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트루바도르의 랩소디 혹은 크리스티아냐
― 정현우 시집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춘천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현우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를 펴냈다. 달아실시선 59권으로 나왔다.
지난 3월 그림에세이 『물병자리 몽상가』를 펴냈을 때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정현우 시인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정현우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셀 수 없이 많다. 자유인, 보헤미안, 집시, 아나키스트, 노마드, 화가, 시인, 디제이(DJ), 가수, 이방인, 경계인, 장돌뱅이, 몽상가… 물론 이 모든 단어를 합쳐도 그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그는 음유시인(troubadour, 吟遊詩人)이다. 사람들은 그를 트루바도르라 부르고 그의 시를 트루바도르의 랩소디라 부른다.
소설가 김도연은 정현우와 그의 시를 일러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형을 처음 본 곳은 어디였을까. 아마 여러 형들이 모여 있는 술자리였을 것이다. 여러 형들 중 형의 웃음소리는 단연 특이해서 한동안 만나지 못할 때에도 형을 생각하면 웃음소리부터 먼저 떠올랐다. 유목을 하듯 떠도는 그 웃음을 따라가면 형은 어김없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춘천의 카페들에서, 양구 사명산 아래의 움막에서, 박수근미술관의 작업공간에서, 화천의 어느 골짜기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바둑을 두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시를 쓰고 있었다. 그곳들은 형의 크리스티아냐였는데 찾아오는 손님들이 다양했다. 예순아홉 편의 시를 필사한 푸른 노트를 간직하고 있는 체 게바라, 밥 딜런, 제니스 조플린, 로트레아몽, 춘천의 진이정, 지미 헨드릭스, 캥거루를 닮은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레오나드 코헨, 에드워드 호퍼, 그리고 붉은점모시나비…… 그곳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기 그지없어 내비게이션은 쉬지 않고 경고를 반복한다. 미끄럼 주의 지역입니다. 급커브 지역입니다. 낙석 주의 구간입니다. 과속 단속 구간입니다. 사고 다발 지역입니다. 추락 주의 지역입니다. 형은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그곳에 홀로 남아 텔레비전을 끄고 클래식 채널 에프엠 라디오를 켠다. 문도 잠그지 않고 자리에 누워 담벼락에 간디와 체 게바라, 밥 말리가 그려져 있는 멀고 먼 코펜하겐 외곽의 크리스티아냐를 꿈꾼다. 이 시집은 그곳으로 가기 위한 현우 형의 마지막 비상구다.”
소설가 이순원은 또 이렇게 얘기한다.
“슬픔이든 농담이든 그의 시는 그림부터 떠오르게 하고, 거기에 그만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언젠가 하창수 작가와 함께 정현우의 시에 대해 얘기하며 그의 시나 에세이는 분명 소설 같은데 그는 왜 소설을 쓰지 않고 짧은 시만 쓸까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노래를 부르느라 바빠서’였다. 우리가 그런 농담을 서슴없이 할 만큼 자기 가슴 안에, 그리고 한 줄 한 줄 시적 표현 안에 많은 이야기를 가진 시인이 이 세상에 어디 흔한가. 그리고 그런 그의 이야기가 내게는 너무도 나의 이야기 같고 친구 이야기 같고 한동네 형들과 동생의 이야기 같다.”
붉은점모시나비가 손등에 내려앉았다
산 나비와 살을 맞대다니
내 살에서 이끼처럼 소름이 돋았다
나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워지려고 얼마나 애를 쓴 걸까
군데군데 붉은 멍이 들었다
붉은점모시나비가 날아간
접도蝶道 끝에 문신 가게를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 손목에
나비문신을 새겨주고 싶었다
별박이세줄나비 눈많은그늘나비 청띠신선나비
나비를 새기다 보면
내 오랜 슬픔도 아름다워지겠다
― 「붉근점모시나비」 전문
그는 이 별이 죽어가는 게 슬프다며 “별박이세줄나비 눈많은그늘나비 청띠신선나비”를 온몸에 새기는 사람이다. 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1956년 숲에서 사라”진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를 이제는 “영영 만날 수 없다”며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 슬픔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음유시인 트루바도르다.
“(정현우는) 밥 말리가 그려져 있는 멀고 먼 코펜하겐 외곽의 크리스티아냐를 꿈꾼다. 이 시집은 그곳으로 가기 위한 현우 형의 마지막 비상구다.”라는 김도연 소설가의 말은 정확하고 적확하다. 음유시인 정현우가 펴낸 두 번째 시집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를 읽어보면 안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쩌면 당신도 코펜하겐 외곽의 먼 크리스티아냐를 꿈꾸게 될지 모르겠다.
■ 달아실출판사는…
달아실은 달의 계곡(月谷)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달아실출판사”는 인문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종합출판사입니다. 어둠을 비추는 달빛 같은 책을 만들겠습니다. 달빛이 천 개의 강을 비추듯, 책으로 세상을 비추겠습니다.
작가 소개
정현우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1995년 <풀잎> 동인 시집에 「눈 내리는 식탁」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04년 시화집 『새들은 죄가 없다』를 필두로 인문교양서 『대마초는 죄가 없다』, 그림 산문집 『그리움 따윈 건너 뛰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지울 때』, 『물병자리 몽상가』, 음악 에세이집 『춘천 라디오』, 그림엽서집 『꽃과 밥』까지 모두 7권의 책을 냈다.
1997년 <겨울 강 건너기>전을 시작으로 2021년 <토템의 재인식>전까지 21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3년 <제1회 평창비엔날레>를 비롯한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4년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동화 일러스트 <도깨비랑 수수께끼 내기>가 수록됐다.
목 차
시인의 말
1부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
수복지구 아이들 ― 폭발물
수복지구 아이들 ― 포 사격장에서
수복지구 아이들 ― 지뢰 탐지기
수복지구 아이들 ― 꽝
수복지구 아이들 ― 꿈길
마지막 생물 수업
아날로그적 구제역
2부
국외자局外者의 비극
새
가장家長
한 소식
목디스크
꿈
사소한 소식
단식
추운 곳
진이정을 읽는 밤
진눈깨비
3부
적요의 카르텔
민달팽이
실업의 눈
행려병
행복식당
친구의 사십구재
월풀 빨래방
인명재천
고독사의 품격
동묘
노숙자
짐
하루살이
노자老者가 됐다
4부
어린 날의 허수아비
이별
늙은 소녀
인생길
헬조선
우는 江
엄마의 칼국수
김유정역 ― 기억
겨울 애인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핑계
소식
5부
붉은점모시나비
초여름의 낙엽
진이정과 보낸 2015년 가을, 춘천
박희선의 도끼
항우울제
시를 필사하는 혁명가
고흐의 귀
통기타를 치게 된 이유
김유정역 ― 야학이 있던 자리
낙타
혹시 나 역시 나 말고
영혼
이상향
발문_ 같은 인생학교의 같은 반 친구에게 · 이순원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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