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어머니의 계절」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영랑 시인이 첫 시집 『발코니 유령』을 『실천문학사』에서 펴냈다.
“날카롭고 진폭이 큰 상상력과 정교한 이미지가 시적 공간을 매혹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현대인들이 처한 불안한 내면과 인간관계의 질곡 등의 무거운 주제가 섬세한 이미지를 통해서
조형되고 있어서 문제적”이라는 황치복 해설가의 표현대로 시인은 탁월하게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불안과 소외라는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의 내면 풍경을” 적확하고 정교한 이미지를 통해서 잘 그려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개인의 자화상, 그리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양상에 대”해 최영랑 시인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세심한 관찰과 탐구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난해한 양상들을 촘촘하게 이 시집에서 잘 그려냄으로써 시인의 시적 역량과 구상력이 한층 돋보이고 있다.
1. 어둠, 혹은 불협화음의 세계
시인이 지닌 특장점은 바로 현대인들의 미묘한 심리적 구도를 적절한 이미지를 통해서 구축하는 데에 있는데, 불안과 소외라는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의 내면 풍경을 날카로운 이미지를 통해서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은 대체로 어둠에 덮여 있거나 그늘에 휩싸여 있으며, 불안과 불협화음이 지배하는 음울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때, 그의 밖은 그렇게 유폐되었다
이제 밖은 바깥의 소관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 유형지가 되었다
유형지의 방식은 미래를 미래답게 하는 것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지금
영하의 기온보다 더 차가운 그늘 속에 있다
자꾸만 깊어가는 그곳은
어둠의 간절기
어둠의 구간을 견디는 계절이 창백하다
―「냉동인간」, 부분
2. 분열된 자아와 낯선 자아, 혹은 분장법으로 살아가기
시인이 상정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 또한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
다.시인은 문득 자아를 대하면서 친밀한 대상에게서 느끼는 낯설고 두려운 감정인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체험하는 것이다. 어둠이 상정하고 있는 무지와 무정형, 무규정 등의 함의가 자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욕조가 몸을 삼켰다
누군가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알몸으로 걸어 나가는 이는 누구일까
그림자보다 다정하게
기억보다 명확하게
나를 나보다 먼저 증명하는 이 누구인가
바닥까지 침수된 나는 껍데기만 남았다(중략)
붉은빛에 에워싸인 나
한바탕 춤곡이 나를 붙잡고 흔든다
누군가 내 머릿속 마개를 뽑는다
물속의 퉁퉁 분 여자와
나를 버리고 빠져나간 여자와
여자를 보고 있던 여자가 모두 사라진다
아파트가 스티로폼처럼 가볍다
―「누군가 들락거리고 있다」, 부분
이 시에는 욕조에 몸을 담그자 욕조에 잠긴 육신의 주체는 그대로 있지만, “누군가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자아의 분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3. 면, 각, 모서리의 인간관계, 혹은 경계와 울타리
시인의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직선, 곡선, 각, 면, 모서리 등의 수학적, 혹은 기하학적 상상력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기하학적 개념과 도형들은 주로 인간관계,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는 너와 나의 관계를 설명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상자라든가 큐브, 혹은 울타리나 경계라는 입체나 도형의 형상으로 연결되어 인간관계의 종합적인 구도를 설정하는 데에 이르고 있다.
