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사소한 우연에 깃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몸짓,
귀 기울이면 가뿐히 경계를 넘어오는
낯선 세계의 말들
김준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이 민음의 시 302번으로 출간되었다. 철학적인 사유가 깃든 감각적인 시 세계가 돋보인 첫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시집이다. 첫 시집에서 김준현 시인이 인간과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서 역사와 언어, 종교와 사랑이라는 거대 관념들을 조망하고 사유하고자 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그 관점을 완전히 반전해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지금 여기에 단단히 발붙이고 산책하는 시인이 밀려드는 풍경과 소리에 집중하며 기다리는 것은 온갖 사소한 우연들, 우연에 깃든 가장 작고 낯선 존재들이다.
시인은 모국어 대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허밍, 소음이 들리도록 소리를 키운다. 눈앞의 풍경을 그대로 보지 않고 중력, 온도, 운명, 유령의 모습이 보이도록 명도와 채도를 바꾼다. 시인이 자서에서 밝혔듯 “이것은 싱크로율을 맞추는 작업”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도록 조율해, 인간이 기록해 온 역사의 빈틈 혹은 역사 바깥의 과거와 미래의 흔적과 징조를 감지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다. 자신의 전생을 보려 사슴 탈을 쓰고 춤추는 아이처럼 사랑스럽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시인은 인간의 역사와 문명 너머를 건너다본다. 세밀히 기록한 그 풍경을 이제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 산책자와 우연
시인은 호기심 많은 산책자의 무구한 시선으로 일상의 풍경과 마음을 바라본다. 시작 노트의 첫 문장에 밝힌 “눈에 자꾸 밟히는 것들이 있다”는 마음은 “눈에 밟히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엉뚱한 질문으로 이어져, “비스듬히 일으켜 세운 펜, 초가을의 햇빛” 같은 일상의 풍경을 지나 “슬픔/ 슬하의 사랑/ 슬슬 시를 쓰고 싶은”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되돌아온 그곳에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축복받는 기분으로/ 시작하는” 마음이 새로이 돋아나 있다. 여기에서의 ‘시작’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일의 처음’을 떠올리게도, ‘시를 짓는 일’을 떠올리게도 한다. 어느 쪽으로 받아들이든 그것은 독자의 자유라는 듯 시인은 부연하지 않는다. 시인이 말놀이하듯 자유롭게 떠오르는 언어와 이미지를 따라나서면, 그 산책길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생각과 말 들이 녹아들어 시가 된다. 그래서 김준현의 시는 소소하고 즐거운 발견들이 이어지는가 싶다가도, 풍선에 깃든 귀신, 포도 한 송이의 전생처럼 낯설고 기이하며 때로는 곤혹스러운 장면이 등장해 예측을 뒤엎는다.
이렇게 우연을 향해 문장의 마침표를 활짝 열어 두는 시인의 시 쓰기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각각의 조상을 가졌을 테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며 모두 뒤섞여, 새로운 이름과 외모를 갖게 된 금붕어들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피는 할아버지의 피와 할머니의 피로부터/ 종이 달라진 새끼를 알아볼까?”(「보디랭귀지」) 시인에게 ‘역사’는 ‘피’와 같이 위에서 아래로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며 이어지지만, 세대를 거듭하며 우연에 의해 뒤섞이고 분열하며 필연적으로 과거와 달라지고 분리되는 것이다. 우연의 개입은 미래를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예측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김준현 시인은 섣불리 미래에 대해 말하는 대신 지금 여기의 우연들을 구석구석 돌아보자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지금 우리는 무엇과 함께 뒤섞이고 분리되며,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해 보자고.
