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기형도의 「빈집」까지 — 시를 쓰는 사람들이 직접 고른 시로 읽는 한국 현대시의 넓고 깊은 스펙트럼
지난 2004년 가을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는 창간 2주년 특집으로 국내 현역시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애송시 3편을 답해 달라고 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246명이 자신의 애송시를 직접 추천한 설문을 바탕으로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 명시』가 출간되었다. 한 사람당 세 편씩 ‘내가 좋아하는 시’를 답한 결과를 모아, 김춘수의 「꽃」과 윤동주의 「서시」,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서정주의 「자화상」, 이형기의 「낙화」 등 한국 현대시의 주요 작품 52편을 한 권에 담았다.
화가가 좋아하는 그림, 영화인이 좋아하는 영화가 궁금하듯 ‘시인이 좋아하는 시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직접 시를 쓰는 사람들이 오랜 독서와 창작의 경험 속에서 마음에 남겨 온 작품을 고른 만큼, 이 책은 단순한 명시 선집을 넘어 시인들의 심미안과 한국 현대시의 취향 지형을 함께 들여다보게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246명의 시인이 답한 ‘내가 좋아하는 시’
설문에는 김춘수, 이형기, 김남조, 김종길을 비롯해 정진규, 이근배, 김종해, 유안진, 오규원, 강은교, 황인숙, 박주택, 이재무, 이문재, 장석남, 함민복, 이윤학, 박정대, 정끝별, 권혁웅, 문태준, 손택수, 안현미, 황병승 등 여러 세대의 시인들이 참여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단 세 편으로 추려야 하는 까다로운 질문이었지만, 참여 시인들은 여러 날 숙고해 답을 보내고 일부는 다시 선택을 고쳐 보낼 만큼 진지하게 설문에 응했다.
두 달 동안 모인 답변은 하나의 흥미로운 목록을 만들었다. 어떤 시인이 넓게 사랑받는지, 어떤 작품 한 편에 추천이 집중되는지, 그리고 서로 다른 세대의 시인들이 어떤 정서와 언어에 오래 머무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 명시』는 이 선택의 결과를 따라가며 한국 현대시를 다시 읽게 하는 선집이다.
김춘수 「꽃」 23명, 윤동주 「서시」 18명 — 한 편의 시가 오래 사랑받는 이유
작품별 집계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는 김춘수의 「꽃」이다. 모두 23명의 시인이 이 작품을 애송시로 꼽았다. 이어 윤동주의 「서시」가 18명,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15명, 서정주의 「자화상」과 이형기의 「낙화」가 각각 14명의 추천을 받았다.
「꽃」은 존재와 관계의 문제를 “이름을 불러 주는” 행위와 ‘꽃’이라는 이미지 속에 담아, 관념적인 질문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언어로 바꾼 작품이다. 「서시」는 순수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삶의 괴로움을 간결한 언어로 압축한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무기력, 그럼에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 정서를 북방의 언어와 풍경 속에 새긴다.
그 뒤를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서정주의 「동천」,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수영의 「풀」, 정지용의 「향수」가 잇는다. 사랑, 그리움, 외로움, 존재의 자각처럼 시대가 달라도 되풀이되는 인간의 감정이 시인들의 선택 속에서 두드러진다.
한 시인의 이름보다, 한 편의 시가 남기는 힘
시인별 총합산에서는 서정주의 작품들이 72명의 추천을 받아 가장 많이 언급되었고, 백석 40명, 김수영 36명, 김소월 34명, 윤동주 32명, 김춘수 30명, 정지용 27명, 박목월 23명, 김종삼과 신경림이 각각 16명로 뒤를 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많이 추천된 시인’과 ‘가장 많이 추천된 한 편의 시’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정주는 여러 작품에 추천이 고르게 분산된 반면, 김춘수는 「꽃」 한 편에 추천이 크게 모였다. 이 차이는 한 시인의 세계를 폭넓게 사랑하는 방식과, 한 작품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느낌이 빠른 시’, ‘귀로 듣는 시’ — 애송시가 지닌 힘
어떤 시가 누군가에게 ‘애송된다’는 것은 단순히 유명하다는 뜻과 다르다. 여러 번 읽고, 때로는 소리 내어 되뇌며, 삶의 어느 순간에 다시 떠올릴 만큼 가까이 두는 시라는 뜻에 가깝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의미를 천천히 음미하게 하는 동시에 첫 이미지와 첫 리듬만으로도 독자의 감각에 빠르게 닿는 시가 많다.
