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단시短詩의 아름다움
조동화 시집 『쥐똥나무 열매만한 시들』이 출간되었다. 1978년 박재삼 선생 선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화암」이 당선된 후, 윤석중 선생 선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첨성대」(1983), 심경림 선생 선으로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1991)이 각각 당선된 바 있는 시인은, 그동안 시집 아홉 권, 동시집 두 권을 냈다. 시집으로는 열 번째 시집, 전체 저서로서는 열두 번째 책인 셈이다.
이번 시집은 1부에서 5부까지 총 68편의 시들을 모았는데, 이 가운데 17편의 산문시를 제외하고 총 51편의 시들이 극히 짧은 단시(短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참고로 시행 수로 작품을 분류해 보면, 3행이 2편, 4행이 28편, 5행이 9편, 6행이 7편, 7행이 2편, 8행이 3편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3-6행에 해당하는 시가 51편 가운데 무려 46편으로, 이는 비율상 90%를 상회하는 수치다.
그러면 왜 이렇게 조동화의 시가 기울어지는 성향을 나타내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그 누구도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의 이전 시집들 가운데서 『나 하나 꽃 피어』를 보면 15편 정도의 단시들이 선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부면이 이번 시집에서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또 하나의 가정은 시인의 연치와 관련된 것이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을 선호하기 마련인데, 공교롭게도 이번 시집의 발간 시기가 일흔을 넘긴 그의 연치에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은 이번 단시의 대폭발에 얼마간 함수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제1부는 「수평선」, 「봄밤」, 「청설모」, 「보름달」, 「무늬」 등 15편이 수록되었고, 제2부는 「모과풍령초」, 「희밍의 땅」, 「봄 햇살」, 「일흔」, 「사이」 등 1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자연을 대상으로 한 거시적 안목과 시각, 청각, 미각 등 감각의 전이(轉移)가 활달하게 표현된 부분이다. 예컨대 「수평선」은 입이 큰 아귀 수육을 먹다가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는 가장 큰 입이라는 놀라운 발견을 해낸다. 「봄의 맛」은 이른 봄 뒷산의 머위 잎을 따와 쌈 싸 먹으며 “온몸이 떨리도록 혀끝에 감겨오는/ 보랏빛 쓴 맛!”을 감지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는데 놀라운 감각의 전이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보랏빛 쓴맛!”이라는 대목은 이른바 공감각으로 미각의 시각화가 되겠는데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제3부는 「민달팽이」, 「사는 일」, 「은어들의 고향」, 「심장」 등 15편이 수록되었다. 이 부분은 삶에 대한 궁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부분이다. 시인은 삶을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가닿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은어들의 고향」 같은 작품이 그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아름다운 최선」에서 보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는 여정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하겠다.
제4부는 「탱크와 티코」, 「지옥」, 「무모한 고행」, 「단 한 권의 책」 등 13편이 수록되었는데, 주로 성경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들이다. 예컨대 「무모한 고행」 같은 작품은 ‘기둥 위의 성자’로 불리는 인물이 자신은 진리를 추구했다고 믿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의 인생 전체가 미망에 지나지 않았음을 설파한 작품이다.
제5부는 「출생기」, 「엄마의 속곳 끈」, 「가슴으로 우는 법」, 등 12편의 산문시들을 모았는데, 유년시절 기구한 운명 속에 내던져졌던 시인 자신의 자서전적 삶이 상당부분 투영된 작품들이다. 특히 「엄마의 속곳 끈」은 어린 시절 엄마가 도망갈 것이라는 낌새를 채고 밤마다 엄마의 속곳 끈을 손에 감고 잠들었다는 진술이나, 끝내 엄마가 떠난 후 아무도 모르는 가슴 속에 쓰리고 헛헛한 황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진술은 애처로움과 인간 한의 극치라 할 만하다.
시인 조동화는 시, 시조, 동시라는 세 분야에 각각 한 번씩 도합 세 번이나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이른바 시 분야에서 사이클히트를 날린 다재다능한 시인이다.
