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 드라마
그 중심에는 늘 이희호가 있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에 대한 평전이 출간되었다.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한겨레를 통해 총 80회에 걸쳐 장기 연재된 내용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몇몇 사항을 보완하였다. 이 책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유력 여성운동가이며,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이희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을 만날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장해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 더욱 큰 시사점을 줄 것이다.
일찍이 여성인권에 눈뜬 지식인
이희호의 삶은 김대중의 존재와 떼려야 떼기 힘들다. 이희호 그 자체보다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조명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희호는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 이미 주목받는 사회운동가였다. 미국에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교운동을 이끌었다. 결혼 후에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대한YWCA연합회 상임위원, 범태평양?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 등으로 왕성히 활동한다. 대통령 부인 시절에는 한국여성재단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명예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이었다는 점과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부가 출범한 사실 등도 주목할 만하다.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서로를 칭할 때 ‘동행자’, ‘동역자’라는 표현을 즐겨 쓰곤 했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가장 깊은 신뢰로 묶인 평생의 동지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부산 피란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던 ‘면우회’를 통해서였고, 6년 뒤 각각 YWCA 총무와 정치초년생이던 시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 서로의 고민을 나눈 게 그 다음 만남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젊은이로 서로 알아간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하는’ 동지로서 말이다.
그 뒤 김대중은 상처(喪妻)의 절망을 딛고 민의원에 당선되지만, 5?16쿠데타로 다시 정치낭인이 되고 만다. 이 좌절의 시기에 큰 힘이 된 동료가 바로 이희호다. YWCA 총무 일로 바쁜 이희호가 시간을 내면 무일푼의 실업자였던 김대중이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밥값이나 찻값은 이희호가 냈다. 마흔이 다 된 나이였고, 김대중은 애도 둘 있는 처지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연애감정보다는 동지의식에 가까웠다. 나누는 이야기도 주로 시국에 대한 것이었고, 지식인들의 정치토론에 가까웠다. 그러는 중에 서서히 교감이 커졌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도 깊어졌다. 이희호는 그렇게 김대중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김대중이 가지는 남자로서의 매력, 인간 자체의 매력도 중요했지만, 이희호가 결혼을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도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당시의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에 대한 큰 꿈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었다. 이희호는 이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지요.” 주변의 만류에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다.
“남편이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미국 망명 시절 한 강연에서 김대중이 한 말이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을 것이란 평가는 이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 공히 인정하는 바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희호는 찬조연설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김대중의 신조 ‘행동하는 양심’의 그 양심 한가운데 이희호가 있었다. 숱한 권력의 탄압 속에서 그의 민주주의 신념이 흔들릴 때마다 이희호의 존재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유신독재 시절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이 늘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양심은 악의 편에 속한다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야고보서 4장 17절)”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한 세월의 태반은 핍박과 죽음의 불길이 어른거리는 환난의 시간이었다. 유신독재 시절 남편은 망명 아니면 수감으로 집을 비웠고, 남편 없는 집에서 이희호는 정보기관에 둘러싸여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내란 음모’로 몰아가 감옥에 묶어두었다가 온 가족을 미국으로 망명 보내기까지 한다. 그 시절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준 것이 신앙이었다. 기댈 것은 기도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갈라지고 부서질 것 같았지만 기도로 버텼다.
이희호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 무기였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남편의 할 일이었고, 그렇기에 남편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간구했던 것이다. 그 신앙이 권력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의 원천이었다.
민주화를 향한 끈질긴 싸움은 결국 1987년 6월 승리로 이어졌지만, 절반의 승리였을 뿐이다. IMF 환난 속에서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이희호가 오늘도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다.
동역자를 보내고 홀로 남아
2009년 8월 18일 김대중이 눈을 감았다. 같은 해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오열한 지 82일만이었다. 김대중이 떠나고 20여 일 뒤인 9월 10일 이희호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에 선임됐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김대중평화센터의 설립 목적인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평화,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던 취임 인사말대로 2011년과 2015년 평양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메시지를 전하는 등 지금도 이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희호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한 기여에 비하면 소박한 바람이다.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한 세기
집필을 맡은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이희호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의 역사는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도 힘든 격투의 시간”이었다며, 그 역사를 만든 민중의 노고와 그 민중 열망의 물결을 타고 절망의 최저점과 희망의 최고점을 함께 오간 이희호와 김대중의 삶을 온전히 그려내려고 노력했다고 전한다.
