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어떻게 태어날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어떤 존재로 살아갈지는 결정할 수 있다”
─백수린 소설가 추천
“나는 작가이기 전부터 번역가였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줌파 라히리의 오직 번역에 관한 산문집
데뷔작 『축복받은 집』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국가인문학메달(National Humanities Medal)을 받은 줌파 라히리. 자신만의 문학적 영토를 넓혀나가던 작가는, 장편소설 『저지대』를 출간한 뒤 이탈리아어로만 글을 쓸 것이라 선언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올린 그가 ‘안전한’ 길을 뒤로하고 제2의 언어로 달아나는 도전을 감행한 것에 대한 걱정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줌파 라히리는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시작으로, 『책이 입은 옷』 『내가 있는 곳』 『로마 이야기』까지 차례차례 이탈리아어 작품을 선보이며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은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에 몰두해 있던 시기, 미국에서 처음 출간한 산문집이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연대순으로 배치된 에세이에는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세 작품을 번역하며 쓴 서문과 후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중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로 보는 원작과 번역의 관계, 안토니오 그람시와 이탈로 칼비노에 관한 탐구, 번역 노트, 강연 발제문 및 연설문 등이 망라되어 있다. 처음부터 영어로 쓴 글도 있는가 하면 이탈리아어로 썼던 글을 영어로 옮긴 글도 있어, 줌파 라히리는 “본질적으로 이중언어 텍스트”라고 이 책을 소개한다.
인도계 미국인인 그는 벵골어와 영어의 이중언어 작가로서,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서 벵골어로 대화하는 인물들을 영어로 옮겨 써야 하는 번역의 딜레마를 토로하며 자신은 “작가이기 전부터 번역가였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라고 고백한다. 어느 쪽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내가 진정한 모어를 갖지 못한 작가라는 자각,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 고아라는 느낌”을 받아온 줌파 라히리는, 이 책에 번역과 ‘자기번역(self-translation)’을 배우고 숙고하는 시간을 기록할 수 있었다. 글쓰기와 번역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성찰의 경험으로 가득 찬 글들은 번역가 줌파 라히리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건 아울러 번역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작가이기 전부터 번역가였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 나는 영어와 벵골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생활환경에서 자랐고, 이건 곧 나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이 두 언어를 끊임없이 번역해왔다는 의미였다.
─서문에서
“이탈리아어는 나에게 제2의 삶,
또 다른 인생을 안겨주었다”
나 자신을 번역하며 깨달은 자유의 감각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로 연이어 책을 출간한 후에도, 몇몇 이탈리아어 모어 사용자들에게 끊임없이 왜 ‘너의’ 언어가 아닌 ‘우리’ 언어로 글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마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의 에필로그처럼 느껴지는 첫 번째 에세이 「왜 이탈리아어인가」에, 로마에서 느낀 “이탈리아어가 내 것이 아니”라는 소외감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느냐’는 물음에 랄라 로마노와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에서 발견한 몇 가지 은유를 들어 답한다. 줌파 라히리에게 이탈리아어는 “눈부신 장관을 펼쳐” 보이는 “문”이며, “취약함을 실험”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실명”이며, 새로운 문화/언어에 뿌리 내리는 “접목” 행위에 다름없다.
왜 이탈리아어냐고?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문을 열려고, 다르게 보려고, 나 자신을 다른 존재에 접목해보려고.
─44쪽
한편,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 작가이자 친구인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소설 『끈』 『트릭』 『트러스트』를 번역하면서 명실상부한 번역가로 거듭난다.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에는 이 세 작품을 옮긴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서문과 후기도 담겼다. 줌파 라히리는 단어를 선택하는 일과 문화적인 맥락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텍스트에 대한 사랑을 충족시키기에 번역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줌파 라히리가 번역가로서의 자의식과 언어적인 지평을 더욱 확장하게 된 것은 자신이 이탈리아어로 쓴 『내가 있는 곳』을 직접 영어로 번역하면서다. 그는 자기번역이란, 양쪽 텍스트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지면에 쓰인 낱말 하나하나의 유효성을 의심하도록” 강요받는 “가혹한 행위”이며, 작가는 “원본과 파생본의 서열이 해체”되는 경험을 통해 자기 작품의 약점을 발견하고 오류를 바로잡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글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꾸면서 스스로 “깊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짜릿함에 대해서도 주지한다. 이처럼 줌파 라히리는 자기번역을 반추하면서 번역 행위의 본질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 작업에서 얻는 즐거움과 경이까지 고스란히 담아낸다.
