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동몽시, 아동 한시의 재발견
천성은 본디 맷돌 사이에서 왔으나
둥글고 빛나서 동산에 뜬 달과 똑같네.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운 진미보다는 못해도
머리 벗겨지고 이 빠진 노인에게는 제일 좋구나.
- [두부], 김시습 5세 (이 책, 268면)
노인에게는 천하진미보다 부드러운 두부가 더 좋은 것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 이 시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다섯 살 때 지은 시다. 길을 가는 김시습에게 한 노파가 두부를 주자 그 감사의 표시로 지은 시로, 이 시 등이 널리 퍼져 이후 김시습은 오세(五歲) 신동(神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물론 한자로 쓴 한시(漢詩)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아이들이 쓴 시는 동몽시(童蒙詩)라 하여 어른이 쓰는 일반적인 시와 구별하였다. 아동을 지식이 별로 많지 않다 하여, 동몽(童蒙)이라 불렀으니 동몽시는 요즘의 동시에 해당하는 말이다. 조선 시대에는 어릴 때부터 시를 쓰는 것이 교양의 하나였으나 아이들에게는 엄격한 격식을 강요하지 않아 비교적 생각대로 자유롭게 표현하였던바, 김시습의 시처럼 성장한 후의 시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발상을 볼 수 있다.
김시습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 백사 이항복, 다산 정약용 등 저명한 학자와 정치가들이 어린 시절에 쓴 한시는 비교적 알려진 편이나, 그 외에도 옛 아동들이 쓴 시는 상당히 많다. 수십 편이 넘는 한시를 써서 아동 시인이라 불릴 만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작품이 남아 있지 않고, 시인의 이름도 잊혀졌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죽은 후에 문집을 남겼지만 어린 시절의 작품은 거의 수록하지 않았다. 성인의 기준으로 유치하다고 평가절하하고, 습작이나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버린 것이다. 이제 안대회 교수의 감식안과 애정 어린 손길로 옮겨져 빛을 보게 된 대부분의 시들은 한 편 한 편이 경탄을 자아내는 빼어난 작품들이자 소중한 유산이다.
아동 한시가 도달한 깊이와 넓이
밤도 아닌데
봉우리마다 달이 떴고
봄도 아닌데
나무마다 꽃이 피었네.
천지 사이에는
오로지 검은 점 하나!
날 저물어 돌아가는
성 위의 까마귀 한 마리
- [눈], 정창주 7세 (이 책, 114면)
정창주(鄭昌?)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그가 일곱 살에 지은 이 시는 아동 한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빼어난 작품으로 모방작이 나올 만큼 유명하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설경 묘사는 어린 시인의 솜씨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첫째 개가 짖고
둘째 개가 짖고
셋째 개가 따라 짖는다.
"인기척인가?
범이 나타났을까?
바람 소리인가?"
아이가 대답하였다.
"산 달이 촛불 켠 듯 환해요.
뜰에는 오동잎 스치는 소리뿐인걸요. "
- [개가 짖는다], 이경전 7세 (이 책, 126면)
이경전(李慶全)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아들로 천재로 알려졌다. 반복구를 적절히 활용하여 시적 효과를 더해 주는 이 시 또한 아동 한시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참신한 발상과 표현뿐 아니라 성숙한 주제의식을 보이는 작품도 적지 않다.
조물주는 용광로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똑같은 금전화
잘도 찍어 냈구나.
반푼짜리 동전은
제 잘난 것만 뻐기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줄도 모르네.
- [금전화], 허봉 9세 (이 책, 178면)
허봉(許?)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친형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특히 시에 천재적 재능을 보여 성인 작가들과 견줄 수 있을 작품 수준을 보였다. 이 시도 뛰어난 시 중 하나로 동전 모양으로 생긴 금전화를 보며 가난한 사람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니 이름값도 하지 못한다며 꼬집고 있다. 꽃말에서 빈민구제라는 사회적 의미를 끌어낸 발상이 참신하고 의미가 깊다.
생애 첫 번째 시, 의미 있는 발언
빠르게는 3세부터 늦게는 13세 나이에 쓴 동시는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뱉은 의미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성장에의 욕구,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 혹은 미래에의 암시가 은연중 들어 있다. 전해오는 동시에는 훗날 위인이 될 징조를 보여주었다든가, 장수하거나 요절하거나 하는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사연이 함께 들어 있기도 하다. 아이가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동시를 지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른들이 그런 시를 짓도록 은근히 강요하기도 했다.
