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빼어난 문장과 잔잔한 지혜로 깊은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
“그는 가공되지 않은 쓰라린 기억을 재료로 너무나 따뜻하고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전기 장르의 위대한 작품이다.” -뉴욕 타임스
퓰리처상 수상작
퓰리처상에 빛나는 매력적인 좌충우돌 성장기
빼어난 문장과 잔잔한 지혜로 깊은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
어려운 형편 때문에 여덟 살에 신문팔이를 시작해야 했던 소년이 후일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가 되었다면 과연 그의 자서전은 어떻게 씌어질까?
「뉴욕 타임스」의 ‘옵서버’ 칼럼을 36년간 연재한 러셀 베이커는 지난 세기 후반 미국 언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여덟 살 때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고 익살을 떨면서도 정작 화려한 자신의 이력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책에서는 「볼티모어 선」의 풋내기 기자로 좌충우돌하며 결혼식을 올리는 스물다섯 살까지의 이야기가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둘 때까지 이어지고, 30년을 뛰어넘은 마지막 장의 짧은 장면에서도 저자가 주인공이 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저자 자신이 돋보이는 데 이렇게 무관심한 자서전도 드물 것 같다.
많은 자서전에서 고통과 위기와 역경은, 최후의 승리와 성공과 극적 반전을 빛내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되곤 한다. 고통스러웠던 유년기와 실패로 점철된 청장년기는 그래서 때로 비장하기까지 하다. 1983년 퓰리처상 평전/자서전 부문을 수상한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Growinng Up』은 이러한 자서전의 공식(?)을 뒤집는다.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이며, 낄낄거리다 어느새 울컥하기를 반복하게 된다”는 「시카고 선 타임스」의 서평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감정의 선을 제대로 묘사한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대공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절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는 꼬마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비쳤을까? 비가 내리는 날 신문을 다 팔지 못한 소년에게 성냥팔이 소녀의 비극을 예상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는 다섯 살짜리 당찬 여동생 도리스가 있기 때문이다. 우유 값을 아끼기 위해 뒷마당에 젖소를 묶어놓고 음식물 쓰레기로 사료를 대신할 생각을 하는 엉뚱한 외숙모는 고아로 자랐지만 강자에게 굽힘이 없고 약자들에겐 더할 수 없이 너그럽다. 이밖에도 숱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러셀 베이커는 주연배우이기를 포기하고 객석에 내려가 그들의 모습과 시간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책은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슬픔과 기쁨, 열병과 치유 그리고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좌충우돌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대학 입학 전후와 해군 비행단 시절, 그리고 아내와의 연애 이야기가 펼쳐지는 책의 후반부는 거의 매 페이지마다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만, 어머니의 병문안을 기록하는 마지막 페이지는 결국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러셀 베이커는 1979년 6월 4일자 「타임Time」의 표지인물로 등장했다. 타자기 앞에서 담배를 들고 있는 그의 사진 아래에는 “The Good Humor Man”이라는 문구가 있다. 로버트 셰릴Robert Sherrill은 「워싱턴 포스트」의 서평에서 그를 “20세기 후반 최고의 풍자가”라 불렀다. 이처럼 러셀 베이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개 그의 유머와 위트에 집중된다. 그의 ‘옵서버’ 칼럼이 그러했다. 또한 그에게 두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에서도 그의 유머는 불우한 환경과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회상에서 단연 빛이 난다. 메리 리 세틀Mary Lee Settle은 그래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서평에서 이 책을 마크 트웨인의 책에 버금갈 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 했다.
윌리엄 맨체스터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냄으로써 당신의 비밀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러셀 베이커가 아주 오래도록 고맙게 느껴질 것이다”라는 말로 이 책에 대한 평을 대신했다. 『종이 시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앤 타일러의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매우 짧다. “보물!”
저널리스트 러셀 베이커
알리스테어 쿡Alistair Cooke은 BBC 라디오의 ‘미국에서 온 편지’를 1946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했을 만큼 장수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유명하다. 미국의 PBS가 러셀 베이커에게 그의 뒤를 이어 ‘명작극장 Masterpiece Theater’의 진행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나는 알리스테어의 뒤를 이어 진행을 맡은 사람이 은퇴하면 그때 진행을 맡고 싶다”고 했다. 물론 러셀 베이커다운 농담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그는 알리스테어의 뒤를 이어 1992년부터 ‘명작극장’의 진행자로 2004년 진행을 그만둘 때까지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79세로 은퇴할 때까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러셀 베이커는 1962년부터 1998년까지 「뉴욕 타임스」의 ‘옵서버’ 칼럼을 쓴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옵서버’ 칼럼은 그에게 퓰리처상 평론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는데, 풍자와 위트가 넘치는 그의 글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저널리즘의 교과서가 되었다. 물론 백악관과 의회 그리고 각 분야에서 불명예스럽게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인물들은 그의 풍자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비판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언론 환경과 국내외 문제에 대한 기고와 서평 등을 통해 경륜과 녹슬지 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2007년 많은 미국인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월스트리트 저널」을 인수했을 때, 그는 종이신문의 위기는 자본의 탐욕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대중의 신뢰와 사명감을 잃은 언론인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올해 85세인 러셀 베이커는 현재 고향 버지니아의 리스버그에서 살고 있다.
