길 하나 찾아가는 오솔한 길가에/초가집 한 채 짓는다/무명 가수 하나 여기 산다고….

「시인의 말」에서 박판석(朴判碩, 1948~ ) 시인이 시 쓰면서 거처할 자신의 집을 이처럼 그려내고 있다. 평설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나의 평생 친구 박판석 시인을 무엇으로 드러낼까를 요량하다가 심봉사 개안처럼 감격적인 생각들이 고스란히 모인 이 말들을 읽고 환희 작약했었다.
사실 이 말은 박판석 시인의 개인 소유이지만 필자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시인들이 이 같은 거처를 소망할 것 같다. “일기처럼 자꾸만 부르고 싶은 노래”를 위해 “세상 눈치 보지 않고” 호젓한 오솔 길가에 무명가수가 사는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는 박판석 시인, 그는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문학나라의 시인이다. 그런데 이같이 마음에 드는 집을 시집에다 지어놓고 그의 마음은 얼마나 편안하고 덩실했을까. 아, 좋은지고. 가슴을 펴고 하늘을 보고 두 어깨를 젖혀 심호흡을 한다. 아니. 아니 이것들을 몽땅 내 것으로 해버리고 싶다고 세상사람 모두 듣도록 소리 지른다.
하나 둘 셋….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피아노 건반 위의 파동이 또 다른 파동을 만들듯이 봉우리 봉우리 지은 산들이 한 몸처럼 저 먼 데까지 뻗어 내리고 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호남의 주맥 노령산맥의 태청산太淸山과 만나게 되고 토끼가 엎드려 달을 본다는 복토망월伏兎望月의 대혈大穴 함평 월야를 만날 수 있다.

노령산맥 태청산에서 시인이 나다
 함평 월야(月也)는 태청산의 기운으로 펼쳐낸 운중반월雲中半月에 만월괘서(滿月掛西)의 대혈이 숨 쉬는, 대저 달이 밝은 쾌청한 고을이다. 소재지인 전하마을은 1912년 행정구역 개편까지는 연꽃밭이란 의미의 전하뫼[田荷山]라 하여 연꽃에 물이 당도한 연하도수(蓮荷到水)의 형국이며 걸출한 인재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다. 또한 불갑산의 연실봉(蓮實峯)을 ‘연밥’이라 할 때, 월야의 넓은 들녘은 연밭이고 주민들은 송이송이 피어난 연꽃에 비유하곤 한다.
삼한 때의 월야는 마한이었다. 백제 때는 다지현, 고려 명종 때는 나주목 모평현, 조선조 태종 2년부터는 함평현 달애기로 부르다가 고종 3년부터는 함평군 월악면이 되었다. 1912년에 조선총독부 전남 도령 제2호가 발효되고 갈동면과 월악면, 대야면을 합쳐 ‘월야면’이 되는데 법정 12개리에 59개의 자연부락 중 양정리 방축마을로 우리의 시선은 좁혀져 간다. 조선조 말까지는 갈월(葛月)이라 이름 하던 동네가 삼한부터 형성되었다는 이곳 함평 월야면 양정리 방축 마을은 200년 전부터 입촌한 전주 이씨와 남양 양씨, 충주 지씨 등이 어우러진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초가집 한 채’의 주인 박판석 시인이 고고지성을 발하였고 다음의 작품을 낳는다.

반세기 하고 오년 흘러
 고향에 왔다
 고향이 변했다고 하나, 당신은
 고향보다 더 변해 고향에 왔다
 옷만 바꿔 입은 고향
 당신의 변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고향이 저를 몰라본다고 고향을 탓하지만
 고향은 바람처럼 불어오는 가난 앞에
 큰 산과 강물은 그대로 두고
 작은 산골짜기만 목장에다 팔았다

 더러 순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제 키와 명예는 모르고
 노루목 대밭 상수리나문들 성장하지 않고
 어린 나이 다섯 살짜리 빛깔로
 그대로 있으란 말인가?

그대여
 고목 되어 쓰러진 당산나무 자리
 삼거리 공단네 목로주점엔 분교가 섰다 폐교되고
 그림자만 펄럭이는데.....
대처(大處) 물 먹고 찾아온 고향
 불변(不變)으로 이름 붙여 애틋하대서야 되리오?

산 아래 엎어놓은
 꼬막 같은 동네
 당신 마음 뿌리 깊이
 금맥으로 묻혀 썩지 않고 빛날 뿐
-「고향에 대한 소견서」 전문

 위의 시는 박판석 시인이 독자들과 얘기하고픈 「고향에 대한 소견서」이다. 직접적으로 풀어 말하면 “시로 쓴 고향”쯤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박판석 시인이 “반세기 하고 오년 흘러” 다녀온 고향에 대한 인상기를 한 자리 시로 엮어 미주알고주알 고백하는 내용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고향이 변했다고 하나, 당신은/고향보다 더 변해 고향에 왔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적인 내용이다. 고향이 변한 것은 분명하지만 당신은 그 고향보다 더 많이 변했으면서 무슨 할 말이 있냐는 것이다. 숫제 옷만 바꿔 입은 고향의 모습은 고향을 찾은 당신의 변절에 비하면 약과라는 의미다.
시인이 생각한 고향이 얼마나 변했는가는 이 시의 2연으로 옮기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바람처럼 불어오는 가난 앞에/큰 산과 강물은 그대로 두고/작은 산골짜기만 목장에다 팔았다”는 것이 화자가 바라본 고향변절의 전부이다. 그 죽일 놈의 가난만 아니어도 ‘작은 골짜기’마저도 목장에 팔아넘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고향 또한 변절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란 암묵적인 의미를 읽게 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변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연’이란 이름 앞에 시인은 “노루목 대밭 상수리나문들 성장하지 않고/어린 나이 다섯 살짜리 빛깔로/그대로 있으란 말인가?”를 항변처럼 들려준다. 그 동안 자신이 이룬 “키와 명예”는 어디에 두고 상대만을 향해 변절의 멍에를 씌운단 말인가?
분교가 섰다가 폐교된 자리엔 “삼거리 공단네 목로주점”이 들어섰고 그림자만 쓸쓸히 펄럭이는 폐교된 분교의 광경을 대처에서 물먹고 고향 찾은 시인은 “불변(不變)으로 이름 붙여 애틋하대서야 되”겠느냐고 결론을 낸다. 화자가 기억하고 찾은 그 시절의 고향모습은 이제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연 날리고 썰매타고 자치기하던 그 무렵의 고향 정경은 산 아래 꼬막쪼가리처럼 오순도순 이마 맞대고 다정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 고향은 “당신 마음 뿌리 깊이/금맥으로 묻혀 썩지 않고 빛날 뿐” 더 이상은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향은 ‘무상無常’한가. ‘무상’은 유해한가. 고향이란들 불변일 리 없고 불변이 진리는 더더욱 아닌 세상에서 화자는 무상한 고향을 향해 다다를 수 없는 애틋한 마음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 변하는 데 자연 위에 터 잡고 살아가는 인간이 무에 그리 대순가. 그 땅의 그 사람들이 들고 나는 고향이라고 변하지 않는대서야 어찌 사람 사는 곳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대처에서 물먹다가 더 많이 변해서 고향만 변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변절(?)을 내심 꾸짖고 있다. 그러나 그 현장을 떠나면서부터 뉘우치듯이 고백한 그 사실마저도 또 다른 망각과 변절이 되고 그 다음의 뼈아픈 시간들로 마음 둘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게 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도 있을까. 세상의 존재는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는 바위도 물도 태양도 변한다는 사실에 예외가 없다. 요컨대 변한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평등하기만 하다. 그런 터에 ‘고향’이란 사실적 존재가 이 같은 평등 앞에서 어찌 불변일 수 있겠는가. 분명 오늘 떠오른 태양은 어제 졌던 태양이 아니며 내일의 태양 또한 오늘의 태양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일전에 어느 시인이 상대와 나눈 얘기에 “당신 변했다”니까 어찌 변하지 않고 살겠더냐며 한 술 더 뜨더라고 한다. 그래도 시인은 이 같은 변화 앞에서 무심할 수 없고 떨쳐낼 수 없는 우수를 노래하며 감당하는가 보다.

