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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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박지영
출판사항시인동네, 발행일:2022/05/27
형태사항p.126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8964191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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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언어, 기호, 그리고 우연적인 마주침


일상은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로 채워진 패치워크(patchwork)이다. 이 마주침의 사건들은 대개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 우연히 듣게 된 소리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 어떤 장면이나 풍경에 시선을 사로잡히는 순간, 무심코 읽은 문장에 마음을 빼앗겨 한동안 넋을 놓게 되는 순간……. 시인은 우연의 시간과 순간의 강렬함을 감각적인 사유로 연결하고, 내부에 그 강렬함의 흔적을 간직한 감각적 존재를 창조해냄으로써 일상의 시간을 예술로 바꿔낸다. 그런데 이 창조적 사건에는 종종 두 가지 오해가 따라다닌다. 하나는 이 우연한 마주침이 온전히 시인에 의해 주도되는 사건이라는 오해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마주침이 왜곡이나 잔여 없이 언어화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이 우연한 마주침의 대부분은 동일한 질서의 반복으로 구성된 상식의 세계를 뒤흔들면서 나타나는, 혹은 우리에게 도래하는 타자적인 것과의 조우로 시작된다. 따라서 이 마주침에서 시인의 역할/능력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이 경우 시인에게 요청되는 능력은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의 출현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것, 상식이라는 이름의 익숙함을 보존하기 위해 타자적인 것의 출현을 부정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개방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주침은 경험의 가능 조건일 뿐 그 자체가 시(詩)는 아니다. 시인에게는 이 마주침의 사건, 그 강렬함을 언어 안에 담는 작업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 마주침의 대부분은 그 자체로 강렬한 정서적 만남일 뿐 특정한 내용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시에서의 언어 또한 강렬한 정서적 사건이 발생한 흔적일 뿐 마주침의 실체에 대한 기술이 아님을 의미한다. 시가 시인의 배타적인 독점물이 아니라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이유, 특히 그 읽기가 문해력이 아닌 행간 읽기라는 정서적 독법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지영의 시는 일상적 사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화한다.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 시적 대상을 정서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장면들,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 자연과의 관계, 기후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같은 현실적 문제들 등 다양한 주제들이 ‘시집’이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이 주제들 가운데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다.


종이 위에 강이라고 쓰자

물고기 한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갑자기 물 위로 솟구쳐 오른다

고맙다는 듯 꼬리를 까닥이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수면은 조용해지고

종이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글자들이

순서를 기다리다가

답답한지 고개를 들어 올리다

낚시꾼에게 걸려든다


종이 위에서도 생사가 갈린다

‘아’라고 써야 할 것을 ‘어’라고 쓰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 올라와 잡은 고기 놓아줄 때도 있다