[책속으로 추가]
신문 꾸러미를 둘러메고 나는 벨빌가街로 나섰다. 거기가 사람들이 좀 모이는 곳이었다. 그 주위에는 주유소 두 군데와 유니언가와 연결된 교차로, 물론 A&P 식료품점도 있었고 과일가게, 빵집, 이발소, 주카렐리 약국, 그리고 열차처럼 생긴 간이식당도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나는 사람들 눈에 잘 띄기 위해 거리의 이쪽 저쪽, 이 상점 저 상점 앞으로 자리를 옮겨가며「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라고 큼지막하게 씌어져 있는 가방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어느새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그건 저녁 먹을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30쪽
별 볼일 없는 남자의 표본을 완벽한 작품으로 개조해 보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당신이 어머니 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다. 아홉 중의 맏딸로 자란 어머니는 그것을 당신의 남동생들에게 처음 시도해 보았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버지한테 시도해 보았는데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남자들에 대해 어머니는 20세기 페미니즘과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가 뒤섞여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페미니즘은 어머니로 하여금 단지 바지를 입고 못 입고에 따르는 불평등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38쪽
“네 아빠 죽었어.” 케네스 형이 말했다.
그 말이 내게는 아버지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흉을 보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변호하고 나섰다.
“우리 아빠 안 죽었어.”
케네스 형과 루스가 상황을 잘 몰라서 저러는가 보다. 그래서 나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아빠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다 나아서 엄마가 오늘 집에 데려오신다고 했고…….
“죽었다니까.” 케네스 형이 말했다.
자신 있게 얘기하는 형의 태도에 나는 가슴이 예리한 것에 찔리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안 죽었어!” 나는 소리쳤다.
“죽었어.” 루스가 말했다. “너보고 빨리 집에 오래.”
“아니야!”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말싸움이었다. 사촌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도 있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죽었어…… 안 죽었어…… 안 죽었어…….”
나는 아버지께서 숨을 거두셨다는 사실을 집에 다다르기 전에 이미 받아들였다. -98쪽
가슴 위로 포개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도 저처럼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오래 숨을 참았다가 가쁘게 내쉬느라 가슴팍이 들썩거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침묵이 무서워졌다. 나는 그 방에서 나와 다시는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102쪽
어머니는 나를 가리켜 ‘집안의 기둥’이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한 번도 매를 드신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여덟 살이 된 나를 번쩍 안아서 엉덩이를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내 나이에는 잘못된 행동을 하면 무조건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으셨다. 언덕에서 신나게 썰매를 타며 놀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늦는 일이 내 생각에는 아주 사소한 잘못이었지만 어머니는 내 허리띠를 치켜드셨다. 남자는 사회생활을 할 때 엄격한 시간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몸집이 작긴 하셨지만 그래도 내 종아리에 매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모욕적인 매질을 너무나 혐오했기 때문에 억지로 짜내는 눈물 몇 방울로 어머니를 만족시키고 말자는 유혹을 단연코 거부했다. -155쪽
잡담과 커피가 어른들의 낙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공황을 거치는 동안에는 참으로 훌륭한 소일거리였다. 영화와는 달리, 한가로이 얘기를 나누는 것은 돈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의 강물은 집안 전체를 흘러 저녁식사 시간을 가득 채운 다음 내가 잠자리에 들 즈음이면 최고 수위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면 졸졸 흐르는 속삭임들이 자정을 넘어 이어졌고 모두들 침대로 들어간 뒤엔 찰리 외삼촌이 혼자 남아 커피 주전자를 다시 데우고 담배 잎을 종이에 말아서 한 권의 책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었다. -185쪽
간혹 공황이 화제로 오르면 대화의 분위기엔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전체적인 어조는 여전히 유머와 절제를 잃지 않았다. 분노가 비통함이나 자기 연민으로 바뀌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기껏해야 기업과 정부, 그리고 약장수처럼 자신들의 주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가벼운 조소가 있을 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친놈들’인데다 ‘위험한 놈들’이었다. 쿨린 신부와 휴이 롱은 ‘선동꾼’이었다. 나치의 깃발을 앞세운 독일계 미국인 분트는 ‘쪼다 독일놈’이었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깡패’였다. 뉴딜 정책도 조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벨빌에서는 정부 산하 공공사업 추진위원회가 벌여 놓은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삽자루에 기대고 서서 시간만 때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공공사업 추진위원회’의 약자 ‘공추위’는 앨런 외삼촌의 말을 빌리면 ‘공공예산낭비 추진위원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88쪽