그가 무등산을 떠나
 생전 가고 싶은 고향을 찾은 날
 망월동 화장(火葬)터는
 그를 바람과 구름으로 떠돌던 몸을 태워
 기러기로 바꿔줬다

 고향은 함흥, 소년 군인으로 남쪽으로 와
 살아서 가보지 못한 길
 팔순(八旬)이 넘어서야
 여권도 발부되지 않은 땅으로 훌훌
 찾아갈 채비를 한 것이다

 울다 지친 능선에 올라
 푸른 산천 무등산 한 번 뒤돌아보고
 한(限)처럼 길고 긴 영산강 줄기 바라보며
 꺼이꺼이 기러기 한 마리
 남쪽에 둥지를 두고 북으로
 울며 떠나는 가을

 새가 된 그의 영혼은
 죽어서야 한 맺힌 장벽 허물고
 한탄강 흐르는 휴전선 넘어 훨훨
 슬픔의 강을 건너
 남과 북을 자유로이 날 것이다

 남쪽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두고
 북으로 가는 그에게
 나무들은 꼬까옷 입고
 철새가 아닌 기러기 날개를
 꽃물로 곱게 물들여 주었다
-「귀향 -매형 가시는 날」 전문

 한 갑자(甲子)가 다된 세월에 박판석 시인과 지근의 거리에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필자는 그의 표정만 봐도 무엇을 생각하는 지를 맞춰낼 것 같다. 그 같은 사이이니 그의 가정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은 불문가지. 그는 남동생 하나에다 세 분의 누님을 포함한 다섯 여자 형제로 도합 칠남매의 가정에서 장남으로 성장했다. 그런 가운데 “고향은 함흥, 소년 군인으로” 월남하여 친척누님에게 장가든 매형 한 분이 있었다. 위의 작품은 박판석 시인이 친형제처럼 지냈던 그 매형과의 사별 앞에서 부른 지극한 슬픔의 이별가인 셈이다.
작품 속의 매형은 망월동 화장터에 가서 “바람과 구름으로 떠돌던 몸을 태워/기러기로” 다시 태어났고 살아생전에는 찾아갈 수 없었던 함흥 땅을 “죽어서야 한 맺힌 장벽 허물고/한탄강 흐르는 휴전선 넘어 훨훨/슬픔의 강을 건너” “길고 긴 영산강 줄기 바라보며” 남쪽에 둥지를 두고 북으로 울며 떠났는데 바로 그 계절이 가을이었다. 인간 세상에서 ‘새’는 인위적 칸막이에 구애 없이 나는 자유의 표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어디든 날아 찾아 갈 수 있는 ‘새’는 사자死者의 원망願望을 담은 상여에도 새겨져 있다. 인간세상에선 부자유했으나 다음 세상에서는 두 날개 활짝 펴고 훨훨 날으라는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

신의 한 수를 요청하는 「쿼바디스」
근자에도 재개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금강산 온정각 일대가 울음바다를 이뤘다. 분단 70년인 지금에도 이산가족들의 슬픔은 녹지 않는 만년설처럼 민족의 깊은 아픔으로 응어리져 있다. 오매불망 망향에의 꿈을 놓지 않았건만 이들 대부분은 죽거나 심한 고령이어서 보호자를 따로 대령하면서까지 상봉의 자리에 참석하였다. 설·추석에는 북한강 강변에다 망향단을 차리고 합동제를 올리던 풍경마저도 이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사라져가는 풍경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위 작품은 제목 「귀향」에다 “매형 가시는 날”이란 부제를 달았다. ‘귀향’은 “고향 돌아가는 일”이다. 기러기로 변신한 ‘매형’은 푸른 산천 무등산을 한번 돌아보고 팔순이 넘어서야 생전의 고향 땅을 찾아 날개 쳐 날아간 것이다. 두 날개로 나는 ‘새’는 인간 같은 장벽이 없다. 그리도 그리던 고향이니 정든 둥지에 사랑하는 남녘땅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여권도 발부되지 않은” 북쪽 땅을 찾아가는 그에게 “나무들은 꼬까옷 입고/철새가 아닌 기러기 날개를/꽃물로 곱게 물들여 주었다.”는 가슴 따뜻한 전송을 노래하고 있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누구에게나 슬픈 법이다. 그러나 고향을 찾아서 날개를 펼친 기러기 한 마리의 노래는 어디든 자유하게 훨훨 날을 수 있음이니 “꺼이꺼이 기러기 한 마리” 나는 일은 진정 멀어도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사슴 초등학교를 나와

 원숭이 중, 고를 졸업하고

 사자 대학을 마쳤다


 그가

 사회생활을 사자로 시작하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함께

 물어 죽였다
-「쿼바디스」 전문

 앞의 두 작품과는 대단한 반전을 읽었다. 우리는 짧지만 상징성이 높은 촌철살인적인 작품으로 박판석 시인을 만나고 있다. 매사 차분한 이야기를 조단조단 엮어가는 박판석 시인의 작품으로선 다소 의외의 느낌이지만 그의 작품적 표정 하나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박 시인은 ‘그’의 일대기를 노래하지만 ‘그’가 누구인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문제는 ‘그’도 여느 사람 중의 1인이고 ‘사슴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온통 사랑 투성이였을 테니까. 그러던 ‘그’가 ‘중, 고를 졸업’하고는 원숭이처럼 미운 존재로 바뀌었다. 그리고 ‘대학’을 진학하고 학교를 마칠 쯤에선 그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물어죽이는 무서운 ‘사자’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일단은 사랑스럽다가 그 다음은 밉고 그리고는 무섭다는 세 개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읽어가게 된다. 이제는 ‘사자’가 되어 학교를 마쳤으니 다음의 단계는 ‘사랑스럽고’ ‘밉고’에 상관없이 자신보다 힘이 약한 상대라면 막무가내 물어 죽이는 몹쓸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같은 얘기일지 모르겠는데 독이 오른 칠팔월 초목들을 보면 위의 시는 실감이 커진다. 봄날에는 초목들이 사슴초등학생이 연상될 만큼 부드러운 연둣빛이었다. 그러다가 늦은 봄쯤이면 산야에 들어찬 원숭이 중, 고생 쯤 된 잡초들을 대하면서 패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진다. 그런 뒤에는 이른 아침부터 매달려도 밭뙈기를 온통 점령해버린 억센 잡초들의 김매기에 기진맥진하고 만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약과다. 다음의 단계는 독이 오른 풀들이 흉기처럼 강하고 날카롭게 변해있고 그 풀들을 제압하기 위해 예초기를 앞세워 소탕작전에 돌입한다. 요컨대 추석을 앞두고 벌이는 ‘벌초’작업은 ‘사자’가 된 풀들과 전쟁을 벌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쿼바디스」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짤막하면서도 극명하게 형상화한, 시적 성공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 학생들을 보호하고 돌봐야할 대학교 졸업자가 되레 힘세고 날카로운 이빨의 ‘사자’가 되어 무자비하게 물어 죽이고 말았으니 이보다 살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작품은 해석여하에 따라 여러 의미로 나뉠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한 ‘그’의 성장과정은 변화가 빠른 세태를 읽어낼 수도 있고 학력사회의 심각한 폐단을 지적한 경구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약육강식’이란 표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생존 전쟁의 한 현장을 상징성 높은 표현으로 집약시켜 우리 독자들을 섬뜩한 상황체험의 현장으로 인도하여 절로 움츠리게 하는 작품이다.
제목으로 쓰인 ‘쿼바디스’란 “신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의미한 라틴어 문구인데 시인이 갈길 몰라 판단을 구하는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처한 질곡의 한 단면을 어찌 구해내야할지에 ‘신의 한 수’를 요청하는 형식인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산이 요즘
 밥 먹고 사느냐 물었다
 산에게 나는
 밥 먹고 산다고
 말할 수 없었다

