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알 수 없는 채로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하던 순간조차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해준 반짝이는 순간들
“누구도 미래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채로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행락객이 빠져나간 늦겨울의 한 바닷가, 생 토방 쉬르 메르(Saint-aubin-sur-mer)에서 작가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 있었다. “나는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문득 날이 저물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정류장으로 달려갔지만, 숙소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겨 있었다. 그녀는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을 찾아 어둑해진 길을 덤불을 헤치며 걷고 또 걸었고, 다행히도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을 찾았다. 하지만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붙은 종이들을 훑어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ATTENTION, Disparue Leopard(주의, 표범 탈출)’
근처 동물원에서 표범이 탈출했다는 경고문 아래 표범 사진과 발견했을 시의 연락처, 동물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가는 사진 속 표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생각한다. ‘표범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걸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삶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된 듯했다.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알 수 없는 채로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말이다.
실의에 빠져 나 자신을 망가뜨려 갈 때
나를 일으킨 작지만 분명한 호의들에 관한 기록
서른이 넘어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로 진로를 바꾸면서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주저앉고 싶을 때, 낯선 나라에서 서툰 언어로 자꾸만 주눅이 들 때 작가를 일으켜 준 것은 딱 필요한 그 순간의 작은 호의들이었다. 호의를 베푼 이에게는 “들꽃에 먹던 물병의 물을 살짝 부어 준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마음이었을지 몰라도, 작가에게는 몸을 일으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커다란 힘이 되었다. 실의에 빠져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속수무책으로 망가뜨려 갈 때,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반쯤 깎여 나간 자아의 빈자리를 채워”준 건 대단한 도움이나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목을 축일 수 있는 한 모금의 물 같은, 작지만 분명한 호의였음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해 여름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지치고 힘이 들 때마다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보잘것없는 들꽃에 먹던 물병의 물을 살짝 부어 준 정도의 호의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덕분에 무사히 체류 기간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내 앞에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채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를 몇 번이고 일으킨 작은 호의들 덕분이었다.” -<프롤로그>에서
잊을 수 없는 만남이 된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여성 예술가들과의 특별한 동행
《알 수 없는 채로, 여기까지》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개인전을 여는 동시에 여러 작가들과 전시를 기획하고 큐레이션하는 사진작가 레나의 첫 책으로, 우연한 마주침이 잊을 수 없는 만남이 된 순간들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사진 공부를 위해 런던과 뉴욕에 머물 때, 프랑스어를 익히기 위해 파리와 루앙에서 지낼 때, 그리고 세계 각지의 낯선 도시를 여행하면서 마주한 뜻밖의 만남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용기를 주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1부에서는 “낯선 이에게 행운을 빌어 주던” 이들과의 반짝이는 조우의 순간들을 담았다. 자신을 “‘특별한 아이’라고 불러 주었던” 아테네의 마리아, “재능도 없으면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던 작가에게 진심어린 응원을 건네주었던 하나코, 대학원 시절 “예민함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너만의 재능”이라며 북돋아주었던 나이젤 선생님……. 작가는 이들이 건넨 온기에 “어깨 위에 놓인 차가운 짐을” 잠시나마 녹일 수 있었다.
2부에서는 세상을 떠난 여성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떠난 특별한 여정을 담았다.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했던 프랑스 북부의 해안도시 노르망디에서 그녀의 영화들을 불러내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배경인 하워스에서 “청량하고 깨끗한 바람”을 맞으며 200여 년 전의 작가와 작품 속 인물과 교감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동행한 런던 거리에서는 “여자 혼자 외출을 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던” 믿어지지 않는 시대를 지나 이국의 낯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현재에 새삼 감격하며, “이러한 현재가 있기까지 길을 먼저 걸어가며 개척한 여자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딛고 있는 ‘여기’, 알 수 없는 우연이 이끈 현재 ‘나의 자리’를 가만히 돌아보게 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채로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하던 순간조차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고, 자신을 조금은 긍정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지금 마주한 사람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자신 앞에 펼쳐진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작가 소개
레나
1980년 여름 서울에서 태어났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6년 만에 간신히 졸업한 탓에 ‘외대 의대 졸업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물아홉, 처음 떠난 일본 여행에서 후지와라 신야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전시를 보고 사진의 매력에 눈을 떴다.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사진 및 일렉트로닉 아트(The Image and Electronic Arts)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시안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소수자에 대한 시선을 테마로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 오고 있다.
레나(LENA)라는 이름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자유(Liberty), 감정(Emotion), 자연(Nature), 아나키즘(Anarchism)의 머리글자를 따서 조합한 것이다.
목 차
프롤로그
1부 반짝임과 흔들림으로
사는 건 그렇게 복잡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란다
낯선 이에게 행운을 빌어 주던 그들을 위해서
나의 장소, 내 자리를 찾아서
우리가 우연히 스친 곳은
괴물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이 세계에서 여자라는 이방인으로
히말라야에서 너를 보낸다
그런 장면들을 더 많이 갖고 싶어서
내 언 몸을 녹여 주었던 작은 입김들
한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표정만을 짓지 않는다
우리를 움직이는 건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도 나는 길 위에 서서
2부 안녕, 고마웠어요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한 해변
에밀리 브론테의 언덕에서
빨간 머리 앤이 살았던 그 집엔 앤이 없다
버지니아 울프와 런던 거리 쏘다니기
에필로그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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