나는 어머니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연주 실력은 썩 훌륭하지는 못했다. 연주는 이따금 끊겼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건반을 다시 짚어 연주를 이어갔다. 어머니는 음악에 깊이 몰입해 있었고, 거실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시선은 내 뒤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마냥 들떠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우리 모두로부터 따로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외로운 어머니를 발견했다. -218쪽
애초에 내가 고모부에게서 느꼈던 경외심은, 고모부가 하는 얘기들이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임을 깨달아 가면서 조금씩 사그라졌다. 하지만 해럴드 고모부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울러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사로잡은 이야기들을 구성지게 지어내던 고모부는 그야말로 이야기꾼이었다. 여전히 고모부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꾸며냈고, 나는 감히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나는 고모부 역시 내가 더 이상 그 얘기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모부도 내가 당신의 상상력에서 샘솟는 이야기들 속에서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시치미를 뚝 떼는 우리 둘의 관계에서 고모부 역시 즐거움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28쪽
내가 열두 번째 생일을 맞은 날, 어머니는 내게「볼티모어 뉴스 포스트」와「선데이 아메리칸」을 배달하는 일을 새로 시작하게 하셨다. 「볼티모어 뉴스 포스트」는 석간이었지만 「선데이 아메리칸」은 토요일 자정이 넘어 나왔기 때문에 일요일 새벽에 배달을 해야 했다. 나는 일요일이면 새벽 2시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 일어나 어머니와 도리스를 깨우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살금살금 집을 나섰다. 새벽길은 언제나 등골이 오싹했다. 깜깜한 빈 거리에 어쩌다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적막을 찢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그러던 어느 새벽 나는 평소보다도 훨씬 음산한 분위기 속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전날 아래층에 시신이 하나 들어와 있었고, 장례 때마다 맡게 되는 온갖 냄새와 삶은 새우 냄새가 집안 전체에 낮게 깔려 있었다. -241쪽
어머니가 뻔한 수입을 쪼개 알뜰하게 모으는 솜씨는 흡사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해 겨울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어머니께서 일을 나가시고 도리스는 부엌에 있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침실 열쇠를 찾아내서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어가 보았다. 어머니의 침실은 1층에서 올라오는 계단과 바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밖에 나가실 때는 항상 침실 문을 잠그고 열쇠는 따로 숨겨놓는 곳에 두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한쪽 벽에 커다란 검정색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자전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볼티모어가에 있는 어느 상점 앞에 진열되어 있던 중고 자전거였다. 나는 그 거리를 지날 때마다 그 자전거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15달러나 하는 가격 때문에 내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어떻게든 계약금만 지불할 돈을 긁어모아서 성탄절 아침에 나를 놀라게 해줄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256쪽
과거의 나는 대학에서 셰익스피어와 라틴어를 접해 본 어머니의 지식을 늘 우러러보았다. 시티 칼리지에서의 첫해에 학생들은 카이사르를 배웠는데, 내가 해석에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어머니는 옆에서 늦도록 불을 밝히고 라틴어의 격변화와 동사변화를 상대로 씨름을 벌이는 나를 도와주셨다. 어머니는 카이사르의 글을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로 가면서 나는 내 라틴어 실력이 이미 어머니를 능가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나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을 뒤로 하고 파도의 도움을 받아 뭍을 향해 헤엄쳐가는 수영 선수와도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어머니는 계속해서 내 옆에 늦은 시각까지 머물며 당신이 내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으셨다. -269쪽
나에 대한 허브 아저씨의 인내는 초인적이었다. 아저씨의 그러한 인내심은 어쩌면 옥수수 농장과 친척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면서도 남몰래 기관사의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저씨는 소년기의 깊은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저씨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아저씨는 내가 당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괴롭히던 시절에 대해 얘기를 꺼내시는 법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얘기를 꺼내거나 그 시절의 일들에 대해 용서를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그런 얘기를 나누는 데에는 익숙지 않았다. 내가 그 시절의 얘기를 꺼낼 낌새만 보여도 아저씨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씀하셨다. “에이 그만하고.” 그러면서 아저씨는 화제를 바꾸셨다. “윌리 메이스 말인데 정말 대단한 선수야.” -282쪽
