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고향과 같이 가는 시의 행로!
유진택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밥에 대한 예의』가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유진택 시인이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이후 30년 동안 삶을 지탱해준 문학의 궤적이 진솔하게 들어 있다. 특히 고향, 부모님, 농사와 삶의 들판과 질곡의 저수지까지 날것 그대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지게를 졌다/관절 삭아 풀썩 고꾸라질 듯했지만/기도하듯 점잖게 무릎을 굽혔다//무릎을 굽히는 것은 땅에 대한 예의//밥을 위한 길이었기에/무릎을 늘 땅에 대고 조아렸다/조아리고 난 후에는/충성을 맹세하듯 무릎을 폈다//굽혔다 펴는 것은 아버지의 오래된 신앙//팔순 동안 신앙을 지켜온 바람에/지게는 늘 무릎을 의지하게 되었다/가정이 단란한 것은 아버지의 무릎이/지게를 하늘처럼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밥을 위한 길」 전문
풀썩 퍼질러 앉아 풀을 씹을 땐/세상 욕심 다 버린 보살의 얼굴이다/무슨 생각 저리 깊게 하는지/왕방울 눈 끔벅이며 되새김질만 한다/쇠파리, 날파리들 시위하며 달려들어도/맘 좋게 꼬리 흔들며 목쉰 울음을 쏟는다
―「황소에게」 부분
아버지가 소를 앞세워 쟁기로 밭을 갈 때 한쪽에서 묵묵히 호미로 풀을 쳐내던 어머니, 머릿수건 질끈 동여매고 호미로 풀을 찍어낼 때마다 토해냈던 어머니의 땀과 한숨 소리. 그것이 애잔하게 흙에 스며들어 비옥한 밑거름이 되듯 아버지, 어머니, 지게, 소, 달, 부추꽃, 팽이, 사과나무, 철길, 장대비, 풍뎅이, 별, 빈집, 돌담, 거미, 신발 등 고향에서 그와 함께한 것들은 힘겨운 삶의 터전의 자양분이 되고 시인의 시적 토대가 되었다.
난 신도 부처도 아닌 평범한 존재/나보다 더 눈부신 태양의 얼굴이/보기 싫어/도둑처럼 어둠만 딛고 다닐 뿐이다/사람들은 내가 헤쳐 온 가시밭길을 모른다//황달기로 부어 있는 얼굴엔/계수나무 가지에 할퀸 자국이 있다
―「만월」 부분
빨랫줄에서 풍기는/물똥 냄새 지우기 위해/옷자락이 만국기처럼/펄럭였던 사실을 아느냐/비 그친 뒤 돼지 젖꼭지처럼/빗방울이 오종종 매달린 것도/빨랫줄에 아무나 앉으면 안 된다는/경고의 표시인 줄 모르나
―「인간에 대한 예의」 부분
「시인의 산문」에서 시인이 토로하듯 혼란한 시국에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감고 향수만을 좇는 시들을 못마땅해하는 시선도 있지만 “황달기로 부어 있는” 농촌 이야기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며 지켜져야 할 가치이자 여전히 유효한 숭고함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애장품처럼 끼고 다녔던 쟁기와 호미처럼 그렇게 들과 논을 오가며 거친 ‘가시밭길을 헤쳐 온’ 이유가 밥을 위한 길이었기에 그것은 농촌의 삶을 토대로 사회와 국가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경고의 표시인” 셈이다.
