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모화’(김동리 단편 「무녀도」의 등장인물)가 파우스트(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대표작)와 대체될
새로운 세기의 인간상이란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100년만 두고 봐라! 모든 것이 증명될 것이다!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_김동리
세계적으로 고전이라 칭송받는 문학작품에 자신의 작품을 견주면서도 위풍당당했던 문인, 바로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동리입니다. 김동리는 일제의 탄압이 거셌던 1930년대 중반에 등단해 해방과 전쟁, 민주화와 경제 개발의 소용돌이였던 현대사를 거치며 활동했습니다. 거센 파도가 몇 번이고 휘몰아치는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그는 시대의 분위기를 뚜렷하게 담아내는 데 치중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소재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 운명을 대하는 다양한 인간상, 따뜻한 휴머니즘 등을 그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로 다른 시대·역사의 경계를 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써 온 것이지요.
인간의 현실을 깊이 있게 성찰하며 치열하게 작품을 집필한 그의 노력은 세계 무대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장편소설 『을화』가 1981년, 우리나라 작품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작이 된 것입니다.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김동리의 작품은 우리의 전통적인 소재가 여러 문화를 초월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 주지요.
“삶의 희로애락과, 그 사이 어디쯤 있는 무수한 감정까지 길어 올린 수작들”
한국문학의 거장 김동리의 작품세계를 오롯이 보여 줄 5편의 단편소설
『등신불』은 한국문학을 떠받쳐 온 중요한 축인 김동리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1999년에 초판 출간된 『농구화』의 개정판으로, 표제작을 교체했고 오늘날의 표기법에 맞추어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거쳤습니다.
여기 실린 5편의 작품, 「등신불」「새벽의 잔치」「용기와 분경이」「저승새」「아버지와 아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고 뜨겁게도 때론 서늘하게도 만들며 우리 삶의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 줍니다. 이 작품들은 ‘기쁘다’ ‘슬프다’ 등의 단순한 표현으로는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세밀한 감정과 심리를 강렬하게 느끼도록 해 주지요.
소년과 소녀의 풋풋하지만 먹먹한 사랑을 담은 「용기와 분경이」, 안타까운 사랑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인연을 그린 「저승새」는 우리들의 작은 현실이 때로는 큰 파도 같은 운명 앞에서 나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호랑이가 송아지를 물어 간 어느 밤의 이야기인 「새벽의 잔치」, 한국전쟁이란 비극에서 피어난 인간애를 그린 「아버지와 아들」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 또 전쟁이란 역사의 큰 수레바퀴 앞에서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지요.
하지만 김동리는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리진 않았습니다. 표제작 「등신불」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마치 종교나 기적처럼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5편의 작품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만나게 될 현실의 여러 단면들을 담아 낸 수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한 편 한 편 작품을 음미하면서 현실의 여러 모습을 받아들이고 결국 삶을 긍정하게 되는 독서를 경험했으면 합니다.
「등신불」
일제강점기, 전쟁터로 끌려간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같은 대학 출신의 불교 학자가 근처에 있다는 걸 조사해 온 나는 그를 만나 살려 달라고 요청하고, 각오를 혈서로 쓰기까지 합니다. 그 덕분에 어느 절로 피신하게 된 나는 그곳에서 괴이한 모습의 불상을 봅니다. 그 불상은 그때로부터 천 몇 백년 전, 자기 몸을 공양한 ‘만적 선사’의 남은 육체에 금을 입혀 놓은 것이었지요.
만적 선사는 새아버지의 재산을 탐낸 어머니가 전실 부인의 자식인 이복동생을 죽이려 하자 회의를 품고 출가한 승려였습니다. 다시 만난 이복동생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보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몸을 바쳐 불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만적 선사의 불상은 신비한 영험을 발휘합니다. 그 기록을 읽은 나는 비로소 불상이 왜 그런 모습인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표제작 「등신불」은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전쟁터에서 도망친 ‘나’의 이야기가 액자의 틀이 되고 만적 선사의 사연이 그 틀에 담긴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만적 선사의 이야기 즉 내부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라는 외부 이야기의 틀을 입고 독자와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독자들은 그 거리 덕분에 만적 선사의 사연을 객관적으로 느껴면서 그 이야기를 ‘더욱 신뢰할 만하다’고 느낄 수 있지요. 그렇다면, 작가는 우리가 무엇을 신뢰하길 바랐던 걸까요?
