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시인은 이 세상에는 없는 새로운 세계를 다채롭게 펼쳐보인다.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어서 언어가 만들어내고 있는 이미지라기보다는 실재를 보고 겪는 듯하다. 이는 곧 언어의 확장과 우리 삶의 확장으로, 이 시집은 세상의 풍요로움과 언어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시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눈/깃털/바다/별/바이러스, 그리고 활자로 내리다·김영옥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수면(睡眠)” 속에 빠져들면 마주치게 되는 몸 속 “수면(水面)의 창”에 떠오르는 단란한 가족. 폭풍우 끝난 밤, 밥상을 둘러싸고 달 아기들과 달 어머니가 둥글게 앉아 있다. 달 어머니 국자마다 달덩이 퍼올리신다. 이 집은 일차적으로 “문을 닫아도 달 냄새 멀리까지 퍼지고, 꿈 냄새 요란한 여자의 집”(이하 필자의 강조는 굵은 명조체)이다.
달 엄마와 모든 엄마들은 엄마의 존재를 공유하고 있다. 김혜순에게서 엄마를 엄마이게 하는 그 첫번째 속성은 무엇이든 품어주고 부화시킨다는 데 있다. 엄마는 생산 공장이고 스스로 샘이다. 잠에서 꿈이 부화되고 알에서 새들이 부화되고, 보리밭에서 보리가 부화하고, 그리고 머지않아 ‘별들’도 부화될 것이다. 여성 화자인 ‘나’는 엄마와 이 ‘엄마의 속성’을 공유한다-“또 엄마인 내가 차가운 별들을 가득 품고 있어요”(「엄마는 깃털 샘인가 봐요」). 달, 엄마, 깃털, 꿈, 샘, 별-이 모든 것들은 하얗고 가벼우며,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에 스며들게 하고, 다른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엄마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종종 잊혀지거나, 언급되지 않거나, 함께 공존하더라도 야릇한 모습으로 공존한다. 자, 다시 한 번 수면(睡眠) 아래로 침잠해 들어가 수면(水面) 창에 떠오르는 가족의 모습을 눈여겨보자. 거기에선 “우리 아버진 바다 깊이 잠들어 계시고//우리 어머닌 한 천 년째 바다를 휘젓고 계시다.” 어머니 휘젓는 손길마다 파도의 물방울마다에 아가의 영롱한 눈망울이 맺힌다. 그러면 “아버지 배꼽에선 연꽃 한 그루 억세게 높이 자라/그 연꽃 속에서 뛰어나온 청년이/바다 위 마을의 집집마다/영롱한 눈망울 두 개씩 배달 나간다.” 사람들은 남자에게도 배꼽이 있다는 사실을 꽤나 자주 잊고 지낸다. 배꼽티를 입는 것도 여자 아이들이고, 배꼽 빠지게 웃는 사람들도 사실 대부분 여자(아이)들이지 않던가. 그런데 김혜순은 아버지에게 배꼽을 돌려주었다. 그것도 그냥 배꼽이 아니라, “연꽃 한 그루 억세게 높이 자라”는, “그 연꽃 속에서 청년이” 뛰어나오는 그런 배꼽을.
‘배꼽-옴팔루스Omphalus’는 ‘남근-팔루스Phallus’와 음성적 친연 관계에 놓여 있다. 팔루스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에게만 있는 신체 기관인데, 오만하게도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상징 질서 체계의 초월적 기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면에 옴팔루스는 여자/남자 가릴 것 없이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있는, 인간의 자식임을 증거하는, 즉 탯줄을 끊고 어머니 신체에서 떨어져나왔음을 알리는 삶과 죽음의 족적이다. 배꼽 있는 생명체는 모두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죽음을 담보로, 죽음 속에서의 삶을 살고 있다. 배꼽은 바로 인간의 적나라한 그 실존 방식, ‘죽음 속의 존재’를 늘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뾰족한, 도드라진 무엇’이다. 물론 배꼽의 ‘돌출’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체 안으로 잠겨들어간다. 그러나 기억 속의 배꼽은 여전히 그 첫번째 떨어져나옴의 상흔으로 도드라져 있다. 배꼽은 일종의 ‘마이너스 돌출’이다(이상하다. 라캉이 말했듯이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미지이거나, 자신의 육체을 연장하는 육체이거나 혹은 이제껏 사랑해왔던 존재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의 특징을 지니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어찌 되었든 배꼽에 좀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지 않을까. 남자의 배꼽이 ‘엽기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기껏해야 영화 「매트릭스」 정도이다). 김혜순은 아버지의 배꼽에서 연꽃이 자라게 한다. 