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저자는 오랜 시간 경제학을 가르치며 경제학과 사람의 ‘삶’, 이웃과의 ‘관계’를 고민해왔다. 이 책은 그 고민이 지금까지 지나온 여정을 엮은 것이다. 따라서 굳이 분류하자면 이 책은 ‘에세이’이며 여전히 그 고민은 진행 중이다.
이 책은 수백 년을 거치며 강성해진 주류경제학의 오류와 한계를 비판하고 이를 넘어 경제학에 ‘새로운 상상’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은 주류경제학이 보기에 비경제학적이거나 나아가 불순하게 읽히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의 행간을 따라 읽어가면 사람들의 ‘삶’과 서로의 ‘관계’에 대해 주류경제학과 전혀 다른 저자의 주장에 생각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책은 3부로 구성되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둔다
1부는 세 가지 이야기를 엮어 주류경제학의 원형과 그 전개를 추적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가상의 공간인 ‘후안 페르난데스 섬’에 대한 이야기이다. 섬에 염소 몇 마리를 방목했는데 엄청난 번식력으로 사람들은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염소를 사냥할 목적으로 개 한쌍을 풀었는데, 밀고 당기는 치열한 생존투쟁 속에서 개들의 숫자가 일정하게 증가하고 반대로 염소는 감소하는 ‘억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의 세계가 무인도에서 그려진다.
1768년 염소들과 개들의 행동공리를 담은 조셉 타운센드의 논문은 동시대의 맬서스와 리카도에게 희소성 원리와 자기조정 시장경제를 ‘발명’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도 잘 아는 1719년에 출간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이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영악한 앵글로색슨인의 캐릭터는 1776년에 「국부론」을 출간한 애덤 스미스 이후 주류경제학에 이르기까지 ‘합리적 경제인’의 원형으로 작용하였다.
마지막 이야기는 로빈슨 크루소 소설을 패러디한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리디, 태평양의 끝」이다. 여기에는 염소들과 개들의 행동공리와 같은 추상의 오류도 없고, 유럽문명에서 뽑아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계산 합리적 행위자도 없다. 대신 우리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것을 요구하는 존재론적 전회가 일어나는 ‘호혜의 섬’이다.
주류경제학은 자원의 배분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인간의 ‘죽음’을 관리하며 쓸모가 없는 ‘죽음’은 내버려두는데, 이는 필요악으로 여긴다. 저자는 위의 세 이야기를 얶어 주류경제학이 어떤 생각에서 이런 암울하고 허무한 상황을 정당화 하는지, 이 상황을 벗어날 새로운 해방의 기획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한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2부는 평생을 떠돌며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칼 폴라니를 조명한다.
칼 폴라니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늘 쫓기며 살았다.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세계를 떠돌고 망명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이었다.
“나의 삶은 세계사다”라고 할 정도로 칼 폴라니의 삶은 불안·고통·격변·절망으로 압축된 세계사를 관통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스탈린주의의 대두, 나치즘, 사회주의,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숨가쁜 역사와 마주한다.
칼 폴라니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자유’였다. 사회적 자유는 타자와 연대를 이루는 사회적 연결고리를 끊임없이 확장하여 인간은 시장과 개인의 경제적 교환관계가 아닌 사회적 존재로서 의무와 책임을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 나온다.
사회와 분리된 시장교환 행위자의 절대적 자유, 말하자면 경제적 자유를 넘어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구현할 진정한 자유는 ‘사회적 의무와 책임에 기초한 자유’였다. 사회와 타인에 빚지고 있다는 채무의식이 해소될 때 인간은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의 부담을 떨쳐버리고 자립적이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칼 폴라니가 평생의 주제로 탐색했던 자유는 ‘형식경제가 갖는 경제적 자유’에 대항하여 ‘실체경제를 통해 사회적 자유’를 실현하는 패러다임으로 이어진다.
칼 폴라니에게 ‘실체경제’는 인간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도덕률 속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해 의무를 다하는 도덕적 존재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실체경제의 궁극적 가치는 개인의 발전, 도덕적 자유와 정신적 자립 또는 자유로움에 있다.
위기의 시대에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을 요구했다. 저자는 공동체 이후 시장경제와 경제학이라는 사회과학이 면역(免役) 프로젝트였다면, 이제 전환시대의 경제학은 위험에 노출되고 불안하고 취약한 인간들이 아픈 상처를 공통성으로 삼아 공역(共役)의 프로젝트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은 형이상학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3부는 주류경제학의 바탕에 깔린 철학적 인식을 비판하고 앞으로의 경제학이 나아갈 철학적 방향을 탐색한다.
경제학만큼 학습과 이론의 영향력이 큰 학문도 없다. 경제학은 학습자의 행동은 물론 관찰대상과 현실까지 바꾼다. 자연과학도가 연구한 가설 검증과 이론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유용하지만 자연계와 물리적 실재에 직접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자연과학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공전운동을 바꿀 수는 없지만 경제학은 그렇지 않다. 주류경제학은 자유시장주의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지구 전체가 시장경제를 중심축으로 공전운동하도록 바꾼다.
경제학이라는 학문도 우리 삶의 실체조건이라 할 수 있는 신·자연·인간의 본질적 관계에서 ‘겸손하고 소박한’ 매우 작은 지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한과 유한의 형이상학을 ‘유한한 수단과 무한한 욕망의 만족’이라는 형식에 가둬놓고 신과 자연을 수직적으로 지배하는 제국주의를 만들어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양태가 거꾸로 ‘실체 또는 만물의 생성원인=자연=신’을 감옥에 집어넣고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했던 과잉된 이성의 거대한 오류이자 비극이었다. 생태계의 반란이었던 코로나19 사태도 근원적으로는 여기서 기원한다.