1942년 여름, 내가 존스 홉킨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미국은 참전 7개월째를 맞고 있었다. 내 유년 시절 전쟁은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에티오피아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비록 어렸지만 나는 전쟁으로 불타고 있는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했다. 하지만 그 세계는 멀게 느껴졌다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었고, 또 그런 일은 내 세계에선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두 대양의 보호를 받는 미국은 난공불락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나는 여름밤 지평선 저 멀리 마른번개가 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저쪽 어딘가에 폭풍이 몰아치겠군” 하고 중얼거리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폭풍이었다. -308쪽
어머니는 내게 인종적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물론 흑인들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에는 오래 전 버지니아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시절의 도도함이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인종 차별주의자들을 ‘불쌍한 백인 쓰레기들’이라고 가르치셨다. 흑인들은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품성과 장단점에 의해서만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볼티모어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주의가 아무 거리낌 없이 일상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1년이 갓 지났을 때 나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해럴드 고모부에게, “나는 검둥이들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만 알고 있어도 아무런 불만이 없을 거예요”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인종 차별주의는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았다. -319쪽
어머니는 치밀한 전략에 기초한 우회적인 전술이 다가오는 싸움을 대비한 최상의 무기임을 간파하셨다. “그 아가씨의 인상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을 거다”라는 말이 먼저 아주 날카로운 메스를 찔러 넣은 것이었다면 “화장이 그토록 요란하지만 않았어도”는 그 메스를 힘껏 비튼 것이었다. 그때는 1946년이었고, 나는 아직 ‘좋은 여자’에 대한 어머니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던 나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좋은 여자 혹은 나쁜 여자로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초월해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나에게 미미는 특별한 여자일 뿐이었다. -366쪽
4학년이 되면서 나는 매주 발행되는 학교 신문의 편집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경력이 나로 하여금 볼티모어의 유력 일간지에서 일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보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것에 그다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꿈은 제2의 헤밍웨이가 되는 것이지 신문사의 월급쟁이가 아니었다. -399쪽
어머니와 세상을 잇고 있던 마지막 연결고리가 끊어진 그 가을 이후 벌써 4년이 흘러 있었다. 어머니의 정신은 이제 현기증 나는 시간 여행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잠만 주무셨다. 백발이 된 머리는 침대 시트처럼 하얗기만 했다 어머니의 체중은 고작 34킬로그램이었다. 어머니는 침대 매트리스에 옴폭 들어간 자리 하나 남기지 못할 만큼 야위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만히 맥박을 짚어 보았다. 맥박은 정상이었다. 어머니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몇 분 동안 어머니의 손을 쥔 채 그대로 있었다. 사람의 온기에 어머니께서 눈을 뜨셨다. -432쪽
▣ 작가 소개
저자 러셀 베이커Russell Baker
러셀 베이커는 1925년 버지니아의 모리슨빌에서 태어났다. 1947년 존스 홉킨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볼티모어 선」을 통해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4년부터 「뉴욕 타임스」에서 백악관과 의회, 국내 정치를 담당했다. 1962년부터 1998년까지 「뉴욕 타임스」의 ‘옵서버’ 칼럼을 썼으며, 1979년 ‘옵서버’ 칼럼으로 조지 포크상과 퓰리처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워싱턴: 포토맥 강의 도시』, 『워싱턴의 어느 미국인』, 『패닉에는 이유가 없다』, 『거꾸로 매달린 사나이』, 『우리의 차기 대통령』 등이 있으며 이 중 『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Growing Up』으로 1982년에 퓰리처상 평전/자서전 부문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이 책의 후속편인 『좋은 시절The Good Times』을 펴냈다. 1992년부터 2004년 은퇴할 때까지 PBS의 ‘명작 극장Materpiece Theater’의 진행을 맡았다. 현재 고향 버지니아의 리스버그에서 살고 있다.
역자 송제훈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원묵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오프라 윈프리의 특별한 지혜』 등을 번역하는 한편 EBS와 교학사에서 영어 교재와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제1장 어머니의 타임머신
제2장 5센트짜리 비즈니스
제3장 나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
제4장 모리슨빌 사람들
제5장 마지막 나들이
제6장 공황의 풍경
제7장 집안의 기둥
제8장 외삼촌의 비밀
제9장 기회의 땅으로
제10장 거짓말쟁이
제11장 크리스마스 선물
제12장 허브 아저씨
제13장 진로의 갈림길
제14장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
제15장 비행 훈련학교
제16장 연인
제17장 새 출발
제18장 어머니
빼어난 문장과 잔잔한 지혜로 깊은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
“그는 가공되지 않은 쓰라린 기억을 재료로 너무나 따뜻하고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전기 장르의 위대한 작품이다.” -뉴욕 타임스
퓰리처상 수상작
퓰리처상에 빛나는 매력적인 좌충우돌 성장기
빼어난 문장과 잔잔한 지혜로 깊은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
어려운 형편 때문에 여덟 살에 신문팔이를 시작해야 했던 소년이 후일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가 되었다면 과연 그의 자서전은 어떻게 씌어질까?