즉 신체 안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린 배꼽을 다시 밖으로 돋아나오게 할 뿐만 아니라 길게 연장시켜 높이 솟아오르게 한다(연꽃은 배꼽의 연장이니까). 이 아버지는 한국 문학이 알지 못하던 ‘지극히 행복한, 팔루스의 지구를 고단한 어깨에서 내려놓은 옴팔루스’ 아버지이다. 아버지 배꼽에서 자란 연꽃에서 뛰어나온 청년(주의하시라, ‘아들’이 아니다!), 이 청년이 어머니가 만든 눈망울을 배달 나간다. 이 눈망울을 달고 보는 법을 배우는 아기들 눈에 세상은 분명 달리 보일 것이다. 이 눈망울, 이 검은 점에는 자신이 어머니의 탯줄에 매달려 세상에 나온 존재라는 바로 그 유한한 생존 조건에 대한 기억이 일렁거리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존재의 이 결핍에 대한 처절한 절망이 ‘너에게로 흐르고 싶은 천 개의 강’이 되어 또한 함께 넘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이 다시 쓰는 ‘가족 시네마’는 이렇듯 옴팔루스적 자기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환하디환한 이 달의 꿈속에도 악몽은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꿈속에 나타난 달
어머니에게 오줌을 누고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돼지처럼 구석으로 몰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달 아기들은 문밖에서 울고
-「달이 꾸는 꿈」 부분
달의 환한 꿈속에 침입해 들어온 이 악몽의 세계는 어둡고, 오래된 통곡으로 가득 찬 차가운 수족관의 세계이다. 버려진, 죽은 아가들의 울음 소리가 끊이지 않고 무덤들은 거듭 물 속에 잠긴다. 시인은 TV 욕조를 빌려 이 악몽의 세계를 세기말적 유형으로 그려낸다. ‘그녀’는 TV 욕조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있다. 그녀는 일단 이중적 의미에서 TV 욕조에 잠겨 지낸다. 끊임없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녀(모든 것을 상품으로 기호화해버리는 시대에 가장 뛰어난, 가장 ‘사랑받는’ 상품 기호인 여자), 그리고 화면 앞을 떠나지 않는 그녀(상품 기호가 되어 화면을 떠다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주술에 걸린 듯 꼼짝 않고 바라보는 여자). 그러나 진짜 ‘사건은’ 자정 뉴스가 끝난 이후에 ‘일어난다.’
그러나 자정 뉴스가 끝나면 그 뉴스에 이어서
그 뉴스를 견뎌내는 건 바로 그녀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
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
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
나는 이어서 그녀라는 이름의 TV를 들여다보네
푸른 그늘이 용솟음치고, 침묵으로 얼어붙는 수초들
그 사이로 통곡하는 물고기들이 장의사 행렬처럼 떠가네
TV가 끝난 후 이 뇌파 어항의 불빛은 너무 춥고
곧 이어서 흘러나오는 죽은 아가들의 울음 소리
그녀는 절대로 TV 눈꺼풀을 감지 않네
잠을 자는 것도 그녀에겐 일종의 말하기 방식
그녀는 잠속에서도 우는 배역은 싫어
잉크도 종이도 없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TV 욕조 속 미지근한 물 속을
무거운 고개만 이리저리 흔드네
-「물 속에 잠긴 TV」 부분
잠재적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간의 경계를 무차별하게 지워버리는 과도한 영상 매체 시대에 TV 화면에 비추이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홀로그램적 성격을 띠면서 구체적인 윤리적 책임과 결단을 묻는 질문에서 끊임없이 미끌어진다. 인용한 두 연은 이제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그녀”의 잠속을 들여다봄으로써 이것을 문제화한다. 그리고 이때 여자/남자의 젠더가 중요해진다. 인용한 마지막 연에서 그녀의 수면(睡眠) 속 수면(水面) 창에 떠도는 것은 “통곡하는 물고기” “죽은 아가들의 울음 소리,” 비명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얼어붙은 침묵’뿐이다. 이것은 달의 엄마가 꾸는 악몽이고, 환원해서 말하자면 여성들의 실존태이다.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몸부림치며 우는” 여자들은 제2, 제3, 제4의 “그녀” 자신이며,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 “나”인 까닭이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 이것이 김혜순의 시 쓰기이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던가. 침묵이 견디다 못해 터져나온 비명이 시라고.