해설글을 쓴 이태동 평론가는 그 답을 이 작품의 이름인 ‘등신불’에서 찾습니다. 인간과 같은 크기의 불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현실을 초월하는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지요. ‘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몸을 피신할 수 있었던 것도 혈서를 써서라도 몸을 의탁하고자 했던 그 간절한 의지 때문이었다고요.
「새벽의 잔치」
“동네 사람 다 나오소! 횃불 들고 나오소!” 어느 날 밤, 고요히 잠든 산촌 마을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호랑이가 정수네 송아지를 물어 갔거든요. 온 동네 사람들은 호랑이를 ‘무찌르겠다는’ 각오로 산을 올라갑니다. 하지만 맙소사! 호랑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결국 호랑이에게 먹힌 송아지의 남은 부분을 가지고 돌아와 곰국을 끓여 나눠 먹습니다.
하지만 어린 정수는 곰국을 한 술도 뜨지 않습니다. 그 잔치판에는 끼기도 싫다는 듯 툇마루에 걸터앉아 별을 바라볼 뿐이었지요. 호랑이를 죽일 것처럼 해 놓고서 고작 곰국 한 그릇에 기뻐하는 어른들이 회의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품을 읽고 ‘만약 내가 정수였다면’ 어떤 기분일지,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세요. 정수처럼 ‘곰국이나 먹자고 그 애를 썼나’ 생각할 수도 있고, ‘이렇게 된 거 차라리 곰국이라도 맛있게 먹자!’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정답은 없습니다. 김동리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이야기 마당에서 마음껏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독서가 될 테니까요.
「용기와 분경이」
이성 간에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던 시절, 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상대를 얼핏얼핏 바라보기만 1년이 넘었을까요? 소녀 분경이가 소년 용기에게 드디어 말을 건넵니다. “저어…….” 연애의 속도가 ‘LTE’에 비유되기도 하는 요즘으로써는 두 사람이 답답하게 느껴질 법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운명도 두 사람을 도와줄 기미가 없습니다. 용기는 서울의 상급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분경이는 상급 학교 시험도 못 치고 있거든요. 두 사람, 이대로 헤어지게 되는 걸까요?
느리게 흐르는 용기와 분경이의 관계는 요즘 아이들에게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두 사람을 안타깝게 여길수록 용기와 분경이의 애타는 마음은 더 서정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해소되지 않을수록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작품에 숨겨진 여러 가지 복선들은 결말을 더 먹먹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복선이 놓여 있을지는 직접 찾아보세요. 책장을 앞으로 넘기다 보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두 사람의 속마음이 더욱 섬세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저승새」
1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그날이 왔습니다. 저승새가 오는 날이면 만허 스님은 꼭 샘터로 가시거든요. 만허 스님은 어느 날 저승새를 보며 “오, 남이” 하고 부르기도 했대요. 만허 스님은 젊었을 적에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때 주인집 아가씨인 ‘남이’와 서로 사랑했거든요. 하지만 남이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자 스님은 불교에 귀의했고요.
스님 밑에서 수행하는 두 동승 ‘적인’과 ‘혜인’은 이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혜인은 저승새를 보았을 때 “서럽고 아득한 기분”이 들어 눈물을 훔칠 뿐이었지요. 저승새가 온 날, 두 동승은 스님이 계실 것 같은 샘터 근처에서 혜인의 일가 아저씨를 만납니다. 오늘은 바로 혜인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하대요. 아저씨는 “할머니가 시집오기 전에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며 할머니의 비밀을 풀어 놓습니다.