주춤주춤 나타난 커브가 나를 삼킨다
직진하려는 나의 관성이 휘어진다 액셀을 밟고 있는데
자꾸 브레이크를 밟으라 한다 나는 다시 액셀, 너는 브레이크
횡단보도에 부서진 감정들이 쌓인다 방지 턱을 넘으며
방지 턱을 지우며 나는 방향을 핸들에게 맡기고 구부러진
태도를 펴는 일에 몰두한다
곡선으로 사라진 네가 처음으로 보였다 내가 내뱉은 비난이 등 뒤에 들러붙어 있었다
너는 떠도는 어둠이었다가 가까워지는 빛이었다가 지금 다시 내게 커브의 속성을 건네고 있다
너는 매일 커브 속에서 커브를 반복하고 있다
반경이 긴 후유증이 나를 길들인다
―「커브」, 전문
4. 안과 밖, 혹은 시소 위의 우리
당신은 안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
안에 있는 당신과 밖에 있는 당신은 같은 목소리인가요
트렁크처럼 놓여 있는 당신은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신호음만 냅니다
그런 당신과 나는 날마다 안부를 주고 받습니다
나는 말을 걸고 당신은 내 손을 잡습니다
당신은 왜 내내 지퍼를 꽉 물고 고장 난 트렁크 흉내를 내나요
나는 안쪽을 기웃거리는데 당신은 이미 여행을 떠나고 없습니다
경쾌한 저녁을 연주하던 도마소리가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고만 있습니다
안쪽엔 내가 모르는 이정표가, 아니 어떤 목적지가 있는 걸까요
기억을 빨리 닫아버리는 당신, 나만 그 언저리를 내내 맵돕니다
―「고장난 트렁크」, 부분
위의 시에 그려진 나와 당신의 관계란 서로 소통이 안되고 단절되어 있는 안과 밖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적 주체는 “당신은 안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라고 묻고 있지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철저히 내면의 풍경을 고장 난 트렁크 안에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자폐적인 자아상을 대변해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을 확인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자기만의 구조물, 혹은 입방체를 형성하고 거기에 갇힌 기계 문명화된 현대인들의 인간 관계의 한 모습일 것이다.
너는 풍선을 불고
나는 풍선을 터트리고
너는 하늘공원으로 날아오르고
나는 풀밭으로 내려오고
우리는 교대로
올라가는 추락
내려오는 상승
하늘로 솟는 풀밭
풀밭으로 착지하는 하늘
순간, 호흡을 가다듬고 서로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고
우리는 다시 거품을 만들고 거품을 빼고
너는 이륙하는 말들을 허공에 띄우고
―「시소의 감정」, 부분
위의 시에서 시소에 올라탄 두 사람의 관계는 안과 밖의 관계와는 또 다른 점에서 현대인들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안과 밖의 관계란 어떤 울타리를 경계로 한시적으로 분리되어 고립과 분열을 경험하는 관계를 상징한다면, 시소의 관계란 영원히 상대방을 상쇄하고 억제하는 작용으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이라든가 구조 등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어느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거나 동일한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로섬게임 (zero-sum game)처럼 한쪽의 이익은 다른 쪽의 손실로 이어지고, 한쪽의 손실은 다른 쪽의 이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영원히 화해 불가능한 대립적 관계의 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하나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소개
최영랑
전라북도 정읍 출생.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 차
제1부
커브
카페인
누군가 들락거리고 있다
오, 칸나
훌라후프
발코니 유령
고동의 길
버블 스토리
오후 1시의 빨랫줄
튤립
어머니의 계절
고장 난 트렁크
무한 화서
제2부
옹이의 독백
이별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식
시소의 감정
모르기 때문에
은밀한 상자
붕대
염소와 말뚝
불면
길의 잠적
두더지
카푸치노 카푸치노 카푸치노
간절기 병을 앓다
자물쇠를 열다
제3부
잠이 환하다
알레르기
구성을 위한 구성
매미의 간증
엉겅퀴, 잠시 불러보면
뜬구름 하루
모과 향이 둥글어질 때
나의 큐브
봄의 오류
이방인
삵
봄, 지평선 그 위의 애벌레
라쇼몽의 시간
탱자
제4부
셰이크
멍의 소용돌이
1인 극장
냉동 인간
산딸기 랩소디
솜털
집중
깃을 세워요 그런데 여름이 와요
말 백신
하울링
미라 아이
불안한 공중
팝콘이거나 풍선이거나
분장법
해설 황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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