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980년 서울대 국문과 재학 중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의 꿈」이 당선되며 등단한 장석은, 그러나 많은 화제와 비평적 상찬을 불러일으킨 데뷔작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어디에도 그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침묵이고 사라짐이었다. 「풍경의 꿈」을 두고 “한국 현대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아름답고 격조 있는 언어의 조직을 보여”준다고 고평한 시인이자 비평가 남진우는 장석 시의 침묵을 특별히 안타까워하기도 했다(「풍경의 꿈」은 이번에 같이 출간하는 두번째 시집 『우리 별의 봄』에 수록되어 있다).
“단 한 편의 시밖에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래 기억해야만 할 시인이 있다. 데뷔작 「풍경의 꿈」 외에는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을 보여주지 않은 장석 시인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이는 그의 시가 보여주는 빛나는 언어 구사와 환상적인 이미지의 조형, 상상력의 미묘한 변주와 함께 시인의 천진한 감수성이 일으킨 불꽃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 불꽃은 1980년대 내내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지만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우리에겐 그를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신성한 숲」(남진우 평론집 『신성한 숲』, 민음사, 1995)
장석의 시에서 “예민한 감수성과 말을 다루는 비범한 솜씨의 차원을 넘어 형이상학적 인식의 차원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읽기도 한 남진우는 장석 시인의 침묵에 대해 「풍경의 꿈」에서 엿보이는 시적 화자의 “순결한 영혼의 설렘, 흔들림, 망설임”을 언급한 뒤, “시인의 이러한 측면은 그가 왜 1980년대 시단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개진·구축해 나감으로써 현실과 역동적으로 맞부딪치며 싸우기보다는 긴 침묵의 잠행을 택했는지 그 이유를 암시해준다”고 쓴다. “1979년 말 긴급조치의 어둠이 걷히고 1980년 5월의 야만의 시간이 다가오기 직전 발표된 이 작품은 너무도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상황 논리에 따라 자진해서 닫히고 만 운명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착잡함을 금치 못하게 한다.”(같은 글)
그렇기는 하나 장석 시인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정호웅은 그 침묵의 시간 역시 ‘시의 삶’이었다고 알려주며 40년 만에 모두 150편의 시(첫 시집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76편, 두번째 시집 『우리 별의 봄』 74편)를 들고 돌아온 시인의 귀환을 반긴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시인은 부친 희운(希雲)공을 이어 한려수도 바다를 쟁기질하여, 자연의 숨을 담고 있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싱싱한 새 숨을 불어넣는 ‘숨굴’을 생산하는 바다 농군으로 살았다. “가르친다는 일은/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심는 일이며/지켜보며 기다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좇아 대안학교 이우중고등학교를 세우고 가꾸는 데 앞장섰다. 그것은 “한겨울 밤/나이도 내력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한 개의 불빛”을 “붉은 감 한 개처럼 켜”(「미처 다 부르지 못한 노래처럼 - 정광필 선생을 보내며」)는 일이었다. 동서 문명 교류 연구의 길라잡이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인터넷 정론지 『프레시안』이 제자리를 잡도록 뒤에서 묵묵히 거들었다.