연애와 사랑의 감정만큼이나 외로움과 그리움, 부끄러움과 자기성찰, 상실과 회복의 정서도 자주 등장한다. 시인들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해 온 작품을 따라 읽는 과정은 곧 한국시가 어떤 감정과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오래 남아 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시인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한국 현대시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 명시』의 가장 큰 특징은 작품 선정의 주체가 ‘시인’이라는 데 있다. 문학사적 중요도나 교과서 수록 여부만으로 작품을 배열한 선집이 아니라, 창작자가 실제로 좋아하고 즐겨 읽는 시를 묻고 그 응답을 모았다. 그래서 익숙한 명시를 다시 만나면서도 “왜 시인들은 이 시를 골랐을까”라는 새로운 질문을 품게 한다.
한국시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믿을 만한 입문 목록이 되고, 이미 여러 시를 읽어 온 독자에게는 자신의 애송시와 시인들의 선택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준다. 한 권에 모인 52편은 한국 현대시의 서로 다른 목소리와 리듬, 감정의 폭을 한눈에 경험하게 하는 길잡이다.
작가 소개
엮은이 : 한국시인협회
한국 문단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정통적인 시인 단체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 단체가 한국 시단에 끼친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돌이켜 보면 창립 50년 동안 펼쳐온 여러 행적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예컨대 1957년 제정된 '한국시인협회상'은 문단 정치나 경제적 보상과는 무관하게(시인협회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상금이 없는 문학상이다) '시인들이 뽑아 수여하는' 시단의 가장 명예로운 상으로 정착되어 그 권위를 오랫동안 지켜왔다. 1958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시문학의 문헌적 정리와 연감 제작을 목표로 발행해온 시협 사화집 역시 우리 문단에서 그 해의 대표적인 시를 정리하는 사업이 되었다. 1969년부터 연례적으로 시행해온 세미나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적인 문학세미나로 자리잡았다. 특히 후자는 그동안 많은 시인들과 시학자들이 해마다 머리를 맞대고 문단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격의없이 토론하여 한국 시단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공론의 장이 되어 왔다.
그린이 : 이도헌
1966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하여, 오세영 선생님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살수쌍졸>, <필승>, <난타신검> 등의 만화를 발표하였고, <군림천하>, <투자전략 병법 36계>, <그녀의 시간표>, <크레이지 게임> 등 여러 편의 신문 삽화를 그렸다. 현재는 국내외 커버 일러스트 작가도 활동하고 있다.
목 차
1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 13
고 은 | 문의 마을에 가서 ── 15
곽재구 | 사평역에서 ── 19
구 상 | 오늘 ── 21
기형도 | 빈집 ── 25
김광림 | 쥐 ── 27
김남조 | 겨울 바다 ── 29
김소월 | 진달래꽃 ── 32
김수영 | 풀 ── 34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 37
김종길 | 성탄제 ── 39
김종삼 | 북치는 소년 ── 43
김종해 | 풀 ── 45
2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 49
김춘수 | 꽃 ── 51
김현승 | 가을의 기도 ── 54
노천명 | 사슴 ── 57
박남수 | 새ㆍ1 ── 58
박노해 | 노동의 새벽 ── 63
박두진 | 해 ── 67
박목월 | 나그네 ── 71
박용래 | 저녁눈 ── 73
박인환 | 목마와 숙녀 ── 74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79
백 석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80
서정주 | 자화상 ── 84
3
서정춘 | 죽편ㆍ1 ── 89
성찬경 | 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 91
신경림 | 농무 ── 93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 96
오규원 | 한 잎의 여자ㆍ1 ── 99
유치환 | 행복 ── 100
윤동주 | 서시 ── 103
이 상 | 거울 ── 104
이근배 | 냉이꽃 ── 107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108
이성복 | 남해 금산 ── 113
이수익 | 우울한 샹송 ── 114
이용악 | 오랑캐꽃 ── 118
4
이육사 | 광야 ── 122
이형기 | 낙화 ── 124
정지용 | 향수 ── 126
정진규 | 연필로 쓰기 ── 131
정현종 | 섬 ── 133
조병화 | 낙엽끼리 모여 산다 ── 135
조정권 | 산정묘지ㆍ1 ── 137
조지훈 | 낙화 ── 144
천상병 | 귀천 ── 147
한용운 | 님의 침묵 ── 148
허영자 | 감 ── 153
홍윤숙 | 장식론ㆍ1 ── 154
황동규 | 즐거운 편지 ── 158
□ 수록 시인 소개ㆍ161 | □ 작품별ㆍ시인별 집계 결과ㆍ169
□ 해설ㆍ장석주 상처받고 신음하는 용들의 노래 ── 178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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