이 뇌파 속 어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침묵’이 한꺼번에 응결되어 어항을 터뜨리면서 질러대는 비명은 다양한 소리로 허공을 찢는다. 많은 경우 여성 화자의 ‘버림받은, 내침을 당한 존재’로서의 의식/무의식에서 길어져나오는 찢김과 떨어짐, 고통과 절망,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뜨거운 설렘과 들림, 환한 트임 등으로 발화되는 비명은 소리들의 혼성 우주를 형성한다. 이번 시집에 ‘귀’에 대한 언급이 빈번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주를 유영하는 열려진 귀는 자궁을 유영하는 태아와 동형동질의 쌍생아를 이룬다. 그 귀와 태아가 듣고 겪은 일, 그것이 이 시집을 채우고 있는 시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시들은-이것을 몸-생태시라고 부르자-시중에 나와 있는 프로파간다적 생태시보다 한결 더 본원적인 의미에서 생태적이고 몸적이다. 이제 이 비명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선 이 비명이 여성의 존재와 여성성, 혹은 쾌락을 정교하고도 은밀한 방식으로 갈취함으로써 여성을 텅 빈 기호로 동공화시키는 남성적 자아를 향하고 있을 때 그것은 때로 차갑고 냉정하며 냉소적이기도 하다. “밤마다 이 기계[=사랑 기계]를 하러” 오는 “너”에게 “밤하늘에서 가늘게 떨고 있던 행성들을/통제하는 기분인가/인생 전체를 배팅하는 기분인가/그러나 속지 마라 떠들지도 마라/기계는 혼자서 자기 보존 프로그램대로/움직여가는 것일 뿐/너만을 모셔둘 곳은 이 기계 내부 어디에도 없다/네가 할 일이라곤 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 뿐/이 문 없는 기계가 만든 가없이 텅 빈 몸 속을 헤엄치는 것일 뿐”(「다시, 불쌍한 사랑 기계」)이라고 단언한다. 이 시의 ‘너’는 시집 속에 산재해 있는 다른 ‘너들’과 만나 길게 줄을 잇는다. “남자 2가 아우슈비츠 가스실 밖에 던져진/옷을 하나씩하나씩 여자의 몸 속 뼈마디에 걸고 있다/남자 1이 여자의 몸 속 피로 얼룩진 방을/두 손으로 찬찬히 닦고 있다/남자 3이 살 속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와 마주서려고/여자의 몸 속 레일을 타넘고 있다”(「나무꾼과 선녀-고레츠키, 볼탕스키, 채호기」)에서처럼 여자가 죽은 뒤에까지도 그들 존재의 옷을 되돌려주지 않는 남자들이 모두 이 ‘너들’이다. 그리고 이 ‘너들’의 한가운데에는 “달력 공장 공장장님”이 있다.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요 지겨워요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
스위치를 누르면 눈이 휘날리지요
다시 누르면 벚꽃 축제, 아니에요?
윤전기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공장 가득 쌓여 있어요
[……]
달력 속 여자는 맥주를 들고 가랑이를 벌렸어요
그는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쓰윽 집어넣었어요
소복 입은 할머니들이 오늘도 일본 대사관 앞에 서 있었어요
그 여자는 해변으로 가고 나는 달력 속으로 들어갔어요
내 딸이 엄마는 비키니 수영복이 안 어울려 그랬던가요?
공장장님은 색 분해의 도사인 건 틀림없어요
지치지도 않고 달력 속 여자들의 비키니 색이 살아 있으니까요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부분
달력 속의 여자를 해변으로 보내고 비키니 차림으로 달력 속에 들어가 누운 시인, 그녀는 여유 있는 시선으로 “정년 지나서 시장 바구니 들고 엄마”를 따라다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은 이 아버지가 들고 있는 시장 바구니 한켠에 새겨진 어떤 ‘기도문’쯤으로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 시인이 다시 기분이 좋아지면, 아니 “달력 공장 공장장님”이 깊이 반성하고 새로운 달력 도안을 짜신다면 시인은 “공장장님”의 배꼽에서도 싱싱한 연꽃 줄기가 솟구치게 배려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공장장님”은 신이시니까 배꼽이 아예 없으실까.
