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많은 건축가가 수첩이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솜씨 좋은 건축가 또한 많지만, 최문규의 스케치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수려함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담백한 표현 속에 담긴 풍부한 감성과 생각이 매력이다. 인간의 유한함에 함께하는 필연적 슬픔, 어린 마음이 갖는 신기함과 호기심을 담은 그림들이다. 열려 있고 살아 있는 그림이어서 좋다. 자기를 위해서 그린 스케치이지만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_“대화의 문을 열며”, 008쪽
건축가의 그림
여기 이상한 그림이 있다. 나무 중간쯤에 박혀 있는 크게 뜬 눈이 있는 그림, 짙은 파란색의 나무 가운데에 눈이 그림. 파란색 나무 그림에는 “눈을 뜨고 꿈꾸는 나무(85쪽)”라는 연필 글씨가 있다. 다른 나무 그림에는 “나를 바라보는 눈(84쪽)”이라고 쓰여 있다. “밤을 먹는 닭(192쪽)”이라는 그림도 있다. 불을 뿜는 익룡 형상이다. “힘의 분해: 땅, 하늘(206쪽)”은 주먹 쥔 채 뻗은 팔을 기준으로 세로축과 가로축을 설정하고 아래에는 삼각함수 공식에서 사용하는 사인과 코사인 기호가 적혀 있다.
“쌈지길의 건축가” 최문규의 그림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건축가의 스케치와는 상당히 다르다. 건물을 짓기 전에 땅을 보고 그린 개념 스케치도, 건물 형태를 옮긴 그림도 아니다. 누군가 쓱쓱 대충 낙서한 그림처럼 보인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인다. 전문 화가의 그림처럼 세련되고 깊이 있어 보이는 그림도 보인다. 최문규는 “생각을 글로 쓰는 것보다 그림으로 그리는 게 편해요.”(181쪽)라고 말한다. 그림은 복잡한 과제를 단순화할 수 있는 편리함과 대담함이 있어 설계하는 사이사이 잠깐씩 그리게 된다고 한다. 건축가 최문규에게는 그림이 생각을 정리해 주는 일종의 메모인 셈이다.
300여 권에 달하는 최문규의 그림 수첩을 보고 건축역사가 배형민은 “최문규는 신기한 생각을 모으는 수집가”라고 말한다. 근대적인 박물관이 만들어지기 전 세상의 신기한 것을 모으는 서양의 수집가들이 만든 ‘기이한 것들의 방’을 보는 것 같다(187쪽)고.
건축주도 없고 건물도 아닌 걸 시간이 남을 때 그리니까 시간이 쌓이는 것이겠죠. 결과는 횡설수설, 페이지마다 별 연관 없는 여러 그림이 남아요. “내 졸린 위를 바라볼 때는 항상 눈이 시리다.” 이런 글과 그림인데 나는 이것을 “남는 시간이 만든 부산물”이라 불러요.
_“부산물은 나의 힘”, 195쪽
《의심이 힘이다: 배형민과 최문규의 건축 대화》는 건축가 최문규와 건축학자 배형민이 나눈 대화이다. 비평가의 질문과 질문에 답하는 건축가의 대화를 넘어선, 오랜 시간을 함께하여 친구가 된 두 사람의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이다. 가식과 무거움을 털어낸 편안한 대화가 전하는 것은 웃음을 통한 현실에 대한 통찰이다. 꼭 건축의 길이 아니더라도 동시대에 창작의 가시밭을 걷는 후배들에게 따뜻한 위무가 될 것이다. 대화의 갈피마다 등장하는 메타포와 비약의 스케치가 매력적이다. 최문규가 학생 시절부터 그린 300권의 수첩에서 고른 그림에서 대화의 흔적을 찾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건축가와 건축학자의 만남
“최문규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쯤, 동네에서였다.”라며 배형민은 최문규와 첫 만남을 이야기하며 대화를 시작한다. 동네 이웃으로, 여러 일을 함께하며 건축역사가 배형민과 건축가 최문규는 15여 년 동안 수시로 건축과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간 두 사람이 비운 와인 병을 줄 세우면 어지간한 동네 한 바퀴를 돌고도 남을 길이가 될 거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배형민은 자신이 만나본 국내외 건축가 중 최문규가 “건축에 대해 가장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건축가”라고 한다. 또한 최문규는 “비약과 은유의 귀재”라고도 한다. 그럼에도 최문규는 건축을 잘 만들어낸다는 게 다른 건축가들과 다르면 다른 점이라고 한다.
건축가와 건축학자의 대화라고 하면 비평가의 입장에서 건축가의 작업과 작품을 이야기하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의심이 힘이다: 배형민과 최문규의 건축 대화》는 그런 뻔한 대화가 아니다. “신뢰와 의심을 공유하는 파트너가 있을 때 대화가 가능하다는 본질에” 기댄 대화이다. 그래서 오랜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나눌 법한 이야기가 많다. 건축가를 꿈꾸는 학생, 건축을 하고 있는 실무자, 건축 연구자, 건축을 전공하지만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학생 등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다. 솔직하고 유쾌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최문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건물을 완성해 가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된다. 건축역사가이자 비평가이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건축 큐레이터’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배형민의 공부 과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건축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선생님한테 “너는 재능이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 다리가 풀리죠. 그 말에 충격 받고 바로 설계를 포기하는 학생이 많아요.
_“배짱, 또는 건축은 재능이 필요한가?”, 017쪽
습관적으로 매일 한 장이라도 그리고 엉뚱한 걸 생각하고 눈앞에 있는 것을 결정하고. 사실 건축은 창작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결정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 결정을 무서워하지 않고 계속해야 해요.
