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캄캄한 밤, 어디선가 낯설고도 낯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불안에 잠식당한 자신을 외부의 내가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설화에서나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폭력적 현실이 가감 없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기도 하다. 이를 단순히 환청, 환각, 환시 등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은 로즈메리 잭슨이 『환상성:전복의 문학』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환상적인 것은 기표와 기의 간의 분리이자 현존을 부재로 대체함으로써 비의미화의 영역, 즉 죽음을 끌어들여 그것을 극복하려는 움직임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죽음은 존재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욕망을 상실하게 된 어떤 상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존재는 자신을 상실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정온 시인의 시에서처럼 주체의 불안을 야기하는 내적 풍경의 양태로 재현되기도 하며 존재를 둘러싼 세계와의 불화를 극화된 형식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중략)
정온 시인의 이번 시집의 주된 정조를 어둠이라 보았다. 그 어둠 속에는 뜨겁게 빛을 발하는 붉음의 정념이 깃들어 있다. 일견 자조적이기도 하고, 자학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어설프게 환한 빛으로 꾸민 자기 위안으로서의 기만을 수행하는 것보다 불완전한 그래서 불안한 존재의 심층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통합된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에 내몰리며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불안에 휩싸이는 분열증적 주체일 따름이다. “불쑥 하수구 맨홀 바닥 같은 후회와 미련이 목젖까지 차올라 씻어내자고 독주를 붓고 붓”지만 “가진 것 모두 걸”어본 적 없이 다짐만을 반복하는 무력한 주체(「소설」). 정온 시인은 어쩌면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라고 하는 듯하다.
― 이병국(시인, 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중에서
작가 소개
정온
서울 태생이나 전북에서 오래도록 자랐고 지금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 2008년 『문학사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 『오, 작위 작위꽃』이 있다.
목 차
제1부
잠귀 / 가는귀 / 소리들 / 고장 난 피아노 / 이명 / 손톱을 먹고 자라는 꽃에 대한 이야기 / 오동잎 한 잎 두 잎 / 환절기에 듣는 동화 / 창고의 문 / 오블리비아테 / 중첩 / 슬픈 사과
제2부
이 냄새의 기원 / 당신의 코사지, 우리는 / 싹이 파랗다 / 울어라 우크라이나 / 각다귀전 / 군계일학 / 검은 비닐봉지의 추억 / 신각다귀전 / 골몰과 골똘 / 전설 / 아르페지오 /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제3부
또 다른 관점으로 / 전망 좋은 곳 / 종이 인형 / 갑자기 / 소행성 / 이상한 나라에 온 / 풋잠을 말아 피우고 금성엘 간다 / 이상한 나라에 온 / 철이 들다 / 난간 / 시들시들 / 11월의 밤 / 말일
제4부
만첩홍도 / 살랑, 봄 / 변동림 / 시든 꽃 / 너의 이름 / 초설에게 / 슬리퍼 같은 / 음력 8월 / 먼지들 / 소설 / 반성과 공상이 따르는 가벼운 슬픔 / 손을 꼭 쥐면 / 십장생
작품 해설 : 어둠을 살피는 마음의 지평-이병국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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