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어느 날 당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유죄가 되고 감옥에 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어느 날 당신에게 경찰이 찾아와 당신을 강간 혐의 용의자로 붙잡아 갔다고 하자. 경찰은 포렌식 분석을 위해 음모를 뽑고, 당신의 행적을 추궁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피해자는 당신이 범인이라고 증언했다. 결국 당신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을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피해자의 증언이 있으니, 당신은 분명 범인 아니겠는가? 이 책의 저자인 마크 갓시 교수도 그랬다. 그는 교수 업무의 일환으로 결백을 주장하는 한 재소자의 구명 운동에 나선 로스쿨 학생들을 지도하게 됐지만, 솔직히 무죄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학생들이 상담한 허먼 메이라는 이 재소자는 분명히 범인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가 틀렸다. DNA 검사를 통해 허먼 메이는 실제 강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는 13년간의 복역 끝에 무죄 방면된다. 전직 검사 출신이기도 한 갓시 교수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고 완전히 눈을 새로 뜨게 된다. 검경과 사법 시스템의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죄 없는 이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됐다. 그는 동료들과 오하이오 이노센스 프로젝트를 설립하고, 2022년 현재까지 39명을 감옥에서 꺼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활동 기록으로, 전직 검사의 고백록이자, 사법 제도 개선을 위한 제안서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잘못된 유죄판결로 이어지는 심리적이고 정치적 요인들을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지금껏 그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는 한 사람의 진화에 관한 이야기이자 내가 새로이 눈뜨고 진실을 발견해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인간 심리의 타고난 결함과 정치적 압력이 어떻게 형사사법 분야의 행위자들 —경찰관, 검사, 판사, 변호사 —을 기이하고도 놀라우리만치 불공정한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이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설명하려 한다. …… 정말이지, 우리 형사사법제도는 정의의 여신처럼 눈을 가린 채 정의를 실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불의에 눈감고 있다. -12쪽
오판을 만들어내는 경찰, 검찰 그리고
사법 시스템 전반의 문제점들
그럼 어째서 죄 없는 이들이 유죄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몇 가지 주요 원인을 함께 설명한다.
확증 편향: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심리 경향을 말한다. 형사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판사 역시 인간인 이상 이런 확증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어떤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나면, 용의자를 범인으로 만드는 증거에만 몰두하고, 결백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시한다. 장모를 강간 살해하고, 조카를 강간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클라렌스 엘킨스 사건에서 검경은 피해자에게 남은 정액의 DNA가 엘킨스의 것과 다르다는 명백한 증거도 끝끝내 부정하려고 했다.
‘과학수사’의 오류: 확증 편향은 이른바 ‘과학수사(포렌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검경 등의 수사기관은 과학수사를 의뢰할 때 원하는 결과도 같이 전달하곤 한다. 탄도 검사라 치면, “그 총알들이 피고인의 총에서 나온 게 맞는지 확인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검찰청에서는 분석 결과에서 찾고자 하는 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답은 언제까지 필요한지를 늘 포렌식 전문가에게 알려줬을 뿐 아니라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으려면 ‘일치’ 여부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 답이 중요하다는 언질을 주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CSI 류의 기관이 지문이나 필적, 치아 흔적을 대조해서 내리는 결론이 객관적인 과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지문의 경우만 해도, 현장에 남은 지문은 종이에 대고 꾹 눌러 찍은 지문과 달리 뭉개지고 흐릿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용의자의 지문과 대조하는 일은 해석이 필요한 작업이며, 당연히 수사기관이 심어준 선입견과 기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이뤄진 325건의 무죄 방면 사례에서 잘못된 포렌식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사례가 47%나 됐다. 우리나라에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에서 국과수의 필적 감정 전문가는 검찰이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준 바 있다.
비인간화와 ‘대의를 위한 부패’: 검사와 경찰은 자신들을 정의를 실현하는 좋은 사람들로, 자신들이 수사하는 용의자는 ‘나쁜 놈’들로 사고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상대방을 처벌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문제는 그럴 때 자신이 수사하는 이가 실제론 무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그를 유죄로 만들기 위해 규칙을 위반하는 일도 벌어진다. 강압적으로 자백을 강요하거나,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와 증언은 기록해두지 않는 식이다. 이런 것이 ‘대의를 위한 부패noble-cause corruption’다.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스트 클리블랜드 3인방 사건에서, 경찰은 3인방 중 한 명을 총을 쏜 사람으로 지목한 목격자 증언은 남겨둔 반면, 그와 상반된 증언을 한 목격자의 증언은 묵살했다.
정치적 야심: 미국에서는 지방 검사장과 주 판사를 선거로 뽑는다. 대중은 범죄에 강경한 후보자를 선호하는 까닭에, 검사장과 판사 들은 흉악범죄로 기소된 피고인을 유죄판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2015년에 나온 브레넌 보고서에 따르면, 선출직 판사들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중대 사건에서 더 무거운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있으며, 임명직 판사가 있는 관할권에서는 사형 선고 건 중 26%가 항소심에서 뒤집혔으나 법관 선거 제도가 있는 관할권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단 11%만이 뒤집혔다. 우리나라는 법관을 선거로 뽑진 않지만, 흉악범죄를 빨리 해결하고 유죄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은 공기처럼 존재한다.