■ 보디랭귀지
김준현의 시에는 말과 글이 아닌 ‘몸짓의 언어’들이 곳곳에 주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줄지어 걷는 난민의 모습, 공중전화를 붙든 외국인의 입 모양과 표정, 죽은 금붕어를 어항에서 건져 내라는 손짓과 발짓, 머리카락을 숨긴 무슬림의 터번 등 곤경에 빠진 자의 몸짓이나 믿음을 드러내는 외모는 감출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그 마음과 정체성에 시선을 오래 둔다. 드러나는 방식만으로 말을 건네는 ‘표면’은 김준현 시인에게 다른 세계로 향하는 열쇠가 된다. 하지만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다른 세계’는 번역 없이 쉽게 오갈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하다. 이국에서 “이 나라의 공기는 내가 입을 다문 채 한국어로 하는 생각 속에서 적나라”(「에그」)하지만, 그 생각을 모국어로 입 밖에 내는 순간 의미 없는 소음이 되어 흘러가 버린다. 이곳에 온 외국인의 말 또한 처지가 다르지 않다. 소음이 되어 흘러갈 뿐 이해될 수 없는 그 말들은 ‘표면’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소통의 실패가 예고된 바로 이 표면 위에서 다만 ‘입을 맞추길’ 선택한다.
모르는 말들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들리는 대로 따라 읊조려 본다. ‘바다’를 뜻하는 러시아어 ‘море’가 그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모래’와 ‘모레’를 떠올리게 해도, ‘나’는 오독과 오해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 “나를 잃을 때까지 발음”(「문」)한다. 경상도 지역의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무슬림 여인들의 어색한 한국어 억양은 러시아어를 연습하는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모르는 말을 무작정 따라 하며 낯선 세계를 받아들인 흔적이다. 그 앞에서 시인은 짙고 강한 선으로 그어 놓은 듯한 그들의 얼굴, 그들의 국적을 드러내는 표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나’와 그들의 내면에 들어서 버린 낯선 세계들, 이제는 한 몸이 되어 버린 낯선 정체성의 조각을 가만히 매만진다. 뾰족하고 부드러운 조각의 면면을 세밀하고 선명히 감각한다.
■ 시작 노트
눈에 자꾸 밟히는 것들이 있다: 눈에 밟히면 어떤 느낌일까?
비스듬히 일으켜 세운 펜, 초가을의 햇빛, 흰머리오목눈이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손, 사랑하는 이의 양치질 소리, 6층에서 내려다보는 목련 나무, 봄비와 비닐우산의 결혼식, 동향의 창에서 홀로 빛나는 별, 눌변의 이탈리아어와 뒤처진 자막, 하이픈, 어린이들의 목소리, 아침 이슬
슬픔
슬하의 사랑
슬슬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쓸쓸해져서
미역국을 먹는다.
미역국은 한 사람이 태어났음을 축하하는 나라다.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축복받는 기분으로
시작하고 맺고 다시 시작한다.
작가 소개
김준현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2015년 《창비 어린이》 신인상(동시), 2020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문학평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나는 법』 『토마토 기준』, 청소년 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가 있다.
목 차
1부 태양을 똑바로 본다
흼 13
커피와 영혼 14
매일 화성을 바라보기 시작한 너의 구조적 결함 16
어디를 보다가 이제 옴 19
멍 때리기 22
장밋빛 얼굴 25
비 동아리 28
보디랭귀지 30
보디랭귀지 32
금속성 음악 33
핸들 36
명왕성 38
세로로 길어서 사람 사는 바닥에 닿을 것만 같은 시 40
лето 44
2부 노래졌다는 말이 좋았다
제일 처음 배우는 apple 49
두구탄성 52
9는 무슨 수를 써도 9 56
어디로 자라기 60
에그 62
여기는 계란의 내부 64
중요한 곳에 중요한 것을 놓기 67
방언 70
스탄 친구들 72
이토록 멋진 곤충 76
필담: 파란 볼펜과 연필 79
3부 0.28 내 영혼의 가늘기
삼풍로 85
Black on Grey 88
잘 표현된 불행 90
단 한 글자가 비었다고 말했다 — 공空 94
다윗의 별이 아닙니다 96
경계심이 흐려질 때 98
우리의 소원은 통일 100
당신의 세계였던 신체에서 103
호두 까기 106
4부 계속 새 꽃을 두는 마음
기상청에 대한 믿음 109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112
드라카리스 115
유리 밖에 118
붕어빵 고딕체 120
아무도 쉬라고 하지 않았다 122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125
겨울 128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130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133
목요일 — 눈빛은 빈 자리 136
문 138
사슴 탈 141
시작 노트 143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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