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감염은 무엇보다 공동체의 일이다
: 의료인류학자가 길어낸 감염병의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
“나는 고통과 사랑의 감염력에 의지해 이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먼저 휘말린 사람들이 들려주는
감염과 바이러스가 품은 희망과 미래의 이야기
‘감염’은 이제 낡은 화두가 된 것 같다. 팬데믹에서 엔데믹까지를 경험하며 한국 사회는 그간 다루지 못한 담론을 많이 얻었다. 재난은 어떻게 불평등하게 배분되는가, 왜 ‘돌봄 사회’로 전환해야 하는가부터 출발해 질병과 장애에 관한 담론도 확장되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가 정말로 감염이라는 화두를 온전히 소화한 걸까? 엔데믹으로의 전환, 일상으로의 복귀 속에 우리가 제대로 다루지 못한, 눙치고 지나온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팬데믹 초기, 확진자에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사생활의 동선이 전국민에게 공개되던 당시의 공포는 분명 질병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도 ‘몇 번 환자’가 되어 동선이 공개된다면 비난당하고 공동체로부터 격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전히 감염은 개인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여겨지고, 감염병에 걸린 사람 개개인은 질병 그 자체보다 낙인과 싸워야 한다.
『휘말린 날들』은 어쩌면 가장 그러한 낙인이 공고하게 찍혀온 HIV/AIDS를 바탕 삼아 이 같은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 의료인류학자이자 HIV/AIDS 인권운동 활동가인 서보경은 ‘앞줄에 선 사람들’, ‘먼저 휘말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HIV 감염인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혹은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염이라는 사건을 한발 앞서 겪은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불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숨겨진 상실과 함께 나누지 못한 애도의 기억, 그리고 어떻게 다른 세상을 열어갈 것인가에 대한 대담한 통찰이 깃들 이 이야기들을 문화기술지의 형식, 분야를 넘나드는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 스스로 마주하고 겪어온 경험들을 경유해 길어낸다. 그럼으로써 감염이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일’임을, 그리고 우리의 존재 조건임을 논파한다.
자신 역시 “앞줄에 선 사람들에게 휘말리면서 직업으로서 인류학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서보경의 글쓰기는 인류학적 글쓰기의 전범임과 더불어 나아가 인류학의 외연을 넓히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마음을 붙든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기 위해 여러 번 생각하고, 질문하고, 다가가는 동시에, 감염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문법, 어조, 비유를 섬세하게 고찰한다. 이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글쓰기, 감염인들의 숨겨져야 했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온 이야기꾼의 기록 속에서 독자들 역시 온 몸과 마음으로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나는 아직 감염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방역 지침을 성실히 이행한 좋은 시민이라는 유일한 증거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나는 먼저 감염했을 뿐이다.’라는 선언은 방어적 웅크림과는 전혀 다른 몸의 자세를 요구한다. 더 이상 감염한 것을 죄스럽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다는, 수치심을 강요당하지 않겠다는 자긍의 선언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을 직시하고 다음을 예비하겠다는 용기가 여기에 있다.(16쪽)
앞줄의 사람들은 바삐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외려 뒷줄의 사람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는 이들이다. 해줄 이야기가 있다는 마음에는 두려움에 휩싸여 끝없이 달아나려는 탈주의 욕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용기가 있다. 전할 이야기가 있을 때, 앞줄은 버려진 사람들의 자리가 아니라 먼저 겪은 사람들의 자리, 다음 사람이 홀로 고통받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람들의 자리이다. 경계선이 결정하는 운명을 바꾸고, 함께 있을 장소를 찾는 사람들의 자리이다.(17쪽)
HIV에 관한 이야기에는 온갖 차이를 가로질러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힘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숨겨지고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고난과 슬픔을 들려주는 동시에 더 이상 숨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제 숨지 말고, 홀로 사라지지 말고, 함께 있자고 청하는 사람들의 용기와 기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염은 서로 다른 것들이 마주 닿아 번지는 일이며, 그에 관한 이야기들 역시 자아의 좁은 틀을 벗어나서 타자에게 나아가는 감염력이 있다.(32쪽)
이때 흥미롭게도 감염원의 첫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창조된다. 코로나19 범유행의 여파로 감염에 대한 각종 출판물과 기사가 쏟아져 나왔는데, 삽화로 돋보기를 든 탐정이 종종 등장했다. 추리 소설 같은 형식의 이야기에서 발견은 곧 발각이다. 범인은 자취를 감추고, 증거를 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벌이지만 결국 체포된다. 탐정과 범인의 형상으로 탐구하는 과학자와 탐구의 대상인 병원체의 관계를 그릴 때, 그 사이에 놓인 감염한 사람은 어느새 비밀과 의심, 은신과 추적, 죄와 벌에 대한 도덕적 드라마 속으로 깊이 끌려 들어간다. 에이즈의 역사에서는 종종 발견이 발각으로 여겨졌고, 환자는 죄인으로 몰렸다. 이로 인해 어떤 처음은 다행스러운 소식으로 다가왔지만, 어떤 처음은 두려운 선고가 되기도 했다.(42쪽)
에이즈는 특정 위험 집단의 병이 아니다. 에이즈는 ‘누군가’의 병이 아니다. 에이즈는 HIV 감염 이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생겨나는 병이다. 만약 누군가 HIV에 감염했다면,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HIV라는, 양성 단일가닥 RNA 유전체가 증식 과정에서 이중가닥 DNA로 변형되는 레트로바이러스의 한 종류가 감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생물종이기 때문이다. 성서와 신화 속의 악마나 괴물이 아니라, 비둘기나 고양이, 꿀벌이나 소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감염병의 유행에서 ‘처음’의 자리에 서게 된 ‘특별한’ 사람들은 모두 이걸 말하고 있다. 왜 이 질병이 지금 여기서 이렇게 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다면, 감염한 사람 너머를 보라고 말이다.(75~76쪽)