뭇별들이 다들 진을 치고
밝은 달 혼자만 장군이로군. (이 책 31면)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는 모습을 보고서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을 연상하였고, 별들 사이에 환하게 떠 있는 달을 보고 장군을 떠올린 시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남구만(南九萬)이 다섯 살 때 지은 이 시구를 두고 어른들은 어린 남구만이 별들 사이의 달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무엇보다 이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동의 시에는 거짓이 없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아동의 시에 바라는 것도 우선은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쓰는 것이고, 그런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정조 때의 저명한 학자이자 시인인 이덕무(李德懋)는 진실한 기쁨과 진실한 슬픔만이 진실한 시를 만들어낸다면서 아동이야말로 거짓되지 않은 시를 쓸 수 있다고도 하였다.
시 짓기, 영재의 조건?
그렇다면 아동이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었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자기 생각과 마음을 편하게 쓴다고는 하지만 일정한 격식을 갖춘 정형시인 데다 한자를 써야 하므로 시를 짓는 데는 당연히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이 아동에게는 자신의 표현력을 뽐내는 수단이자, 어른에게는 아이의 영재성을 가늠해 보는 잣대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훌륭한 동시를 쓴 신동은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꽃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이규보나 김시습, 이이, 허봉, 이산해, 이경전, 남구만, 이헌경, 목만중, 정약용 등 역사상 뛰어난 영재로 인정받은 인물들은 영재다운 능력을 어린 시절 지은 동시를 통해 세상에 널리 보여주었다. 조숙한 영재들의 동시는 독특한 시각과 사유를 담고 있어 대가로 성장할 잠재력을 미리 드러낸 것이다. 그중에는 청년기나 성인기의 작품과 차별화된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것이 많다.
한 집안에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가운뎃놈은 양 볼이 납작하네
바람이 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지니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일까.
-[세 톨 밤], 이산해 7세 (이 책, 162면)
밤 한 송이에 들어 있는 세 톨의 밤알을 한 뱃속에서 난 삼형제로 보고 바람에 순서도 헛갈리게 떨어지는 모습을 출생에 비유한 시다. 바람에 밤알이 툭툭 떨어지는 광경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산해(李山海)가 일곱 살에 쓴 이 작품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작품이란 평을 들을 만하다. 매우 세련된 작품이나 그 내용이나 표현이 성인이 쓸 수 없는 아동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기도 하다.
작은 산은 어떻게 큰 산을 가렸을까?
멀고 가까운 거리가 달라서라네. (이 책, 314면)
두 구만 남은 이 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일곱 살 때 지은 것이다.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원근법적 인지능력을 보여준다. 일곱 살부터 시를 짓기 시작한 영재로 알려진 정약용은 10살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란 시집까지 만들었다. 신광하(申光河)란 저명한 시인은 정약용이 지은 시를 보고 쓴 “후생가외, 참으로 후생이 두렵구나, 이 늙은이는 더 이상 시를 짓고 싶지 않네.”라는 글을 남겼다.
어린이 세계의 무한성
뛰어난 작품을 영재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예를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쩌면 오늘 어른들의 기준으로 보면 이 책에 수록된 아동 한시의 지은이는 대부분 영재일 수 있다. 그 근저에는 어른들이 잊어버린 ‘왜 그럴까?’라는 왕성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자리한다. 자연현상과 인간세상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며 시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 어른들이 아동에게 요구하거나 학습시킨 주제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체로 아동 한시에 나타난 정서는 적극적이고 활기차다. 한 주체로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다부진 의지를 드러낸다. 때로는 어른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당돌하고 불손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른들과 경험이 다를 뿐 그들이 접하는 세계에 대해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옛 동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바, ‘동심’이라는 이름에 가두기에는 어린이와 어린이 세계는 무한하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준다.
▣ 작가 소개
편역 : 안대회
대한민국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와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있다. 한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종횡하는 고전 읽기와 탁월한 분석을 통해 풀어내는 그의 글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조선후기 한문학이 온축해온 감성과 사유의 세계를 대중적인 필치로 풀어냄으로써 역사 속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향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바꿔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서로는『조선의 프로페셔널』『선비답게 산다는 것』『조선후기 시화사 연구』『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7일간의 한자여행』『고전 산문 산책』『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윤춘년과 시화문화』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산수간에 집을 짓고』『소화시평』『궁핍한 날의 벗』『북학의』『선집 한서열전』『나를 돌려다오』『연경, 담배의 모든 것』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1 우주를 꿈꾸다
2 자연과 계절을 노래하다
3 동식물과 어울리다
4 더불어 살아가다
5 사물을 그려 내다
6 짧은 구절 긴 생각
뒷글 | 아동 한시 세계로의 초대
수록 작가 찾아보기
수록 작품 찾아보기
동몽시, 아동 한시의 재발견
천성은 본디 맷돌 사이에서 왔으나
둥글고 빛나서 동산에 뜬 달과 똑같네.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운 진미보다는 못해도
머리 벗겨지고 이 빠진 노인에게는 제일 좋구나.