이제까지 발표된 시들을 통해 집요하게 여성의, 여성적 시 쓰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몸으로 시 쓰기’를 실험하던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깊이, 더욱 탈중심적으로 시를 육화시키고 그 육화된 시어를 도처의 이랑에, 삶이 번식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흩뿌린다. 그리하여 “내장이 주렁주렁 몸 밖에 달린, [……] 시”(「시인」)를 생산한다. 이것은 어떤 ‘들림,’ 혹은 ‘열정’의 상태, 안과 밖의 경계가 무자비하게 찢겨져나가는 격렬한 혼융의 상태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다. 그때 그 열정은 대개 초록으로 빛나거나, 초록의 즙을 줄줄 흘리거나, “시큼한 슬픔”(「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몸으로 녹아내린다. 고구려 시조왕 주몽을 낳은 어머니 유화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는 시 「유화(柳花)」를 보자. 『삼국사기』가 전하는 유화는 능수버들 우거진 강가에 소풍 나갔다가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말 탄 남자에게 유혹당한 후, 중매 없이 외간남자에게 몸을 주었다고 부모에게 유배당한 철없는 여자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지워진 행간을 읽는다. 유화를 사로잡는 열정의 유혹이, 시퍼런 강물 위 가파른 낭떠러지에서 일초 일초 팽창하는 열정의 상승이, 끝내 터져버려 온 세상을 초록으로 캄캄하게 물들여버리는 열정의 비명이 스크린 하나하나를-이 시는 에니메이션 시대에 서로 교호하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를 유감없이 증거하는 강렬한 색채의 ‘움직이는 시’ ‘움직임으로 말하는 시’이다-숨막히는 성애의 밀도로 채운다. 여자는 벌벌 떨며 기도한다, “내 마음을 용서하소서. [……] 막아주소서,” 그러나 “초록색 섬광”에 눈이 멀어 “녹즙”을 쏟는 그녀의 귓속을 강타하는 말채찍 소리.
강 아래 한 여자가 초록색 양말을 벗고 있어. 양말은 너무 길어 벗어도 벗어도 다 벗을 수 없어. 여자의 머리칼은 모두 타오르는 능수버들잎이야. 갑자기 여자가 고개를 돌려, 갑자기 햇빛도 고개를 돌려. 그러더니 여자가 기나긴 혀로 나를 낼름 삼켜버렸어. 초록으로 캄캄하게 어지러운 중에 빛으로 만든 알 하나가 눈 속을 빙빙 돌고 있어. 여기가 어디야? 내가 초록 말을 타고 강 바닥을 달리고 있어.
-「柳花」 부분
사랑amour을, 아니 사랑의 달착지근한 자기 변명과 미성숙한 자기애의 속삭임을 부끄럽게 만들어버리는, 그대로 ‘바깥’으로 튕겨져나가, 광기로 두 눈이 다 타버리는 이 열정passion은 이번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열애’의 가장 진한 부분, 가장 녹밀(綠密)한 부분이다. 여성의 위험한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는, 그래서 항상 ‘미친년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으로 은유되던 능수버들. 이 능수버들 유화 부인의 이야기를 뜨겁고 녹밀한 열정의 언어로 복원시킴으로써 시인은 모든 여성의 내면에, 세포마다에 숨쉬고 있을 강렬한 욕망을, 눈알이 빠져나올 듯 죽음의 심연을 노려보고 있는 그 욕망을 강한 긍정으로 살려내고자 한다. 이것은 끊임없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어두운 심연 속으로 급강하하는 죽음의 순간마다에서 확 피어오르는 사랑의 방식이다.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냉정한 ‘그’의 갈비뼈 벼랑에 매달려 젖은 혀로 그의 영혼을 핥아보려 밤마다 “울며불며, 무릎에 피 칠갑하며 그의 딱딱한/회백질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던 그녀는,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의 희디흰 잠으로 지은 뼈 밖에,/외과 병동 벽에 붙은 인체 해부도 위에/간신히 매달린 색색의 살덩어리처럼 매달려 있을 뿐”(「현공사(懸空寺)」)이라고 절규하던 시인은, “너의 그 희디흰 벼랑”에 유화 부인의 “초록으로 끓는 용광로”를 대비시킨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고백했다던가. 정육점에 가면 항상 거기 그 동물의 자리에 자신이 없음을 보고 놀라게 된다고. 상처입고 살육당하는, 고통에 푸들푸들 떠는 살덩어리를 앞에 두고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강타당하는 이런 식의 충격을 우리는 ‘살의 존재론적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 「현공사」의 화자는 그러나 더 이상 피를 뚝뚝 흘리며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살덩어리조차 아니다. 인체 해부도 위에 매달린 플리스틱 모조 살덩어리일 뿐. “그”에게 들어가고 싶던, 그 안으로 통로를 내고 싶던 욕망은 그렇게 물화되어버린다. 그 플라스틱 모조 살은 그러나 “초록으로 끓는 용광로”에서 부활하려 한다. 그녀의 몸에는 “저곳으로 가고” 싶어, “너에게로 한없이 흐르고 싶”어 출렁거리던 “천 개의 강”이(「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새겨져 있지 않은가. 이 “천 개의 강”은 갇혀 있다. 그러나 “갇혀서 흐”른다. 그녀의 시는 사랑하는 “가슴과 가슴 사이엔 물”이 흘러 넘친다고, “강”이 출렁거린다고 말하고 있다. 물은 그녀에게 있어 모든 지속적인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개별 육체들을 동시에 기억하며 연결시키는,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그런 운명을 타고난”(「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상호 주관적 통로로서의 영원한 ‘순수 지속’이다.