해마다 같은 날 만허 스님을 찾아오는 저승새는 “빨강·파랑·노랑·주황, 그리고 잿빛의 오색실을 꿈속같이 은은히 감은” 모습입니다. 토속적인 소재가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작품은 불교의 윤회 사상, 돌고 도는 운명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저승새」를 다 읽을 즈음엔 어린 독자들도 만허 스님과 혜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삶 속에서는, 어느 한쪽에서 가슴 찢어질 듯 아픈 이별이 다른 한쪽에서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새엄마·새아빠’라고 신데렐라의 계모를 떠올리면 오산이에요! 승준이의 새아버지는 따뜻하고 살뜰한 분이거든요. 가족은 단란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커다란 위기를 맞습니다. 아버지가 몸져누워 승준이가 가족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6.25 동란이 터지고, 승준이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냅니다. 하지만 가족이 눈에 밟혔던 승준이는 시내로 들어오고, 괴뢰군에게 잡혀 산에서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 순간, 골짜기 아래에서 아버지가 ‘승준아’ 하고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데…….
김동리는 토속적인 소재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많이 썼지만 그렇다고 사회현실에 눈을 감고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쟁이 한 개인, 한 가족에게 얼마나 큰 시련을 주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 줍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전쟁을 둘러싸고 어떤 이념들이 대립했는지는 등장하지 않고, 등장인물들도 그런 것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 실체를 잘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소박한 울타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망가뜨려 버리지요. 그 현실 속에서도 승준이는 끝까지 가족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꼭 지켜내야 하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작가 소개
저 : 김동리
김동리는 한국 근대 작가들 중에서 매우 오랫동안 창작 활동을 유지한 작가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로 등단해 1979년 「만자 동경」까지 43년에 걸쳐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김동리 문학은 식민지 시대부터 전쟁을 거쳐 개발 경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오늘날 김동리의 소설이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넓고 깊다. 그런 만큼 작품들은 언제나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한국소설사에서 그의 문학이 차지하는 성격을 해명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사상적 측면, 기법적 측면, 미학적 측면, 신화 원형적 측면, 심리적 측면 등 다양한 시각에서 김동리 작품은 분석되고 평가된다.
본명은 김시종으로 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경주제일교회 부설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중학에서 2년간 수학한 뒤, 1929년 서울 경신중학(儆新中學) 4년을 중퇴하고 문학수련에 전념하였다. 이 때부터 박목월(朴木月)·김달진(金達鎭)·서정주(徐廷柱) 등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하면서 등단하였고, 이후 몇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소설로 전향하면서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화랑의 후예』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화』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1937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1년 동협회부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문협(文協)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 중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新人間主義)의 문학사상으로 일관해 온 그는 8·15광복 직후 민족주의문학 진영에 가담하여 김동석(金東錫)·김병규와의 순수문학논쟁을 벌이는 등 좌익문단에 맞서 우익측의 민족문학론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이때 발표한 평론으로, 『순수문학의 진의』(1946), 『순수문학과 제3세계관』(1947),『민족문학론』(1948) 등을 들 수 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한국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 등을 신비적이고 허무하면서도 몽환적인 세계를 통하여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그 이후에는 그의 문학적 논리를 작품에 반영하여 작품세계의 깊이를 더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과의 갈등을 조명하는 데 주안을 두기도 하였다.
또한 김동리는 자신의 문학적 출발이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평생 죽음을 어떻게 초극할 것인지에 대한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집착했다. 그러나 김동리의 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는 단순히 죽음 자체의 추구로 끝나지 않고 여러 가지 원형적 이미지들을 통해 오히려 강렬한 생명 의식을 드러낸다.
저서로는 소설집으로 『무녀도(巫女圖)』(1947), 『역마(驛馬)』(1948), 『황토기(黃土記)』(1949), 『귀환장정(歸還壯丁)』(1951), 『실존무(實存舞)』(1955), 『사반의 십자가』(1958), 『등신불(等身佛)』(1963),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 시집으로 『바위』(1936), 수필집으로 『자연과 인생』 등이 있다. 예술원상 및 3·1문화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5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배우자 또한 소설가인 손소희였으며 아들 김평우씨가 있다.
그림 : 박세영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그림책을 만들고자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2014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다. 그동안 『우리 집 한 바퀴』 『벼알 삼 형제』 『하루와 미요』 『멧돼지가 쿵쿵, 호박이 둥둥』 등에 그림을 그렸다.
