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많은 의사가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관계다”
경험과 감정으로 굽이진, 환자의 인생 전체를 따라간 궤적
다큐멘터리 감독 폴리 몰랜드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자신의 엄마의 집을 정리하다 책장 뒤켠에 떨어진 책 한 권을 발견한다. 1967년에 발행된 《행운아》. 《행운아》는 영국의 작가 존 버거가 사진 작가 장 모르와 함께 당시 영국의 한 시골 마을의 의사와 환자의 삶을 따라간 6주간의 시간을 담은 책이다. 폴리 몰랜드는 책을 보다가 그 배경이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불현듯 5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난 현재 같은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의사를 떠올리며 의문을 품는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의사와 환자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야기는 폴리 몰랜드는 존 버거를 따라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속으로 들어가며 시작한다. 그는 그들의 일상을 밀도 있게 관찰하며 사회와 의학이 급변하는 오늘날 의사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한다.
폴리 몰랜드는 자신이 마주한 장면에서 인간의 고통과 외로움을 길어 올린다. 그리고 예전에는 당연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환자와 의사, 그 관계의 상실을 발견하다. 우리는 ‘우리’를 회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책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세기를 잇는 두 의사, 하나의 이야기
이 책은 두 의사를 다룬다. 존 버거 《행운아》가 쓰인 1960년대의 의사와 코로나 전염병이 몰아닥친 2020년대의 의사. 《행운아》의 의사 ‘존 사샬’은 환자를 치료하는 데 평생을 몰두한 의사였다. 도로 위에서 절단 수술을 하거나 부엌에서 맹장 수술을 하고 이웃의 아기를 직접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따뜻하고 인자한 성정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입이 거칠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어서 ‘괴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존 사샬을 좋아하고 존경했다. 환자가 원하면,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 어디든 달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년이 훌쩍 넘은 2020년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의사. 이 의사는 곧잘 선을 넘는다. 환자의 집 앞에서 환자를 기다리기도 하고, 환자의 담벼락을 넘기도 하며 환자의 집문서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서류들을 보기도 한다.
심장 마비 초기 증상을 가볍게 넘기려는 환자를 큰 병원으로 보내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린다. 환자의 집으로 왕진을 하러 가는 날에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들어가지 못하면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걸어서 그 집 담벼락을 넘기도 한다. 이웃 간의 증축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 노여움이 가득한 환자 앞에선 환자가 건넨 집 건물의 소유 증서 등 온갖 서류들을 보며 환자의 하소연을 듣는 날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예방 접종으로 사람이 몰리는 날에 눈이 많이 내려 연로한 환자들이 미끄러질까 노심초사하며 그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
존 사샬의 시대에는 지역사회의 개인, 또는 가족이 한 일반의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영국 정부가 100퍼센트 지원해 주는 국가보건서비스(NHS)가 자리를 잡고 있을 때다.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그게 기본인 시대였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영국을 탄탄하게 지탱하고 있던 국가보건서비스는 위기에 처했고, 환자를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하기란 개인의 역량으로 역부족인 상황이다.
“1차 병원들이 이미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들의 사회적 결핍을 채우는 데 휘말리는 일은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도 이 시골 의사는 마을 위 너도밤나무 숲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떨리는 감정을 느낀다. 양측이 주고받은 도움이 얼마나 단순한 대칭을 이루었는지 떠올려본다.”(35쪽)
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50년이라는 그 세월의 흔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현재 의사는 존 사샬처럼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 인생이 더 나아질 수 있는지 그 인생 전체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반세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으로 길어 올린 인간의 고통과 상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9살 아이가 아니라, 90세가 훨씬 넘은 할머니의 잠옷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마을의 강과 숲에서 때로는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때로는 그 마을을 지키는 훌륭한 어른의 모습을 본다. 자동차 시동을 끄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밤나무를 바라보는 의사, 저녁이면 헤드 랜턴을 쓰고 숲을 달리는 의사에게서 말하지 않는 슬픔을 본다.
BBC 채널4, 디스커버리에서 15년 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폴리 몰랜드는 꼬박 일 년 열두 달 동안 의사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을 섬세한 감각으로 그렸다. 코로나 전염병이 닥쳐 봉쇄되던 시기에는 일어나는 일들을 전해 들으며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폴리 몰랜드는 의사와 환자가 나누는 대화에 귀 기울이면서도 시선은 그들의 눈빛과 손짓 그리고 말 사이의 침묵을 담는다. 여기에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리처드 베이커가 진료실, 마을의 풍경, 텅빈 거리, 의사와 환자의 모습,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담은 사진을 더했다.
“우리의 시간은 10분 단위의 진료로 나뉘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가차 없이 굴러가고 있다.”(38쪽)
“의사는 선택 과목으로 소아 종양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특별하고, 얼마나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지 알고 있다. 가혹한 투병 과정, 고통, 두려움, 그리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타인들로 인해 아이는 ‘달라진다’라고 의사는 말한다.”(179쪽)
이 이야기는 환자와 의사를 다루지만 폴리 몰랜드의 시선으로 촘촘히 길어 올린 장면, 장면마다에는 질병과 그 고통을 겪는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일생 동안 우리가 겪는 보편적인 경험과 감정이 있다. 저 멀리 9000킬로미터 떨어진 영국, 그 외딴 마을의 일상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폴리 몰랜드
영국의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 15년 동안 BBC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감독했다. 신문과 잡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카디프대학교 저널리즘, 미디어 & 문화대학의 왕립문학 기금 펠로로 활동했다.
섬세하고 예리한 관찰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타임스》와 《뉴스테이츠먼》 2022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2022년 베일리 기포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 밖에도 왕립문학회에서 수여하는 저우드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하고 《선데이 타임스》 올해의 책 최종 후보에 오른 《소심한 영혼들의 사회: 또는 용감해지는 법
The Society of Timid Souls: or How to be Brave》을 비롯한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옮긴이 : 이다희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철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고전학을 공부했다. 옮긴 책으로 《타인의 기원》 《보이지 않는 잉크》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남성은 여성에 대한 전쟁을 멈출 수 있다》 《거실의 사자》 《사막의 꽃》 등이 있다. 2023년 첫 에세이 《사는 마음》을 출간했다.
목 차
들어가며 • 15
환자 이야기 • 23
존 사샬의 유산 • 69
상실의 시대 • 127
인간적이거나 비인간적이거나 • 191
우리가 가야 하는 곳 • 253
나가며 • 295
감사의 말 • 298
옮긴이의 말 • 300
참고문헌 • 304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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