그러나 모든 ‘사이들’을 세세히 적시며 “천 개의 강”이 굽이굽이 흘러도 “그대는 나, 나는 그대라고 노래하지만 정녕 너는 내가 아니라는/다만 허공에 주형을 뜨듯 찍어보는 육체의 얽힌 형식이 있을 뿐”이라는 통곡이 여전히 떠나지 않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사랑과 소통의 궁극적 불가능성이라는 ‘통곡의 벽’을 뚫고 그 사이로 다시 운동과 변화와 소통의 물이 흐르게 하는 가능성은 이 시집에서 여성적 몸에 깃들여 있는 ‘살림’의 능력을 통해 구해지고 있다.
흰개미 한 마리 내 허벅지 위로 올라온다
한여름 아무도 모르게 내려왔다가 금세 녹는 눈발 한 송이처럼
입 속에서 금세 녹는 시린 초침처럼
잠시 후 흰개미떼가 허벅지를 기어오른다
조난자를 눈 이불 깊숙이 토닥토닥 잠재우는
히말라야 산맥 속 백설 어머니의 하염없는 손길처럼
아가가 게운 우유처럼 흰개미떼가
허벅지에서 방바닥으로 흘러내리기도 한다
그동안나는채색된부처가가득새겨진서늘한석굴속을다녀온다. 나는등불을높이치켜든다. 그러나어둠속에서부처들이꿈틀거리며나타난다. 부처들이오글거린다. 점점커진다. 부처들이석굴을갉아먹고빨아먹고날고뛰고몸을뒤틀고옷을벗고돌틈사이마다기어나오고쓰러지고죽고되살아나고태어나선자라고흘러넘치고자지러지고기도하고태양을끌어안고날라리를불고옴츠러들고뒤틀어지고머리통을옆구리에끼고울고머리를깨고피를흘리고화를내고내허벅지를다시기어오르고
내가 부처들이 들끓는 석굴을 돌아나오자
이제 다 먹었는가
내 허벅지 꺼먼 뼈 사이에서 기어나오는 흰개미떼들
나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어두운 뼈의 동굴만 남았네
그러곤 잠시 후
내 앞에 다시 드러눕는 흰개미떼가 쌓아가는 저 여자
한 송이, 한 송이, 천근 같은 초침으로 쌓아가는 저 여자 누구인가
나는 없는데 나와 똑같은 저 여자
누구인가
흰개미 한 마리 내 허벅지 위로 올라온다
-「눈」 전문
전문을 인용해본 이 시는 기존의 가부장제가 혹은 모성의 신화가, 알고 선전해온 것과는 다른 어머니와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여름 아무도 모르게 내려왔다가 금세 녹는 눈발 한 송이처럼” 매번 자신의 전존재를 다 내어주고 거듭 이전의 나 아닌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어머니의 모습. 조난자를 잠재우는 백설 어머니의 손길은 매순간마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끊임없이 자신을 공(空)의 상태로 비워내는, 그러면서 자신의 몸과 닿는 대상과 주변의 형질을 변화시켜 궁극적으로 전체를 영원한 변화와 움직임의 상태로 있게 만드는 눈발 송이들이 쌓여 만들어낸 일종의 ‘순수 지속’이다. 흰개미와 눈발, 그리고 아가가 게운 우유는 ‘희다’는 색채적 속성을 통해 하나의 환유 고리를 만들어내면서 ‘어머니의 살’과 그 ‘살’을 먹고 사는 생명체간의 관계를 구성해낸다. 그러나 이 관계는 생명, 즉 ‘살아 움직임’ ‘살려냄’의 운동성을 가장 몸적으로 생생하게 추동시키고 있는 그런 관계이다. 그래서 시 속의 화자는 “채색된부처가가득새겨진서늘한석굴속”으로 몸을 움직여 들어간다. 온갖 형태의, 온갖 색채의 부처들이 오글거리면서 온갖 난장을 벌이는 이곳은 ‘삶의 움직임’으로, 그 움직임이 내는 냄새와 열기로 넘쳐나고 있다. 이 삶의 난장터를 ‘서늘한’ 곳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삶의 난장터인 ‘어머니의 몸’이 생명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게 만드는, 혹은 동어 반복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나열하는 어떤 불변의 고정된 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굴을 다녀온 시인, 이제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흰개미떼가 다 뜯어먹고 남은 “어두운 뼈의 동굴”이다. 그녀의 살은 그렇게도 요란하게 요동을 쳐대며 ‘삶을 향해 움직인’ 부처들/아가들이 다 먹어버렸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텅 빈 무의 존재로 남겨졌는가.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사라졌지만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가 눈앞에 있다. 그리고 물론 그 몸 위로 다시 흰개미가 오르기 시작한다.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모성은 끊임없는 생성의 소용돌이 그 자체이다. 