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글 기계화의 포문을 연 타자기 발명가
어린이를 위한 인물 평전 ‘한겨레 인물탐구’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으로《공병우, 한글을 사랑한 괴짜 의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 ‘공안과’를 세운 의사이자 세벌식 자판을 개발한 한글 타자기 발명가였던 공병우의 개성 있는 삶을 그렸다.
어린이들에게 공병우는 낯선 인물이다. 그가 발명한 타자기는 전 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이며, 생전에 그토록 꿈꾸었던 세벌식 자판의 표준화도 오늘날에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어린이들에게 이 인물의 삶을 소개하는 이유를 작가는 한글 기계화의 혜택에서 찾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교육, 문화, 정보 통신 분야에서 빠른 발전을 이루게 된 데는 한글이 우수한 글자인 덕도 있지만, 한글 기계화를 향한 열정 어린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타자기 발명, 워드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의 개발, 서체 개발 등이 가져온 문화적 혜택은 우리 삶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한 기계화?전산화의 첫 발을 뗀 사람이 바로 공병우이다. 한편, 열정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공병우의 삶은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인간적이며 개성 있는 삶의 궤적을 그리고 간 공병우의 전기가 어른, 어린이 모두에게 매력 있게 읽히는 이유이다.
고집쟁이 시골 소년, 의사가 되다
공병우는 1907년 평안북도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하게 자라 어려서부터 고집도 세고 욕심도 많았다. 학창시절에는 선배한테 대들며 칼부림도 하고, 보란듯이 학교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농업학교 2학년 때 일본인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의학도의 길을 찾아, 독학으로 평양의학강습소에 입학했다. 공병우는 기세를 몰아 의학강습소를 졸업하기도 전에 의사 자격시험을 통과한다. 열세 살 때 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해 스무 살에 의사가 되었으니 7년 만에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 과정을 모두 끝내 버린 셈이다. 물론 졸업장은 한 장도 받지 못했다.
의사가 된 뒤에도 도전은 계속됐다. 공병우는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경성의전에 견학생으로 들어가 병리학을 연구했다. 특유의 끈기와 열의로 연구에 파고든 그는 망막 질환에 대한 논문으로 나고야대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우리나라 의학박사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1938년 공병우는 서울 안국동에 ‘공안과’를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 병원이었다.
타자기와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치다
젊은 의사 공병우는 그 무렵 독립운동가 이극로 선생으로부터 한글을 처음 접한다. 일제강점기에 서른 평생을 보낸 그는 한글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줄곧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고, 더욱이 의학을 공부하면서는 한글로 된 책이나 글은 접해 보지 못했다. 한글로 우리 민족이 글눈을 뜨고 문화의 힘을 기를 수 있다는 이극로 선생의 말에 자극을 받은 공병우는 곧장 한글을 배워 활용하기 시작했다. 눈병 예방 안내문을 한글로 만들어 나누어 주고, 한글로 시력검사표를 만들기도 했다. 또, 일본어로 쓴 안과학 교과서를 우리말로 옮겨 펴내기도 했다. 타자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당시 영문 타자기는 국내에 꽤 들어와 있었지만, 한글 타자기는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앞서 개발된 한글 타자기는 속도가 느리고 불편해 실용화에 실패했다. 영어와 전혀 다른 한글의 생성 원리를 타자기에 반영하지 못한 탓이었다. 공병우는 병원 일도 제쳐 놓고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린 끝에 ‘세벌식 쌍초점 한글 타자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공병우 타자기는 정부 기관과 미군청에서 쓰기 시작해 한국전쟁 이후에는 일반 기업과 개인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물결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던 분위기와 맞물려 타자기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공병우는 사업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타자기 사업에 손을 떼고 안과 의사로 돌아갔던 공병우를 학글학계로 다시 불러낸 것은 1969년에 있었던 정부의 ‘자판 표준안’ 발표였다. 평소 잘못된 일이라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공병우가 눈엣가시였던 정부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던 공병우 타자기를 배제하고 비합리적인 네벌식 자판을 표준안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공병우와 각계 전문가들은 일제히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정부는 힘과 권력으로 그들의 손과 발을 묶었다. 1983년에 다시 두벌식 자판이 표준안으로 채택되면서 세벌식 자판은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공병우는 포기하지 않고 세벌식 자판 보급에 힘쓰며, 전동 타자기?점자 타자기 발명, 워드프로세서 개발, 한글 연구기관 설립, 서체 개발 등 한글 기계화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 한편으로는 소외 계층의 시각장애인들에게 개안수술을 해 주고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등 사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공병우의 삶이 우리에게 준 것들
1995년 공병우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은 ‘내 무덤을 만들 땅에 차라리 콩을 심어라.’였다. 겉치레를 싫어하고 효율과 실용성을 중시하던 그의 성격이 보이는 대목이다. 1950년대 미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 집안 구조를 실용적으로 만들겠다며 문턱을 모두 없애고 부엌과 안방 사이 벽에 큰 구멍을 냈다는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그 고집과 개성이 당시에는 얼마나 괴짜처럼 보였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합리성과 속도는 공병우 삶의 핵심 키워드이며 타자기의 본질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그가 타자기로 성공을 거둔 데는 규격과 속도를 최우선으로 전후 사회 기틀을 만들던 시대상과 큰 관련이 있다. 타자기 광고나 타자 대회 등의 일화로 당시 우리나라 사회상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재미이다.