어디서부터 경제학의 방법론적 오류가 시작되었을까?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견고한 핵은 데카르트와 뉴턴의 초월적 신학과 기계론을 형이상학적 전제로 삼아 지식을 생산해 왔다. 오늘날 데카르트와 뉴턴의 형이상학과 이신론이 더이상 타당하지 않다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아직도 견지하고 있는 견고한 핵은 물론 지식과 이론 체계도 당연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동시대에 데카르트와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 그와 형이상학의 출발지점부터 달랐던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탈데카르트 경제학의 모습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핵심은 자연 안에 ‘나쁜 만남’은 있어도 ‘나쁜 지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혼란스러운 정치체제처럼 군주가 신민을 통제하고 주인이 노예를 억압하는 지배체제는 결코 용납돼서도 안 되었다. 자연만물은 신의 능력과 힘을 분유하고 인과관계의 만남에 따라 서로 변용된 양태라는 점에서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으며 모두가 동등할 따름이다.
권력이 통제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지푸라기들이 많아지면 정념은 변용되어 군중들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스피노자는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슬픔의 정서를 분노로 표현한다. “분노란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분노는 도덕적 감정을 넘어 무엇보다도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어떤 ‘침해’를 목격하였을 때 피지배의 예속된 사람들이 힘을 응집시켜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몰고 간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침해를 당했지만 슬픔이 번져서 대중들 모두가 겪는 것처럼 간주된다. 슬픔의 전염은 하나의 원인 때문에 촉발되기도 하고 주변에서 같은 슬픔이 넘쳐흐르게 하여 예속 편입된 코나투스들이 공통적으로 반란 또는 반동적 운동을 일으키도록 결정짓는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마지막까지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사랑과 기쁨이다. 기쁨은 신체와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동 또는 정서의 변이다. 스피노자에게 역량과 자유는 신체의 변용능력을 키우며 인간발달을 위해 노력하고 영원한 정신과 만남으로써 기쁨을 얻는 것에 있다.
기쁨과 자유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나온다. 스피노자는 외부의 수동적 정념에서 벗어나 덕과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제안한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홀로 고독 속에 살아가는 것보다 협력하여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더 자유롭다.”
짐(負), 빈(貧), 탐(貪), 화폐 저 너머의 세계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한자 세 글자를 논한다. 천천히 그 의미를 느껴보면 좋겠다.
손에 쥔 벼 한 움큼이 주먹이다. 한 움큼을 쥔 벼가 한 줌이다. 한 줌의 벼를 10개 묶으면 볏단(뭇) 또는 한 다발이 된다. 벼 열 단을 모아 손으로 들 수 없어 등에 짊어지게 되면 한 짐(負)이 된다. 그러고 보면 짐은 고단한 삶의 무게가 아니라 수확한 벼를 등에 지는 기쁨이다. 다만 기쁨을 넘어서는 욕심은 탐욕이 되어 내 삶의 등을 휘어지게 하는 짐이 될 뿐이다.
貧(빈)이라는 글자를 나누면 分+貝가 된다. 조개 또는 화폐를 나눈다, 즉 ‘자원을 나눈다’는 뜻을 가진다. 개인으로서는 자기 것을 나누면 적게 가지게 되어 가난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애초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였으나 무한하다고 여겼던 지구상의 모든 자원이 고갈되는 위기상황에서 유한한 자원을 함께 나누는 가난의 생활이야말로 지속적인 생태계 사회를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 되었다. 함께 가난하지 않으면 함께 살아갈 수 없다.
貪(탐)도 한자를 빠개면 今+貝가 된다. 지금 현재 눈앞[今]의 화폐[貝]만 바라보고 이익에 급급하면 탐욕이 될 수밖에 없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원용찬
전북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주요 저서로는 『인물로 본 문화』(칼 폴라니 편, 공저, 2020), 『빵을 위한 경제학』(2016),『칼 폴라니, 햄릿을 읽다』(2012), 『유한계급론: 문화·소비·진화경제 학』(2007), 『상상+경제학 블로그』(2006), 『일제하 전북의 농업수탈사』(2004), 『民俗經濟學の硏究』(공저, 2003), 『전북의 시장경제사』(공저, 2003)가 있다. 옮긴 책으로는 『독식비판: 지식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2011), 『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2008), 『죽음의 문화와 생명보험』(2006),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1997)이 있다.
목 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5천 원과 외상장부 17
제1부 무인도와 죽음의 경제학
동물의 왕국과 인간경제 33
주류경제학의 허구적 원형 49
애덤 스미스의 시신경제학 73
칼 폴라니의 실체경제와 탈상품화 세계 97
제2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의 주저함과 결단 123
사회적 자유와 도덕적 채무 153
칼 폴라니의 화폐의미론 177
이뮤니타스와 코뮤니타스 215
제3부 스피노자, 기쁨의 경제로 가는 길
데카르트가 경제학에 끼친 폐해 239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경제학 방법론 261
욕망 긍정의 코나투스와 인간역량 281
스피노자와 칼 폴라니의 공통인식 329
에필로그
짐(負), 빈(貧), 탐(貪), 화폐 저너머의 세계 373
주 385
참고문헌 396
찾아보기 406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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