 솔직히 밥이
 나를 먹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흘러,
산 아래 강물에게
 한때 나도 그랬어, 라는 대답을
 무척 듣고 싶은 날이었다
-「살아간다는 것」 전문

 작품이 품을 열어 발언하는 바는 “흘러,/산 아래 강물에게/한때 나도 그랬어, 라는 대답을/무척 듣고 싶은 날”이 우리가 읽어낸 메시지의 전부이다. 이 작품에는 ‘산’과 ‘나’ 그리고 ‘산 아래 강물’ 등 세 개의 사물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연달아 발언의 수위를 달리 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진행 과정은 “밥 먹고 산다고/말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처지를 하소연의 형식으로 고백에 다다르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산이 요즘/밥 먹고 사느냐”는 질문으로부터인데 조금은 생뚱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이 작품의 맛을 더한다. 성공한 작품이라는 의미이겠다.
작품 속의 질문자가 외려 “산에게 나는/밥 먹고 산다고/말할 수 없”는 처지를 “솔직히 밥이/나를 먹고 있다고/고백하고 싶었다”로 바꾸어 발언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흘러’에는 장강 같은 많은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하면서도 짧은 시간이 이처럼 표현되었음도 심상찮거니와 ‘흘러’를 많은 사건적 진행이 경과한 시간으로 읽어낸 사실 또한 필자만의 독법일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숨겨둔 ‘강물’을 슬며시 꺼내어 관심의 방향을 돌리면서 시의 여운을 꼬리 사리는 시인의 기교가 남다르다. ‘산’과 ‘나’는 직접 대면의 상대이다. 그리고 ‘강물’이라는 제3자적인 사물을 매개하여 ‘고백’에서 ‘대답’까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산과 나와 산 아래 강물, 이들 3자는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상황을 연상할 수 있다. 의외의 질문법으로 시작한 산과 나는 같은 처지이기도 하고 서로를 살피고 의지하는 의존적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 처지이니 고백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내려놓고 대신 각자의 입장을 재인식케 하는 효과가 있다.

“놀기 질리면 임금 없는 일을 시켜라”
이 작품에서의 화자는 ‘나’ 하나에 모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화자에 의해 세 개의 사물의 관계가 ‘밥’이라는 매개 항으로 교묘히 조립되고 동병상련의 처지가 감잡히는 강물의 등장으로 ‘나’의 위치는 은근슬쩍 봉합되고 있다. 그러나 세 개의 사물이 빚어낸 모든 정황의 직접적인 대답은 유보되어있다. 그러면서 살아간다는 선명한 듯하면서도 애매모호한 흐름이 작품의 독자성과 주제를 결론짓고 있다.
제목에서 읽히는 「살아간다는 것」의 명제적 의미는 제3자적 관계를 심정적으로 살피고 감 잡는 일이다. 이는 이 작품의 독법이 상당해야 다다를 수 있는 질문의 형식이고 밀고 당기면서도 짐짓 눙쳐둔 강물의 대답에 이르면 ‘밥’은 파생된 여러 대답으로 뻗어가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겠다. 상념의 깊이가 도저한 느낌의 작품인 때문이다.

노는 자에게 노는 수당을 주라
 하루 몇 시간 놀았는지 체크하고
 잠자는 시간은 빼라
 쉬지 않고 종일 노는 자에게 더불 수당을,

아침 낮 저녁참을 주고
 저녁에는 술과 안주를 주라

 놀기 질리면
 임금 없는 일을 시켜라

 불만 가득한 자는
 내 자리로 와
 임무를 교대하게 하라
-「행복한 나라 임금」 전문

“노는 자에게 노는 수당을 주라”니!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 이보다 매력적인 나라가 또 있을까. 이런 나라가 존재할리는 만무하고 지구상 어디에든 구상되고 있다면 그런 나라는 그 ‘임금’ 자신이 최우선 자원자로 나설 것 같다. 더구나 “잠자는 시간은 빼고” “하루 몇 시간 놀았는지 체크하고” “쉬지 않고 종일 노는 자에게 더불 수당을” 지급하는 나라, 그럼에도 ‘잠자는 시간’만은 예외로 한다면서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니 “아침 낮 저녁참을 주고/저녁에는 술과 안주를 주라”니 이보다 더한 주지육림의 사회보장국가가 또 있을까. 이 나라에서 ‘임금’은 이중二重의 의미가 읽히는 어휘이다.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사용자에게 받는 ‘품삯’을 의미하는 ‘임금’이 그 하나이고 동시에 군주국가에서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임금‘을 함께 의미한다.
칸트는 자신의 『판단력 비판』에서 ‘노동’과 ‘취미’의 문제를 선명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기대면 ‘노동’은 “대가 없이는 하지 않는 일”이고 ‘취미’는 “대가가 따르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로 정의되어 있다. 이외에도 덧붙여진 ‘취미’의 의미는 덧붙여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거나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일” 쯤으로 풀이하고 있다. 노동과 취미를 이리 선명하게 표현한 박판석은 확실히 자신만의 시적 방법에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에 등장하는 ‘행복한’이라는 관형어도 다분히 이중적인 의미가 돋보인다. 이 시의 내용대로라면 쉬지 않고 종일 노는 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라는 ‘더블 수당’과 하루 세 끼니를 주고 저녁은 ‘만찬’으로 “술과 안주”까지를 얹어서 주는 이리 행복한(?) 나라를 박판석 시인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촌 어딘가에 건설해 놓았다. 이런 나라는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돈키호테」처럼 박판석 시인이 건설한 전형(典型)으로서의 ‘국가’일 수 있겠다. 현실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같은 ‘뜬구름공화국’이 박판석 시인의 머릿속에서 건설되다니 작품상이긴 하지만 이런 나라의 광경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시 읽는 맛이 절로 커지는 것을 어찌 모른 체 할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그런 나라의 존재여부는 물을 필요도 없겠고 독자로서의 우리가 이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만도 절로 덩실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의 제3연에 오면 “놀기 질리면/임금 없는 일을 시켜라”고 통 큰 느낌으로 직격탄을 날린다. 아닌 게 아니라 노는 일도 하루 이틀이거나 열흘 한 달이지 노는 날만 계속되면 이 지상은 그 자체로 짜증범벅이고 지옥도 그런 불가마가 없을 것이다. 지옥이 느껴지면 불만은 가득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 같이 불만 가득한 자가 있거들랑 ‘내 자리’로 와서 ‘임금 임무’를 교대하게 하라니 이건 또 무슨 난린가. 여기에서 “내 자리”는 임금의 자리이고 ‘임무’는 다름 아닌 임금의 임무이다.
바로 노는 “일에 질리면 임금 없는 일을 시키라”는 그 “임금 없는 일”은 ‘품삯’없는 일이겠으나 그 일을 관리 감독하는 ‘임금’이 없는 곳이란 동시적인 의미로도 읽히는 것이겠다. 어쨌든 좋다. 임금이 노는 자에게 베푼 이 기상천외한 은전에도 불구하고 불만 가득한 자가 있거들랑 자신의 자리를 걸고 임무를 교대하게 하라니 이쯤에 와버리면 우리의 상상은 멀찌감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되고 만다. 대저 「행복한 나라 임금」이란 박판석 시인이 건설한 크나큰 시적 유토피아로 떠올라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 나름의 상상을 부가하여 기상천외한 사건으로 확대되고 만다.
위의 시를 독서하면서 문득 ‘천국’이나 ‘극락’으로 지칭되는 하늘나라는 시적 명상으로 접근하자면 지루함만 가득한 참으로 권태로운 세상이 아닐까 싶다. 놀기도 지칠 만큼 편하다 보면 하품에다 기지개켜기조차 따분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 따위는 부담되니까 일부러 피하는 상황이 연출되리라는 생각이 위 시를 대하는 자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우리는 부러 ‘행복한’이라는 관형어를 제목에 얹어서 그걸 반어적으로 이야기하는 박판석 시인의 시작(詩作) 의도를 읽어낼 필요가 있겠다. 일하지 않고 노는 날만 되풀이된다면 이 지상은 그날부터 생기(生氣)가 사라진 침통한 ‘회색’세상으로 채색될 것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보편적인 인간 세상과는 담을 쌓는 참으로 해괴한 세상이 열릴 것이 아닌가.