생성의 매순간 이전의 것은 새로운 것 속에 변화로서 흘러들어가고 생성된 것과 생성하는 것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신화적 정태주의를 벗어버리고 삶의 역동적 운동성으로 옮겨간 모성의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 “나”와 “그대” 사이에 세워져 있는 그 ‘통곡의 벽’은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눈송이’로 내리는 김혜순 시어들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미 이전 시집 『불쌍한 사랑기계』에서-예를 들어 「환한 걸레」-일의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대단히 내밀한 언어로 사랑 담론의 젠더 문제를 교란시키며 삶의 구체적 현장에 기반을 둔 여성들간의 소통을 언어화한 바 있는 김혜순은 이번에「애처로운 목탑」에서 타인과의 소통 불가능이라는 ‘통곡의 벽’을 극복하는 여성들/여성성들 사이의 소통적 관계를 다시 한 번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거대한 5층 목탑”이 시적 화자가 되어 ‘천 년 넘게 기다린 그녀’가 “하늘색 부채를” 들고 드디어 나타난 것에 대한 놀라움을 기록하고 있는 두 개의 연을, 바로 그 “거대한 5층 목탑”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3인칭 화자와 목탑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1인칭 시적 화자의 시선이 따르고 있다. 시적 화자가 되어 천 년 간 기다린 연인 (“그녀”)과의 만남을 노래하고 있는 “목탑”의 젠더는 여기서 확실치 않다. 그러나 “목탑”은 움직이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어리신 그녀가/이내 몸에 또 한 번 깃드시겠다고 계단을 올라오네”(「애처로운 목탑」)라는 시구가 암시하듯 목탑이 여성적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 등으로 우리는 이 목탑의 성을 은연중 여성으로 이해하게 된다. 즉 천 년 만에 나타난 “그녀”와, “그녀”가 깃들일 “목탑”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적 화자인 “나”는 모두 각각의 여성성을 발아하면서 묘한 사랑의 관계에, 동일시의 관계에 섞여든다. 서로 상대방을 열고 드나드는 다양한 여성간의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고, 한 여성적 자아가 자기 안에 있는 수많은 타자들과 나누는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중요한 것은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젠더의 교란이 ‘사랑의 담론’을 지탱시켜왔던 교조적 성별주의와 그것의 밑에 깔린 여성의 타자화에 교묘한 균열을 내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어떤 다른 사랑의 담론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육체의 우주적 확장과 움직임을 통해, 글쓰기의 자기 치유적 놀이를 통해 풍부하게 채우고 개화시키는 그런 가능성 말이다. (절과 부처가 등장하는 몇 편의 시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읽을 때 그 해방적 의미층이 개화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순한 자기 목적적 초월의 현존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몸으로써 몸 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바깥과 안이 서로 열리고 섞여들면서 몸이 별이 되고, 별이 몸이 되기 위하여, 부처들은 그 허다한 자기 욕망이 투영되는 허구의 자리에서 내려와 가장 더럽고 미천하고 펄펄 끓고 살이 터져나가는 바로 그곳, 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식의 질문을 해보자. 왜 “흰개미 한 마리”는 “눈발 한 송이” 곁에 나란히 있는가. 눈(발)은 이번 시집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가장 강력한 모티프이다. 눈(발/송이/보라)은 깃털과 함께(가벼움과 부드러움), 바다와 함께(환함과 무한광대로 출렁임), 결핵과 함께(유년 시절의 쿨럭거림), 별과 함께(터져 쏟아짐), 바이러스와 함께(전염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활자와 함께(귓가에 날리는 이야기의 속살거림) 시집 전체를 뒤덮으며 “자욱”이 내리고 있다. 그러면서 눈은 먼 곳과 가까운 곳의 공간적 경계를 짓고, 어제,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선적 시간의 경계를 짓는다. 즉 눈발은 김혜순의 시가 탄생하며 들숨, 날숨을 쉬는 시·공간의 무한한 결이다. 분분 날리는 눈보라와 깃털들과 활자들 -이것들은 끝없는 다가옴과 사라짐의 선회 속에서 먼, 아주 먼 곳에서 이곳을 향하고 있는 시선, 사랑하고 아끼며 생명을 주는 시선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또한 이것들은 온갖 형태의 다양한 윤무 속에서 끝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시간의 가장 타락한 상태, 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지양되게 한다. 그리하여 타락한 시간의 선적 흐름의 종착지점, 그 고통스럽고 권태로운, 건조하고 무의미한, 영원히 죽지 못하는 죽음을 지워버린다.