「뉴욕 타임스」의 ‘옵서버’ 칼럼을 36년간 연재한 러셀 베이커는 지난 세기 후반 미국 언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여덟 살 때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고 익살을 떨면서도 정작 화려한 자신의 이력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책에서는 「볼티모어 선」의 풋내기 기자로 좌충우돌하며 결혼식을 올리는 스물다섯 살까지의 이야기가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둘 때까지 이어지고, 30년을 뛰어넘은 마지막 장의 짧은 장면에서도 저자가 주인공이 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저자 자신이 돋보이는 데 이렇게 무관심한 자서전도 드물 것 같다.
많은 자서전에서 고통과 위기와 역경은, 최후의 승리와 성공과 극적 반전을 빛내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되곤 한다. 고통스러웠던 유년기와 실패로 점철된 청장년기는 그래서 때로 비장하기까지 하다. 1983년 퓰리처상 평전/자서전 부문을 수상한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Growinng Up』은 이러한 자서전의 공식(?)을 뒤집는다.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이며, 낄낄거리다 어느새 울컥하기를 반복하게 된다”는 「시카고 선 타임스」의 서평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감정의 선을 제대로 묘사한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대공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절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는 꼬마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비쳤을까? 비가 내리는 날 신문을 다 팔지 못한 소년에게 성냥팔이 소녀의 비극을 예상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는 다섯 살짜리 당찬 여동생 도리스가 있기 때문이다. 우유 값을 아끼기 위해 뒷마당에 젖소를 묶어놓고 음식물 쓰레기로 사료를 대신할 생각을 하는 엉뚱한 외숙모는 고아로 자랐지만 강자에게 굽힘이 없고 약자들에겐 더할 수 없이 너그럽다. 이밖에도 숱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러셀 베이커는 주연배우이기를 포기하고 객석에 내려가 그들의 모습과 시간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책은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슬픔과 기쁨, 열병과 치유 그리고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좌충우돌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대학 입학 전후와 해군 비행단 시절, 그리고 아내와의 연애 이야기가 펼쳐지는 책의 후반부는 거의 매 페이지마다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만, 어머니의 병문안을 기록하는 마지막 페이지는 결국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러셀 베이커는 1979년 6월 4일자 「타임Time」의 표지인물로 등장했다. 타자기 앞에서 담배를 들고 있는 그의 사진 아래에는 “The Good Humor Man”이라는 문구가 있다. 로버트 셰릴Robert Sherrill은 「워싱턴 포스트」의 서평에서 그를 “20세기 후반 최고의 풍자가”라 불렀다. 이처럼 러셀 베이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개 그의 유머와 위트에 집중된다. 그의 ‘옵서버’ 칼럼이 그러했다. 또한 그에게 두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에서도 그의 유머는 불우한 환경과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회상에서 단연 빛이 난다. 메리 리 세틀Mary Lee Settle은 그래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서평에서 이 책을 마크 트웨인의 책에 버금갈 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 했다.
윌리엄 맨체스터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냄으로써 당신의 비밀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러셀 베이커가 아주 오래도록 고맙게 느껴질 것이다”라는 말로 이 책에 대한 평을 대신했다. 『종이 시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앤 타일러의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매우 짧다. “보물!”
저널리스트 러셀 베이커
알리스테어 쿡Alistair Cooke은 BBC 라디오의 ‘미국에서 온 편지’를 1946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했을 만큼 장수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유명하다. 미국의 PBS가 러셀 베이커에게 그의 뒤를 이어 ‘명작극장 Masterpiece Theater’의 진행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나는 알리스테어의 뒤를 이어 진행을 맡은 사람이 은퇴하면 그때 진행을 맡고 싶다”고 했다. 물론 러셀 베이커다운 농담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그는 알리스테어의 뒤를 이어 1992년부터 ‘명작극장’의 진행자로 2004년 진행을 그만둘 때까지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79세로 은퇴할 때까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러셀 베이커는 1962년부터 1998년까지 「뉴욕 타임스」의 ‘옵서버’ 칼럼을 쓴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옵서버’ 칼럼은 그에게 퓰리처상 평론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는데, 풍자와 위트가 넘치는 그의 글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저널리즘의 교과서가 되었다. 물론 백악관과 의회 그리고 각 분야에서 불명예스럽게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인물들은 그의 풍자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비판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언론 환경과 국내외 문제에 대한 기고와 서평 등을 통해 경륜과 녹슬지 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2007년 많은 미국인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월스트리트 저널」을 인수했을 때, 그는 종이신문의 위기는 자본의 탐욕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대중의 신뢰와 사명감을 잃은 언론인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올해 85세인 러셀 베이커는 현재 고향 버지니아의 리스버그에서 살고 있다.
