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당당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운 학생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고, 히틀러와 나치의 유대 인 박해와 학살이 나날이 심해지던 1942년 6월 말에 독일 뮌헨 지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백장미단의 전단’. 이후 이 전단은 작성자들이 붙잡히는 1943년 2월 18일 여섯 번째로 뿌려지기까지 독일 곳곳에 뿌려진다. 이들은 전단 작성에서 배포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다. 게다가 게슈타포가 특별수사대를 꾸려 이 문건의 작성자와 배포자들을 뒤쫓을 만큼 이 문건의 내용은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었다.
첫 번째 전단에서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체제에 항거할 것을 촉구하고, 두 번째에서는 점령 지역에서 벌어지는 나치의 잔학 행위를 비난하고, 세 번째에서는 사악한 독재 정권 나치를 공격하면서 수동적인 저항(사보타주)을 부추긴다. 네 번째에서는 히틀러를 평화롭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고, 다섯 번째에서는 독일 군대의 패배를 예견하며, 뿌리다 실패한 마지막 전단에서는 “이제 들고일어나 복수하고, 속죄하고, 가해자들을 처단해 새 유럽을 건설하자”고 외친다.
이 전단을 작성하고 뿌린 이들은 뮌헨 대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백장미단이었다. 이들은 사람들이 대부분 히틀러와 나치의 폭압과 폭거에 복종하고, 독재에 침묵하고, 숱한 유대 인 박해에 고개를 돌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었다. 폭력적 저항 대신 비폭력 저항으로 잠자던 독일 국민의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이들이 처형당한 뒤에도 이들의 저항정신은 멈추지 않고 제2의 백장미단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게슈타포마저 감동시키다
1943년 2월 18일, 마지막 전단이 된 여섯 번째 전단을 뿌리다가 뮌헨 대학교 교정에서 붙잡힌 한스와 조피 숄. 이들은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려고 전단 작성과 배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붙잡힌 지 불과 4일 뒤인 2월 22일, 크리스토프 프롭스트(19일에 체포됨)와 함께 처형된다. 나치 고위 장교들이 신속한 재판과 유죄 판결을 요구하자, 특별 법정인 ‘인민 법정’의 수석 판사이자 ‘교수형 판사’로 악명 높은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신속하게 내린 판결이다. 이 특별 법정은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치 체제의 적들을 근절하기 위해 설치된 법정이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도 한스와 조피, 크리스토프는 나치에 굴복하기는커녕 꼿꼿한 기개로 오히려 게슈타포마저 감동시킨다. 이들을 체포한 백장미단 수사 총책임자인 로베르트 모어는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도 한스와 조피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더 큰 재앙이 독일을 덮치지 못하도록 막고, 가능하다면 수많은 독일 군인과 국민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뿐이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2월 22일 오후, 조피와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최후를 맞이했고, 한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의 끈을 놓지 않고 처형장에서 이렇게 외쳤다. “자유여 영원하라!” 이어서 6월 13일 알렉산더 슈모렐과 쿠르트 후버 교수가 처형되고, 10월 12일 빌리 그라프도 처형된다. 이로써 백장미단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후버 교수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들
아버지 로베르트 숄은 반나치주의자이지만, 한스와 조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히틀러 청소년단 활동을 열심히 했다. 1930년대에 독일에서 자란, 히틀러 청소년단의 유혹에 넘어갔던 다른 평범한 청소년들처럼. 하지만 한스와 조피는 곧 히틀러 청소년단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혐오하게 된다. 이후 한스 형제들은 히틀러 청소년단 대신 불법 청소년 단체인 ‘d.j.1.11’ 활동을 하다가 1937년 가을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한다.
1942년 5월, 조피가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한스와 친구들, 조피는 점차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고민하게 된다. “책임감 있는 시민이라면 독재 정권 아래서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가? 어떻게 하면 나치 체제에 항거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한스는 갈렌 주교의 설교문이 복사된 전단, 즉 정신병자와 신체불구자들을 치명적 가스로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나치의 1급 기밀 안락사 계획을 비판한 문건을 읽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심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 진정한 나 자신을 찾고 있다. 내 안의 진실을 찾아야만 한다.”
이런 고민 끝에 한스와 조피 숄을 포함해 알렉산더 슈모렐, 프리스토프 프롭스트, 빌리 그라프 등이 주축이 되어 백장미단을 만들게 된다. 알렉산더는 키가 크고 재치가 넘치며 우스갯소리를 곧잘 했으며,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빌리는 사려 깊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늘 조용하고 신중했다. 크리스토프는 이들 중 유일하게 어린 두 아들과 곧 태어날 셋째를 두고 있는 기혼자였다. 이 밖에도 이들에게 전단을 인쇄하고 복사용기를 보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작업실을 빌려준 뮌헨의 건축가 만프레트 아이케마이어와 뮌헨 대학교의 쿠르트 후버 교수는 백장미단의 든든한 조력자들이었다.
