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입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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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양지미
출판사항시인동네, 발행일:2023/12/08
형태사항p.118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8966263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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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사람이 온다는 것에 대한 희망


2012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양지미 시인의 첫 시집 『사라진 입술들』이 시인동네 시인선 221로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십여 년의 잠행을 끝내고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양지미 시인의 이 시집은 ‘간결함의 극치’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말[言]이 난무한 작금의 세태에 대해 ‘말씀’으로서의 시가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듯 양지미 시인은 과장된 언어를 극도로 자제하며 시의 본질을 찾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그 여정에 누구나 공감하게 될 것이다.


■ 해설 엿보기


정직한 정념에서 출발한 정체성의 시적 여정


그런 날들이 있었다.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지던 때가. 이제는 꿈을 깨고 “시시(視視)했으나 시시해진 사랑이란 것을 알아버려서”(「사춘기」) 입 밖에 못 낼 대담한 고백을 수백 번 속삭이고도 성에 차지 않아 밤새 연애편지를 쓰던 시절이.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하얀 블라우스에 오렌지색 핫팬츠를 입은 싱싱한 여자”를 등에 업고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의 얼굴이 얼마나 붉었을지. “한 계단씩 걸음 옮길 때마다/뭉클한 가슴이 그의 등으로 그렇게 옮겨 앉았을까” 하는. 그래서 남자는 “몇 날 몇 밤 꺼지지 않는 가슴 때문에” “한동안은 엎드려 잠들지도” 모르겠다고. 아마도 한동안은 “박자를 놓쳐 허둥대는 심장과 땀으로 끈적이는 손바닥”(「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겠다고. 하지만 모든 열정이 그러하듯이 서로를 향해 피어올랐던 불꽃도 촛농만 남기고 사그라진다. 양지미 시인은 빛과 열기를 사방에 흩뿌리던 젊음의 순간이 지나가고 난 이후의 시간을 뒤쫓는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때엔 사랑이 보이지 않아서 우리는 더더욱 빛과 열기의 순간을 무심코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찬란한 순간을 잊지 못해 오랜 잔상을 자신 안에 새긴다. 빛나던 순간들이 사그라들다 마침내 무심한 바람결에 꺼지는 광경은 언제나 슬프기 때문이다. 오래된 슬픔을 머금고 시인은 묻는다. 순정을 맛볼 수 있는 시절은 왜 이리 짧은 것일까? 그녀는 “나도 한때 사람 하나 머금은 적 있는데/삼킬까 뱉을까” 망설이다 “그때 삼켜버린 몇 날 몇 밤 불러내/아직은 난청인 그들의 귀에” 노래하듯 불러보려 한다. 그녀가 아무리 “쓰라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려 해도 “죄책감 없는 바람이 무작위로 들추”어 내 “푸르게 피어날 속수무책 그대들”(「흰 책」)을 말이다.

그것은 시인이 “입술은 사라지고 입만 남은 사람들”이 많은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서이다. 입술은 말하는 것, 먹는 것, 감각을 느끼는 것, 키스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입술은 우리가 의식의 길에 들어서기도 전에 처음 나타나는 순수한 감각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순수한 의미에서의 감각이란 거의 실현될 수 없는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실현 불가능한 순수한 감각을 “첫 키스”의 “터져버린 입술”과 남녀가 정사를 위해 우르가를 세울 때의 “설레는 맘”으로 구체화한다.


보았니?

탑골공원 가면

입술은 사라지고 입만 남은 사람들 많잖아


두툼했던 첫 키스는 터져버린 입술 때문에 들통났고

한동안 저 혼자 부풀어 있었잖아


높다랗게 우르가를 세우고

설레는 맘으로 빗장을 풀었잖아

기다렸다는 듯 입속에서 터져 나온 말의 씨앗들

소리 없이 입술을 핥기 시작했잖아

붉어진 씨앗들은

선명한 테두리까지 야금야금 갉았잖아


배부른 아이들은 떨어져 나가고

쭉정이들은 뱃속에 남아 똑같은 노래를 불러댔잖아

조금씩 배가 부풀어 올라 쓸데없이 수확을 걱정했잖아


아버지 돌아가실 때쯤 거울 속의 귀가 자란다고 하셨잖아

산란에 실패한 입술 조각들

뒤늦은 고해성사처럼 귓불을 부풀게 한다고 하셨잖아

우르가의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그의 입술 그늘도 지워졌잖아

어느새 귀가 자라고 있었잖아


얼굴을 한껏 부풀리며 울어도

입술은 입술로 돌아오지 않았잖아


저기 봐!

우두커니 입술 지워진 사람들

― 「사라진 입술들」 전문


젊음이 생동하던 생의 초기에나 가능한 순정한 감각들은 기억과 습득이 많아지면서 “입속에서 터져 나온 말의 씨앗들”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말의 씨앗들”은 “소리 없이 입술을 핥아” 입술의 붉은색과 테두리를 야금야금 갉아 먹고는 입술의 순수한 기능과 형태를 없앤다. 더욱이 말의 씨앗에서 나온 쭉정이들은 상투적 언어로 “똑같은 노래”를 불러대느라 아버지의 귀만 자라게 한다. 이제 “우르가의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입술 그늘”도 지워지고 “입술은 입술로 돌아오지” 않는다. 입술의 상실은 젊음의 상실과 불가피하게 연관되어 있다. 감각의 순수함과 반짝이는 색채를 잃어버리는 것. 그러나 시인 양지미는 젊음을 지나오고도 그 순수한 시각의 내밀한 전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보인다. 그녀는 포장된 언어로 주어진 길을 가기보다는 세계가 지닌 본래의 감각과 인간다움의 미로를 탐색하고 싶어 하는데 이번 시집에서 그녀는 그러한 것들을 종종 후각적 심상으로 드러낸다.

― 장예원(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양지미

2012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사라진 입술들』이 있다.

목 차

제1부

말을 먹는 귀•13/전지적 관찰자 시점•14/불멸의 호객행위•16/담쟁이•18/롤리타 렘피카•19/찾아온다는 말•20/나무의 모세혈관•22/시소게임•23/사라진 입술들•24/임대차 계약•26/다산의 이유•27/프러포즈•28/엄마의 오월•30/오래된 부케•31/죽지 않는 나무•32/이름이라는 제목•34


제2부

원죄의 재구성•37/비린내•38/청첩•40/봄날의 이삿짐•42/밍크는 힘이 세다•43/나는 왜 미안한가•44/슬픈 몸은 옆으로 눕는다•46/말•47/흰 책•48/그래도•50/묵음•51/흉터•52/나비•54/두근거리는 쪽으로 걷다•55/포장•56


제3부

휘파람•59/소화불량•60/배관의 사회성•62/눈[眼]의 연금술•63/노거수•64/미역•66/입술의 칼•67/은빛노인대학•68/바닥•69/사춘기•70/오늘의 식목•72/방부목•73/선흘 미술관•74/계단의 단계•75/결심을 결심하는 까닭•76


제4부

맹그로브 숲•79/사람•80/양팔저울•81/엉덩이의 인격•82/이번 감기는 너무 지독해•83/아스팔트의 눈물•84/입에 발린 소리•86/오동나무•87/책갈피•88/쿨하지 못해 미안해•89/회춘•90/호박꽃 그 열매•91/잉여인간•92/변명•93/등급을 묻습니다•94/시선 집중•95/X‐ray•96


해설 장예원(문학평론가)•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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