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소실되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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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장석원
출판사항문학동네, 발행일:2026/04/30
형태사항p.123 국판:23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41603113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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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내 안의 너 살아났다가 죽어버린 너

명멸하는 너와 나”


모든 정념이 불타 사라진 뒤에도 완수되지 않는 이별,

결정체처럼 남겨지는 불연성의 존재


첫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를 통해 격렬한 투쟁의 언어, 혁명으로서의 사랑을 선보이며 평단의 뜨거운 주목을 받은 장석원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이 문학동네시인선 250번으로 출간되었다. 그간 여섯 권의 시집을 거치며 세계의 비정함을 부단히 폭로하고 사랑이 끝난 뒤의 폐허를 비통하게 직시해온 시인은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뒤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에 다다랐다. 통절한 감정을 리드미컬하고 능숙하게 구사하는 시인의 문장은 왈칵 쏟아질 듯 넘실거리는 그리움의 정서를 동반한다. 이때의 그리움이란 헤어진 연인에게로 한정되는 평면적인 감정이 아니다. 시인이 그려내는 이별의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소멸하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애틋함과, 다가올 일을 모른 채 ‘너’와 같은 시간선에 머물렀던 ‘나’에 대한 회한까지를 포함한다. 이를 도착적으로 파헤치고 영영 기억하고자 할 때, ‘너’와 ‘나’가 사라지지 않고 명멸하는 “무한 천공”(「플랑크 타임」)의 영원이 가능해진다.


허공이 벌어진다

경탄에 젖어 열리고 있다

안면이 생긴다

사랑에 빠진 육체 흐드러진다


요확에서

네가 나타난다 그때 나는

베어지고 비탄과 신음

구멍마다 새어나오고


(……)


너와 나는 하나였는데 존재한 적이 없었고

맞붙었던 입술 떨어질 때 우리가 헤어질 때

너는 활상하는 그림자가 되고…… 영원한 ●

_「플랑크 타임」 부분


시집을 여는 첫 시의 제목 ‘플랑크 타임’은 물리학에서 유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최소의 시간 단위를 뜻한다. 이를 시적으로 해석하면 “저곳과 이곳, 없음과 있음, 알 수 없음과 앎,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문학평론가 양순모, 해설)라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공간감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는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내가 나타나면 네가 사라지고/네가 다가오면 내가 멀어”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영원히 반복되는 1초” 안에서 그렇게 두 사람은 “연속적이고 연쇄적”인 스침을 지속하는 중이다. 시공간이 점(●)으로 수렴하는, “너와 나”가 “동시에 탄생”(「플랑크 타임」)하고 폐기되기를 반복하는 무한한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는 하나로 중첩된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관계를 암시하듯 “불붙”고 “몽그라진”(「절곡(折曲)」) 모습의 ‘너’는 복구가 불가능할 만큼 변질된 뒤지만, 도리어 “발광체”처럼 “뚜렷해”(「나를 불태워줘」)진 형체로 ‘나’를 찾아온다. “누군가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상황을 두고 화자는 “너무 지겨워 나를 지져줘 나를 묻어줘”(「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라고 한탄하다가도, “너의 잘린 토막으로”나마 “포만”을 느끼고 “살”을 빚어내며 “네 옆에 살아남아서 창궐”(「힘 힘 너머로」)할 힘을 얻는다. 그렇게 연결되는 ‘나’와 ‘너’는 그런데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듯, “절개된 채 썩는” “속 다 내어준 채/문드러지고 있”(「Nothingness」)는 모양새다.