아주아주 더운 여름 날
땡볕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아주아주 멀고 먼 곳에서 누군가 나를 안았어요
한 번도 녹아본 적이 없는 머나먼 눈 나라
그 나라의 얼음 아씨들이
눈을 먹고 사는 누에가 짠 氷蠶에서 실을 뽑아선
시리디시린 얼음 비단 치마저고리 만들어 입고선
내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왔어요
-「얼음 비단, 얼음 아씨」 부분
“눈을 먹고 사는 누에가 짠 빙잠에서” 뽑아낸 실로 짠 직물, 그것이 그녀의 시들이다. 이 시들이 담고 있는 “아주아주 멀고 먼 곳”의 시선이 그녀의 시를 읽는 독자들을 끌어안으려 그 가슴속에 환하게 들어온다. 이 시선은 한없이 떨어져만 가는(“집도 없고 길도 없는 곳에서 떨어져만 갔다/꿈도 없고 잠은 더구나 없는 곳에서 떨어져만 갔다/핏줄도 없고 뼈도 없는 곳에서 떨어져만 갔다/보고 싶음도 없고 눈물도 없는 곳에서 떨어져만 갔다”(「세한도」) 시인을 그 무한한 떨어짐의 회오리에서 찰나적으로 잡아채, “일순간/거울 밖 나라로 뛰쳐나가”게 하는, 천지사방으로 환한, 나무도 있고 집도 있는 “엄마”가 걸어나오는 곳(「세한도」), “오래고 오랜 나의 외갓집이 청결하게 서 있”(「성에꽃다발」)는 곳으로 데려가는 어떤 구원의, 천사적 시선이다. 내 몸 안에 얼어붙어 있는 침묵의 비명을 “몸 밖으로” 불러내 말하게 하는 이 천사적 시선은 “얼어붙은 연못 속에 갇혀 있는 아이 얼굴”에 응고되어 있다 풀려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꼭 껴안을 수 있는, 그 아이가 녹으면서 “내가 녹는” 이 “갇혀 있는 아이”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데자뷔처럼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화자를 불러세우는 이 “얼음 얼굴,” 고통과 부재의 순간에 마주치게 되는 이 얼굴, 시인의 꿈의 세계에, 혹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응결되어 있는 이 차디찬 얼굴은 이번 시집 곳곳에서 축축한 울음을 울고 있는, 천 년 넘게 울고 있는 버림받은 아이들의 원형이다. 그리고 가부장제에서 ‘모국어’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래서 그 모국어 속에 축적된 문화 유산의 소유자, 후계자의 자리에 한 번도 서본 적이 없는 여성 시인은 자신이 바로 그 버려진 아이임을 안다. 그리고 한국 신화는 이 버림받은 여자 아이에서 ‘바리데기’라는 제모신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시인 자신이 ‘여성적 글쓰기’를 논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언급했듯이) ‘바리데기’를 사이에 두고 여성 화자는, 시인이며 어머니이며 버림받은 아이인 그녀는 자신의 몸인 시 안에 버림받음의 고통과 절망과 사랑에의 갈망을 기록한다. “광대한 초원으로 열린 내 몸을 풀씨들이 찌르고 내 상처 덩어리 속에/알을 까고, 보이지도 않는 턱으로 내 살을 씹어먹고/점점점 자라난 숲이 아기집을 가득 채웠다/나는 이름 모를 나무로 가득 찬 내 아기집을 마구/잡아뜯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 만일 이 이불을 차버린다면/이제 마악 눈뜬 풀씨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져갈 것 같아/칠흑 같은 밤비에 젖는 이불을 계속 덮고 있었다/아침이 오면 오늘밤 난생처음 눈뜬 아가가 손가락을 움직이고/메마른 구릉들은 초록 이불을 커다랗게 펴리라 생각하면서(「나는 비에 젖는 이불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김혜순의 이번 시집은 어떤 의미에서는 거듭거듭 베풀어지는 ‘바리데기 불러오기’인지도 모른다(「명왕성에서 온 그녀」는 말하자면 바로 그 버려짐, 갇혀짐의 공간인 ‘지하 세계’-명왕성의 어원은 부와 안녕의 나라, 그리고 지하 세계를 동시에 가리킨다-에서 ‘이곳’으로 거듭 돌아오는 바리데기의 한 실현태이다). 그녀는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두려워하지만 그 ‘떨어짐’과 ‘두려움’을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바깥’으로 끌어안고 산다. 