▣ 주요 목차
새벽의 잔치 | 용기와 분경이 | 등신불 | 저승새 | 아버지와 아들
작품 해설―삶의 모순된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모화’(김동리 단편 「무녀도」의 등장인물)가 파우스트(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대표작)와 대체될
새로운 세기의 인간상이란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100년만 두고 봐라! 모든 것이 증명될 것이다!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_김동리
세계적으로 고전이라 칭송받는 문학작품에 자신의 작품을 견주면서도 위풍당당했던 문인, 바로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동리입니다. 김동리는 일제의 탄압이 거셌던 1930년대 중반에 등단해 해방과 전쟁, 민주화와 경제 개발의 소용돌이였던 현대사를 거치며 활동했습니다. 거센 파도가 몇 번이고 휘몰아치는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그는 시대의 분위기를 뚜렷하게 담아내는 데 치중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소재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 운명을 대하는 다양한 인간상, 따뜻한 휴머니즘 등을 그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로 다른 시대·역사의 경계를 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써 온 것이지요.
인간의 현실을 깊이 있게 성찰하며 치열하게 작품을 집필한 그의 노력은 세계 무대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장편소설 『을화』가 1981년, 우리나라 작품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작이 된 것입니다.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김동리의 작품은 우리의 전통적인 소재가 여러 문화를 초월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 주지요.
“삶의 희로애락과, 그 사이 어디쯤 있는 무수한 감정까지 길어 올린 수작들”
한국문학의 거장 김동리의 작품세계를 오롯이 보여 줄 5편의 단편소설
『등신불』은 한국문학을 떠받쳐 온 중요한 축인 김동리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1999년에 초판 출간된 『농구화』의 개정판으로, 표제작을 교체했고 오늘날의 표기법에 맞추어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거쳤습니다.
여기 실린 5편의 작품, 「등신불」「새벽의 잔치」「용기와 분경이」「저승새」「아버지와 아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고 뜨겁게도 때론 서늘하게도 만들며 우리 삶의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 줍니다. 이 작품들은 ‘기쁘다’ ‘슬프다’ 등의 단순한 표현으로는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세밀한 감정과 심리를 강렬하게 느끼도록 해 주지요.
소년과 소녀의 풋풋하지만 먹먹한 사랑을 담은 「용기와 분경이」, 안타까운 사랑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인연을 그린 「저승새」는 우리들의 작은 현실이 때로는 큰 파도 같은 운명 앞에서 나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호랑이가 송아지를 물어 간 어느 밤의 이야기인 「새벽의 잔치」, 한국전쟁이란 비극에서 피어난 인간애를 그린 「아버지와 아들」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 또 전쟁이란 역사의 큰 수레바퀴 앞에서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지요.
하지만 김동리는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리진 않았습니다. 표제작 「등신불」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마치 종교나 기적처럼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5편의 작품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만나게 될 현실의 여러 단면들을 담아 낸 수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한 편 한 편 작품을 음미하면서 현실의 여러 모습을 받아들이고 결국 삶을 긍정하게 되는 독서를 경험했으면 합니다.
「등신불」
일제강점기, 전쟁터로 끌려간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같은 대학 출신의 불교 학자가 근처에 있다는 걸 조사해 온 나는 그를 만나 살려 달라고 요청하고, 각오를 혈서로 쓰기까지 합니다. 그 덕분에 어느 절로 피신하게 된 나는 그곳에서 괴이한 모습의 불상을 봅니다. 그 불상은 그때로부터 천 몇 백년 전, 자기 몸을 공양한 ‘만적 선사’의 남은 육체에 금을 입혀 놓은 것이었지요.
만적 선사는 새아버지의 재산을 탐낸 어머니가 전실 부인의 자식인 이복동생을 죽이려 하자 회의를 품고 출가한 승려였습니다. 다시 만난 이복동생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보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몸을 바쳐 불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만적 선사의 불상은 신비한 영험을 발휘합니다. 그 기록을 읽은 나는 비로소 불상이 왜 그런 모습인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표제작 「등신불」은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전쟁터에서 도망친 ‘나’의 이야기가 액자의 틀이 되고 만적 선사의 사연이 그 틀에 담긴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만적 선사의 이야기 즉 내부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라는 외부 이야기의 틀을 입고 독자와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독자들은 그 거리 덕분에 만적 선사의 사연을 객관적으로 느껴면서 그 이야기를 ‘더욱 신뢰할 만하다’고 느낄 수 있지요. 그렇다면, 작가는 우리가 무엇을 신뢰하길 바랐던 걸까요?