_“아마추어와 프로”, 029쪽
건축계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어요. 창의성에 대한 일종의 신화죠. 새로운 것, 좋은 디자인은 총체적인 건축의 현실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프로젝트의 조건과 장소가 다르니 그것에 충실하면 다른 것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_“설계가 잘 안 돼요”, 043쪽
개념은 처음 아니면 나중에 나온다기보다는 설계 과정에서 계속 변해간다는 게 더 맞을 거예요. 축구 시합에서 전반 초반에 한 골을 넣었다고 경기에 이기는 것이 아니듯 설계도 첫 생각이 좋다고 바로 좋은 건물이 되진 않아요. 생각과 건물 사이의 긴장이 계속 유지되는데 마지막에 좀 더 명확해지죠.
_“비겁한 콘셉트의 개념”, 065쪽
한 학기 내내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고 노동해 만든 것이 처음부터 그냥 무시당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 힘든 기억 때문에 우리 학생들에게 그런 평가는 자제해요. 그때 내 노동으로 커다란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결과는 유치하고 거칠게 보일 수 있지만 나름대로 절실하고 진지한 작업이었어요.
_“코쿤 프로젝트, 또는 설계 크리틱의 병리학”, 097쪽
오랫동안 선배들과 동료 건축가들이 한국성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적 건축을 만들려고 했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면서 전통과 혼성적인 결과를 만들고. 책과 여행을 통해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듯하지만, 아직도 그 뿌리는 깊이 남아 있어요.
_“어디서 건축을 하는가?”, 177쪽
그림과 이야기, 그리고 편집디자인
건축가의 건축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림과 비평가의 전형에서 벗어난 건축가와 건축학자의 대화를 담은 《의심이 힘이다: 배형민과 최문규의 건축 대화》에는 여느 책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편집디자이너와 글씨체 정보이다. 책 뒤표지에 편집디자이너의 약력과 함께 책에 사용한 글씨체의 서체 이름과 서체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를 표기했다. 책을 구성하고 편집하는 데 디자이너의 역할도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든 디자이너가 필요하지만 이 책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남다르다. 배형민은 “논리와 감각을 구분 없이 녹여내야 하는 책”이기에 여러 번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는 그래픽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에게 함께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편집 디자인
슬기와 민
책을 디자인한 슬기와 민은 계원예술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 최슬기와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최성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슬기와 최성민은 미국 예일대학교 그래픽 디자인 석사 과정에서 만났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의 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다음 2005년 한국에 돌아와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갤러리 팩토리에서 연 첫 단독전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미술 부문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고, 김진혜갤러리, 페리지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국내외 여러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들의 작품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홍콩 M+, 뉴욕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미술관 쿠퍼 휴잇, 파리 장식미술관,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책에 쓰인 활자체
이 책에는 최근 발표된 젊은 디자이너의 활자체가 쓰였다. 본문에 사용한 ‘윤슬바탕체’는 윤민구가, 표제에 사용한 ‘공간’은 김태헌이 디자인했다. 개념이 뚜렷하되 경직되지 않은 인상과 글자 내외로 바람이 통하는 느낌이 《의심이 힘이다》가 담는 이야기에 잘 어울린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배형민
“생각과 글, 이미지, 공간, 설치 등을 엮어 관중과 소통하고 다양한 사람과 협업하는 전시기획”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배형민은 건축역사가이자 비평가이며 큐레이터이다. 2008년,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큐레이터로 참여해 2014년에는 최고 영예의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수석 큐레이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협력 감독, 삼성미술관 플라토 초대 큐레이터 등 전시 현장에서 활동해왔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환경대학원에서 학·석사,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다.
MIT 프레스에서 출간한 《The Portfolio and the Diagram》은 세계 유수 대학의 필독서이다. 《한국건축개념사전》을 공동 저술·편집했으며, 승효상의 건축을 다룬 《감각의 단면》, 기업과 건축의 관계를 다룬 《아모레퍼시픽의 건축》 등을 저술했다.
지은이 : 최문규
“연필이 종이 위를 지나는 느낌, 종이 위에 남는 기억이 좋아 시간이 날 때마다 종이를 찾고 생각을 그림으로 그린다.”라는 최문규는 ‘쌈지길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파리 국제대학촌 한국관(2018), 서울시립대학교 100 주년 기념관(2018),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2015), KIST 게스트 하우스 (2013),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진리관(2013), 숭실대학교 학생회관(2011) 등 ‘함께하는 공간’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건축문화대상, 서울시 건축상, 건축가협회상 올해의 건축베스트 7에 선정되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목받고 있다. 태학사(2005), 서해문집(2005), 독서지도회(2003), 정한숙기념관(2003) 등 파주와 헤이리에 다양한 작품이 있다. 제9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국제관, 제7회 상파울루 건축 비엔날레, 심천-홍콩 Bi-City 비엔날레 초청 등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건축가이다.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뉴욕 컬럼비아 건축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이다.
목 차
대화의 문을 열며 - 배형민
배짱, 또는 건축은 재능이 필요한가?
아마추어와 프로
설계가 잘 안 돼요
같이하는 건축
비겁한 콘셉트의 개념
건축가의 악몽
코쿤 프로젝트, 또는 설계 크리틱의 병리학
애벌레, 번데기, 나비
담벼락 밑에 자는 아이
의심의 기계: 평면과 단면
이상한 생각: 입면
어디서 건축을 하는가?
외로운 청어, 또는 그림에 대하여
부산물은 나의 힘
말, 그림, 모형, 건축
건축은 질문이다
최문규의 그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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