공병우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미덕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일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혼자 힘으로 의사가 되고, 피나는 노력 끝에 안과 의사로 성공한 이후에도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어 타자기와 한글 자판 연구에 쏟은 열정은, 그 결과물과 별개로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여든 살이 넘어 워드프로세서와 서체 개발에 몰두했던 백발의 청춘이 어린이들에게 건네는 이야기의 속살이다.
▣ 작가 소개
저 : 김은식
1973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했고, 월간 〈우리교육〉과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06년 봄부터 CBS 라디오 ‘파워스포츠’에서 80~90년대 한국 프로야구의 스타들을 재조명하는 ‘야구의 추억’을 방송했다. 지은 책으로는 『맛있는 추억』『장기려, 우리 곁에서 살다 간 성자』『야구의 추억』『126, 팬과 함께 달리다』『야구생활』『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두산베어스 때문에 산다』등이 있다.
그림 : 이상규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한은행 새싹 만화 공모전에 입상하며 만화가가 되었고,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마법의 두루마리'' 시리즈를 비롯해『네버랜드 미아』『숲자연학교에 가자!』『큰 그림으로 보는 우리 역사』『두근두근 상담실』『제키의 지구 여행』『열 살이에요』『네버랜드 미아』『숲자연학교에 가자!』『새를 보면 나도 날고 싶어』『행복해져라 너구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주요 목차
지은이의 말
1. 고집쟁이 시골소년, 의사가 되다
외양간 바닥에서 태어난 팔삭둥이
가슴에 품은 꿈
졸업장 하나 없는 의학박사
2. 두 번째 도전, 발명가
한글을 만나다
그래, 내가 직접 만들어 보자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의 탄생
3. 타자기에 바친 삶
전쟁과 타자기
타자기 사이의 삶과 죽음
한글 타자기 열풍이 불다
4. 끝없는 도전 잘못된 일에 맞서 싸우다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표준을 세우기 위하여
모두를 이롭게 하는 삶
고집불통 괴짜 발명가의 멋진 삶
한글 기계화의 포문을 연 타자기 발명가
어린이를 위한 인물 평전 ‘한겨레 인물탐구’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으로《공병우, 한글을 사랑한 괴짜 의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 ‘공안과’를 세운 의사이자 세벌식 자판을 개발한 한글 타자기 발명가였던 공병우의 개성 있는 삶을 그렸다.
어린이들에게 공병우는 낯선 인물이다. 그가 발명한 타자기는 전 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이며, 생전에 그토록 꿈꾸었던 세벌식 자판의 표준화도 오늘날에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어린이들에게 이 인물의 삶을 소개하는 이유를 작가는 한글 기계화의 혜택에서 찾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교육, 문화, 정보 통신 분야에서 빠른 발전을 이루게 된 데는 한글이 우수한 글자인 덕도 있지만, 한글 기계화를 향한 열정 어린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타자기 발명, 워드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의 개발, 서체 개발 등이 가져온 문화적 혜택은 우리 삶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한 기계화?전산화의 첫 발을 뗀 사람이 바로 공병우이다. 한편, 열정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공병우의 삶은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인간적이며 개성 있는 삶의 궤적을 그리고 간 공병우의 전기가 어른, 어린이 모두에게 매력 있게 읽히는 이유이다.
고집쟁이 시골 소년, 의사가 되다
공병우는 1907년 평안북도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하게 자라 어려서부터 고집도 세고 욕심도 많았다. 학창시절에는 선배한테 대들며 칼부림도 하고, 보란듯이 학교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농업학교 2학년 때 일본인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의학도의 길을 찾아, 독학으로 평양의학강습소에 입학했다. 공병우는 기세를 몰아 의학강습소를 졸업하기도 전에 의사 자격시험을 통과한다. 열세 살 때 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해 스무 살에 의사가 되었으니 7년 만에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 과정을 모두 끝내 버린 셈이다. 물론 졸업장은 한 장도 받지 못했다.
의사가 된 뒤에도 도전은 계속됐다. 공병우는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경성의전에 견학생으로 들어가 병리학을 연구했다. 특유의 끈기와 열의로 연구에 파고든 그는 망막 질환에 대한 논문으로 나고야대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우리나라 의학박사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1938년 공병우는 서울 안국동에 ‘공안과’를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 병원이었다.