이 모두는 새로운 시작이고, 기르는 일이며, 진실·선·아름다움을 밝히고 가꾸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생기를 일으키는 일이니 시의 일과 다르지 않다. 그는 시의 삶을 살았다. 그 시의 삶에서 건진, 솟아오른 시들을 안고 시인 장석이 돌아왔다. 이 첫 시집에 실린 76편, 이번에 함께 나오는 제2시집 『우리 별의 봄』에 담긴 74편, 합하여 모두 150편이다. 자연, 신, 인간 앞에 겸허한, 성실·이타·헌신의 정신이 연 “스스로 켠 불로” “아름”답고 “환”(「가을빛」)한 세계이다.” - 발문 「스스로 켠 불로 아름답고 환한」
이번 두 시집의 원고를 출간 전에 읽어본 남진우는 “세계를 향해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그의 사랑의 전언에는 여전히 순결한 자아에 대한 갈망과 현상적 질서 너머의 본질을 투시하고자 하는 은밀한 열망이 가득 차 있다”며 긴 침묵 뒤에 돌아온 시인에게 감개 어린 말을 전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의 회랑을 돌아 아마도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려왔던 시인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1980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에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져버린 시인. 데뷔작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 남긴 채 망각의 심연 저편으로 완벽하게 숨어버린 시인. 새로운 밀레니엄의 개막이란 구호도 적잖이 퇴색해버린 지금, 그 시인이 다시 돌아와 그동안 남몰래 쓰고 다듬어왔던 언어를 건넨다. 세계를 향해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그의 사랑의 전언에는 여전히 순결한 자아에 대한 갈망과 현상적 질서 너머의 본질을 투시하고자 하는 은밀한 열망이 가득 차 있다. 그동안 그는 이 언어를 버려두고 아니 쌓아두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한 시절 한 세상을 탕진해왔던 것일까.”
장석 시인 자신은 “일이 많이도 늦었다”고 겸연쩍어하면서도 새로운 열망으로 설레는 40년 만의 ‘시인의 말’을 보내왔다.
“태어난 시들을 미숙아 보육기에 넣은 채, 공연히 가장자리를 다듬고 색을 덧칠하곤 했다. 제목이 다른 얼굴이 되고, 마지막 연이 지워져 없어진 시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혼란시키고 연대기를 뒤죽박죽 섞어, 시들의 출생 연도를 뚜렷이 밝혀주지 못한 후회가 크다. 쓰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쓰지 않겠다는 위악도 있었으리라. 삶 앞에서 용기가 부족했고, 시적 긴장의 시간들을 나약하게 피했던 적도 있었다. 오로지 작별을 위해 이 말을 적는다. 떠나보내며, 여전히 절망과 같은 부끄러움과 다시 일어나는 열망 가운데 어떤 희망을 본다.” - ‘시인의 말’
장석 시인의 귀환, 새로운 출발은 긴 시간의 간격 때문에도 두 권의 시집을 동시 출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첫 시집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에는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 씌어진 시들이, 두번째 시집 『우리 별의 봄』에는 근자에 씌어진 시들이 묶였다. 등단작 「풍경의 꿈」을 근작 시들의 곁에 둔 것은 시인의 숨은 의욕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발문을 쓴 정호웅은 오래고 오래 여툰 장석의 이번 시집에서 ‘내가 노래해도 됩니까’라는 ‘무겁고 절박한’ 물음을 본다. 아마도 그건 긴 침묵의 시간 동안 시인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자주, 가장 아프고 절실하게 떠올랐던 화두이기도 했으리라.
“시인은 ‘내가 노래해도 됩니까’(「스물몇 개의 허락을 얻기 위해」),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거듭 물으며 노래하기, 이 무겁고 절박한 물음을 품고 있는 노래하기가 장석의 시 쓰기이다.
시인의 노래하기는 ‘모든 것 얼어붙은/이 사랑의 빙하 시대’를 녹여, 얼음에 갇혀 있고 ‘해구 밑바닥’에 ‘숨어 있’(「사랑의 화염」)는 사랑을 풀어 일으키는 일이다. 또 ‘하나는 피어오르고/하나는 잦아들면서/삶의 모닥불을 이루는’ ‘기쁨과 슬픔’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그리하여 ‘이 세상을 흐르게 하’(「노래」)는 일이다. 그리고 ‘가난한 평생을 빛내고 싶’은 일이고, ‘세상의 끝자락이/황홀하게/은빛 지느러미를 흔들며/바닷속으로/헤엄쳐 가게 하고 싶’(「바다의 은박지」)은 일이다.
참으로 고귀한 일인데 아름다운 수사, 한갓 언어 놀이를 넘어설 때 열리는 지평이다. 시집의 맨 앞에 표지석처럼 서 있는 다음 시가 이를 새삼 웅변한다.