전쟁통에 짓눌린 여성의 삶을 위한 활동에서, 군부독재와의 지난한 싸움, 광주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성취와 평화적 정권교체,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최근 민주주의의 위기와 촛불의 저항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 세기를 그 중심에서 살아온 이희호. 그의 삶과 함께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한 단계 도약한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영감을 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고명섭
한겨레신문 기자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문화부에서 출판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사고의 관성을 흔들고 두뇌의 신경을 자극하는 인문학 책들을 읽고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책·지성팀장을 거쳐 지금은 문화부장으로 있다. 인간의 내면세계 혹은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그 정신이 산출한 생각들을 삶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여 설명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 사유가 발원한 지점에 가 닿고 싶다는 욕구, 사상의 나무가 자라나온 뿌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가 인문학 공부를 지속시킨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즐거운 지식-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담론의 발견-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를 썼으며, 시집 『황혼녘 햇살에 빛나는 구렁이알을 삼키다』를 냈고, 『말론 브랜도』(공역)를 옮겼다.
▣ 주요 목차
|차례|
프롤로그 - 이희호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제1부 학업시대
1 남 주기 좋아하던 수줍은 아이 - 어린 시절
2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 이화의 사춘기
3 입주 가정교사에서 농촌 지도원까지 - 이화여전의 시련
4 남자들보다 우렁찼던 구령 소리 - 사범대 리더
5 ‘히히호호’ 크게 웃던 학생 - 연극배우
6 전쟁통에 짓눌린 여성을 위해 - 여성운동 첫발
7 엘리너 루스벨트를 만나다 - 미국 유학시절
제2부 만남과 동행
1 학문의 길과 사회운동의 길 사이에서 - YWCA 총무
2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한 사람 - 만남
3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 결혼
4 함께 걷는 시련의 길 - 동교동 문패
5 걱정의 눈길이 축하의 시선으로 - 국회의원 아내
6 남편의 소신을 지지하다 - 한?일협정
7 박정희 대 김대중 - 목포의 전쟁
8 삼선개헌과 맞서다 - 40대 기수
9 대선 후보 김대중의 탄생 - 신민당 전당대회
10 보이지 않는 손들의 광란 - 1971년 대선
11 느닷없는 교통사고 - 1971년 8대 총선
제3부 유신의 암흑
1 우려가 현실이 되다 - 유신 쿠데타
2 첩보영화 같은 편지 교환 - 망명
3 ‘지옥’에서 보낸 6일 - 도쿄 납치
4 정보부에 점령당한 집 - 가택연금
5 총성 속에 밝힌 화촉 - 긴급조치
6 기자들의 싸움에 함께하다 - 자유언론투쟁
7 사법살인의 그날 - 아, 인혁당
8 중앙정보부에 잡혀가다 - 3?1민주구국선언
9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감옥 - 진주교도소
10 양말 속에 숨겨 나온 쪽지 - 서울대병원
11 독재자가 베푼 ‘선심’ - 동교동 감옥
12 암살로 끝난 18년 독재 - 유신 종말
13 군부 안의 독버섯, 하나회 - 12?12군사반란
제4부 제5공화국
1 장막 뒤의 신군부 - 서울의 봄
2 참혹한 운명의 날 - 5?17쿠데타
3 기도로 보낸 날들 - 남산 지하실
4 아아, 광주여! 우리 민족의 십자가여! - 광주학살
5 고문으로 조작한 허구 - 내란음모 재판
6 지미 카터부터 미테랑까지 - 구명운동
7 감옥 속의 감옥 - 청주교도소
8 신앙과 사상의 교환 - 옥중서신
9 교도소에 넣은 600권의 책 - 감옥대학
10 독재자의 마수를 뒤로하고 - 미국 망명
11 미국에서 벌인 민주화 투쟁 - 망명활동
12 몸이 다시 무너져 내리다 - 귀국 준비
13 공항 일대를 메운 환영 인파 - 폭풍의 귀국
14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 - 개헌 투쟁
15 야수 정권의 맨얼굴 - 부천서 성고문
16 군부독재의 마지막 발호 - 4?13호헌
17 “불법감금 해제하라” - 6월항쟁
18 마침내 자유의 광장에 서다 - 이한열 장례식
제5부 광장의 시련
1 두 번째 대통령 선거 - 13대 대선
2 패배의 아픔을 딛고 - 4?26총선
3 솟구치는 통일 열기 - 공안탄압
4 평생의 소원을 이루다 - 가족법 개정
5 세 번째 도전에 뛰어들다 - 1992년 대선
6 눈물 속에 받아쓴 정계은퇴서 - 영국 생활
7 햇볕정책의 탄생 - 아태재단
8 ‘반대’에서 ‘이해’로 - 정계복귀
9 김영삼 정부의 파국 - 국민회의 창당
10 IMF 사태와 준비된 대통령 - 15대 대통령 선거
제6부 청와대의 시간
1 감격 어린 평화적 정권교체 - 대통령 당선
2 동교동보다 소박했던 청와대 살림 - 국민의 정부
3 여성과 어린이를 위해 - 금강산 관광
4 소록도 한센인들의 손을 잡다 - 국가조찬기도회
5 분단 반세기의 단절을 넘어 - 남북정상회담
6 “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 - 노벨평화상
7 UN 아동총회 임시의장 - 여성부 탄생
8 슬픔과 기쁨의 이중주 - 한?일 월드컵
제7부 동교동의 날들
1 청와대 5년과 작별하다 - 다시 동교동으로
2 다시 평양에 갈 수 있을까 - 10?4선언
3 민주주의?서민경제?남북관계의 후퇴 - 촛불시위
4 47년 동역자를 보내다 - 이별
5 홀로 다시 다녀온 평양 - 방북
저자 후기
참고문헌
연보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 드라마