나에게 이탈리아어 번역은 내가 사랑하는 언어와 멀리 떠나 있을 때 그 언어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번역한다는 건 한 사람의 언어적 좌표가 달라지는 일, 놓쳐버린 것을 붙잡는 일, 망명을 견뎌내는 일이다.
─115쪽
“나는 번역한다, 고로 존재한다”
번역은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그중 에코와 나르키소스 신화를 비유 도구로 삼은 번역에 대한 성찰이다. 에코는 “남들이 한 말의 마지막 한 토막만을 따라” 하지만, 줌파 라히리는 그에게서 복제를 넘어 “경청하고 복원하는” 열정적인 태도를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번역은 단순히 원작을 “반복”해서 “파생”시키는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상상력과 독창성과 자유로움을 요하는 연금술”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번역을 문학의 보조적인 행위로 취급하는 인식에 경종을 울린다.
모든 번역은 다른 무엇도 아닌, 변신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 일정한 특성과 요소들이 떨궈지고 다른 것들이 얻어지는, 과격하고 고통스럽고 경이적인 변화로 보아야 한다.
─77쪽
줌파 라히리가 존경할 만한 번역가로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인물은 안토니오 그람시다. 그는 그람시가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쓴 편지와 수고(手稿)를 읽으면서 다양한 언어와 번역에 대해 지속적이고 끈질긴 관심을 보이는 그람시란 인물을 분석한다. 문화와 언어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는 줌파 라히리에게 번역에 끝없는 열망을 보이는 그람시는 이상적인 번역가로 인식된다. 또,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였던 이탈로 칼비노를 번역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그에게서 “두 개의 텍스트, 두 개의 목소리를 연주하는 번역가의 감성”을 발견한다.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은 어느새 번역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게 된 줌파 라히리가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앞에 두고 써 내려간 글들을 엮은 것이다. 수년간 글쓰기와 번역과 언어에 천착해온 그는, 자신의 기원을 돌아보며 “늘 번역하는 사람이었음을 거듭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번역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지지자인 그의 풍부한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문화와 문학의 중심에 놓여 있던 번역의 존재, 그리고 언어의 생생함을 깨닫게 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줌파 라히리
1967년 영국 런던의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곧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드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 바너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보스턴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같은 대학에서 르네상스 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첫 소설집 『축복받은 집』을 출간하며 그해 오헨리 문학상과 펜/헤밍웨이상을,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03년 출간한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뉴요커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로 뽑혔고 전미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2008년 출간한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은 프랭크오코너 국제단편소설상을 수상했고 〈뉴욕타임스〉 선정 ‘2008년 최우수 도서 10’에 들었다. 2013년 두 번째 장편소설 『저지대』를 출간했다. 가족과 함께 로마에서 거주했던 경험을 계기로 이탈리아어로 쓴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책이 입은 옷』, 소설집 『내가 있는 곳』 『로마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프린스턴대학교를 거쳐 현재 바너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생활 중이다.
옮긴이 : 이승민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화와 문학 학제간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게일 콜드웰의 『먼길로 돌아갈까』, 로버트 맥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전 3권), 샘 밀스의 『돌보는 사람들』, 거트루드 지킬의 『지킬의 정원』,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등이 있다.
목 차
서문
왜 이탈리아어인가
통_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끈』 서문
병치_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트릭』 서문
에코 예찬_번역의 의미를 고찰하며
기원문에 부치는 송가_어느 번역가 지망생의 메모
나를 발견하는 곳_자기번역에 관하여
치환_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트러스트』 후기
그람시의 ‘트라두치온’_통상적 이감과 특별한 번역에 대하여
언어와 언어들
이국의 칼비노
후기_변신을 번역한다는 것
몇 가지 메모
옮긴이의 말
부록
참고 문헌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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