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뱀과 소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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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권순자
출판사항시인동네, 발행일:2021/09/13
형태사항p.119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8965273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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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시는 기본적으로 불친절한 장르다. 서정적 장르의 개념을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는 세계의 자아화’라고 했을 때 이미 그 속에 시란 장르의 소통의 어려움이 내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의 자아화’란 결국 세상을 화자의 시각으로 재구성한다는 걸 의미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고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시의 내용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평소 개인적 친분 관계도 없고 시인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짧은 시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과 느낌을 순간적으로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독자로서의 감정이입도 쉽지 않다. 더군다나 가장 짧은 장르인 시의 특성상 독자로선 시의 내용이 전후 맥락도 없고, 친절한 상황 설명도 부족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 시인이 순간적으로 포착한 대상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해놓은 문장들이 독자에겐 한없이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다. (간혹 그게 매력일 수도 있다.) 물론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고 나름의 플롯과 문법이 있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게 그 모든 걸 이해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봐서 모르겠으면 그냥 모르는 거다. 많은 경우 작품의 배경과 화자의 상황 혹은 소재나 주제를 작품의 제목을 통해 유추하거나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제목과 작품의 내용이 잘 부합된 경우가 아니면 어렵다. 그래서 그렇다. 시를 쓰고 있는 나에게도 남의 시를 읽는 일은 기대감이나 즐거움과 함께 항상 곤혹스러움이 동반된다.
권순자 시집 『소년과 뱀과 소녀를』 읽으며 느끼게 되는 곤혹스러움 또한 마찬가지다. 그 곤혹스러움 속엔 권순자의 시를 다른 시인의 시와 변별되게 하는 존재 이유와 부정의 이유가 공존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곤혹스러움의 정체를 성급히 모두 언어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은 해석되지 않는 신비로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권순자의 이 시집을 읽으며 주목한 것은 기억의 서사다. 이 시집에 실린 상당수의 시에서 시인은 과거의 장면을 소환한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어느 시점까지, 시인의 고향일지도 모를 바닷가나 산골 혹은 어느 시골을 배경으로, 소년과 어머니와 애인에 대한 기억이 시 속에 출몰한다. 그 소년이 자라서 성인 남자가 되고 애인이 된 것인지 그 연속성을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시집 속에 어느 정도의 일관된 기억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가에서 짱돌을 찾아
 수십 번 수백 번 물속으로 서러움과
 울분의 날개를 날려 보냈다


 짱돌은 거칠게 물 위를 날아오르다가
 첨벙첨벙
 물속으로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리고 덜 자란 몸을 쑤셔 박고 말았다


 물수제비로 수면을 네댓 번
 가볍게 제 몸을 날려 물결 잔등을 튕기어
 새도 아닌 것이
 새라도 되고 싶어서
 돌은,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물결도
 돌이 뜨겁게 날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는 듯
 손바닥으로 받쳐주고
 제 품을 열어 멀리 흘러가 주었다


 낮게 날던 제비마저
 돌을 물고 비상이라도 해주고 싶었을까


 물결을 뜨겁게 끌어안고
 돌은, 자글거리며 흘렀다
― 「짱돌」 전문


물가의 물수제비 장면이 왠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연상하게 만드는 이 시는 “새도 아닌 것이/새라도 되고 싶어서” 발버둥 치고, “날마다 가출하고 날마다 귀가”(「유목의 시대」)하며, 망명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물결을 뜨겁게 끌어안고/돌은, 자글거리며 흘렀다”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짱돌」은 젊은 날의 알 수 없는 서러움과 분노와 갈망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뜨거운 가슴은 있으나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항상 종종걸음을 칠 수밖에 없는 것이 젊은 날이나 그 불안의 정체는 오리무중인 것이 특징이다. 혹시 그 열망이나 불안이 이성을 향한 육체적 욕망의 흔적은 아닌가 생각해보게도 된다.
― 이동재(시인)

 

■ 책 속에서


 소년과 뱀과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겁이 없었고
 소녀는 겁이 많았다


 햇볕에 탄 얼굴이 갈색으로 빛났다
 뱀의 무늬가
 머리카락을 물들였다


 빛나는 머리털을 가진 소년과
 무늬가 아름다운 뱀과
 그 모든 것이 경이로운 소녀가 함께


 더 까매진 눈동자를 품고
 산길을 내려왔다


 저녁연기가 뱀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 「소년과 뱀과 소녀를」 전문


 나의 귀는 당신에게만 열려 있네
 당신의 미세한 음성까지도 듣는 귀라네


 뜨거운 여름의 입김도 스쳐 지나가는 귀
 솟구치는 새소리를 놓칠지언정
 바람 소리보다 여린 당신의 음성은
 귀를 타고 실핏줄을 타고 심장에 닿아
 나를 환하게 물들이네


 나의 귀는 당신 음성만 들을 수 있네
 무심한 바람이 광장으로 달려갈 때
 새들이 울음을 상실할 때
 누군가 잃어버린 언어가 노을에 흩어져가고
 누군가의 눈을 가렸던 태양이 저물어갔네