[책속으로 추가]
신문 꾸러미를 둘러메고 나는 벨빌가街로 나섰다. 거기가 사람들이 좀 모이는 곳이었다. 그 주위에는 주유소 두 군데와 유니언가와 연결된 교차로, 물론 A&P 식료품점도 있었고 과일가게, 빵집, 이발소, 주카렐리 약국, 그리고 열차처럼 생긴 간이식당도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나는 사람들 눈에 잘 띄기 위해 거리의 이쪽 저쪽, 이 상점 저 상점 앞으로 자리를 옮겨가며「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라고 큼지막하게 씌어져 있는 가방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어느새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그건 저녁 먹을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30쪽
별 볼일 없는 남자의 표본을 완벽한 작품으로 개조해 보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당신이 어머니 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다. 아홉 중의 맏딸로 자란 어머니는 그것을 당신의 남동생들에게 처음 시도해 보았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버지한테 시도해 보았는데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남자들에 대해 어머니는 20세기 페미니즘과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가 뒤섞여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페미니즘은 어머니로 하여금 단지 바지를 입고 못 입고에 따르는 불평등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38쪽
“네 아빠 죽었어.” 케네스 형이 말했다.
그 말이 내게는 아버지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흉을 보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변호하고 나섰다.
“우리 아빠 안 죽었어.”
케네스 형과 루스가 상황을 잘 몰라서 저러는가 보다. 그래서 나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아빠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다 나아서 엄마가 오늘 집에 데려오신다고 했고…….
“죽었다니까.” 케네스 형이 말했다.
자신 있게 얘기하는 형의 태도에 나는 가슴이 예리한 것에 찔리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안 죽었어!” 나는 소리쳤다.
“죽었어.” 루스가 말했다. “너보고 빨리 집에 오래.”
“아니야!”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말싸움이었다. 사촌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도 있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죽었어…… 안 죽었어…… 안 죽었어…….”
나는 아버지께서 숨을 거두셨다는 사실을 집에 다다르기 전에 이미 받아들였다. -98쪽
가슴 위로 포개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도 저처럼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오래 숨을 참았다가 가쁘게 내쉬느라 가슴팍이 들썩거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침묵이 무서워졌다. 나는 그 방에서 나와 다시는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102쪽
어머니는 나를 가리켜 ‘집안의 기둥’이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한 번도 매를 드신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여덟 살이 된 나를 번쩍 안아서 엉덩이를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내 나이에는 잘못된 행동을 하면 무조건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으셨다. 언덕에서 신나게 썰매를 타며 놀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늦는 일이 내 생각에는 아주 사소한 잘못이었지만 어머니는 내 허리띠를 치켜드셨다. 남자는 사회생활을 할 때 엄격한 시간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몸집이 작긴 하셨지만 그래도 내 종아리에 매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모욕적인 매질을 너무나 혐오했기 때문에 억지로 짜내는 눈물 몇 방울로 어머니를 만족시키고 말자는 유혹을 단연코 거부했다. -155쪽
잡담과 커피가 어른들의 낙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공황을 거치는 동안에는 참으로 훌륭한 소일거리였다. 영화와는 달리, 한가로이 얘기를 나누는 것은 돈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의 강물은 집안 전체를 흘러 저녁식사 시간을 가득 채운 다음 내가 잠자리에 들 즈음이면 최고 수위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면 졸졸 흐르는 속삭임들이 자정을 넘어 이어졌고 모두들 침대로 들어간 뒤엔 찰리 외삼촌이 혼자 남아 커피 주전자를 다시 데우고 담배 잎을 종이에 말아서 한 권의 책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었다. -185쪽
간혹 공황이 화제로 오르면 대화의 분위기엔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전체적인 어조는 여전히 유머와 절제를 잃지 않았다. 분노가 비통함이나 자기 연민으로 바뀌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기껏해야 기업과 정부, 그리고 약장수처럼 자신들의 주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가벼운 조소가 있을 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친놈들’인데다 ‘위험한 놈들’이었다. 쿨린 신부와 휴이 롱은 ‘선동꾼’이었다. 나치의 깃발을 앞세운 독일계 미국인 분트는 ‘쪼다 독일놈’이었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깡패’였다. 뉴딜 정책도 조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벨빌에서는 정부 산하 공공사업 추진위원회가 벌여 놓은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삽자루에 기대고 서서 시간만 때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공공사업 추진위원회’의 약자 ‘공추위’는 앨런 외삼촌의 말을 빌리면 ‘공공예산낭비 추진위원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88쪽