- [두부], 김시습 5세 (이 책, 268면)
노인에게는 천하진미보다 부드러운 두부가 더 좋은 것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 이 시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다섯 살 때 지은 시다. 길을 가는 김시습에게 한 노파가 두부를 주자 그 감사의 표시로 지은 시로, 이 시 등이 널리 퍼져 이후 김시습은 오세(五歲) 신동(神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물론 한자로 쓴 한시(漢詩)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아이들이 쓴 시는 동몽시(童蒙詩)라 하여 어른이 쓰는 일반적인 시와 구별하였다. 아동을 지식이 별로 많지 않다 하여, 동몽(童蒙)이라 불렀으니 동몽시는 요즘의 동시에 해당하는 말이다. 조선 시대에는 어릴 때부터 시를 쓰는 것이 교양의 하나였으나 아이들에게는 엄격한 격식을 강요하지 않아 비교적 생각대로 자유롭게 표현하였던바, 김시습의 시처럼 성장한 후의 시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발상을 볼 수 있다.
김시습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 백사 이항복, 다산 정약용 등 저명한 학자와 정치가들이 어린 시절에 쓴 한시는 비교적 알려진 편이나, 그 외에도 옛 아동들이 쓴 시는 상당히 많다. 수십 편이 넘는 한시를 써서 아동 시인이라 불릴 만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작품이 남아 있지 않고, 시인의 이름도 잊혀졌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죽은 후에 문집을 남겼지만 어린 시절의 작품은 거의 수록하지 않았다. 성인의 기준으로 유치하다고 평가절하하고, 습작이나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버린 것이다. 이제 안대회 교수의 감식안과 애정 어린 손길로 옮겨져 빛을 보게 된 대부분의 시들은 한 편 한 편이 경탄을 자아내는 빼어난 작품들이자 소중한 유산이다.
아동 한시가 도달한 깊이와 넓이
밤도 아닌데
봉우리마다 달이 떴고
봄도 아닌데
나무마다 꽃이 피었네.
천지 사이에는
오로지 검은 점 하나!
날 저물어 돌아가는
성 위의 까마귀 한 마리
- [눈], 정창주 7세 (이 책, 114면)
정창주(鄭昌?)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그가 일곱 살에 지은 이 시는 아동 한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빼어난 작품으로 모방작이 나올 만큼 유명하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설경 묘사는 어린 시인의 솜씨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첫째 개가 짖고
둘째 개가 짖고
셋째 개가 따라 짖는다.
"인기척인가?
범이 나타났을까?
바람 소리인가?"
아이가 대답하였다.
"산 달이 촛불 켠 듯 환해요.
뜰에는 오동잎 스치는 소리뿐인걸요. "
- [개가 짖는다], 이경전 7세 (이 책, 126면)
이경전(李慶全)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아들로 천재로 알려졌다. 반복구를 적절히 활용하여 시적 효과를 더해 주는 이 시 또한 아동 한시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참신한 발상과 표현뿐 아니라 성숙한 주제의식을 보이는 작품도 적지 않다.
조물주는 용광로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똑같은 금전화
잘도 찍어 냈구나.
반푼짜리 동전은
제 잘난 것만 뻐기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줄도 모르네.
- [금전화], 허봉 9세 (이 책, 178면)
허봉(許?)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친형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특히 시에 천재적 재능을 보여 성인 작가들과 견줄 수 있을 작품 수준을 보였다. 이 시도 뛰어난 시 중 하나로 동전 모양으로 생긴 금전화를 보며 가난한 사람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니 이름값도 하지 못한다며 꼬집고 있다. 꽃말에서 빈민구제라는 사회적 의미를 끌어낸 발상이 참신하고 의미가 깊다.
생애 첫 번째 시, 의미 있는 발언
빠르게는 3세부터 늦게는 13세 나이에 쓴 동시는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뱉은 의미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성장에의 욕구,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 혹은 미래에의 암시가 은연중 들어 있다. 전해오는 동시에는 훗날 위인이 될 징조를 보여주었다든가, 장수하거나 요절하거나 하는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사연이 함께 들어 있기도 하다. 아이가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동시를 지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른들이 그런 시를 짓도록 은근히 강요하기도 했다.