전단 배포는 몇 개월 동안 토론해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모두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진저리를 쳤다. 그들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기를,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폭탄을 던지는 쪽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인쇄된 말’을 통해 국민의 양심을 일깨우는 비폭력 저항 방법을 선택했다.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는 계속된다!
“그 누가 됐든, 그 무엇이 됐든 우리 당에 도발해 오면 우리는 그 열 배로 되갚아줘야 한다. 반역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 백장미단의 주동 학생들을 처단하고 나서 히틀러가 한 말이다. 그러나 게슈타포가 아무리 반역자들을 없애려 해도 제2의 백장미단 전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 전단은 강제수용소에도 흘러들어 갇혀 있는 이들에게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또한 전단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중립국인 스웨덴과 스위스, 영국에도 뿌려지게 된다. 결국 1943년 말, 영국 전투기들은 독일의 도시와 마을에 백장미단 전단 수만 장을 살포한다. 전단에는 ‘독일 전단: 뮌헨 학생 선언’이라는 제목이 굵직하게 찍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백장미단 학생 투사들의 목소리는 나치에 점령당한 지역과 자유세계 양쪽의 수백만 명에게 전달되었다.
오늘날 백장미단 회원들은 2차 세계대전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들에 대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고, 영화와 뮤지컬이 쏟아졌다. 독일에서는 백장미단과 그 회원들을 기려 이름을 붙인 학교와 광장과 거리가 셀 수도 없이 많다. 뮌헨 대학교 정문 밖 광장은 숄 남매 광장으로, 길 건너 광장은 후버 교수 광장으로 이름 지어졌다. 러셀 프리드먼은 말한다. “백장미단 운동과 참수당한 그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기적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고, 히틀러와 나치의 유대 인 박해와 학살이 나날이 심해지던 1942년 6월 말에 독일 뮌헨 지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백장미단의 전단’. 이후 이 전단은 작성자들이 붙잡히는 1943년 2월 18일 여섯 번째로 뿌려지기까지 독일 곳곳에 뿌려진다. 이들은 전단 작성에서 배포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다. 게다가 게슈타포가 특별수사대를 꾸려 이 문건의 작성자와 배포자들을 뒤쫓을 만큼 이 문건의 내용은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었다.
첫 번째 전단에서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체제에 항거할 것을 촉구하고, 두 번째에서는 점령 지역에서 벌어지는 나치의 잔학 행위를 비난하고, 세 번째에서는 사악한 독재 정권 나치를 공격하면서 수동적인 저항(사보타주)을 부추긴다. 네 번째에서는 히틀러를 평화롭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고, 다섯 번째에서는 독일 군대의 패배를 예견하며, 뿌리다 실패한 마지막 전단에서는 “이제 들고일어나 복수하고, 속죄하고, 가해자들을 처단해 새 유럽을 건설하자”고 외친다.
이 전단을 작성하고 뿌린 이들은 뮌헨 대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백장미단이었다. 이들은 사람들이 대부분 히틀러와 나치의 폭압과 폭거에 복종하고, 독재에 침묵하고, 숱한 유대 인 박해에 고개를 돌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었다. 폭력적 저항 대신 비폭력 저항으로 잠자던 독일 국민의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이들이 처형당한 뒤에도 이들의 저항정신은 멈추지 않고 제2의 백장미단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게슈타포마저 감동시키다
1943년 2월 18일, 마지막 전단이 된 여섯 번째 전단을 뿌리다가 뮌헨 대학교 교정에서 붙잡힌 한스와 조피 숄. 이들은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려고 전단 작성과 배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붙잡힌 지 불과 4일 뒤인 2월 22일, 크리스토프 프롭스트(19일에 체포됨)와 함께 처형된다. 나치 고위 장교들이 신속한 재판과 유죄 판결을 요구하자, 특별 법정인 ‘인민 법정’의 수석 판사이자 ‘교수형 판사’로 악명 높은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신속하게 내린 판결이다. 이 특별 법정은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치 체제의 적들을 근절하기 위해 설치된 법정이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도 한스와 조피, 크리스토프는 나치에 굴복하기는커녕 꼿꼿한 기개로 오히려 게슈타포마저 감동시킨다. 이들을 체포한 백장미단 수사 총책임자인 로베르트 모어는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도 한스와 조피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더 큰 재앙이 독일을 덮치지 못하도록 막고, 가능하다면 수많은 독일 군인과 국민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뿐이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2월 22일 오후, 조피와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최후를 맞이했고, 한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의 끈을 놓지 않고 처형장에서 이렇게 외쳤다. “자유여 영원하라!” 이어서 6월 13일 알렉산더 슈모렐과 쿠르트 후버 교수가 처형되고, 10월 12일 빌리 그라프도 처형된다. 이로써 백장미단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후버 교수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들
아버지 로베르트 숄은 반나치주의자이지만, 한스와 조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히틀러 청소년단 활동을 열심히 했다. 1930년대에 독일에서 자란, 히틀러 청소년단의 유혹에 넘어갔던 다른 평범한 청소년들처럼. 하지만 한스와 조피는 곧 히틀러 청소년단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혐오하게 된다. 이후 한스 형제들은 히틀러 청소년단 대신 불법 청소년 단체인 ‘d.j.1.11’ 활동을 하다가 1937년 가을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한다.