타자기와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치다
젊은 의사 공병우는 그 무렵 독립운동가 이극로 선생으로부터 한글을 처음 접한다. 일제강점기에 서른 평생을 보낸 그는 한글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줄곧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고, 더욱이 의학을 공부하면서는 한글로 된 책이나 글은 접해 보지 못했다. 한글로 우리 민족이 글눈을 뜨고 문화의 힘을 기를 수 있다는 이극로 선생의 말에 자극을 받은 공병우는 곧장 한글을 배워 활용하기 시작했다. 눈병 예방 안내문을 한글로 만들어 나누어 주고, 한글로 시력검사표를 만들기도 했다. 또, 일본어로 쓴 안과학 교과서를 우리말로 옮겨 펴내기도 했다. 타자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당시 영문 타자기는 국내에 꽤 들어와 있었지만, 한글 타자기는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앞서 개발된 한글 타자기는 속도가 느리고 불편해 실용화에 실패했다. 영어와 전혀 다른 한글의 생성 원리를 타자기에 반영하지 못한 탓이었다. 공병우는 병원 일도 제쳐 놓고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린 끝에 ‘세벌식 쌍초점 한글 타자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공병우 타자기는 정부 기관과 미군청에서 쓰기 시작해 한국전쟁 이후에는 일반 기업과 개인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물결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던 분위기와 맞물려 타자기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공병우는 사업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타자기 사업에 손을 떼고 안과 의사로 돌아갔던 공병우를 학글학계로 다시 불러낸 것은 1969년에 있었던 정부의 ‘자판 표준안’ 발표였다. 평소 잘못된 일이라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공병우가 눈엣가시였던 정부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던 공병우 타자기를 배제하고 비합리적인 네벌식 자판을 표준안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공병우와 각계 전문가들은 일제히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정부는 힘과 권력으로 그들의 손과 발을 묶었다. 1983년에 다시 두벌식 자판이 표준안으로 채택되면서 세벌식 자판은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공병우는 포기하지 않고 세벌식 자판 보급에 힘쓰며, 전동 타자기?점자 타자기 발명, 워드프로세서 개발, 한글 연구기관 설립, 서체 개발 등 한글 기계화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 한편으로는 소외 계층의 시각장애인들에게 개안수술을 해 주고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등 사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공병우의 삶이 우리에게 준 것들
1995년 공병우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은 ‘내 무덤을 만들 땅에 차라리 콩을 심어라.’였다. 겉치레를 싫어하고 효율과 실용성을 중시하던 그의 성격이 보이는 대목이다. 1950년대 미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 집안 구조를 실용적으로 만들겠다며 문턱을 모두 없애고 부엌과 안방 사이 벽에 큰 구멍을 냈다는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그 고집과 개성이 당시에는 얼마나 괴짜처럼 보였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합리성과 속도는 공병우 삶의 핵심 키워드이며 타자기의 본질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그가 타자기로 성공을 거둔 데는 규격과 속도를 최우선으로 전후 사회 기틀을 만들던 시대상과 큰 관련이 있다. 타자기 광고나 타자 대회 등의 일화로 당시 우리나라 사회상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재미이다.
공병우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미덕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일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혼자 힘으로 의사가 되고, 피나는 노력 끝에 안과 의사로 성공한 이후에도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어 타자기와 한글 자판 연구에 쏟은 열정은, 그 결과물과 별개로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여든 살이 넘어 워드프로세서와 서체 개발에 몰두했던 백발의 청춘이 어린이들에게 건네는 이야기의 속살이다.
▣ 작가 소개
저 : 김은식
1973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했고, 월간 〈우리교육〉과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06년 봄부터 CBS 라디오 ‘파워스포츠’에서 80~90년대 한국 프로야구의 스타들을 재조명하는 ‘야구의 추억’을 방송했다. 지은 책으로는 『맛있는 추억』『장기려, 우리 곁에서 살다 간 성자』『야구의 추억』『126, 팬과 함께 달리다』『야구생활』『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두산베어스 때문에 산다』등이 있다.
그림 : 이상규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한은행 새싹 만화 공모전에 입상하며 만화가가 되었고,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마법의 두루마리'' 시리즈를 비롯해『네버랜드 미아』『숲자연학교에 가자!』『큰 그림으로 보는 우리 역사』『두근두근 상담실』『제키의 지구 여행』『열 살이에요』『네버랜드 미아』『숲자연학교에 가자!』『새를 보면 나도 날고 싶어』『행복해져라 너구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주요 목차
지은이의 말
1. 고집쟁이 시골소년, 의사가 되다
외양간 바닥에서 태어난 팔삭둥이
가슴에 품은 꿈
졸업장 하나 없는 의학박사
2. 두 번째 도전, 발명가
한글을 만나다
그래, 내가 직접 만들어 보자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의 탄생
3. 타자기에 바친 삶
전쟁과 타자기
타자기 사이의 삶과 죽음
한글 타자기 열풍이 불다
4. 끝없는 도전 잘못된 일에 맞서 싸우다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표준을 세우기 위하여
모두를 이롭게 하는 삶
고집불통 괴짜 발명가의 멋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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