온몸으로 앉아 있는 바위
전신만신의 둥근 달
혼신을 다해 붉은 꽃
멍청한 돌부처
그리고 사랑은
세상에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서시」 전문
폐사지의 풍경 같다. 이 풍경 속 바위, 달, 꽃은 ‘이제 막 태어난’ ‘사랑’처럼 저마다 ‘온몸으로’ ‘전신만신의’ ‘혼신을 다해’, 전력투구 앞을 향해 나아간다. 온몸 온 마음을 다하는 ‘진심’의 태도가 이 사물들 사이 빈 공간을 달구고 활기로 채워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이제, 따로 떨어져 제각각인 이 사물들은 손잡고 함께 노래 부르며 나아간다. 겉으로 비어 있지만 안으로 가득 차 있는, 적막한 듯하지만 생동하는 풍경! 노래하는 시인의 내면은 이와 같으리라.”?발문 「스스로 켠 불로 아름답고 환한」
작가 소개
1957년 부산생. 평북 영변 출신으로 함흥과 부산에서 성장하고 수학한 아버지와 전남 순천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오래 묵힌 세월로 인해 첫 시집 『사랑은 이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니』를 두번째인 우리 별의 봄』시집과 함께 펴내게 되었다.
목 차
1부
서시_ 12
가을빛_ 13
그 섬_ 14
목말_ 16
서랍 1_ 18
서랍 2_ 19
서랍 3_ 20
서랍 4_ 22
순천 외가 1_ 23
순천 외가 2_ 24
순천 외가 3_ 26
순천 외가 4_ 29
순천 외가 5 _ 30
할머니의 암술_ 32
전후의 웅덩이에서 나도 돋았다_ 34
편지_ 37
언덕에서_ 38
해당화와 돌고래_ 39
청보리밭_ 40
발상표_ 41
2부
순천만 1_ 44
숯_ 45
여름이 온다_ 46
바다의 은박지_ 49
사랑, 바다에서_ 50
청혼_ 52
사이_ 53
슬픈 이들은 늘 별을 바라보며_ 56
차_ 59
사랑의 처음_ 60
사랑의 화염_ 62
사랑에 대하여_ 64
불볕에 서 있는 나무에게_ 66
노래_ 68
깨진 기와_ 71
나쁜 꿈_ 73
3부
어젯밤, 내가 하려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묻는 당신에게_ 78
스물몇 개의 허락을 얻기 위해_ 80
지하철 정류장에서_ 84
밤나무 숲으로부터_ 87
몽돌 위의 그림자_ 91
화엄제_ 94
그대가 산으로 오르는 첫 기차를 타려면_ 97
천지로부터_ 100
그믐달_ 102
진화론 1_ 103
진화론 2_ 104
달밤_ 105
두드리는가 미는가_ 106
달과 혼인하다_ 107
불타는 집_ 109
코스모스와 불꽃_ 113
상속 유언_ 116
불타는 사람_ 118
가을을 움직이는 그대_ 120
가을 노래_ 123
노을_ 124
꽃 사시오_ 126
앎의 즐거움 1_ 128
앎의 즐거움 2_ 129
새 집_ 131
우리 마을의 이웃집 아이_ 133
이제 막 책을 펴낸 그대에게_ 136
4부
여행_ 140
스페인의 시골 마을_ 143
기차역 매표소_ 144
점집_ 147
밧줄 묶는 사람_ 149
미처 다 부르지 못한 노래처럼_ 152
이수광 선생을 보내며_ 157
윤영석 선생을 보내며_ 160
나의 근린생활시설_ 166
세현이를 보내며_ 172
죽음에도 질투가 있다면_ 174
이천십년 시월에서 다음해 칠월로_ 177
아버지들에게_ 180
발문 - 정호웅
스스로 켠 불로 아름답고 환한_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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