그 중심에는 늘 이희호가 있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에 대한 평전이 출간되었다.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한겨레를 통해 총 80회에 걸쳐 장기 연재된 내용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몇몇 사항을 보완하였다. 이 책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유력 여성운동가이며,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이희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을 만날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장해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 더욱 큰 시사점을 줄 것이다.
일찍이 여성인권에 눈뜬 지식인
이희호의 삶은 김대중의 존재와 떼려야 떼기 힘들다. 이희호 그 자체보다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조명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희호는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 이미 주목받는 사회운동가였다. 미국에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교운동을 이끌었다. 결혼 후에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대한YWCA연합회 상임위원, 범태평양?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 등으로 왕성히 활동한다. 대통령 부인 시절에는 한국여성재단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명예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이었다는 점과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부가 출범한 사실 등도 주목할 만하다.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서로를 칭할 때 ‘동행자’, ‘동역자’라는 표현을 즐겨 쓰곤 했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가장 깊은 신뢰로 묶인 평생의 동지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부산 피란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던 ‘면우회’를 통해서였고, 6년 뒤 각각 YWCA 총무와 정치초년생이던 시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 서로의 고민을 나눈 게 그 다음 만남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젊은이로 서로 알아간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하는’ 동지로서 말이다.
그 뒤 김대중은 상처(喪妻)의 절망을 딛고 민의원에 당선되지만, 5?16쿠데타로 다시 정치낭인이 되고 만다. 이 좌절의 시기에 큰 힘이 된 동료가 바로 이희호다. YWCA 총무 일로 바쁜 이희호가 시간을 내면 무일푼의 실업자였던 김대중이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밥값이나 찻값은 이희호가 냈다. 마흔이 다 된 나이였고, 김대중은 애도 둘 있는 처지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연애감정보다는 동지의식에 가까웠다. 나누는 이야기도 주로 시국에 대한 것이었고, 지식인들의 정치토론에 가까웠다. 그러는 중에 서서히 교감이 커졌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도 깊어졌다. 이희호는 그렇게 김대중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김대중이 가지는 남자로서의 매력, 인간 자체의 매력도 중요했지만, 이희호가 결혼을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도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당시의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에 대한 큰 꿈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었다. 이희호는 이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지요.” 주변의 만류에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다.
“남편이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미국 망명 시절 한 강연에서 김대중이 한 말이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을 것이란 평가는 이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 공히 인정하는 바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희호는 찬조연설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김대중의 신조 ‘행동하는 양심’의 그 양심 한가운데 이희호가 있었다. 숱한 권력의 탄압 속에서 그의 민주주의 신념이 흔들릴 때마다 이희호의 존재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유신독재 시절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이 늘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양심은 악의 편에 속한다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야고보서 4장 17절)”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한 세월의 태반은 핍박과 죽음의 불길이 어른거리는 환난의 시간이었다. 유신독재 시절 남편은 망명 아니면 수감으로 집을 비웠고, 남편 없는 집에서 이희호는 정보기관에 둘러싸여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내란 음모’로 몰아가 감옥에 묶어두었다가 온 가족을 미국으로 망명 보내기까지 한다. 그 시절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준 것이 신앙이었다. 기댈 것은 기도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갈라지고 부서질 것 같았지만 기도로 버텼다.