그의 열두 번째 시집 『쥐똥나무 열매만한 시들』에서 가장 먼저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4행과 5행의 시편들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특히 4행시는 28편이나 되는데, 이를 두고 혹시는 향가의 4구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는가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5행과 6행의 시도 16편이나 되므로 이번 시집을 두고 향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제 막 일흔을 넘긴 시인의 자연스런 시적 호흡의 결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이번 시집의 형식적 성향에 가까우리라 여겨진다.
어떤 사내도 오를 수 없는
깊은 산 바위 벼랑
홀로 늙어가는 절세미녀를
어느 여름 운 좋게도 만난 적이 있다
―「하늘말나리」 전문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식물의 의인화다. ‘하늘말나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보다시피 ‘홀로 늙어가는 절세미녀’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어떤 사내도 오를 수 없는/ 깊은 산 바위 벼랑”에 고고히 살고 있다. 시인은 어느 여름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듯 가슴 설레며 그 절세미녀를 만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올해도 제 머리들을
삭둑삭둑 베어 던지려는가,
홍안의 농염한 여인들
벼랑 위 난간에 모여 서 있다
―「능소화」 전문
이 작품 역시 의인화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능소화(凌霄花)’는 꿀풀목 능소화과의 식물로 초여름 아주 탐스러운 주황색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이 나무는 꽃이 질 때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통꽃 그대로 떨어지는 습성이 있다. 땅위에 널린 싱싱한 꽃숭어리들을 내려다보노라면 마치 낙화암 절벽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를 보는 듯 섬뜩하고 애처로운 느낌을 준다. 그래서 시인은 떨어지기 전의 능소화들을 홍안의 농염한 자태로 결연히 벼랑 위 난간에 모여 서 있는 여인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스쳐간 고갯마루에 나도 섰다
이제부터는 고봉들이 즐비한 길이다
몇 개의 봉우리들을 더 오를 수 있을까?
운무 자욱한 연봉連峰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일흔」 전문
예로부터 ‘일흔’을 일러 ‘고희’라 일러왔는데, 이는 두보가 ‘곡강(曲江)’이라는 시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한 데서 유래했다.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라는 뜻이다. 시인은 지금 그 일흔의 고갯마루에 섰다. 아무리 백세시대라 해도 사람이 누구나 백세 가까이 사는 것은 아닐진대 시인은 즐비한 고봉들을 바라보며 두보의 시구를 머릿속에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자신이 몇 살까지 살 것이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시인은 “운무 자욱한 연봉連峰들을 지그시 바라”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벚꽃이 만개한 경주 동방초등학교 옆 큰 도로
새 옷 입고 고사리 손을 든 한 떼의 1학년들이
지금 막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아침입니다
버스도 승용차도 덤프트럭도 지게차도
모두 꼼짝 못하고 멈추어 선 채
이 땅의 눈부신 미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눈부신 미래」 전문
어린이들, 특히 1학년들은 이 땅의 눈부신 미래요 희망이다. 이들이 어떻게 자라는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흉포한 문명의 이기로부터 이들은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도시의 교외에 있는 초등학교들은 아이들이 급감하여 폐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동방초등학교는 근처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덕분에 취학아동들이 오히려 불어나 등하교시면 깃발을 들고 호루라기를 입에 문 엄마아빠들이 길 양편에 서고 질서정연하게 아이들을 건너게 한다. 예쁘고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이 고사리 손을 들고 길을 건너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즐겁고 감격스럽다.