송원섭 씨에게 눈앞에 보이는 욕창의 고통은 자명한 것이었고, 벌어진 상처가 아무는 건 마땅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처남인 창엽 씨의 긴 입원 생활 동안 그가 더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는 의료진은 많지 않았다. HIV 감염인이더라도 뇌경색으로 쓰러졌으니 이걸 좀 더 치료해볼 수 있지는 않을지, 원섭 씨는 기대를 걸고 신경외과 의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가 “더 이상 치료할 것도, 좋아질 것도” 없는 상태라며 “지금 수준은 애완견으로, 개로 보시면” 된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신경외과 전문의에게 HIV 감염인인 이창엽의 손상된 뇌 기능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으니, 가족에게 헛된 기대를 주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섭 씨에게 창엽 씨는 단 한 번도 말 못 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 종합병원과 요양병원을 오가는 사이, 그래도 “주는 대로 꼬박꼬박 잘 받아먹던” 창엽 씨는 기도 흡인에 따른 폐렴이 이어지자 콧줄로만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고, 소변줄로 배설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죽음에 거의 다다른 상태로 여겨졌을지 몰라도, 창엽 씨를 돌본 사람들에게는 결코 여일한 날들이 아니었다. “꽃 피는 봄날”처럼 좋은 날도 있었고, 열이 나서 힘들어하거나 다리가 갑자기 퉁퉁 부은 게 눈에 보여 걱정을 그칠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이처럼 몸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원섭 씨가 있었기에, 창엽 씨는 말 그대로 살아남았다. 원섭 씨 역시 남들에게 처남의 상태를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창엽은 “그냥 안쓰러워서 보고 만져주고” 싶은 이(person)이지, 부끄러워 치워버려야 하는 것(thing)은 아니었다.(194~196쪽)
그는 이창엽 씨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그의 등에 생긴 욕창의 모양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숨 쉬기를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등을 알아차리고, 여기에 하나하나 대응해가고자 했다. 의사에게 욕창이 아물게 도와주는 수술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고, 기도 삽관을 하자는 의사의 권고에 대해서는 꼭 필요한 일일지 고민했으며, 비위관 상태를 보기 위해서 관 내부를 직접 보여달라고 하기도 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이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였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했고, 그 결과를 살폈다. 이렇듯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필요와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보살핌의 관계 속에서 에이즈 환자이자 친족원이자 인간으로 이창엽의 삶이 지속되었다.(198쪽)
환자의 퇴원을 막는 행태는 갈 곳이 없는 감염인들을 받아들인 병원에서 일종의 비제도적 수용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양 병상의 폭발적인 증가와 그에 따른 과다 경쟁 속에서 환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병원 중의 하나가 HIV 감염인의 입원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HIV 감염인이자 ‘중증’으로 분류된 환자의 경우에는 간병비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여러 HIV 감염인들의 입원은 시설이 열악한 병원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 병원은 특히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동성 파트너와의 관계를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취약한 조건을 악용하여 입원 기간을 늘리고 있었다.(260~261쪽)
감염과 건강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감염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과 감염으로 생길 수 있는 위해가 커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은 다른 종류의 일이다. 병원체는 병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며, 동반의 까다로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끈질기게 묻고 있다. 질병의 예방은 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게 하는 일이 아니라 병에 걸릴 사람을 맞이하는 일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389쪽)
당신이 아무리 HIV에 감염한 사람과 이웃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당신의 몸은 언제나 이미 감염한 몸과 이웃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지금 당장 직접 닿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감염이라는 작용이 매개하는 생명의 의미망 속에 늘 휘말리고 있기 때문이다. 몸으로 우리는 들이마시고, 만지고, 맛보고, 삼키고, 내뿜고, 그러므로 서로 드나든다. 서로의 몸에 가닿는다. 동시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고, 피부에 스치지도 않지만, 그래도 서로 휘말리고 있다.(389~390쪽)
작가 소개
지은이 : 서보경
인류학자. 대전에서 태어나 속리산 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국에서 제일 이름이 특이한 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 캔버라, 치앙마이,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일했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 다닌다.
이주여성의 출산과 출생 등록 경험에 관한 연구로 미국의료인류학회에서 수여하는 루돌프피르호상을,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돌봄의 미시정치에 대한 논문으로 미국문화인류학회의 컬처럴호라이즌스상을 받았으며, HIV 인권운동과 사회과학 연구방법론의 결합 방식에 관한 논문으로 비판사회학회·김진균학술상을 받았다. 감염병의 이동성에 대한 국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생명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인류학의 기반 위에서 새롭게 해명하고자 한다.
목 차
서문: 앞줄에서 알려드립니다
1 첫 사람의 자리에서
2 걸려들었다
3 가운뎃점으로 삶과 죽음이 뭉쳐질 때
4 차별에 맞서는 서로의 책임
5 불명예 섹스를 계속하기
6 휘말림의 감촉
7 HIV와 에이즈의 미래
감사의 말
주
참고 문헌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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