검사들은 선거 외에도 실적(즉 담당한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것)에 따라 직장에서 좋은 업무 평가를 받기 때문에 승소하라는 압력과 억세고 공격적인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국선변호인의 질: 유죄를 이끌어내려는 검경의 의욕에 반해 피의자들은 충분한 수준의 변호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호화 변호인 군단이 재벌이나 유명인을 변호하는 장면을 주로 보지만, 실제로 다수의 형사피고인들은 국선변호인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국선변호인들은 업무는 너무 과중한데 보수는 너무 적어서 적절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 저자가 들려주는 한 일화에서는, 어떤 국선변호인은 비용 청구가 안 된다는 이유로 수감 중인 자기 의뢰인으로부터 걸려온 수신자부담전화도 받지 않았다. 〈60분〉 프로그램에 출연한 국선변호인 5인은 자신들이 변호를 맡았던 의뢰인들 가운데 결백한 이들마저 결국 감옥에 간 건 적절히 변호할 시간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심으로 무죄가 밝혀진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나 삼례 나래슈퍼 강도치사 사건의 원심은 국선변호인이 맡았었다.
기억의 오류: 놀랍게도 “목격자의 잘못된 범인식별 증언은 단연코 잘못된 유죄판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미국에서 이뤄진 325건의 무죄방면 가운데 235건, 즉 72%가 목격자의 범인식별 증언에 오류가 있었다. 여러 심리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인간의 기억은 오염되기 쉽고, 아무리 확신하는 기억도 틀린 것일 수 있다.
강간을 당한 제니퍼 톰슨은 이후 용의자 사진 라인업에서 로널드 코튼의 사진을 지목했고, 실제로 봤을 때도 그가 범인이라고 증언했다. 톰슨은 나중에 진짜 범인이라고 밝혀진 이의 얼굴도 봤지만, 그럼에도 코튼이 틀림없이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코튼은 종신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DNA 검사로 무죄임이 밝혀져 10년을 복역한 뒤 석방됐다. 톰슨은 결국 진실을 받아들이고, 코튼에게 사과했지만, 강간범의 얼굴을 떠올릴 땐 여전히 코튼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 인간의 기억은 생각보다도 더 부정확하다.
허위 자백: 인간 기억의 취약성으로 인해, 검경의 압박을 받는 피의자는 자신이 실제로 하지 않은 일을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18세의 피터 라일리는 자택에서 엄마의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서로 연행돼 신문을 받았다. 경찰관들이 순번대로 돌아가며 들어와 그를 부정에서 혼란으로, 그리고 다시 자기의심으로 옮겨가게 만들었으며, 라일리는 마침내 경찰 측 주장대로 본인에게 잘못이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는 결국 자기 엄마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무죄가 밝혀지고 몇 년 뒤 라일리는 자신이 왜 그런 자백을 했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유일한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혼란스럽고 피곤한 상태로, 그것도 낯설고 위압적인 장소에서 긴 시간 동안 계속 잠을 못 자고 깨어있는 데다 주위에 둘러선 경찰들이 이 끔찍한 짓을 틀림없이 내가 저질렀다고 계속 이야기하고 아무도 나를 걱정해주거나 내 생각을 묻는 사람은 없는 상황인 겁니다. …… 제가 기억을 못하는 거라고 경찰 당국이 장담을 하면 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죠. 암시하며 유도했던 내용이 얼마 후에는 대화 중에 결국 내 입에서 튀어나오게 됩니다. …… 이런 상황에선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서명하게 되지요. ―249쪽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도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아들이나 남편이 오심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엄마나 아내의 전화를 수도 없이 받는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는 재판이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검사들이 얼마나 오만하게 굴었는지 그리고 미국에서 이런 식의 마녀사냥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열과 성을 다해 털어놓는다. 마치 자신이 털어놓는 내용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 엄청난 폭로로 받아들일 거라 여기는 눈치다.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한다. “맞아요, 다들 그렇듯 선생님도 당황스러우셨을 겁니다. 상상도 못 하셨을 거예요. 우리 다 같은 마음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바닥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 알게 되신 거예요. 굳이 아실 필요 없는 걸 아시게 돼 유감입니다. ―382쪽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특히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법적 판단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고, 검경이 무리한 수사로 범인을 만들어 내는 일도 잦았다. 간첩조작사건만 하더라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오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또 흉악범죄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면,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보다는 되도록 많은 범인을 처벌하길 원하는 게 현실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죄 없는 누군가를 유죄로 만들 수 있는 사법 제도는 바로 ‘나’ 역시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형사사법제도criminal justice system가 단순히 누군가를 벌주는 제도가 아니라, 진정 정의로운 시스템system of justice으로 변하는 데 이 책이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마크 갓시
신시내티 대학의 법학교수로 오하이오 이노센스 프로젝트(Ohio Innocence Project)의 공동 설립자다. 대학교수가 되기 전에는 연방검사로 일하며 조직범죄, 납치, 테러, 중대사기범죄 및 고위 정치인의 부정부패를 비롯해 여러 건의 중대사건을 기소했으며, 그 공로로 모범검사상을 받기도 했다. 고향 신시내티에 대학교수로 부임한 이후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감옥에 갇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그들을 구하기 위한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와 동료들이 2003년 설립한 오하이오 이노센스 프로젝트는 2022년 현재까지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도합 750년 이상을 복역한 39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에서 석방시켰다.
미국 언론은 그를 “감옥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슈퍼히어로” 또는 “결백한 이들의 대변자”라고 부른다.
옮긴이 : 박경선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는 『동물원』, 『악의 해부』, 『슬픔 뒤에 오는 것들』, 『전쟁 유전자』, 『예루살렘 광기』, 『갈망에 대하여』, 『맥주 바이블』, 『환경을 해치는 25가지 미신』, 『가짜 뉴스의 시대』, 『내 머릿속에 누군가 있다』 등이 있다.
목 차
1장 불의에 눈뜨다
2장 눈을 가리는 부정
3장 눈을 가리는 야심
4장 눈을 가리는 편향
5장 눈을 가리는 기억
6장 눈을 가리는 직관
7장 눈을 가리는 터널비전
8장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받아들이기
주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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