해설글을 쓴 이태동 평론가는 그 답을 이 작품의 이름인 ‘등신불’에서 찾습니다. 인간과 같은 크기의 불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현실을 초월하는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지요. ‘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몸을 피신할 수 있었던 것도 혈서를 써서라도 몸을 의탁하고자 했던 그 간절한 의지 때문이었다고요.
「새벽의 잔치」
“동네 사람 다 나오소! 횃불 들고 나오소!” 어느 날 밤, 고요히 잠든 산촌 마을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호랑이가 정수네 송아지를 물어 갔거든요. 온 동네 사람들은 호랑이를 ‘무찌르겠다는’ 각오로 산을 올라갑니다. 하지만 맙소사! 호랑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결국 호랑이에게 먹힌 송아지의 남은 부분을 가지고 돌아와 곰국을 끓여 나눠 먹습니다.
하지만 어린 정수는 곰국을 한 술도 뜨지 않습니다. 그 잔치판에는 끼기도 싫다는 듯 툇마루에 걸터앉아 별을 바라볼 뿐이었지요. 호랑이를 죽일 것처럼 해 놓고서 고작 곰국 한 그릇에 기뻐하는 어른들이 회의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품을 읽고 ‘만약 내가 정수였다면’ 어떤 기분일지,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세요. 정수처럼 ‘곰국이나 먹자고 그 애를 썼나’ 생각할 수도 있고, ‘이렇게 된 거 차라리 곰국이라도 맛있게 먹자!’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정답은 없습니다. 김동리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이야기 마당에서 마음껏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독서가 될 테니까요.
「용기와 분경이」
이성 간에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던 시절, 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상대를 얼핏얼핏 바라보기만 1년이 넘었을까요? 소녀 분경이가 소년 용기에게 드디어 말을 건넵니다. “저어…….” 연애의 속도가 ‘LTE’에 비유되기도 하는 요즘으로써는 두 사람이 답답하게 느껴질 법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운명도 두 사람을 도와줄 기미가 없습니다. 용기는 서울의 상급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분경이는 상급 학교 시험도 못 치고 있거든요. 두 사람, 이대로 헤어지게 되는 걸까요?
느리게 흐르는 용기와 분경이의 관계는 요즘 아이들에게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두 사람을 안타깝게 여길수록 용기와 분경이의 애타는 마음은 더 서정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해소되지 않을수록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작품에 숨겨진 여러 가지 복선들은 결말을 더 먹먹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복선이 놓여 있을지는 직접 찾아보세요. 책장을 앞으로 넘기다 보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두 사람의 속마음이 더욱 섬세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저승새」
1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그날이 왔습니다. 저승새가 오는 날이면 만허 스님은 꼭 샘터로 가시거든요. 만허 스님은 어느 날 저승새를 보며 “오, 남이” 하고 부르기도 했대요. 만허 스님은 젊었을 적에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때 주인집 아가씨인 ‘남이’와 서로 사랑했거든요. 하지만 남이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자 스님은 불교에 귀의했고요.
스님 밑에서 수행하는 두 동승 ‘적인’과 ‘혜인’은 이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혜인은 저승새를 보았을 때 “서럽고 아득한 기분”이 들어 눈물을 훔칠 뿐이었지요. 저승새가 온 날, 두 동승은 스님이 계실 것 같은 샘터 근처에서 혜인의 일가 아저씨를 만납니다. 오늘은 바로 혜인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하대요. 아저씨는 “할머니가 시집오기 전에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며 할머니의 비밀을 풀어 놓습니다.