 오래된 청력은 별빛보다 가늘어지고
 흐느끼지만 집요하게
 당신을 향해서만 반응하는 프리즘이었네


 현란하게 발산되어
 울컥, 내 속살에 닿는 당신의 음성,


 일시에 폭죽처럼 터지는
 수천 송이 꽃들의 탱천(?天)
― 「이상한 귀」 전문


 죽음이 허구 같아서
 구름처럼 허공에 휘날리는 기억들이 있다


 수평으로부터 짠물이 그리움처럼 몰려들었다
 수천수만의 출렁거림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슬픔의 아가리가 갸륵한 듯 문득 다물어졌다


 지옥은 어디에 있나
 고통이 희열과 어떻게 같아질 수 있나
 깊고 깊은 바닥 폐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회오리


 작고 빛나는 슬픔 덩어리들이
 죽음의 안무를 끝마쳤다


 날렵하게 장악하는 어둠의 거대한 아가리는
 수많은 멸치가 대를 이어 건너가야 하는
 대를 이어 껴안고 가야 하는
 무거운 띠


 무법에 취한 자를 뛰어넘어
 꿈틀거리는 상승기류로 변해버린 불가사의한 꿈
 멸치 떼의 구원에의 몸부림이
 하얗게 빛났다
― 「멸치」 전문


 바람결에 맴돌다가
 당신이라는 매끄러운 표면에
 얼어붙은 나의 운명
 하얗게 엉겨 꽃이 되었네


 죽도록 붙어서 짧은 인연 애달파라
 기다려줘
 작은 알갱이로 잠깐만 빛날게


 빛이 당신과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네
 야멸찬 빛
 당신은 나를 주워 담을 수 없어서 우네
 빛이 나를 데리고 가네


 미끄러운 절벽을 견디는 비밀은
 빛이 뒤돌아보는 순간
 투명하게 생을 멈춘다는 것
 당신은 햇살에서 나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


 아, 나는
 녹지 않는 사랑이 되고 싶었네
― 「얼음꽃」 전문


 어지럽던 어제의 골목들이
 하나 둘 사라져버리고


 아무도 떠나간 골목의 설렘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제의 골목은 심장을 하나씩 가지고
 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달빛 서성거리던 골목길
 구름이 낮게 드리워 옷자락을 끌던
 모퉁이 키 큰 감나무도
 흔적 없이 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골목이 키우던 개들도
 푸성귀를 키우던 텃밭도
 햇살을 낚시질하던 거미도
 골목이 데리고 떠나버렸다


 남아 있는 골목들은 고향의 흔적을 잃어버리고
 허전함과 외로움으로
 비대해지고 거칠어져 갔다


 기억을 잃은 골목이
 가로등 불빛을 타고 휘청휘청
 메마르게 걸어간다
― 「골목의 기억」 전문


■ 시인의 산문


한때는 세상을 거슬러 너에게 가느라 마음이 젖은 적이 있다. 찢기고 피멍 든 시간이 오래 멍울 져 장미처럼 붉었던 적이 있다. 너의 노래는 기타 속에서만 아름다웠다. 그것마저도 어딘가 닿는 순간 흩어져 버렸지만, 노래의 귀환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밤에도 닫히지 않았다. 너를 버리고서야 비로소 너를 그리워하는 차가운 눈빛들…… 여러 개의 입술을 가진 너를 나는 얼마나 오래 사랑해왔던가.

작가 소개

권순자

1986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다로 간 사내』 『우목횟집』 『검은 늪』 『낭만적인 악수』 『붉은 꽃에 대한 명상』 『순례자』 『천 개의 눈물』 『청춘 고래』, 시선집 『애인이 기다리는 저녁』, 영역시집 『Mother’s Dawn』(『검은 늪』 영역), 수필집 『사랑해요 고등어 씨』 등이 있다.

목 차

제1부

 떠돌이별•13/짱돌•14/거미집•16/망명 케이크•18/유목의 시대•20/이상한 귀•22/뿌리의 힘•24/에덴여인숙•26/애월•28/구름밥•30/천 개의 달•32/멸치•34/봄밤 한 접시•36/굴러가는 것들•38

제2부

 소년과 뱀과 소녀를•41/얼음꽃•42/삐걱거림에 대하여•44/애인이 기다리는 저녁•46/버드나무 잔가지•47/원심력 분석•48/구두•50/가자미 후생•52/장미가 말라갈 때•54/목련 편지•56/겨울의 끝•57/통조림 속의 잠•58/고양이 축배•60/백련•62

제3부

 누군가 오는 소리•65/잠실(蠶室)•66/피아노 아버지•68/풍경의 자세•70/골목의 기억•72/야밤의 시인•74/아이스크림 먹는 여자•76/당신과 머물던 섬에도 비 내리고 있을까요•77/고양이 눈을 비추는 눈물•78/지금 봄 지급•80/소리의 통증•82/꽃처럼 돌이 무늬 질 때•84/거품의 집•86/곰장어•88

제4부

 마법의 여름•91/당신이 떠난 계절•92/구길리•93/행성 추리탐색기•94/복사꽃 마을•96/나의 연애는 짧았습니다•98/폭설•99/구름 애인•100/쥐들의 저녁•102/달빛 사과밭•103/빈집•104/모란시장 칼국숫집에서•106/별리•108

해설 기억의 서사와 시/이동재(시인)•109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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