나는 어머니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연주 실력은 썩 훌륭하지는 못했다. 연주는 이따금 끊겼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건반을 다시 짚어 연주를 이어갔다. 어머니는 음악에 깊이 몰입해 있었고, 거실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시선은 내 뒤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마냥 들떠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우리 모두로부터 따로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외로운 어머니를 발견했다. -218쪽
애초에 내가 고모부에게서 느꼈던 경외심은, 고모부가 하는 얘기들이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임을 깨달아 가면서 조금씩 사그라졌다. 하지만 해럴드 고모부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울러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사로잡은 이야기들을 구성지게 지어내던 고모부는 그야말로 이야기꾼이었다. 여전히 고모부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꾸며냈고, 나는 감히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나는 고모부 역시 내가 더 이상 그 얘기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모부도 내가 당신의 상상력에서 샘솟는 이야기들 속에서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시치미를 뚝 떼는 우리 둘의 관계에서 고모부 역시 즐거움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28쪽
내가 열두 번째 생일을 맞은 날, 어머니는 내게「볼티모어 뉴스 포스트」와「선데이 아메리칸」을 배달하는 일을 새로 시작하게 하셨다. 「볼티모어 뉴스 포스트」는 석간이었지만 「선데이 아메리칸」은 토요일 자정이 넘어 나왔기 때문에 일요일 새벽에 배달을 해야 했다. 나는 일요일이면 새벽 2시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 일어나 어머니와 도리스를 깨우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살금살금 집을 나섰다. 새벽길은 언제나 등골이 오싹했다. 깜깜한 빈 거리에 어쩌다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적막을 찢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그러던 어느 새벽 나는 평소보다도 훨씬 음산한 분위기 속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전날 아래층에 시신이 하나 들어와 있었고, 장례 때마다 맡게 되는 온갖 냄새와 삶은 새우 냄새가 집안 전체에 낮게 깔려 있었다. -241쪽
어머니가 뻔한 수입을 쪼개 알뜰하게 모으는 솜씨는 흡사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해 겨울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어머니께서 일을 나가시고 도리스는 부엌에 있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침실 열쇠를 찾아내서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어가 보았다. 어머니의 침실은 1층에서 올라오는 계단과 바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밖에 나가실 때는 항상 침실 문을 잠그고 열쇠는 따로 숨겨놓는 곳에 두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한쪽 벽에 커다란 검정색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자전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볼티모어가에 있는 어느 상점 앞에 진열되어 있던 중고 자전거였다. 나는 그 거리를 지날 때마다 그 자전거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15달러나 하는 가격 때문에 내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어떻게든 계약금만 지불할 돈을 긁어모아서 성탄절 아침에 나를 놀라게 해줄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256쪽
과거의 나는 대학에서 셰익스피어와 라틴어를 접해 본 어머니의 지식을 늘 우러러보았다. 시티 칼리지에서의 첫해에 학생들은 카이사르를 배웠는데, 내가 해석에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어머니는 옆에서 늦도록 불을 밝히고 라틴어의 격변화와 동사변화를 상대로 씨름을 벌이는 나를 도와주셨다. 어머니는 카이사르의 글을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로 가면서 나는 내 라틴어 실력이 이미 어머니를 능가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나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을 뒤로 하고 파도의 도움을 받아 뭍을 향해 헤엄쳐가는 수영 선수와도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어머니는 계속해서 내 옆에 늦은 시각까지 머물며 당신이 내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으셨다. -269쪽
나에 대한 허브 아저씨의 인내는 초인적이었다. 아저씨의 그러한 인내심은 어쩌면 옥수수 농장과 친척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면서도 남몰래 기관사의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저씨는 소년기의 깊은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저씨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아저씨는 내가 당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괴롭히던 시절에 대해 얘기를 꺼내시는 법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얘기를 꺼내거나 그 시절의 일들에 대해 용서를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그런 얘기를 나누는 데에는 익숙지 않았다. 내가 그 시절의 얘기를 꺼낼 낌새만 보여도 아저씨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씀하셨다. “에이 그만하고.” 그러면서 아저씨는 화제를 바꾸셨다. “윌리 메이스 말인데 정말 대단한 선수야.” -282쪽