해마다 같은 날 만허 스님을 찾아오는 저승새는 “빨강·파랑·노랑·주황, 그리고 잿빛의 오색실을 꿈속같이 은은히 감은” 모습입니다. 토속적인 소재가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작품은 불교의 윤회 사상, 돌고 도는 운명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저승새」를 다 읽을 즈음엔 어린 독자들도 만허 스님과 혜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삶 속에서는, 어느 한쪽에서 가슴 찢어질 듯 아픈 이별이 다른 한쪽에서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새엄마·새아빠’라고 신데렐라의 계모를 떠올리면 오산이에요! 승준이의 새아버지는 따뜻하고 살뜰한 분이거든요. 가족은 단란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커다란 위기를 맞습니다. 아버지가 몸져누워 승준이가 가족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6.25 동란이 터지고, 승준이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냅니다. 하지만 가족이 눈에 밟혔던 승준이는 시내로 들어오고, 괴뢰군에게 잡혀 산에서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 순간, 골짜기 아래에서 아버지가 ‘승준아’ 하고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데…….
김동리는 토속적인 소재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많이 썼지만 그렇다고 사회현실에 눈을 감고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쟁이 한 개인, 한 가족에게 얼마나 큰 시련을 주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 줍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전쟁을 둘러싸고 어떤 이념들이 대립했는지는 등장하지 않고, 등장인물들도 그런 것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 실체를 잘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소박한 울타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망가뜨려 버리지요. 그 현실 속에서도 승준이는 끝까지 가족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꼭 지켜내야 하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작가 소개
저 : 김동리
김동리는 한국 근대 작가들 중에서 매우 오랫동안 창작 활동을 유지한 작가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로 등단해 1979년 「만자 동경」까지 43년에 걸쳐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김동리 문학은 식민지 시대부터 전쟁을 거쳐 개발 경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오늘날 김동리의 소설이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넓고 깊다. 그런 만큼 작품들은 언제나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한국소설사에서 그의 문학이 차지하는 성격을 해명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사상적 측면, 기법적 측면, 미학적 측면, 신화 원형적 측면, 심리적 측면 등 다양한 시각에서 김동리 작품은 분석되고 평가된다.
본명은 김시종으로 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경주제일교회 부설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중학에서 2년간 수학한 뒤, 1929년 서울 경신중학(儆新中學) 4년을 중퇴하고 문학수련에 전념하였다. 이 때부터 박목월(朴木月)·김달진(金達鎭)·서정주(徐廷柱) 등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하면서 등단하였고, 이후 몇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소설로 전향하면서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화랑의 후예』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화』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1937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1년 동협회부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문협(文協)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 중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新人間主義)의 문학사상으로 일관해 온 그는 8·15광복 직후 민족주의문학 진영에 가담하여 김동석(金東錫)·김병규와의 순수문학논쟁을 벌이는 등 좌익문단에 맞서 우익측의 민족문학론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이때 발표한 평론으로, 『순수문학의 진의』(1946), 『순수문학과 제3세계관』(1947),『민족문학론』(1948) 등을 들 수 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한국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 등을 신비적이고 허무하면서도 몽환적인 세계를 통하여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그 이후에는 그의 문학적 논리를 작품에 반영하여 작품세계의 깊이를 더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과의 갈등을 조명하는 데 주안을 두기도 하였다.
또한 김동리는 자신의 문학적 출발이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평생 죽음을 어떻게 초극할 것인지에 대한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집착했다. 그러나 김동리의 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는 단순히 죽음 자체의 추구로 끝나지 않고 여러 가지 원형적 이미지들을 통해 오히려 강렬한 생명 의식을 드러낸다.
저서로는 소설집으로 『무녀도(巫女圖)』(1947), 『역마(驛馬)』(1948), 『황토기(黃土記)』(1949), 『귀환장정(歸還壯丁)』(1951), 『실존무(實存舞)』(1955), 『사반의 십자가』(1958), 『등신불(等身佛)』(1963),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 시집으로 『바위』(1936), 수필집으로 『자연과 인생』 등이 있다. 예술원상 및 3·1문화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5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배우자 또한 소설가인 손소희였으며 아들 김평우씨가 있다.
그림 : 박세영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그림책을 만들고자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2014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다. 그동안 『우리 집 한 바퀴』 『벼알 삼 형제』 『하루와 미요』 『멧돼지가 쿵쿵, 호박이 둥둥』 등에 그림을 그렸다.
▣ 주요 목차
새벽의 잔치 | 용기와 분경이 | 등신불 | 저승새 | 아버지와 아들
작품 해설―삶의 모순된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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