그는
 거짓말 저수지에서 태어나
 거짓말로 성장했고
 거짓말로 감옥에 갔다

 감옥은
 거짓말을 가두는 곳

 붉은 벽에 말을 걸자
 벽은 등을 뒤로 돌려
 메아리처럼 그의 말을 되돌려줄 뿐

 그들의 저수지는
 거짓말로 말라가고 있다
 불로불사(不老不死)의 힘을 지닌
 거짓말의 저격수
 크로노스와 함께
-「거짓말의 저수지」 전문

「거짓말의 저수지」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담겨있는 걸까. 넘실거리며 주름주름 다가오는 ‘거짓말’ 파랑을 상상하노라면 그게 어떤 모습 일까가 궁금해진다. 작품 속의 ‘거짓말’은 ‘그’로부터 시작한다. ‘거짓말 저수지’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그’의 부모는 거짓말 저수지이다. 요컨대 ‘그’는 거짓말 저수지의 자식인 것이다. 거짓말 덕에 성장했고 거짓말로 감옥을 갔었다. 온통 날밤 새운 거짓말로 이 세월을 보냈는데 ‘그’가 감옥에 가면서부터 거짓말도 감옥에 갇히는바 되었다. 태생부터 거짓말의 자식이던 ‘그’를 감옥에다 가두니까 그로 인한 거짓말도 감옥살이를 하게 된 셈이다.
감옥살이 관계로 ‘거짓말’을 더 이상 외부로 내보내지 않게 되자 감옥 내의 ‘붉은 벽’이나마 말을 걸어보려 하지만 돌아앉은 벽은 등으로 말을 받아 메아리처럼 되돌려 올 뿐이다. 거짓말만 담아둔 그들의 저수지는 거짓말 주술이라도 걸린 듯 속절없이 말라가고 있다. 당초 ‘그’가 태어났던 거짓말 저수지는 그를 성장시켰고 감옥에 보냈지만 등을 돌려 그의 말을 메아리처럼 되돌려준 연유는 따로 있을 것 같다. 처음 「거짓말 저수지」는 등장인물이 단수인 ‘그’였다가 마무리에 와서는 ‘그들’이라는 복수로 바뀐다. 처음에는‘그’였다가 뒤에 와서 ‘그들’이었다면 아메바처럼 핵분열을 일으킨,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유가 존재한단 말인가.

호수에 내려와 제 몸 비추는 산봉우리들
 이 작품의 맨 마지막 행에는 ‘크로노스’가 등장한다. ‘크로노스’는 크라이노kraino, 즉 “완성된 자”란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신족 12신의 막내였었다. 그는 장성하면서 아버지 우라노스의 남근을 잘라 거세시킨 후 우주의 지배자 즉 최고신의 위치에 등극한다. 말하자면 여기가 서양 신화의 아버지 거세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작품이 보여준 것과는 달리 크로노스는 그리 선명한 신이 아닐진대 “불사불로(不老不死)의 힘을” 지닌 영웅이고 거짓말을 격살하는 저격수라니 좀은 의아스럽다.
제우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크로노스는 자신도 막내아들 제우스에 의해 타르타르스라는 지하 세계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헤시오도스에 의해 기록된 이 섬뜩한 이야기는 훗날 많은 시인 작가들에 의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된다. 아버지 우라노스에게 고통과 시달림을 받은 어머니 가이아를 복수하는 대목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허지만 그 또한 아들에게 갇히는 신세가 되기까지의 물고 물리는 이야기의 실타래는 많은 예술적 천재들의 상상력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주술에 걸린 거짓말 저수지는 거짓말 저격수 크로노스와 함께 말라버리지만 ‘그’를 둘러싼 거짓말 세계의 신화성은 또 다른 의미를 지어내는 원천으로 읽힐 터이다.

산이 비상(飛翔)하려 하자
 실핏줄같이 흐르는 지류를 묶어
 호수를 만들어
 산의 푸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중량이 버거워 산이 날 수 없게 되자
 호숫가엔 나무들이 모여들었다
 짐승과 새들이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울처럼 맑고 영롱한 호수에
 낮엔 산봉우리들이 제 모습을 비춰보고
 밤엔 별들이 반딧불처럼 날아와
 어둠 속 사슴 눈망울 같은 파란불을
 호수에 켜주었다

 날개 접은 산의
 들뜬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자
 고기들은 호수의 품에
 산의 알을 낳아주었다
 달과 별도 바람 없는 날 몰래 들어와
 초롱초롱한 그들의 알을 슬어놓고 갔다
-「산과 호수」 전문

 산과 호수를 불러내어 동화 한 편을 우리 앞에 펼쳐낸 위의 작품은 시작부터 “산이 비상(飛翔)하려 하자/실핏줄같이 흐르는 지류를 묶어/호수를 만들어/산의 푸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는 사연이 읽힌다. 산의 비상이 미수에 그치는 순간을 이처럼 재미있게 그린 것이다. 이제 산은 날개는 가졌으되 날 수 없는 닭처럼 버거운 중량 땜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새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광경이 연상된다.
몸무게는 늘고 날개는 퇴화한 산, 그래서 하늘과 만나면서도 날 수 없는 그 “들뜬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은 산은 호숫가를 중심으로 나무들을 부르고 짐승과 새들에게 아름다운 집을 짓게 한다. 바야흐로 대자연은 산을 중심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오만가지 조화를 펼쳐간다. 이 자리에 조물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비상하려는 산의 지류를 묶어 호수를 만들고 그 호수를 산의 주머니에 넣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체중 때문이긴 하지만 일단 산이 날 수 없게 되자 호숫가로 모여든 나무들과 아름다운 집을 짓는 짐승과 새들, 그리고 맑고 영롱한 거울 같은 호수에다 제 모습을 비추는 산봉우리들, 어디 그뿐인가, 밤이 되면 날아든 반딧불이가 “사슴 눈망울 같은 파란불을 호수”에 밝혔으니 바야흐로 세상은 만화경이 방불한 별천지가 되었다.
산도 더 이상은 어디론가 날아갈 들뜬 생각 대신 고요히 가라앉힌 호수의 품에 들어와 산의 알을 낳는 물고기들, 바람도 잠이 든 잠잠한 날, 달과 별도 초롱초롱 알을 슬어놓고 갔다는 이야기 등으로 이 작품의 서사적 스토리는 끝이 나지만 정작 박판석 시인이 꿈꾸고 의도한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대자연은 장자의 생각처럼 무(無)에서 절로 일어났고 일어난 만큼 어우러진 거대한 유기체적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조물주가 산의 비상을 주저앉힌 이유는 무엇일까. 선명하지는 않지만 호수라는 푸른 주머니를 중심에 두고 슬그머니 산봉우리까지 제 모습을 비춰 보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고 싱그럽다.
유경환 시인이 쓴 「호수」라는 동시는 “호수가 산을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라고 노래한다. 필자는 유경환의 시적 사유가 오래도록 마음에 번져 지워지지가 않는다. 인간 세상에 시인의 서정보다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 박판석 시인의 순결하면서도 신명난 한 자리의 자연을 대하면서 필자의 뇌리에는 “산과 물의 상생관계”가 스쳐갔다. 산과 물은 높고 낮다는 점에서 상반된 형상을 한 두 개의 사물이다. 낮고 높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상호 유기성을 눈여겨 볼만한 비상한 시선을 요구한다. 우선 높이 솟아 위의(威儀)한 산들도 물의 흐름만은 활짝 품을 열어 잘 흐르도록 도와주고 그 흐름을 귀한 손님처럼 멀리까지 내바람한다. 그러면 물은 흐르면서 산들의 밑뿌리를 적시고 그들의 키를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 솟아난 산들의 높은 키는 간난아이 시절부터 물의 조력으로 올려 세운 바로 그 높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인간 세상에 ‘서정’만큼 늘 푸른 식물이 있을까를 생각한다. 목적을 의도한 구호적인 것들은 당장은 힘이 있고 으리번쩍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날껏 이내 시들해지는 것을 보아왔다. 황진이의 시조작품은 오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준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조 천년은 시문장의 우열로 입신출세를 갈랐지만 그 시대에 우수하다고 평가된 작품들은 지금은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많은 얘기를 한다. 순수 서정의 길은 어렵기는 해도 제대로만 찾아가면 시간의 흐름에 제약받지 않고 늘 푸른 소나무 같은 감동으로 우리 곁을 흐른다는 사실이다.