우리의 소원은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
성급히 달을 꺼내려 안달하지 말일이다
휘저을수록 그것은 산산이 부서지기 마련인 것
호수 가운데 그냥 저 혼자 오래 놓아두어라
때 되면 가장 둥근 달 휘영청 떠오르리니
―「우리의 소원」 전문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이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요즈음 전방에서는 휴전선 일부에 대전차장애물과 철조망들을 제거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그런 성급하고 허울 좋은 조치만으로 통일은 오지 않는다. 남과 북의 마음이 하나 되지 않았는데 통일이 되겠는가? 우격다짐으로는 이 큰 소망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보다는 먼저 남과 북이 신뢰를 키워 합의하에 핵전력을 제거하고, 군인 수를 줄이는 일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와 경제를 서로 소통하며 조건 없는 이산가족상봉과 자유왕래가 이루어져 마음부터 하나가 되는 일이 급선무다. 양측이 지금 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의 섣부른 통일은 자칫 이 민족의 피를 요구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4선 대통령 우고차베스
그는 겉똑똑이 사회주의자였다
기간산업 국유화와 무상복지라는 신기루에 홀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들을 보는 족족 잡아
장장 14년간 원 없이 파티를 벌이다 갔다
가장 배고픈 나라 1위라는 가혹한 멍에를
자신이 사랑한 백성들의 목에다 고스란히 걸어둔 채
―「우고차베스」 전문
석유매장량이 세계 제일인 베네수엘라는 석유 값이 좋을 때는 세계적인 부국이었다. 그러나 우고차베스라는 지도자가 나와 포퓰리즘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바람에 14년 만에 그동안 쌓았던 국부를 다 소진하여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4300%에 달했고, 올해는 100만%가 될 것이라 한다. 국민들의 체중이 평균 10킬로그램이 줄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여 수백 만 명이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엑소더스가 일어나고, 많은 여자들이 몸을 팔아 연명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우고차베스를 영웅시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에 영합하는 무상복지의 달콤함에 절대로 취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은 곧 우리와 우리 자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마약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검은 블랙홀은
전봇대에도 열려 있기 일쑤다
대화+만남
1899-2662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걸까
그리고 만나서 무얼 허자는 걸까
달콤한 미끼처럼 걸린
저 음험한 입구入口
―「음험한 입구」 전문
도시 근교 도로를 지나가다 보면 도로변 전봇대에 ‘대화+만남’이라는 문구 밑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나라 순진한 여자들을 꼬드기는 악마의 계략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미풍양속과 건전한 가정들을 무너뜨리는 최대의 적이다. 이것들이 이렇게 버젓이 전봇대에 붙어 있다는 사실은 영업이 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왜 이러한 악을 정부는 방치하는 것일까? 경찰은 왜 이 일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일까?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일이 너무 많아 남아도는 손이 없다는 걸까? 좀도둑 몇 놈 잡느니 이런 놈들부터 잡아 엄단하여 이 나라 기강부터 바로 세워야 하리라.
태양 따라 서쪽으로 가는 길이 바른 길인데
태양을 버려둔 채
다수는 부득부득 동쪽으로만 가자고 한다
다가오는 긴 밤을 보지 못하고
―「다수」 전문
다수는 귀가 얇고 어리석다. 바른 길이 한눈에 보이는데도 부득부득 멸망 쪽으로 가자고 한다. 민주주의는 늘 어리석고 눈 먼 다수의 편이다. 다수가 부화뇌동하면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 쉬 밝아올 기약 없는 긴 밤을 통과하고 있다. 시인이여, 등대처럼 깨어 불빛을 비추라!
작가 소개
조동화
1949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화암」이 당선된 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첨성대」, 부산일보에 시 「낙동강」이 각각 당선되었다. 시집에 『낙화암』, 『산성리에서』, 『강은 그림자가 없다』, 『낮은 물소리』, 『눈 내리는 밤』, 『영원을 꿈꾸다』, 『나 하나 꽃 피어』, 『고삐에 관한 명상』 등 9권과 『우리나라 나비 새 풀 나무』, 『쥐똥나무 열매만한 시들』, 『우리나라 나비 새 풀 나무 2』 등 두 권의 동시집이 있다. 이번 시선집 『낙동강』은 그의 열세 번째 시집이다.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통영문학상등을 받았다. 2017년 보문 둘레길 물너울교 부근에 시 「나 하나 꽃피어」가 경주시에 의해 시비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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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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