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가시적 세계 너머에 있는 존재의 흔적들을 써내려 가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권덕하 시인이 세 번째 시집 『귀를 꽃이라 부르는 저녁』을 냈다.
권덕하 시인에 따르면 시를 쓰는 일은 “자기의 독단을 줄이고 남이 되어 보려는 노력”이다. 시인은 ‘귀꽃’이라는 상징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관습적 인식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귀꽃’은 석등이나 석탑 등에 새긴 꽃 모양을 뜻하는데, 권덕하 시인은 그 귀꽃이 우리 몸에도 깃들어 있다고 여긴다.
석탑의 귀꽃처럼 시인의 몸속 ‘귀꽃’ 역시 수많은 사물, 풍경, 사람들의 사연과 속울음을 듣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 느낌으로써 우리가 잃고 사는 사회적 삶의 원형을 되찾아 간다.
“외로움에 사무친 몸 기울어져/기가 막히면 가장 먼저 우는 꽃”이요, “오래 머뭇거리다/요연한 이별 한 번 못한 채/몸에서 가장 늦게 지는 꽃”(「귀꽃1」)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가장 먼저 울고, 가장 늦게까지 견디는 필경사(筆耕士)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구메밥’(옥문 구멍으로 죄수에게 주는 밥)도, ‘소나기밥’(보통 때에는 얼마 먹지 아니하다가 갑자기 많이 먹는 밥)도, ‘입시’(하인이 먹는 밥)도, ‘메’(귀신이 먹는 밥)도 ‘헛제삿밥’도 “다 시장이 반찬이다”(「밥」)라는 숭고한 전언처럼, 그의 시에는 ‘귀꽃’으로 담아낸 뭇 생명에 대한 공평한 헌사가 깃들어 있다.
권덕하 시인이 세상을 향해 열어 놓은 ‘귀꽃’은 뭇 생명을 향한 경외라 해도 좋을 것이다. 김현정 문학평론가가 표현하듯 “온갖 현란한 시각적 형상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남의 말에 오랫동안 귀 기울일 줄 아는 넉넉한 몸가짐을 통해 경청하는 힘”의 가치를 드러낸다.
자본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 시대에도 소통과 상생, 배려와 나눔의 살이를 몸으로 체득한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가진 지혜로움이야말로 얼마나 빛나는 ‘시’인지 시인은 주목한다.
“바다에서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아온 이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백 사람이 하는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다던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영 사는 아흔아홉은 어떵 살코’(그렇게 일하면 이렇게 사는 나머지 아흔아홉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요).”(저자 발문 「시(詩)에 관한 열 개의 단상」 중)
위 대목에서 보듯 시인은 두루 보살피고 두루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존재들에 귀를 기울여 “시장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보여 준다.
들숨과 날숨 사이 무자맥질에
숨넘어갈 듯
까무룩 몸서리치는 순간만으로
하루 다섯 시간
일 년 열 달 꼬박
숨비소리 내쉬며
성산포 바당에서 오십 년 물질했는데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혼잣소리 흥얼거리며
자식들 낳아 길렀는데
스킨스쿠버 장비 사용하면 백 사람이 하는 일을 혼자 할 수 있다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요,
기자가 묻는 말에
영 사는 아흔아홉은 어떵 살코
- 「잠녜 물질」 전문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제 길 가도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이웃을 밀치거나 밟지 않는다
천수만에 사는 어떤 이는 귀신같이 새소리를 낸다지만 새들은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는다
빈 나뭇가지 고요히 밟는 새는 맨발이다
사람들은 신발 벗어야 하는 곳을 성지라 이르면서 태어나 딛는 곳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지 못한다
성지 순례하다가 폭탄이라는 말에 놀라 좁아터진 다리에서 떠밀고 넘어지다 티그리스 강으로 입적한 사람들
산더미처럼 쌓인 신발들 사이 새의 맨발 아득하다
- 「새」 전문
“사람들은 신발 벗어야 하는 곳을 성지라 이르면서 태어나 딛는 곳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지 못한다.” 반면 새들은 어떠한가. 새들은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는다”, 그저 “빈 나뭇가지 고요히 밟”을 뿐이다. 무엇하나 걸치지 않은 “맨발”로 오롯이.
이처럼 시인 권덕하가 보여 주는 세계는 우리가 익히 보아 온 세상이지만, 새로운 창 하나를 더 낸 것처럼 섬세한 시선과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말의 고갱이가 지닌 힘을 구체화”해내어 시 읽는 즐거움을 가장 정통적인 방식으로 구현해 낸다.
두계역에 내리자 비바람 몰아쳤어요 비닐우산은 마음먹고 뒤집어지려 하고 빗물에 찢긴 부대종이 사이로 갈치 맨살이 드러났어요
이거 뭐 중앙시장서 산 갈치 두 마리도 가리지 못할 우산 들고 그래도 입속엔 가득 그리움이 살고 있으니까 철길 건너갔지요
아껴 먹으며 십 리를 걷고 또 아껴 먹으며 십 리를 걷고 눈도 따라 십 리는 들어갔지만 깨물면 자책했을 단단한 맛 지키며 혀끝으로 살살 녹여 먹는 힘으로 갔지요
어디다 맡길 수도 없는 동생 달래며 기억에 젖고 젖어 질척질척한 먼 길 외갓집까지 뭔 힘으로 걸어갔겠어요
- 「십리사탕」 전문
세상의 모든 길은 식당으로 돌아온다 일 마치고 우리는 함께 말없이 밥 먹는다 밥을 남기지 않고 먹는 사람은 반찬 투정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밥이 곧 하늘이니까 하늘에 어찌 투정하며 하늘을 어찌 남길 수 있으랴
- 「밥 이야기」 부분
작가 소개
대전에서 출생했다. 1994년 ‘화요문학’ 동인시집 『두고두고 살아나는 꽃』에 시를, 2002년 《작가마당》에 문학평론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생강 발가락』 『오래』, 문학평론집 『문학의 이름』, 문학연구서 『콘라드와 바흐찐』 등이 있다.
목 차
제1부
수긍
귀를 꽃이라 부르는 저녁
민달팽이 집
더듬거리다
앞일
그림자놀이
산길
꽃자리
블랙박스
관심을 보이다
사이
비꽃
식전
산책
하지
밥
가을 물안역
네 이름
하나를 보면
탁란
귀꽃1
제2부
시인
그리운 비트
그믐에
산내에서
이명
십리사탕
다리
새
라플레시아
옛일
귀꽃2
밥 이야기
어떤 만남
생시에
유품
문명의 문맹
알섬 우화
갯비나리
국
대도시 오감도
제3부
노루벌
이름
강릉
잠녜 물질
불쑥
굴피
월동
겨울의 액면
메리 크리스마스
새벽달
우명리
늦봄
유월
부적
회오리 승객
가을소리
고향집 잔상
간이역
산내 차고지
귀꽃3
저자 발문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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