저 많은 풀잎들 중
 하나쯤 뽑아버려도
 아니 몇 포기쯤 베어버려도
 흔적 없어

 낫을 든
 바람이 말했다

 풀잎들은 일제히 까마귀 떼처럼
 비 내리는 광장에 누워버렸다

 번개치고 큰 바람 불어
 칼날 부서지고 날이 샐 때까지
 바람 앞에
 반딧불처럼 어깨를 모았다

 바람의 망나니도 춤을 끝내고
 번지는 촛불을 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자
 풀들은 바람을 차단하고야
 끙,
힘차게 일어섰다
-「풀잎 하나」 전문

 우주에 실려서 나풀거리는 풀잎 하나의 중량은 얼마나 될까. 봄날이 되어 언 땅을 열고 싹을 틔운 풀잎들을 보노라면 그들 풀잎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김수영의 「풀」에서 우리가 떠올린 풀은 민중들의 이미지 고양에 손색이 없다. 모택동은 풀잎도 바람 따라 눕는다면서 인민들을 향해 시의에 따른 처세를 주문하기도 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풀은 많이 널린 만큼 하찮다. 그래서 쉽게 뽑아버리거나 베어내곤 한다. 그러나 곰곰 새겨보면 하찮은 생명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 것이며 무시해서 좋을 존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라지 말자, 어린이로 살자”라는 교훈!!
“낫을 든 바람”은 풀잎 위에 군림하는 위압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풀잎을 일으키기도 하고 숨죽이게도 하고 때로는 풀잎의 생사여탈권까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위세 등등한 권력자들과 한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저 많은 풀잎들 중/하나쯤 뽑아버려도/아니 몇 포기쯤 베어버려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으스대는 자들과 얼굴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애시당초 ‘풀잎’과는 DNA부터가 다르다며 자신들 존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풀잎을 향해 어디서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고 믿는, 그래서 군림하는 일이 그들의 생존조건의 일상성이 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족속들인 것이다. 그런 무리들이 이 작품에서는 일괄 “낫을 든 바람”으로 표상되어 있다.
3연에서 펼쳐낸, 비 내리는 광장에 까마귀 떼처럼 일제히 누워버린 풀잎들은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의 광경이건만 바람의 눈으로 보면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들의 무대책처럼 비쳐진 참 한심스런 현장이었을 것이다. 춥고 배고프고 의지할 곳 없고… 그런 마당에 “번개치고 큰 바람 불어/칼날 부서지고 날이 샐 때까지” 더는 가망 없다고 여길 때 “반딧불처럼 어깨를 모”은 풀잎들의 결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망나니의 춤을 끝낸 바람을 상대하여 촛불 든 풀잎들은 번져가는 들불이고 높은 키 세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다녔다.
이 자리의 바람은 이내 꼬리를 감추고 퇴장한다. 인해전술이 아니면 끔쩍도 않을 바람들의 차단된 위세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풀잎이 되어 ‘끙’하고 일어서는 광경은 생각만으로도 볼만했겠다. 비 내리는 광장에 까마귀 떼처럼 사생결단으로 누워버린 풀잎들이지만 이 같은 사태 앞에 맘만 먹으면 마구잡이로 낫을 든 바람이라도 텅 빈 들녘에 혼자 남았을 때처럼 몸이 떨리고 무서웠을 것이다.
힘 가진 바람은 자신들의 일은 모두가 정당하고 거룩한 특별한 일이다. 그래서 풀잎들이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는 현장이면 적이 마땅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민중을 ‘풀’에 비유한 것이 ‘민초’인데 연약한 풀잎의 현실에서 칼날이 부서지고 날이 샐 때까지 바람 앞에서 바람 모르게 반딧불이처럼 어깨를 모으는 풀잎들의 결사는 장하고 옹골지다. 이들이 “바람을 차단하고야” 힘차게 일어설 수 있었음이 지금까지 민초 중심의 역사가 아니던가.

민들레초등학교 운동장엔
 웃음이 가득하네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지 마세요
1학년 토끼 소녀들만 아는 사실이에요
 천기(天氣)누설(漏泄) 되면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하므로
 이웃 들국화초등학교 소년들이 궁금해, 종일
 해가 달이 되고 달이 해가 되도록
 부엉이처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지요
 시계 없는 교실을
 몇 시인지 모르는 잡초들도 함께 화단에서
 아이들과 기웃거리며 교실을 들여다보지요
 가끔, 탁탁 꼬리를 치며 고라니 부부가 운동장에서
 집에 가라고 꽥, 기차처럼 소리를 지르지만
 칠판에는 하얀 분필로 떠든 사람 이름만 달빛에 적혀 있어요
 노루 새끼, 콩꼬투리, 암꿩과 수꿩, 너구리
 담벼락엔 빼빼 마른 나팔꽃 수위 아저씨가
 실처럼 가느다란 팔로 금을 그어보지만
 아무도 그것에 구애받은 아이들은 없어요
 구름이 순간 달과 별을 가려 한밤중 흉내를 내보지만
 소녀들은 잠깐이라는 걸 잘 알지요
 눈 내리면 기침소리로도 알 수 있는 소녀들의 비밀을
 이웃 들국화초등학교 소년들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알라, 가르친 소크라테스도
 이 학교 교훈을 몰랐답니다
?
민들레초등학교 교훈은, 쉬!
태초의 비밀처럼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자라지 말자
 어린이로 살자’였습니다

 이 학교 교훈을 실천한 이들은
 세상엔 하나도 없지요
 어른이 되기 싫어 깊은 산골짝 민들레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창공을 바라보며
 소녀들이 킥킥 웃는 웃음소리만 초승달과 함께
 들판 가득 메아리처럼 퍼진답니다
-「민들레 초등학교」 전문