아무도 아닌

내 안에서

아무는 누구


다무는 입

나를 닫아걸고

너를 묻는다


(……)


우리는 서로를

찢어버렸네

비명과 울음 없이

피 없이 애도 없이


절개된 채 썩는

아무와 아무

나 아닌 나와 너


속 다 내어준 채

문드러지고 있다

割, 愛

_「Nothingness」 부분


이렇듯 손상되고 부서지는 몸의 이미지를 지닌 채로, ‘너’는 “망각과 회억의 상관관계 속에서” “살아나는 밤의 불빛”(「문산」)처럼 가물거리며 슬픔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지는데 이때 화자가 ‘너’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일은 보통의 이별에 수반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른 결을 취한다. 그것은 때로 “가슴속 긁어대는” “쇳소리”로, “회전하는 총알”(「조준 사격」)로, “기묘하고 차갑게” 다가오는 “시반”(「착한 에세이」)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서늘한 이미지는 ‘부음’ ‘국화’ ‘화장장’과 같은 시어들과 더불어 사별을 암시하기도 한다. 다만 마치 “터미널을 빠져나”(「영현(英顯) 처리」)오듯 누군가와 함께했던 한 시절로부터 탈각되어 나오는 과정 역시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시인에게 있어서 이별이란 어떤 사정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그 상대를 ‘영현’으로 처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한 시절 전체를 애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끝없음을 거듭해 환기하며 보다 근본적인 애도 작업을 작동”(해설)시키는 방식으로.


투명하고 깊은 X의 흰 손이

내게 사랑을 불러왔지


X를 안고서 미끄러져 내려간다

어둠 안으로 들어가서 재생한다

기쁨과 두려움 그리고 가려움


나는 X의 체온을 잊지 못해

기억해 그것을, X의 것을

불덩어리의 아름다운 활강을


(……)


폭우가 쏟아진다. 바위가 굳는다. 빗물 혓바닥 땅을 핥는다. 새로운 X가 태어난다. 방혈하면 나는 깨끗해질까. 나와 공동(空洞)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비가 있다. 비가 나를 다스린다. 나는 녹는다, 흘러간다. 용암. 종말. 사랑은 망각 후에 발굴될 것이다.

_「폼페이, (그)라(디)바」 부분


그러나 기억을 “보존 처리”해둔다면, ‘너’와 누렸던 시간은 언제든 “재생”할 수 있는 영원한 역사가 된다. 위 시의 ‘X’는 이미 “불덩어리”로 타올라 사라진 뒤지만, ‘나’는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붙들린 것 같다”고 토로하며 ‘X’와의 대담을 이어간다. 시 속 ‘X’는 화자를 사랑해주는 타인처럼도, 화자 자신처럼도(“내가 너야. 너를 사랑해”) 보인다. “X는 누구일까”라고 자문하던 ‘나’는 이내 “바위가 녹아내”릴 듯 뜨겁고 “살 타는 냄새 가득”한 살풍경 속에서 “새로운 X”의 탄생을 예감한다.

편집자와의 사전 인터뷰에 따르면, 장석원의 시 속 ‘너’는 타인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그때 그 시절에 존재했던 ‘나’이기도 하다. 수많은 ‘나’가 ‘너’ 혹은 또다른 ‘나’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러 ‘우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현재의 우리가 소멸한 뒤 다음 세상에는 어떤 새로운 존재가 탄생할까. 이별과 만남이, 죽음과 탄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세계에서 장석원은 타자와 타자화된 나를 ‘너(X)’라고 총칭하며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별을 아우르고 있다.