어미 개는 대책 없이 많은 새끼들을 싸질러 놨지만/그건 어미 개의 잘못이 아니다/봄바람이 어미 개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주인이 산책한다고 잠깐 풀어놨던 목사리를 끌고/번개같이 도망쳐 떠돌이 수캐와/하룻밤을 치르고 나왔을 때/눈물이 맺히던 어미 개의 슬픈 눈을 잊지 못한다/그 슬픈 눈이 지금도 촉촉이 눈물에 젖어 있다/다섯 마리의 새끼들을 업보처럼 달고/터덜터덜 걸어가는 어미 개 뒤로/황혼의 그림자가 설핏 내려앉는다
―「업보」 부분
유진택 시인은 생활은 곤궁했지만 시를 쓰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학지에 시를 싣는 횟수만큼 “업보처럼 달고” 있는 살림도 펴졌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숨어서 시를 써야 하는 현실은 암담했다. 그러나 “터덜터덜 걸어가”도 시를 쓰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시인은 시집을 읽고 난 사람들이 불쑥 건네는 칭찬에도 뒤통수를 긁적이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복잡한 시 말고, 꽈배기처럼 뒤틀린 시 말고, 한평생 들판에 뼈와 살을 묻은 아버지, 어머니 같은 농사꾼이 읽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를 쓰고 싶다는 유진택 시인의 다짐은 조용하지만 묵직하다. 오늘도 그의 유년을 기어 나온 달팽이 한 마리 온 힘으로 시의 땅을 밀며 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어가는 꽃줄기처럼
나도 벼랑 끝까지 기어 올라가련다
―「신발의 향기」 부분
유진택 시인의 시집 『밥에 대한 예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사라져 가는 고향에 대한 예의이다. 그동안 그는 시인의 삶 30년 동안의 궤적을 시집 일곱 권에 담아놓았다. 요즘 들어 그의 시에는 부쩍 더 고향 생각에 사무친 그리움으로 넘치고 있다. 꽃이 필 때 고통이 따르듯이 그의 삶도 때로는 고달팠다. 그의 시 목록은 매우 구체적인 세목들로 표출되고 있다. 해바라기, 솔방울, 소, 초승달, 부추꽃, 팽이, 나팔꽃, 사과나무, 달, 철길, 장대비, 풍뎅이, 별, 빈집, 돌담, 석류, 낫, 거미, 달팽이, 신발, 포도, 황소, 수저, 담쟁이 등 고향에서 그가 유년 시절을 함께한 것들이다.
시인의 고향은 힘겨운 삶의 터전, 역설적으로 시인의 시적 토대였다. 어머니의 호미와 아버지의 쟁기는 대지와 만나 건강하고 힘찬 노동의 숨결로 살아난다. 어머니 땀과 한숨 소리 아버지의 소몰이 외침이 흙으로 스며들어 비옥한 밑거름이 되어 그의 시를 키워내고 있다. 그의 문학은 철저히 전원적이고 자연적인 식물성이다. 그래서 고향의 풍경과 마을에 연루된 사물들이 날것 그대로의 숨을 몰아쉬고 있다. 오늘도 그의 유년을 기어 나온 달팽이 한 마리 온 힘으로 시의 땅을 밀며 간다. 이 완벽한 백지에의 저항, 그는 백지의 공포를 철저히 누리며 산다. 그러니 우리 어찌 유진택 시인의 『밥에 대한 예의』 없이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으랴! _김완하(시인ㆍ한남대학교 교수)
작가 소개
유진택
충북 영동군 황간면 안화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30년 가까이 대전에 정착하였다. 1996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시 「달의 투신」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텅 빈 겨울 숲으로 갔다』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다』 『날다람쥐가 찾는 달빛』 『환한 꽃의 상처』 『달콤한 세월』 『붉은 밥』이 있다. 2013년, 2016년, 2019년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2020년 현재 좌도시 회원이다.
목 차
시인의 말·05
제1부
밥에 대한 예의·13
달과 포도 1·14
달과 포도 2·15
밥을 위한 길·16
만월·17
여승의 흰 손·18
수저를 날릴 그날·19
업보·20
신발 한 짝·22
황소에게·23
탁란·24
길·26
담쟁이·27
낡은 기타·28
버들잎과 술잔·29
밀월·30
제2부
해바라기의 최후·33
솔방울·34
불청객·35
팔자 편한 소 1·36
팔자 편한 소 2·37
초승달·38
흰 부추꽃 술렁대던 길·39
제삿날·40
깡통·41
고백·42
싸구려·44
가을 부근·45
팽이 1·46
팽이 2·47
나팔꽃·48
제3부
사과나무 1·51
사과나무 2·52
엄마·53
달을 보며·54
풍뎅이·55
장마·56
별이 되고 싶어·57
인간에 대한 예의·58
어죽·60
둑길을 달리던 그때처럼·61
줄 무덤·62
숟가락의 힘·63
장대비 소리치는 밤·64
철길 1·65
철길 2·66
내 손이 지은 죄·67
제4부
석류·71
고향길·72
나무의 손금·73
낫·74
검은 노래·75
대못·76
돌의 비행술·77
거미 1·78
거미 2·80
폐선·81
태풍·82
달팽이·84
벌초 날 1·85
벌초 날 2·86
신발의 향기·87
시인의 산문·89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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