“창공을 바라보며/소녀들이 킥킥 웃는 웃음소리만 가득한 하늘에 초승달과 함께/들판 가득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민들레 초등학교’는 박판석 시인이 작품 속에 건설한 학교 이름이다. 이 학교의 일들이 궁금하여 안달이 난 “이웃 들국화 초등학교 소년들”이 “해가 달이 되고 달이 해가 되도록” 종일 부엉이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지만 도대체가 그들의 일을 알아낼 길이 없다. 교실에는 시계도 없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잡초들만 아이들처럼 교실 안을 기웃거릴 정도이다. 그리고 집에 가라고 꼬리를 치며 기차처럼 꽥 소리를 지르는 고라니 부부도 작품 진행에 동원된 재미있는 무대 장치중의 하나이다.
민들레 초등학교 칠판에는 노루새끼부터 암꿩과 수꿩, 너구리까지 떠든 자의 명단에 들어있고 넘어오지 말라고 ‘나팔꽃 수위 아저씨’가 빼빼 마른 가느다란 팔로 금을 긋고 있지만 그런 일에 구애 받지 않을 학교가 민들레 초등학교 학생들의 모습이다. 이 학교의 소개는 이쯤 설명하지만 베일에 둘러싸인 이 학교의 교훈은 태초의 비밀처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만큼 한사코 비밀에 부친 상태인데 박판석 시인이 전후사정 모르고 천기누설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메가톤급에 해당할 만큼 대단한, 소크라테스도 몰랐던 이 학교의 교훈은 “자라지 말자/어린이로 살자”였다니 이 지구상에 이리 풋풋하고 기상천외한 은유적 공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라지 말고 어린이로 살자니 이는 꼼짝없는 박판석 시인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필자는 “시계가 없는 교실”을 노래한 이 학교를 독서하면서 중국고사에서 읽었던 ‘무릉도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시는 것처럼 ‘무릉도원’은 4세기 무렵 중국의 후난성(湖南省)의 무릉(武陵)이라는 지역에서 고기 잡는 어부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어부는 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따라 계곡 깊숙이 들어갔는데 계곡 을 따라 복숭아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어부는 계속 복숭아꽃을 따라가다 보니 계곡물이 솟아나오는 수원 근처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더니 평탄한 대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여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한가롭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어부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느냐 묻고는 술과 닭고기요리를 가져다가 대접해 주었다. 어부에게 아래 세상에 대해서 하나하나 묻던 그들은 진秦나라 전란이 일어나자 가족 친지들이 이 산속으로 피난을 왔고 세상과 절연한 지금은 어느 시대인지를 모르고 지내는데 대략 500년쯤을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지낸다고 얘기하였다. 어부가 여러 날을 돌아가면서 대접을 받고 돌아가려 하자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말에 그러마고 말한 어부는 나오는 도중 도중에 표시도 하고 눈여겨보며 자신의 마을로 와서 관리에게 그간의 일을 얘기하고 그 마을을 찾아갔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짧게 줄인 이야긴데 길을 잘못 들면 누구나 겪을 법한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는 신비감이 감도는 신선들의 세계 같건만 특별한 치장도 없어서 서민적 정취가 물씬거리는 장소였다. 그리고 누구나가 꿈꿀 수 있는 전원 주택지쯤의 공간에 존재함직한 ‘별천지’로 이해하면 무방할 듯하다. 무릉도원 이야기는 바로 ‘별천지’의 이미지가 다분하고 박판석 시인의 「민들레 초등학교」 또한 이 같은 이미지가 겹쳐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별천지’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은 그가 설정한 고향이 여러 사물들 중 하나인 「민들레 초등학교」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이다.
‘무릉도원’이나 ‘민들레 초등학교’에는 공통적으로 ‘시계 없는 교실’이 존재한다. 그처럼 세상에 시계가 없으니 “자라지 말자/어린이로 살자”의 세계가 온전한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무릉도원’이나 ‘민들레 초등학교’가 아니어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한 곳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곳에는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일들만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생명력 가득한 ‘고향의 사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필자는 일찌감치 “고향은 키가 자라지 않는 감정이다.”라고 단정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 고향 앞에서 철부지 아닌 자가 있을까. 고향을 생각하면서 때때옷입고 뛰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 자가 있을까. 그리 보면 시인은 ‘영원한 고향주의자’이고 자라지 않는 ‘영원한 아이’인 지도 모르겠다.
시인이란 언제고 무릉도원이나 민들레 초등학교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 존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어느 시간부터는 아예 생장점이 멈춰버린 기형적인 인간이 시인이라는 생각을 되풀이해온 터이다. 시인이 이 같으니 그가 구사한 언어 또한 동일한 것은 물론이다.
시인의 보행은 막힌 것은 뚫고 구부러진 것은 펴고 시든 것들에게는 생기(生氣)를 주사하여 심장을 달아주고 그래서 건강하고 발랄한 생명이 창조될 때까지 온갖 사물들과 반응하거나 어울리면서 ‘시’의 여행길을 순시하는 나그네에 다름 아니다.
「민들레 초등학교」를 독서하면서 이 작품의 얘기꺼리만큼 우리들의 논의 또한 장황해졌지만 제대로 된 담론에만 도달하면 이 같은 길이의 논의는 별개의 일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박판석 시인의 「민들레 초등학교」에서 드러나게 읽힌 관심사는 “시를 쓰자/영원히 시인으로 살자”를 이리 뒤집어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는 박판석 시인을 두고 “더 이상 자라지 말 것”과 “계속 어린이로 살아갈 것”을 새삼 주문한다.

팔순 넘은 그가
 학교에 간다
 네모난 도시락과
 책 대신 아내를 넣은 배낭을 메고
 무등산에 오른다
 가볍다, 아내의 정성을 등에 메고 오르는 길
 중머리 교실엔 벌써
 도반(道伴)의 동료들이 햇살을 깔고 앉아
 천황봉을 바라보고 있다
 푸른 칠판엔 비행운이
 머리 들어 지나온 생(生)을 보라는 듯
 한 줄로 일필휘지 곧게 긋고 달아난다
 산의 출석 부르는 소리는 침묵이다
 꽃은 스스로의 이름을
 잎으로 색깔로 위치를 고려하여 대답하지만
 사계가 다른 호명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산의 건강을 체크하며 바람은 장불재를 넘고
 상급 학년이 물려준 나무의자는 낡아서
 졸수(卒壽)가 되자 그는 아애 산 속으로 들어가
 양지 바른 너럭바위 소나무 곁에
 흙으로 둥근 집을 짓고
 그 후 그가 하산하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그가 가는 길을
 등산이라 부른다
 하늘 가까운 정상으로 가는 길을 물으며
 끝없이 줄지어
 너 나 없이
 이승을 넘어 학교에 간다
-「졸업 없는 학교」 전문

 무슨 말이 준비된 걸까. “팔순 넘은 그”가 학교에 간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벌써부터 독자들은 흥미가 동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네모난 도시락과/책 대신 아내를 넣은 배낭을 메고” ‘무등산’이라는 학교에 간다. 도대체가 향학열이 높아진 건지 세상이 그만큼 좋아진 건지! 하기야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의 등굣길은 아내의 정성을 등에 메고 오르는 산길이지만 마음은 가뿐하기만 하다. 젊은 시절에도 오르지 않았던 천황봉 등굣길은 걸어둔 푸른 칠판 위로 비행운이 재빠르게 지나가는 ‘중머리재 교실’이 그려진다. 학생인지 동료교사인지 벌써부터 햇살을 깔고 앉아 천황봉 푸른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수업 개시는 이어질 테고 “머리 들어 지나온 생(生)을 보라는 듯” 선명한 비행운이 줄쳐져 있다. 침묵으로 대신한 산의 출석점호, 이윽고 수업시간이 펼쳐진다.
평생을 교직에서 칠판 걸어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니 그에게 인박힌 단어는 자연스럽게 ’학교‘이고 수업 내용은 ’자연‘이겠다. “꽃은 스스로의 이름을/잎으로 색깔로 위치를 고려하여 대답하”라는 자리에 누구도 예측 못할 계절이 당도한다. ’사계가 다른 호명‘은 변화무쌍한 기상 상태를 이르는 말은 아니었을까. “산의 건강을 체크”하면서 장불재를 넘는 바람, 부드럽기가 비단결 같았겠다. 그래 이쯤이면 한 차례의 심호흡이라도 뒤따르지 않겠는가. 상급학년이 물려주었다는 낡은 나무의자! 그는 아예 산으로 가고 뒤를 따라 계속 오르는 사람들만 “양지 바른 너럭바위 소나무 곁에/흙으로 둥근 집을 짓고” 세월 보내면서 그의 하산을 지켜보려 했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작품에다 담아내고자한 등산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가 가는 길을/등산이라 부른다”고.