1942년 5월, 조피가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한스와 친구들, 조피는 점차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고민하게 된다. “책임감 있는 시민이라면 독재 정권 아래서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가? 어떻게 하면 나치 체제에 항거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한스는 갈렌 주교의 설교문이 복사된 전단, 즉 정신병자와 신체불구자들을 치명적 가스로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나치의 1급 기밀 안락사 계획을 비판한 문건을 읽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심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 진정한 나 자신을 찾고 있다. 내 안의 진실을 찾아야만 한다.”
이런 고민 끝에 한스와 조피 숄을 포함해 알렉산더 슈모렐, 프리스토프 프롭스트, 빌리 그라프 등이 주축이 되어 백장미단을 만들게 된다. 알렉산더는 키가 크고 재치가 넘치며 우스갯소리를 곧잘 했으며,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빌리는 사려 깊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늘 조용하고 신중했다. 크리스토프는 이들 중 유일하게 어린 두 아들과 곧 태어날 셋째를 두고 있는 기혼자였다. 이 밖에도 이들에게 전단을 인쇄하고 복사용기를 보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작업실을 빌려준 뮌헨의 건축가 만프레트 아이케마이어와 뮌헨 대학교의 쿠르트 후버 교수는 백장미단의 든든한 조력자들이었다.
전단 배포는 몇 개월 동안 토론해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모두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진저리를 쳤다. 그들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기를,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폭탄을 던지는 쪽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인쇄된 말’을 통해 국민의 양심을 일깨우는 비폭력 저항 방법을 선택했다.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는 계속된다!
“그 누가 됐든, 그 무엇이 됐든 우리 당에 도발해 오면 우리는 그 열 배로 되갚아줘야 한다. 반역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 백장미단의 주동 학생들을 처단하고 나서 히틀러가 한 말이다. 그러나 게슈타포가 아무리 반역자들을 없애려 해도 제2의 백장미단 전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 전단은 강제수용소에도 흘러들어 갇혀 있는 이들에게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또한 전단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중립국인 스웨덴과 스위스, 영국에도 뿌려지게 된다. 결국 1943년 말, 영국 전투기들은 독일의 도시와 마을에 백장미단 전단 수만 장을 살포한다. 전단에는 ‘독일 전단: 뮌헨 학생 선언’이라는 제목이 굵직하게 찍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백장미단 학생 투사들의 목소리는 나치에 점령당한 지역과 자유세계 양쪽의 수백만 명에게 전달되었다.
오늘날 백장미단 회원들은 2차 세계대전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들에 대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고, 영화와 뮤지컬이 쏟아졌다. 독일에서는 백장미단과 그 회원들을 기려 이름을 붙인 학교와 광장과 거리가 셀 수도 없이 많다. 뮌헨 대학교 정문 밖 광장은 숄 남매 광장으로, 길 건너 광장은 후버 교수 광장으로 이름 지어졌다. 러셀 프리드먼은 말한다. “백장미단 운동과 참수당한 그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기적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 소개
저 : 러셀 프리드먼
Russell Freedman
192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책의 저자와 전기 작가로 유명하다. 1988년에 『링컨(Lincoln: A Photogiograpby)』으로 뉴베리 상을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 루스벨트, 라이트 형제, 매리언 앤더슨 등의 전기로 뉴베리 명예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아동 문학에 평생 기여한 공로로 로라 잉걸스 와일더 상(Laura Ingalls Wilder Medal)을 받았다. 그리고 2007년에 National Humanities Medals을 받았다. 지금까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의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책을 써 온 그의 작품으로 『링컨』 이외에도 『마사 그레이엄』,『라이트 형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친말의 삶과 죽음』『1차 세계대전』등 50여 권이 넘는다.
역 : 강미경
1964년 제주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프로파간다』, 『작가 수업』, 『나침반, 항해와 탐험의 역사』,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유혹의 기술 1, 2』,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아메리카를 누가 처음 발견했을까?』, 『똥 누고 물 내리지 마세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이 있다.
목 차
머리말
1장 히틀러 청소년단 입단
2장 깊어지는 의구심
3장 반은 군인, 반은 학생
4장 백장미단의 전단
5장 “우리는 당신의 나쁜 양심입니다”
6장 “히틀러 타도!”
7장 체포되다
8장 “자유여 영원하라!”
9장 안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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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히틀러 청소년단 입단
2장 깊어지는 의구심
3장 반은 군인, 반은 학생
4장 백장미단의 전단
5장 “우리는 당신의 나쁜 양심입니다”
6장 “히틀러 타도!”
7장 체포되다
8장 “자유여 영원하라!”
9장 안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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