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새순처럼 간지럽게 젖어오는 생기
18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는 이미경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노모의 병을 옆에서 함께하는 시적 화자의 눈이 단연 도드라진다. 1부에 배치된 시편들이 그러한데 여기에는 감상이나 허무가 없다. 도리어 늙음과 병에 대한 따뜻한 긍정이 넘쳐흐른다. 여기서 ‘긍정’이 뜻하는 것은 병든 노모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건강한 시선이다. 그러니까 그마저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노모가 살아온 지난 시간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에 실린 작품 중 탁월한 가편이기도 한 「봄비」에서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병든 어머니의 “네 아버지 무덤에/ 잔디 싹이 돋겠구나” 같은 생동감이 넘친다.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직관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그것이 시인의 “새순처럼 간지럽게/ 젖어오는”과 연결되면서 작품 자체를 삶에 대한 긍정으로 뒤바꿔놓는다.
그런데 이런 시인의 긍정적인 시선에는 어떤 억지도 없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병든 노모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단지 노모의 병 수발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기 위함이 아닌 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통해 더듬어가는 그 이전 과거도 시인에게는 또다른 세계로 펼쳐진다.
꿈속에 소환된 외할머니는 오늘도
당진 분박기 늙은 감나무 밑 평상에
살쾡이 쫓던 긴 작대기 기대어놓고
빡빡 담배를 태우시며 이십 년도 넘게 앓고 있는
딸년을 기다리고 계신가 보다
_「과장」 부분
물론 인용된 시의 마지막은 어머니가 “잠자듯” 편안히 가셨으면 바람으로 끝나지만 그것도 단지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저 벚꽃잎처럼 훌쩍」에 드러나듯 “저 꽃잎처럼/ 훌쩍, 목숨 버리지 못할까 봐/ 그게 두려운” 것일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부정적인 그림자 없이 자연스러움이 함께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시적 화자는 노모의 죽음까지 기꺼이 함께하는 존재인데, 비록 육친이라는 대상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미경 시인의 시를 쓰는 과정에 대한 어떤 은유를 얻을 수 있다.
호박벌 따라 놀다 들어올 수도 있지
또 이 시집에는 교사 생활의 경험이 몇 편의 작품들에 녹아 있다. 하지만 학생을 훈육하거나 지도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는다. 학생과 교사인 시적 화자 사이에 흐르는 것은 그것 이전의 서정, 즉 시인으로서의 서정이기 때문이다. 이 서정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위계를 대신한다.
학교 앞 골목에서 담배 피우고 있다는 주민 신고보다
3학년 전용 구역 에코 피시방에 있었다는 말보다
욱하고 내질러 생활지도부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는 말보다
천 번 만 번 듣기 좋네
학교 안 장미정원에서 봄날 꿀잠을 잤다는
_「봄맞이」 부분
이 작품은 “6교시 시작하고 삼십 분쯤 지나” 교실에 들어온 “국기”가 수업을 제치고 “장미정원에서 자다가” 온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교사인 시적 화자는 제자가 “장미정원에서 봄날 꿀잠을 잤다는” 사실을 수업을 제친 것보다 앞에 둔다. 이럴 때에 찾아오는 것은 ‘봄’이라는 시간 속에 함께하는 교사와 학생의 동일한 삶이다. 이런 서정은 「자리 바꾼 날」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은 시적 화자 자신이 부재하는 어느 수업 시간을 상상하며 쓴 시인데, 수업보다는 바깥, 즉 “운동장”, “구름”, “찔레꽃 향기”, “키 큰 후박나무” 등에 홀리기도 하고 봄볕에 졸기도 하는 제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방임(?)하는 것이 아니다. “판서하다 돌아서는 선생님과 눈만 마주치지 않는다면”이라는 유머러스한 전제를 달고 “호박벌 들어왔다 나갈 때 검은 궁둥이에 붙어/ 잠시 나가 놀다 들어올 수도 있다”고 한다.
시인의 이런 순정한 마음은 아직도 우리에게 큰 상처를 남겨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에도 나타난다.
날 물어뜯어봐
차라리 버렸다고
버린 거 아니냐고
어깨 걸고 나와봐
그럴 수 있냐고, 나와서
날 물어뜯어 봐
_「2014」 부분
여느 세월호 시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깊은 절제와 침묵을 통해 그 때 죽임당한 아이들에게 시적 화자자신을 내놓는다. 그때 잃어버린 아이들은 사실 잃은 게 아니라 버린 거였다는 예리한 인식을 아이들의 관점에서 제시한다. 이 작품이 더 아픈 것은, 아이들에게 “어깨 걸고 나와”서 “차라리 버렸다고/ 버린 거 아니냐고” “날 물어뜯어” 보라는 마지막 대목이다. 그간 숱한 애도시와 정치적 분노가 앞서는 작품들은 있었지만, 시적 화자가 자신을 번제하듯 내놓은 작품은 없었다. 그것도 자신을 ‘물어뜯으라’니…. 이미경 시인의 「2014」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작품들 중 기억될 만한 시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노모의 병에 함께하는 자세에서 드러나듯, 슬픔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길 줄 아는 자세가 포함되어 있는데, 각 존재자는 근원적으로 동등하며 시쓰기는 그게 어느 길이든 다른 존재들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바탕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작가 소개
1991년 무크지 『한반도의 젊은 시인들』에 「일어서는 땅」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상처 난 꿈을 꽃들은 안다』(1995)가 있다.
목 차
시인의 말•4
제1부 저 벚꽃잎처럼 훌쩍
어머니•12
봄비•13
먹물점•14
능소화•16
말년 운세•18
백 투 더 퓨처•20
꽃게탕•22
초승달•24
버즘꽃•26
못된 희망•28
실타래•30
금낭화•32
나의 무덤•33
가요무대•36
저 벚꽃잎처럼 훌쩍•38
서설•40
제2부 술래 없다
봄맞이•42
법당•44
초여름•46
화계사 가을•48
춘설•50
저승꽃•52
사월•54
산 빗소리•55
자리 바꾼 날•56
여름•58
술래 없다•60
꽃무릇 지다•62
다시 동백숲•64
아으, 동동다리•65
산수유꽃 아이들•66
제3부 모두 꿈이어라
국화차•70
冬至•71
사진•72
茶에 취하다•74
앗살라 알라이쿰•76
연대•78
모두 꿈이어라•80
52Hz•82
왕오천축국전•84
빙하기•86
1967 연•88
매미•90
어떤 내력•91
길•94
수상한 시절•96
제4부 바람의 언덕, 바람의 말
로드킬•98
다비장•99
불면•100
2014•102
풍경•104
용래 씨의 눈•106
중도객잔•108
조 따거•110
봄, 오마주•112
고요•114
안녕•116
룽다•118
시불시불•120
오늘•122
잡담•124
발문_반反이슬적 세계의 힘 |심원섭•125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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