「졸업 없는 학교」는 고산도 야산도 오르게 해
 작품의 마무리는 천황봉의 ‘푸른 칠판’을 보고 오르지만 정상에 이르면 너 나 없이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작품에 드러난 ‘졸수(卒壽)’는 인간의 수명을 졸업했다는 의미이고 끝없이 배우며 다다른 졸업식장은 한 줄로 일필휘지한 자리에서 “머리 들어 지나온 생을” 바라보게 한다. 이승을 넘어 등교한 종착지는 시인이 양지 바른 너럭바위 소나무 곁에 흙으로 지은 둥근 집이었고 그 학교를 졸업으로 갈무리한다.
생을 살고 마치는 일은 이도 저도 아닌, 일종의 등산이다. 박판석 시인이 아니어도 우리 살아가는 일에 계속 세월보태며 오르는 일이니까 이리 아스라한 높이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사는 일이 엄연한 등산인 것을 깨우치듯이 알려준다. 산을 오르는 일은 하늘만큼 높아져도 결국은 하늘 아래를 오르는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 시조작품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를 외우면서 언제 우리가 태산만큼 높아질까를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이리 하늘 가깝게 오르다 보니 이러다간 아예 하늘이 되는 건 아닐까를 생각한다.
산을 오르는 것도 등산이고 세월의 높이만큼 나이를 먹는 것도 등산이다. 다만 전자는 하산이 전제된 등산이고 뒤의 등산은 하산이 불가능한 등산이다. 한번 오르면 내려올 수 없는 천길 아스라한 절벽 등반을 우리는 나이란 이름으로 여기까지 올랐던 것이다. 브레이크가 없는 전진을 두고 아찔하다 했는데 하산이 없는 등산 또한 아찔하기는 매한가지다. 「졸업 없는 학교」는 그래서 고산도 오르지만 야트막한 야산도 오르게 하고 아예 하산하는 길을 봉쇄해버리고 짐짓 시치미를 떼는 ‘독락당(獨樂堂)’의 함의도 있다. 이것이 「졸업 없는 학교」가 우리에게 보여준 이 학교만의 실체다. 아, 대단한 지고, 이 엄청난 아포리즘을 박판석 시인이 이처럼 시로 보여주다니!

할아버지는 닷새 장날이면
 강마을 청년들이 장터에 팔러 온 자라를 사서
 동네 연방죽에 넣어주었다

 한여름 텃밭 울타리 넘어오는 화사(花蛇), 황구렁이
 한겨울 폭설로
 뒤란 닭장 곁, 몰래 들어온 꿩, 산토끼, 어린 노루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야산(野山) 식솔(食率)들은 모두
 우리 집 손님이었다

 사흘 밤낮 지치지 않고 내린 눈
 혹한(酷寒)에 찾아오신 길손들을
 절대 해코지해서는 안 된다는
 벼락같은 할아버지 말씀에 놀라
 눈보라 치는 폭설도 잦아져
 조용히 비켜가는 날들이 있었다
- 「폭설(暴雪)」 전문

 박판석 시인의 작품독서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폭설暴雪」을 올린다. 이 작품은 박판석 시인이 지켜온 생명정신의 아찔함을 읽어낼 수 있는 수작이다. 강마을 청년들이 장터에 팔러온 자라를 사서 “동내 연방죽에 넣어”준 할아버지나 “한여름 텃밭 울타리 넘어오는 화사(花蛇), 황구렁이/한겨울 폭설로/뒤란 닭장 곁, 몰래 들어온 꿩, 산토끼, 어린 노루/울타리 안으로 들어온/야산(野山) 식솔(食率)들은 모두/우리 집 손님”이라 말하는 화자는 다름 아닌 이 작품의 작자인 박판석 시인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든 울타리이든 일단 집안으로 들어온 야산 식솔들은 모두 ‘우리 집 손님’이라 말하는 화자는 의도한 범애주의자가 틀림없다.
「오디세이」에는 세상의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접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모든 만물이 신이고 인간의 형상을 한 신들이 매번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인간의 집을 찾는다고 믿었다. 낯선 자가 자신을 찾았을 때는 어떤 신분인지 누구인지를 묻지 않고 일단 환대부터 하고 그 이방인이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도록’ 배려한다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이들의 이방인 환대의 방식에는 이방인이 제우스 자신이거나 제우스가 보낸 사자가 그 같은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에게 박판석 시인이 들려준 “우리 집 손님”의 사상은 일방 오디세이에서 읽었던 신들이나 신들의 사자를 받아들인 이웃사랑보다 더 큰 범애주의가 숨 쉬고 있다. 천재지변에 버금갈 만큼 “사흘 밤낮 지치지 않고” 눈이 내리면 혹한과 폭설이 자심할 터이고 그 같은 사태를 피해인가로 찾아든 ‘길손’들은 “절대 해코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 조상들이 지닌 사랑과 온정의 정신이었다. 춥고 배고프면 산짐승들인들 불기운과 먹을 것이 저장된 인가 외에 달리 찾을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은 비록 야생동물이라 해도 인간과 동일 선상의 식솔이고 그런 의미에서 “벼락같은 할아버지 말씀”은 새삼 우리의 잠든 몽매(蒙昧)를 일깨워 준다.
이른바 우리가 끌어낸 범애주의는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로부터 그 논의를 풀어간다. 그는 신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하여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philanthropia(인간애)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은 후일 ‘박애’를 뜻하는 어원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극악인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의 아픔을 ‘인간애’라고 보았다. 스토아파의 박애주의와 세계시민주의도 동일 개념으로 논의되었으며 로마시대에 와서는 이 말이 humanitas로 번역되어 단순한 인간애의 의미를 넘어 널리 인간 전반의 교양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었다. 근대에는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도제에 의해 ‘박애사상의 실현’이 시도되기에 이르렀고 루소로부터 이어받은 범애학교를 설립하고 박애주의정신을 교육하기에 이른다. ‘박애’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혁명 때 ‘자유’, ‘평등’과 함께 혁명의 중심 모토가 되면서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 세계주의 무저항주의 등을 빚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애주의를 담론한 서양사상은 인간애를 고양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허나 조선조에 와서 천지는 부모요 만물은 한 형제이며 동포라던 하서 김인후 선생의 범애주의는 그 사상의 폭과 깊이에서 넓고 심오함을 읽을 수 있다. 고향의식에서 시작된 박판석 시인의 문학은 수직으로는 다층적이고 수평으로는 다양한 주제적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절차탁마로 보여준 작품들을 깊이 생각하고 간절하게 표현하는 박판석 시인은 기실 문학세상의 출발은 다소 늦었지만 그가 보여준 시적 진지함 내지 성실함과 탁월함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성경 속의 “시작은 미미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란” 예언처럼 그의 시적 장도는 계속 창성하리란 생각이고 필자와는 한 갑자의 세월을 어깨동무하면서 예까지 왔고 다음 세상의 행장도 ‘시인이 되는 일’이나 도정을 함께 하리란 예감이 든다.
고향에 대한 소견을 역지사지한 「고향에 대한 소견서」나 두 날개 펼친 한 마리 새가 되어 비로소 생전의 미망을 ‘자유’했던 매형의 「귀향」, 짤막하면서도 극명한 시적 형상성으로 인간의 생존문제를 집약시킨 「쿼바디스」, 산과 나와 산 아래 강물이라는 3자적 상황인식을 심정적으로 감 잡게 한 「살아간다는 것」, ‘행복한’이란 관형어를 생기 있게 얹어 세상을 반어적으로 노래한 「행복한 나라 임금」, 거짓말 저수지의 신화성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펼쳐낸 「거짓말 저수지」, 산과 물의 상생관계를 소나무 같은 순수서정으로 접근한 「산과 호수」, 바람 모르게 반디불이의 어깨를 모으는 민중들의 결사를 옹골진 표현으로 풀어간 「풀잎 하나」, 생기의 심장을 달아주고 여러 사물과의 반응을 재치 있게 묘사한 「민들레 초등학교」, 오르고 내린 생의 문제를 등산에 비견한 「졸업 없는 학교」, 박애주의적 인간애를 넓고 심오하게 보여준 「폭설」 등 박판석 시인의 시작품을 독서하면서 우리가 다다른 곳은 ‘인생’이거나 ‘고향’이었고 젊고 풋풋한 생명정신의 원초성을 노래하고 있었다.