통증 없이 나를 기재한다

후회 없이 나를 벗겨낸다


조금 더 멀어졌던가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부패했던가


부르튼 얼굴 들여다보면


느리게 달라질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

발생된 것

기억된 것

서술된 것

일까

_「훈증」 부분


대체로 절망적이고 비통한 정서가 시집 전체에 배어 있는 가운데, 집념을 내려놓은 자의 초연함이 느껴지는 구절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이별은 흘러가는 것 땀이나 눈물 같은 것이지 사랑처럼 쉽게 탈색되지”(「착한 에세이」), “기다려보자 견뎌보자 달라질 것이다”(「단자의 리스페리돈」)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위 시 역시 마찬가지다. 화자인 ‘나’는 이제 “통증 없이” “후회 없이” 자신을 직시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 초탈한 태도로 “부패”된 ‘나’와 “우리”의 기원을 되짚어간다. 그로써 ‘나’는 너무도 밀접했던 이별의 통증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낸 뒤 ‘우리’가 하나가 아닌 둘로 “쪼개진” 상태임을 자각하고, “너를 기다리다가 생매장된 나를 꺼내”볼 용기를, “헤어진 몸, 사출한 그 몸”은 “소각하”(「회회(蛔蛔)」)겠다는 결심을 품게 된다. “전쟁과 전염” “미망의 광기” 속에서도 “어떻게든/일상”은 “지속”될 것이므로 “너를 붙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오랫동안/널 머금을 수 있”도록 오히려 “조금 더 멀어져”(「단자의 리스페리돈」)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로써 “영구히 떠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들은, 결단코 만나지 않는다”(「대속(代贖)과 구령(救靈)」)는 아이로니컬한 깨달음이 도출된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될까” 기대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사라”지는, “감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끌고 가”(「조운트조(soundso)」)는 위협적인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일 수도 있겠다.

몸이 불타 소실되는 고통을 느낄 만큼 뜨거웠던 한 세월을 지나고 난 뒤, 시인은 마침내 우리는 함께 “경험하는 자”이며 “광장의 굉음에 절삭되며 신음하는 몸들”이자 공통적으로 “사라지는” 신체를 가진, “세계의 전부를 소실”(「●」)한 후 다음으로 건너갈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시집의 마지막 시편, 모든 것이 허물어진 생의 끝에 이르러 몸을 태우고 남은 재를 바람에 날리는 「폭장」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너’를 기린다. “봄바람”이 실어다 주는 “꽃씨”처럼 나를 스쳐간, 한때는 내 “살 속의 뼈”와도 같았던 ‘너’가 “나에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음을 느낀다.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별의 폐허에 매몰되는 대신 그 피폐한 풍경 속 남겨진 ‘나’와 ‘너를 고요하게 응시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이별하고 영원히 애도하는 자로 거듭난다.


우리가 소실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나’, 결코 반성될 수 없는 ‘나’.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 속에서, 이미지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며 풍경을 그려내는 ‘나’. 그런데 우리 저 ‘나’를 바라보며 외려 ‘나’를 압도하는 ‘이별’을, ‘죽음’을 어느 때보다 슬프게 예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진정 마주한 것은 무엇인가. (……) 우리의 삶이 진정 삶다운 것이 되기 위해, 그 앞과 뒤에서 묵묵히 문학을 하고 있는 시인과 눈이 마주쳤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기에 끝없는 패배를 수행하는 시인과 눈을 마주쳤다면,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 너머, ‘나’ 너머의 그것들을 참으로 슬프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_양순모, 해설에서

작가 소개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리듬』 『유루 무루』 『이별 후의 이별』, 산문집 『우리 결코, 음악이 되자』 『미스틱』 등이 있다.

목 차

시인의 말


1부 배타 원리

플랑크 타임


2부 절명의 피막

묘혈/ 절곡(折曲)/ 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 나를 불태워줘/ 절곡(絶穀)/ 견고한 대지와 늪/ 힘 힘 너머로/ Nothingness/ 파주/ 환면(幻面)/ 문산/ 조준 사격/ 착한 에세이/ 영현(英顯) 처리/ 기체 인간/ 혼유석(魂遊石) 앞에서—Contaminate me/ 쌍분(雙墳)/ 꽃 무덤


3부 보존 처리

폼페이, (그)라(디)바


4부 별사

적열(赤熱)/ 맥주를 들고 집으로/ 단자(單子)의 플롯/ 회회(蛔蛔)/ 가소성/ 훈증/ 화장장에서/ 단자의 리스페리돈/ 메틸렌 블루/ 대속(代贖)과 구령(救靈)/ 출장길, 뒤돌아보니 인중과 아미(蛾眉)가/ 조운트조(soundso)/ 수색역에서, 1988/ 더 멀리, 우리의 색신/ 두 눈으로 우는 우리는 사후(死後)에/ ●/ 폭장(曝葬)


해설| 눈물이 쉬루르_양순모(문학평론가)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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