1942년 여름, 내가 존스 홉킨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미국은 참전 7개월째를 맞고 있었다. 내 유년 시절 전쟁은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에티오피아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비록 어렸지만 나는 전쟁으로 불타고 있는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했다. 하지만 그 세계는 멀게 느껴졌다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었고, 또 그런 일은 내 세계에선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두 대양의 보호를 받는 미국은 난공불락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나는 여름밤 지평선 저 멀리 마른번개가 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저쪽 어딘가에 폭풍이 몰아치겠군” 하고 중얼거리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폭풍이었다. -308쪽
어머니는 내게 인종적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물론 흑인들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에는 오래 전 버지니아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시절의 도도함이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인종 차별주의자들을 ‘불쌍한 백인 쓰레기들’이라고 가르치셨다. 흑인들은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품성과 장단점에 의해서만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볼티모어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주의가 아무 거리낌 없이 일상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1년이 갓 지났을 때 나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해럴드 고모부에게, “나는 검둥이들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만 알고 있어도 아무런 불만이 없을 거예요”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인종 차별주의는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았다. -319쪽
어머니는 치밀한 전략에 기초한 우회적인 전술이 다가오는 싸움을 대비한 최상의 무기임을 간파하셨다. “그 아가씨의 인상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을 거다”라는 말이 먼저 아주 날카로운 메스를 찔러 넣은 것이었다면 “화장이 그토록 요란하지만 않았어도”는 그 메스를 힘껏 비튼 것이었다. 그때는 1946년이었고, 나는 아직 ‘좋은 여자’에 대한 어머니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던 나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좋은 여자 혹은 나쁜 여자로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초월해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나에게 미미는 특별한 여자일 뿐이었다. -366쪽
4학년이 되면서 나는 매주 발행되는 학교 신문의 편집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경력이 나로 하여금 볼티모어의 유력 일간지에서 일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보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것에 그다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꿈은 제2의 헤밍웨이가 되는 것이지 신문사의 월급쟁이가 아니었다. -399쪽
어머니와 세상을 잇고 있던 마지막 연결고리가 끊어진 그 가을 이후 벌써 4년이 흘러 있었다. 어머니의 정신은 이제 현기증 나는 시간 여행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잠만 주무셨다. 백발이 된 머리는 침대 시트처럼 하얗기만 했다 어머니의 체중은 고작 34킬로그램이었다. 어머니는 침대 매트리스에 옴폭 들어간 자리 하나 남기지 못할 만큼 야위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만히 맥박을 짚어 보았다. 맥박은 정상이었다. 어머니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몇 분 동안 어머니의 손을 쥔 채 그대로 있었다. 사람의 온기에 어머니께서 눈을 뜨셨다. -432쪽
▣ 작가 소개
저자 러셀 베이커Russell Baker
러셀 베이커는 1925년 버지니아의 모리슨빌에서 태어났다. 1947년 존스 홉킨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볼티모어 선」을 통해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4년부터 「뉴욕 타임스」에서 백악관과 의회, 국내 정치를 담당했다. 1962년부터 1998년까지 「뉴욕 타임스」의 ‘옵서버’ 칼럼을 썼으며, 1979년 ‘옵서버’ 칼럼으로 조지 포크상과 퓰리처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워싱턴: 포토맥 강의 도시』, 『워싱턴의 어느 미국인』, 『패닉에는 이유가 없다』, 『거꾸로 매달린 사나이』, 『우리의 차기 대통령』 등이 있으며 이 중 『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Growing Up』으로 1982년에 퓰리처상 평전/자서전 부문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이 책의 후속편인 『좋은 시절The Good Times』을 펴냈다. 1992년부터 2004년 은퇴할 때까지 PBS의 ‘명작 극장Materpiece Theater’의 진행을 맡았다. 현재 고향 버지니아의 리스버그에서 살고 있다.
역자 송제훈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원묵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오프라 윈프리의 특별한 지혜』 등을 번역하는 한편 EBS와 교학사에서 영어 교재와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제1장 어머니의 타임머신
제2장 5센트짜리 비즈니스
제3장 나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
제4장 모리슨빌 사람들
제5장 마지막 나들이
제6장 공황의 풍경
제7장 집안의 기둥
제8장 외삼촌의 비밀
제9장 기회의 땅으로
제10장 거짓말쟁이
제11장 크리스마스 선물
제12장 허브 아저씨
제13장 진로의 갈림길
제14장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
제15장 비행 훈련학교
제16장 연인
제17장 새 출발
제18장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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