“생의 이야기로 ‘인생’을 담는 시”
괴테는 말한다. “시는 어린 시절에는 ‘노래’이고 중년에는 ‘철학’이다가 노년에는 ‘인생’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박판석 시인의 작품들을 여기까지 읽어오면서 노래나 철학이기보다는 드러나게 ‘인생’임을 읽었다. 문학이 지향하는 세계적 궁극성은 노래도 철학도 요구되지만 더 깊은 인생을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평소 박판석 시인을 지근에서 지켜본 필자로서는 그의 시편들이 사색을 통한 현장성의 사유라는 점에서 문학성의 가치가 도저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생의 축적된 시간들을 호수처럼 맑은 물길로 담아 주변의 여러 표정들에 굽이쳐 갔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가 부대낀 세상 사람들과의 다층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더욱 진실 된 언어로 읽혀졌고 우리의 가슴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에게는 유난히도 골방의 시간이 많았던지라 허투루 언어에 진입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고 그 자신만의 공간에다 자신의 언어를 숙성시켰던 것이다. 시인에게 우선한 것은 자신의 언어를 자신만의 시간 위에 펼치는 일이라고 하겠는데 박판석 시인에게도 그만의 시간이 족히 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판석 시인은 불의(不義)하고 수틀리면 분노하고 격앙하지만 그렇다고 그 같은 일을 다혈질적으로 펼치는 사람은 아니다. 언젠가 자동차의 CM에 “소리 없이 강하다.”란 표현이 있었는데 박판석 시인의 언어 또한 무언이면서 절차탁마의 내적 강인함을 체질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묘하게 겹쳐지는 부분을 느낄 수 있다.
시는 시적 리얼리티를 미묘함과 경이로움에 배합하여 하늘 높은 곳에 걸어둔 환상의 무지개라고 할만하다. 요즘 시의 추세가 사실주의 쪽으로 기우는 감이 있지만 그 같은 현상은 복잡다기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파편화된 생각이나 의미적인 생을 시라는 유기체로 빚어내는 과정에서 또 다른 길이 개척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우려하기보다는 다양한 표현의 숲을 만끽하는 독자에게 보다 직접적인 감동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마땅하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그 같은 경향이 박판석 시의 서정성에서 갖가지 생의 문제나 이야기들을 더더욱 풍성하게 꽃피우고 결실했다는 점에서 그가 펼쳐낸 언어적 체험의 오지랖만큼이나 폭넓은 간절함이 펄럭이고 있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판석 
194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문학예술》 《시와사람》을 통해 등단했다.
조선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원탁시회, 한국시인협회,
국제PAN한국본부 광주광역시위원회 회장 역임
국제PAN한국본부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새벽산길』 『도토리 열매 속에는 큰 산 하나
들어가 산다』 『소년 오두산』이 있다.

 

목 차

제1부 쿼바디스
 쿼바디스 ______ 12
대추나무 ______ 13
고속버스에서 ______ 14
우주 ______ 15
꽃으로 가는 길 ______ 16
짐 ______ 18
마음 ______ 20
두 마디의 시 -어느 신부님의 글에서 ______ 21
현수막 앞에서 ______ 22
봄날・ ______ 23
노병(老病)에게 ______ 24
김안토니오 화백 ______ 26
거짓말의 저수지 ______ 28
묵뫼가 ______ 29
푸른 바다 ______ 30
생각의 무게 ______ 32
바람 앞에서 ______ 34
선생님께 드리는 보고 ______ 36
살아간다는 것 ______ 38
버스카드 ______ 39
어떤 귀로(歸路) ______ 40
하루살이 ______ 41

제2부 산과 호수
 산과 호수 ______ 44
무등산(無等山) ______ 45
친구의 초대 ______ 46
산·1 ______ 47
산·2 ______ 48
산지기 ______ 50
바람소리 ______ 51
규봉암 ______ 52
덕림산 소나무 -시인, 화가 K에게 ______ 54
꽃잎의 방향 ______ 56
영원한 집 ______ 57
無等山 원근법 ______ 58
하느님 계신 곳 ______ 60
벚꽃나무 ______ 62
위르겐 힌츠 페터 씨를 기다리며
-2017년 2월3일 광주 망월동으로 온다는 보도를 접했다 _____ 64
피라미 떼 ______ 68
계단・ ______ 69
행복한 나라의 임금 ______ 70
머슴 장가가기 ______ 71
무등산의 일과 -증심사 종점에서 ______ 72
나무의 길 ______ 73

제3부 물에도 날개가 있다
 쓸쓸한 가을 ______ 76
물에도 날개가 있다 ______ 77
도서관에서・ ______ 78
숲 ______ 79
졸업 없는 학교 ______ 80
가을날의 시 ______ 82
무거운, 너무 무거운 ______ 84
수선화 ______ 85
풀잎 하나 ______ 86
자화상 ______ 87
홀로 피고 싶지 않은 꽃 ______ 88
누나의 팔 ______ 89
신록 ______ 90
인형엄마 ______ 91
이별은 바람이다 ______ 92
이슬의 그늘 ______ 94
뉴스 ______ 95

제4부 고향에 대한 소견서
 소년 오두산 ______ 98
폭설 ______ 101
고향에 대한 소견서 ______ 102
제4수원지 ______ 104
아지랑이 ______ 105
민들레 초등학교 ______ 106
푸른 발자국 ______ 108
다시 서울로 ______ 110
영호 아재네 소 ______ 112
사돈 ______ 114
수업시간표 ______ 116
귀향 -매형 가시는 날 ______ 118
증심사 벚나무 ______ 120
집으로만 가는 달 ______ 122
염일방일(拈一放一) ______ 123
할아버지・ ______ 124
할아버지・ ______ 125
할아버지 약전(略傳) ______ 126
안경 -제자 김삼억 군에게 ______ 128
돌아오지 못할 강 ______ 130
 132 |해설|
생의 간곡함 또는 촘촘한 언어의 집 -“초가집 한 채”가 궁궐처럼 덩실하다/김종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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