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어느 날, 도축장의 기억을 딛고 살아남은
싸움소 칠성이, 그의 드라마에 깃든 진한 휴머니즘
4년 전. 도축장. 한낮이건만 해가 뜨지 않은 듯, 사방이 소들의 울음소리로 술렁거리는 도축장에 갓 두 살이 된 칡소도 끼어 있었다. 어린 칡소가 자기에게 닥친 운명에 대들기라도 하듯 앞발로 땅을 헤집어대고 있을 때, 한 노인이 겁에 질린 칡소와 눈이 마주쳤다.
황 영감.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싸움에 건 외로운 노인, 황 영감에게 도축장에서 발견한 칡소 칠성이는
새 삶을 함께 일구어 갈 동지이고, 식구였다.
깊은 속 어딘가에 도축장의 기억을 새긴 칠성이, 사랑하던 범소를 묻은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한 황 영감. 둘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삶의 냉혹함을 경험했고, 이후 이들이 펼쳐가는 이야기에서도 그 선 경험한 삶의 기억은 열뜬 고통처럼 둘을 따라붙는다.
가슴 한쪽에 묻은 범소. 송아지 때부터 정들었고, 천수를 누리도록 곁에 두고 싶었던 소. 범소는 그저 싸움소가 아닌 자식이고 친구였다. 황 영감 자신이라고 해도 좋았다.
-22쪽
한몸처럼 붙어 지낸 지 삼 년 만에 칠성이는 첫 출전한다. 우렁찬 고래빼기로 상대의 기를 애초에 꺾어 놓고, 자기보다 큰 덩치, 경험이 많은 선수들한테도 결코 밀리지 않으며 연승을 거듭하는 칠성이. 담력 좋은 선수로 키워낸 황 영감의 조력이 큰 성과를 거두어 가던 어느 날, 그날은 칠성이가 태백산과 맞붙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일찍이 범소를 잃게 만든 태백산. 황 영감의 예감은 좋지 않다.
칠성이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도축장의 두려움은 없어진 게 아니라 칠성이의 깊은 속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노였고 또 다른 힘이었다. 뜨거운 힘이 꾸역꾸역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37쪽
도축장의 두려움이 분노로, 또 다른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칠성이를 휘어잡았을 때, 칠성이는 태백산이 범소에게 했던 걸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태백산을 끝내 버린다. 본디 싸움소들은 이미 항복한 상대를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뒤로 돌아 도망치거나 거리를 두어 항복을 선언한 소를 쫓아가 결딴내는 일은 흔치 않다. 제 힘과 두려움을 못 이긴 칠성이가 아이러니하게도 범소를 보낸 태백산을 끝내 버린 것이다.
오래 전, 범소를 잃었다. 멈추어야 할 때를 깨닫지 못한 태백산에게. 범소의 죽음이 황 영감의 모든 기운을 꺾었고, 칠성이 덕에 기운을 다시 차렸다. 태백산에 대한 원망도 삭일 수 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 그러자고 칠성이를 들인 게 아닌데.
-44쪽
어둡고 축축한 우사. 훈련하지 않는 날이 늘기 시작하면서, 칠성이는 어쩌면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황 영감의 슬픔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도축장의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작품은 긴 시간 묵묵하게 서로를 신뢰해 가는 두 주인공의 진한 사랑과 결국 고통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 엄숙한 투지에서 희망을 본다.
끈끈한 심리 묘사, 속도감 있는 전개
연필드로잉으로 살린 치밀한 형상화
작품을 보는 묘미 중에 하나는 치밀한 묘사일 터. 황선미 작품의 주요 특질로 언급되곤 하는, 마치 눈앞에 살아있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만 같은 치밀한 형상화는 이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출렁거리는 경기장, 수소들의 술렁거림, 한낮의 모래판과 불거지는 근육. 더하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다 이해하지는 못하는 말 없는 동물의 눈과, 그를 바라보는 인간 황 영감의 다층적인 감정의 겹이 깊고 굵직하게 다가온다. 김용철 화가의 연필 드로잉은 이 문학적 형상화를 더욱 생생하고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슬픔과 두려움, 인물간의 감정의 거리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수소의 힘찬 움직임, 그럼에도 순한 슬픔이 어린 소의 눈은 때로는 이야기의 포문을 열고, 때로는 이야기의 리듬으로 움직이며 작품을 감상하는 맛을 더하고 있다.
어디에 서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을 바라보는 통찰, 그리고 질문
이 작품은 민속소싸움을 배경으로 하여, 싸움소 칠성이와 주인 황 영감의 생의 굴곡을 되짚어 간다. 소싸움이 민속문화의 전승인지, 동물학대인지 사회적으로 오랜 논란이 거듭되는 와중에서, 작가는 냉혹한 삶을 비유하는 문학의 틀로서 과감하게 소싸움을 끌어들인다. 20~36개월에 이른 농가의 소들은 엄연히 도축되고, 시스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날로 잔혹해지는 도축장의 현실은 이 작품의 주인공, 칠성이가 생애처음 맞닥뜨린 깊은 두려움이다. 칠성이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존재를 긍정해 가는 과정과 황 영감이 범소를 잃은 기억을 딛고 새로운 관계와 삶을 희망하는 자리에, 그 모든 슬픔과 아픔과 극복의 자리에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로 달구어진 서늘한 모래판이 있다. 하나의 두려움을 딛더라도, 또 하나의 두려움이 들어오는 자리. 삶이 이와 같을 때, 어디에 서서 무엇을 꿈꾸고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까? 이 작품이 뜨겁게 던지는 질문이다.
작가 소개
글 : 황선미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한 심리 묘사와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야기로 수많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작품을 통해, 때로는 여러 자리를 통해 항상 어린이들 가까이에서 함께하고 있다. 서울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진솔하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로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1963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단편 『구슬아, 구슬아』로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을, 중편 『마음에 심는 꽃』으로 농민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97년에는 제1회 탐라문학상 동화 부문을 수상했고, 『나쁜 어린이표』,『마당을 나온 암탉』,『까치우는 아침』,『내 푸른 자전거』,『여름 나무』,『앵초의 노란 집』,『샘마을 몽당깨비』,『목걸이 열쇠』,『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등을 썼다.
대표작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알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어 보겠다는 소망을 갖고 살던 암탉 잎싹의 이야기다. 양계장에서 편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안전한 마당을 나온 잎싹은 우연히 청둥오리의 알을 품게 되는데, 그렇게 부화한 청둥오리를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고 자신의 목숨을 족제비에게 내주기까지 한다.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꿈과 자유, 그리고 사랑을 실현해나가는 삶을 아름다운 동화로 그려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학교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혼자 캄캄해질 때까지 학교에 남아 동화책을 읽곤 했던 그녀의 글은,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글을 써나가는 다른 90년대 여성작가들 달리 깊은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그 대표적 예. 근대 · 문명을 상징하는 '마당'과 탈근대·자연을 상징하는 저수지를 배경으로, 암탉 잎싹의 자유를 향한 의지와 아름다운 모성애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림 : 김용철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어린 시절 산길, 들길, 물길 따라 신 나게 놀고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친 덕에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다. 쓰고 그린 책에 『뒤집힌 호랑이』, 『꿈꾸는 징검돌』, 『우렁각시』, 『 화가 박수근 이야기』 등이 있고, 그린 책에 『훨훨 간다』, 『 낮에 나온 반달』, 『길 아저씨 손 아저씨』, 『이상한 나뭇잎』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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