종이 위에 강은 여전히 소리 없이 흐른다


앗! 물고기가 찌를 물었다

손맛이 짜릿하다


이 맛을 알아야 진짜 인생을 아는 거다

― 「미끼」 전문


시집의 첫 페이지에 배치된 동음이의어(homonym)를 활용한 작품들은 이 ‘시집=세계’에 대한 이정표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품사의 하나인 ‘부사(副詞)’와 사과의 특정한 품종(品種)인 ‘부사(富士, ふじ)’의 동음 관계를 이용한 「부사」, ‘밤(night)’과 ‘밤[栗]’의 동음 관계를 이용한 「밤 까먹는 밤」이 그것들이다. 시인은 전자에서 사과 상자에 갇혀 말라가는 사과의 형상을 “형용사는 버리고/동사로 누워 있는 부사”(「부사」)라고 표현함으로써 언어적 동음 관계 이상의 의미를 발견해내고 있고, 후자에서는 ‘밤’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의미 형성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이 사례들은 단순한 유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알다시피 시는 ‘언어’ 예술이다. 하지만 이때의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근간, 즉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언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상징 질서,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인 기능적·도구적 언어가 문법과 의미를 중심으로 작동한다면, 시는 언어를 의미보다는 정서, 문법보다는 욕망의 질서에 따라 사용하는 예외적 방식의 일종이다. 현대시에서 동음이의어, 언어유희(pun) 등은 ‘유희’라는 단순한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기호의 의미를 중층화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익숙한 감각에 충격을 가하고, 이질적인 의미를 충돌시킴으로써 진술 자체를 불확정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만들며, 그리하여 자동화된 감각과 사고의 과정을 탈구시킴으로써 인지 과정 자체를 지연시킨다. 특히 동음이의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로 환원되지 않도록, 동시에 음성적 물질성에 근거하여 우리의 사고를 다른 세계로 도약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인용 시에서도 반복된다. 1연에서 화자는 종이 위에 ‘강’이라는 글자를 적으니 물고기 한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솟구쳤다가 이내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시(詩)가 ‘언어’의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 즉 언어적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이때 ‘강’이라는 언어와 ‘물고기’의 출현은 동시적이다. 시에서 언어는 현실의 사건을 뒤늦게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문학작품에서 세계는 발화되는 순간 탄생한다는 점에서 시의 언어는 창조 그 자체이다. 근대미학, 특히 텍스트주의는 이러한 발상에 기초하여 텍스트의 안과 밖을 단절된 것으로, 그리하여 자율적인 세계로 간주했다. 2연에서 시인이 글쓰기를 “종이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글자들이/순서를 기다리다가/답답한지 고개를 들어 올리”는 행위로 형상화한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에게 글을 쓰는 일은 ‘종이=백지’에서 ‘글자’를 낚아 올리는 행위이다. “낚시꾼에게 걸려든다”라는 표현처럼 시인에게 있어서 ‘글’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물고기와 그것을 낚아챈 시인의 행동이 결합되어 탄생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작품의 제목을 ‘낚시’가 아니라 ‘미끼’라고 썼을까? 3연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소쉬르나 바르트 같은 구조언어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발화행위는 계열체(Paradigm)와 통합체(Syntagma)를 조합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계열체는 적절한 기호를 선택하는 것이고, 통합체는 선택된 기호들을 연속적으로 배열하는 문법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언어적 원리를 패션과 음식에 적용하여 ‘모드의 체계’라는 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발화행위가 계열체와 통합체의 조합이라면 그 각각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수많은 어휘 가운데 어떤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이웃하고 있는 단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시인은 선행하는 단어를 ‘미끼’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인해 “‘아’라고 써야 할 것을 ‘어’라고” 잘못 쓰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생각이 올라와 잡은 고기 놓아줄 때도 있”는 것이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 시인의 산문


해 저물도록

나는 어디를 헤매다 이제야 왔을까.


지난날엔 잘 몰랐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이 들면서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간절함이 찾아왔어.

그 간절함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어.


간절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어.

운명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

나는 그 힘을 믿어. 

작가 소개

박지영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2년 《심상》으로 등단 후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시집으로 『서랍 속의 여자』 『귀갑문 유리컵』 『검은 맛』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 『눈빛』(사진 시집)과 평론집 『욕망의 꼬리는 길다』, 산문집 『꿈이 보내온 편지』가 있다. 〈대구문학상〉 〈금복문화상〉(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목 차

제1부


부사•13/밤 까먹는 밤•14/속수무책•16/고요를 품어주는 말•18/나방의 문•19/봉쇄•20/그냥 온 것이 아니다•22/너의 울음을 날려 보냈다•24/말할 수 없네•25/눈 감아도 너무 멀다•26/세상이 변했다•28/날씨의 맛•30/저 꽃 어쩌나•31/나와 닮은 그녀에게•32/구월의 책•34/단단한 벽•36


제2부


정신분석 세미나•39/테이블•40/저 너머에서 빛이•42/구르는 풀•44/흔적•45/케 세라 세라•46/눈에 어른거리는 거기•48/그게 다 나였던가•50/운명은 벼락처럼•51/바람 딸•52/정로환(征露丸)•54/더 슬픈 것•56/달콤한 감기•57/사막 일기•58/주름의 힘•60


제3부


튤립나무라 불러도 튤립이 되는 건 아니야•63/미끼•64/쓴맛의 정체•66/무언가 놓쳤다•67/실종 사건•68/노래가 목걸이라면•70/나는 딸의 형상을 한 아들이었을까요•71/소리의 상(相)•72/가만히 우네•74/오늘•75/자각몽•76/아침•78/아가씨라는 말•79/문이라는 기호•80/매일 죽는 여자•82/절망을 보게 된 대가•83/연민•84


제4부


금서•87/심각한 이야기•88/이를테면 고양이•90/다 보았다고 우긴다•91/내 삶을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았지만•92/여우비•94/큰 잔치•95/그 말 때문에•96/신들의 골짜기•98/왕을 기다리며•99/그리운 토리노•100/어둠을 보고 짖다•102/하지•103/간절함은 늙지 않는다•104/자연의 역습•106/나는 늘 나인데•108


해설 고봉준(문학평론가)•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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