뭇별들이 다들 진을 치고
밝은 달 혼자만 장군이로군. (이 책 31면)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는 모습을 보고서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을 연상하였고, 별들 사이에 환하게 떠 있는 달을 보고 장군을 떠올린 시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남구만(南九萬)이 다섯 살 때 지은 이 시구를 두고 어른들은 어린 남구만이 별들 사이의 달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무엇보다 이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동의 시에는 거짓이 없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아동의 시에 바라는 것도 우선은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쓰는 것이고, 그런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정조 때의 저명한 학자이자 시인인 이덕무(李德懋)는 진실한 기쁨과 진실한 슬픔만이 진실한 시를 만들어낸다면서 아동이야말로 거짓되지 않은 시를 쓸 수 있다고도 하였다.
시 짓기, 영재의 조건?
그렇다면 아동이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었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자기 생각과 마음을 편하게 쓴다고는 하지만 일정한 격식을 갖춘 정형시인 데다 한자를 써야 하므로 시를 짓는 데는 당연히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시를 짓는 것이 아동에게는 자신의 표현력을 뽐내는 수단이자, 어른에게는 아이의 영재성을 가늠해 보는 잣대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훌륭한 동시를 쓴 신동은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꽃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이규보나 김시습, 이이, 허봉, 이산해, 이경전, 남구만, 이헌경, 목만중, 정약용 등 역사상 뛰어난 영재로 인정받은 인물들은 영재다운 능력을 어린 시절 지은 동시를 통해 세상에 널리 보여주었다. 조숙한 영재들의 동시는 독특한 시각과 사유를 담고 있어 대가로 성장할 잠재력을 미리 드러낸 것이다. 그중에는 청년기나 성인기의 작품과 차별화된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것이 많다.
한 집안에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가운뎃놈은 양 볼이 납작하네
바람이 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지니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일까.
-[세 톨 밤], 이산해 7세 (이 책, 162면)
밤 한 송이에 들어 있는 세 톨의 밤알을 한 뱃속에서 난 삼형제로 보고 바람에 순서도 헛갈리게 떨어지는 모습을 출생에 비유한 시다. 바람에 밤알이 툭툭 떨어지는 광경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산해(李山海)가 일곱 살에 쓴 이 작품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작품이란 평을 들을 만하다. 매우 세련된 작품이나 그 내용이나 표현이 성인이 쓸 수 없는 아동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기도 하다.
작은 산은 어떻게 큰 산을 가렸을까?
멀고 가까운 거리가 달라서라네. (이 책, 314면)
두 구만 남은 이 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일곱 살 때 지은 것이다.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원근법적 인지능력을 보여준다. 일곱 살부터 시를 짓기 시작한 영재로 알려진 정약용은 10살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란 시집까지 만들었다. 신광하(申光河)란 저명한 시인은 정약용이 지은 시를 보고 쓴 “후생가외, 참으로 후생이 두렵구나, 이 늙은이는 더 이상 시를 짓고 싶지 않네.”라는 글을 남겼다.
어린이 세계의 무한성
뛰어난 작품을 영재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예를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쩌면 오늘 어른들의 기준으로 보면 이 책에 수록된 아동 한시의 지은이는 대부분 영재일 수 있다. 그 근저에는 어른들이 잊어버린 ‘왜 그럴까?’라는 왕성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자리한다. 자연현상과 인간세상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며 시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 어른들이 아동에게 요구하거나 학습시킨 주제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체로 아동 한시에 나타난 정서는 적극적이고 활기차다. 한 주체로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다부진 의지를 드러낸다. 때로는 어른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당돌하고 불손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른들과 경험이 다를 뿐 그들이 접하는 세계에 대해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옛 동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바, ‘동심’이라는 이름에 가두기에는 어린이와 어린이 세계는 무한하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준다.
▣ 작가 소개
편역 : 안대회
대한민국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와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있다. 한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종횡하는 고전 읽기와 탁월한 분석을 통해 풀어내는 그의 글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조선후기 한문학이 온축해온 감성과 사유의 세계를 대중적인 필치로 풀어냄으로써 역사 속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향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바꿔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서로는『조선의 프로페셔널』『선비답게 산다는 것』『조선후기 시화사 연구』『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7일간의 한자여행』『고전 산문 산책』『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윤춘년과 시화문화』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산수간에 집을 짓고』『소화시평』『궁핍한 날의 벗』『북학의』『선집 한서열전』『나를 돌려다오』『연경, 담배의 모든 것』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1 우주를 꿈꾸다
2 자연과 계절을 노래하다
3 동식물과 어울리다
4 더불어 살아가다
5 사물을 그려 내다
6 짧은 구절 긴 생각
뒷글 | 아동 한시 세계로의 초대
수록 작가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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