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누군가 나를 꿈꾸기를 멈춘다면
2019년 《시산맥》,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슈뢰딩거의 이별』이 시인동네 시인선 234로 출간되었다. 예술은 ‘나’의 ‘최초’의 것을 펼쳐내는 객관화 작업이다. 한영미 시인은 이러한 ‘최초의 객관화’가 이루어지는 ‘나’에 대한 사유 과정으로 『슈뢰딩거의 이별』을 풀어낸다. 한영미는 우리가 객관이라고 믿었던 것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항대립의 사고방식을 벗어나려는 동시에 관계, 시간, 장소, 삶과 죽음에서도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허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해 방식은 한영미의 시가 어떤 철학적 사유를 동반할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할 것이다. 하여, 한영미 시인의 철학적 사유가 더 궁금해지는 것이다.
■ 해설 엿보기
한영미 시집 『슈뢰딩거의 이별』에는 “기시감이 다중우주처럼 차원을 달리해 펼쳐지다가/낯선 풍경으로 지워지길 여러 차례”(「잠의 세계」) 한다는 마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술사는 마술이 이루어지는 모든 변화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지만, 처음과 끝은 어차피 마술사의 손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마술사는 처음과 끝을 쥐고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창조하는 자다. 시인도 마술사와 유사하지만 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인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창조하지 않고, 보이는 것 즉 “내가 아닌 물고기가/내가 되어버리는”(「시인의 말」) 과정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나이 여든에 임한 한 인터뷰에서, “나는 두 개의 끝 부분을 봅니다. 그 끝 부분은 시나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이에요. 그게 다예요. 나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을 지어내야 합니다. 만들어내야 해요. 그게 나에게 남겨진 일이죠. …… 길을 잘못 들어설 수도 있고,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할지도 몰라요. 다른 어떤 것을 지어내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언제나 처음과 끝을 알고 있어요.”(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서창렬 옮김, 『보르헤스의 말』, 마음산책, 2015, 36쪽)라고 하였다. 이는 시인이 처음과 끝을 분명히 알지만,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기록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처음과 끝이란 ‘섬’이 물과 뭍을 아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끊임없이 좌절하게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피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이란 욕망과 언어의 산물이 아니던가. 한영미의 시는 어떤 주제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찾기 위하여 거리를 걸을 뿐인 이의 움직임을 기록한 결실이다.
무대 한가운데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가 내부를 열고 빈속을 관객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나를 지목해 그 안에 넣습니다 상자를 닫는 동안 한 번 더 객석을 돌아봅니다 몸을 구부려 넣는 사이 자물쇠가 잠깁니다 인사가 장내를 향해 경쾌하게 퍼집니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가 긴 칼 꺼내 듭니다 구멍이 숭숭 사방으로 열려 있습니다 하나씩 칼이 꽂힙니다 정면이기도 측면이기도 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자를 회전시키고 뒤집습니다 비밀 따윈 애초에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마침내 소리 없는 비명이 잘려나갑니다 그가 동백을 생강꽃이라고, 씀바귀를 신냉이라고 주문을 욉니다 나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신냉이가 되어 신냉― 신음― 되어갑니다 실체도 없이 거대한 그가 나를 어디에나 있게 하고 어디에도 없게 합니다 칼은 탄식을 재단합니다 마술이 끝나면 나는 상자에서 걸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야 합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닙니다 상자 속 한 여자를 잊어야 합니다
― 「마술의 실재」 전문