그녀에게서 ‘바깥,’ 에피파니는 더 이상 남성 작가들에게서 그랬듯 불현듯 ‘나’를 덮치며 도적떼처럼 ‘안’으로 침투해들어오는 추상적·신적인 초월의 세계가 아니라, 예전에 버려졌던, 지금도 계속해서 버려지고 있는 여성 존재의 물적 심연이다. 그래서 그녀는 열하루째 하던 단식을 그만두어버린다. 단식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듣던 것과는 달리 쉽다고 거의 푸념하듯 말한다. 그러나 초월을 향한 극기, ‘저편’을 ‘저편’으로 가둬두는, 선적 시간의 흐름에 기대고 있는 훈련과 견딤의 방식은-‘평생을 벗겨내야 하는 하늘의 꺼풀’(「단식」)-처음부터 집 밖으로, 죽음의 나라로 버려진 여자 아이에게는 맞지 않는, 필요 없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냥 “뜬구름 같은 미음”을 먹고 이편의 생활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이어서 예고 없던 가랑비가 내린다. 이 가랑비는 다시 “이제 마악 눈뜬 풀씨들” “난생처음 눈뜬 아가”들 위로 내린다. 그리고 시인의 몸을 돌고 돌아 속살거리는 활자로 우리 독자들의 머리 위로 내린다. 이것이 여성 시인으로서 김혜순이 자신의 실존태를 이해하는 방식이고,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을 살아내며, 더불어 모든 버림받은 존재의 삶을 함께 살아내는 윤리적 실천 방식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손등을 적시는 그녀의 눈송이들.
작가 소개
김혜순
시인. 1979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현대시작품상·소월시문학상·올해의문학상·미당문학상·대산문학상·삼성호암상 예술상·미국 최고번역도서상·캐나다 그리핀시문학상·스웨덴 시카다상·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등을 수상했다.
목 차
잘 익은 사과 / 얼음 비단, 얼음 아씨 /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 / 물 속에 잠긴 TV / 자욱한 사랑 / 귀 / 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만큼 / 밤 전철을 타고 보니 / 엄마는 깃털 샘인가 봐요 / 얼굴에 쓴 글씨 /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 단식 / 꼬뮤니즘의 인기가 올라가는 7분 간 / 혹은 70년 간 / 애처로운 목탑 / 아무것도 얼지 않고 / 肺 / SPACE OPERA / 文身 / 성에꽃다발 / 몽유 비행선 탑승 규칙 / 우리 후손들이 제일 싫어했던 영화 / 태양의 축제 / 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
/ 자전거 / 검은 눈동자 / 김포 쓰레기 매립지로 가는 길 / 국문과가 있는 그 대학의 복도 / 눈 / 나는 나의 그림자 속에 심겨진 한 그루 나무 / 명왕성 / 나의 오아시스, 서울 / 落法 / 달이 꾸는 꿈 / 명왕성에서 온 그녀 / 몽골 / 시곗바늘로 만든 국수 / 숟가락 /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 病 / 나는 비에 젖는 이불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 선풍기의 살인 / 월인천강지곡 / 왜 우리는 부처를 / 성자 청소부 아저씨 아줌마들 / 잠들기 전의 예고편 / 수압 마사지기 / 그들은 결혼했고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았단다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나요? / 해 / 운하 깊은 밤 / 풍경 중독자
/ Spoonful Blues / 나무꾼과 선녀 / 뇌 /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 懸空寺 / 두근거리네 / 비나무 한 그루 / 다시, 불쌍한 사랑 기계 / 柳花 / 섣달 그믐밤, 서울 도착 / 세한도 / 시인 / 아수라, 이제하, 봄 / 플러그가 빠지면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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