이 시편은 시인이 쥐고 있는 처음이자 끝이요 그가 추구하는 시적 세계를 담고 있다. 시인은 시의 실재를 마술의 실재로, 시인의 삶을 마술사의 삶으로 보여주면서 시인의 욕망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상자 속 여자는 시인일 수도,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질료나 시어일 수도 있다. 마술사가 꽂는 칼에 잘려나가는 과정처럼 시는 자신의 것을 도려내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존재가 놓이도록 한다. 화자는 상자에 들어간 여자가 “이제 내가” 아니므로 우리는 “상자 속 한 여자를 잊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인이 자기 생각을 비워내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움’이 생겨나게끔 하는 과정을 함축한다. 루이스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모든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첫 번째 요구하는 것이 ‘항복’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 지식과 선입견에서 놓여날 때 비로소 우리는 ‘눈’을 사용하여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C. S. 루이스, 홍종락 옮김, 『오독』, 홍성사, 2017, 29쪽). 마술사는 여자를 상자에 넣고 “그가 동백을 생강꽃이라고, 씀바귀를 신냉이라고 주문을” 외우면 “나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신냉이가 되어 신냉― 신음― 되어”가 결국 “실체도 없이 거대한 그가 나를 어디에나 있게 하고 어디에도 없게” 만들어낸다. 우리는 마술사가 헌신하는 현란한 말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하는 동시에 원래 지니고 있던 의미와 그것을 중첩해 나간다. 이처럼 시인의 역할은 마술사처럼 일상적인 것들과 관계 맺고 있는 말들을 뽑아내어 획일화된 세계와 결별시켜 새로운 의미로 생성시키는 데 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고 ‘나’는 마술사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나’가 된다. 여자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신냉이가 되어 신냉― 신음― 되어”가며 무수히 많은 다른 기표들의 연속체가 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사물을 개념화할 때 그 불안정함을 이항대립에 근거하여 보충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물론 그는 이에 따른 이분법적 대립을 해체하고자 했다. ‘선’을 설명하기 위해 ‘악’이라는 차이가 필요하고 ‘따뜻함’을 위해 ‘차가움’을 존재하게 하는 사유방식이 옳은가를 되물은 것처럼 시인도 “한 권의 책 속엔/가로로 이등분된 두 개의 시공간”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모든 책 속엔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와/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세계의 발견」)만 들어 있을 뿐이라며 이러한 이항대립의 세계는 시인들에 의해 해체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 염선옥(문학평론가)
■ 시인의 산문
간절해하는 것은 결국 삶이라는 것을 안다.
절박은 누군가의 형틀이다.
어쩌면 이제껏 누려왔던 자잘한 행운들도
알 수 없는 은총이 아니라
번갈아 찾아든 가능성 때문이라고
등을 쉽게 내보이는 체념이 아닌
그 확률에 기대어 두 손을 모으는 일이야말로
고양이를 살리는 일,
문 앞에 놓여 있는 너의 상자를 본다.
막다른 믿음 하나로
물 주는 심정이 된다.
작가 소개
한영미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수료했다. 2019년 《시산맥》,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23년 〈영등포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목 차
제1부
마술의 실재•13/잠의 세계•14/누군가 나를 꿈꾸기를 멈춘다면•16/빛의 착란•18/커서•20/라스코 벽화•21/검은 모래 해변과 돌탑들•22/현재•24/유리의 증명•26/다른 날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구름 이야기•28/드림캐처•30/당신의 4월•32/이상한 나라의 앨리스•34/슈뢰딩거의 이별•36
제2부
둘레길•39/알렙•40/알츠하이머•42/영등포•44/유고 시집•46/물의 여자•48/평범한 아침•50/헤아려보는 파문•52/착한 사람•54/그루밍•56/크로스 워드•58/타자•60/안녕, 시빌라•62/한여름의 크리스마스•64
제3부
불편한 침묵•67/돌을 나눠 가지고•68/일 인분의 감정•70/눈사람•72/세계의 발견•74/목관(木棺)•75/나무 자세•76/아부다비 소녀•78/진실의 입•80/∞•82/꽃 도둑•84/벽에 걸린 여름•86/비는 멈추기 위해서 퍼붓는다•88/나도 모르게 일생을 살다 온 것 같은•90
제4부
내 안의 타인•93/오늘의 토마토•94/오 초간•96/숨 쉬는 것들은 늘 수위가 변한다•98/기약할 수 없는 말•100/나를 넣어 기르는 장(欌)•102/객공(客工)•104/템플스테이•106/영향권에 든다는 예보•108/팬데믹•110/우기•112/펭귄•114
해설 염선옥(문학평론가)•115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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