이희호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 무기였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남편의 할 일이었고, 그렇기에 남편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간구했던 것이다. 그 신앙이 권력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의 원천이었다.
민주화를 향한 끈질긴 싸움은 결국 1987년 6월 승리로 이어졌지만, 절반의 승리였을 뿐이다. IMF 환난 속에서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이희호가 오늘도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다.
동역자를 보내고 홀로 남아
2009년 8월 18일 김대중이 눈을 감았다. 같은 해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오열한 지 82일만이었다. 김대중이 떠나고 20여 일 뒤인 9월 10일 이희호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에 선임됐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김대중평화센터의 설립 목적인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평화,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던 취임 인사말대로 2011년과 2015년 평양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메시지를 전하는 등 지금도 이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희호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한 기여에 비하면 소박한 바람이다.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한 세기
집필을 맡은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이희호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의 역사는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도 힘든 격투의 시간”이었다며, 그 역사를 만든 민중의 노고와 그 민중 열망의 물결을 타고 절망의 최저점과 희망의 최고점을 함께 오간 이희호와 김대중의 삶을 온전히 그려내려고 노력했다고 전한다.
전쟁통에 짓눌린 여성의 삶을 위한 활동에서, 군부독재와의 지난한 싸움, 광주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성취와 평화적 정권교체,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최근 민주주의의 위기와 촛불의 저항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 세기를 그 중심에서 살아온 이희호. 그의 삶과 함께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한 단계 도약한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영감을 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고명섭
한겨레신문 기자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문화부에서 출판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사고의 관성을 흔들고 두뇌의 신경을 자극하는 인문학 책들을 읽고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책·지성팀장을 거쳐 지금은 문화부장으로 있다. 인간의 내면세계 혹은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그 정신이 산출한 생각들을 삶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여 설명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 사유가 발원한 지점에 가 닿고 싶다는 욕구, 사상의 나무가 자라나온 뿌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가 인문학 공부를 지속시킨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즐거운 지식-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담론의 발견-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를 썼으며, 시집 『황혼녘 햇살에 빛나는 구렁이알을 삼키다』를 냈고, 『말론 브랜도』(공역)를 옮겼다.
▣ 주요 목차
|차례|
프롤로그 - 이희호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제1부 학업시대
1 남 주기 좋아하던 수줍은 아이 - 어린 시절
2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 이화의 사춘기
3 입주 가정교사에서 농촌 지도원까지 - 이화여전의 시련
4 남자들보다 우렁찼던 구령 소리 - 사범대 리더
5 ‘히히호호’ 크게 웃던 학생 - 연극배우
6 전쟁통에 짓눌린 여성을 위해 - 여성운동 첫발
7 엘리너 루스벨트를 만나다 - 미국 유학시절
제2부 만남과 동행
1 학문의 길과 사회운동의 길 사이에서 - YWCA 총무
2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한 사람 - 만남
3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 결혼
4 함께 걷는 시련의 길 - 동교동 문패
5 걱정의 눈길이 축하의 시선으로 - 국회의원 아내
6 남편의 소신을 지지하다 - 한?일협정
7 박정희 대 김대중 - 목포의 전쟁
8 삼선개헌과 맞서다 - 40대 기수
9 대선 후보 김대중의 탄생 - 신민당 전당대회
10 보이지 않는 손들의 광란 - 1971년 대선
11 느닷없는 교통사고 - 1971년 8대 총선
제3부 유신의 암흑
1 우려가 현실이 되다 - 유신 쿠데타
2 첩보영화 같은 편지 교환 - 망명
3 ‘지옥’에서 보낸 6일 - 도쿄 납치
4 정보부에 점령당한 집 - 가택연금
5 총성 속에 밝힌 화촉 - 긴급조치
6 기자들의 싸움에 함께하다 - 자유언론투쟁
7 사법살인의 그날 - 아, 인혁당
8 중앙정보부에 잡혀가다 - 3?1민주구국선언
9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감옥 - 진주교도소
10 양말 속에 숨겨 나온 쪽지 - 서울대병원
11 독재자가 베푼 ‘선심’ - 동교동 감옥
12 암살로 끝난 18년 독재 - 유신 종말
13 군부 안의 독버섯, 하나회 - 12?12군사반란
제4부 제5공화국
1 장막 뒤의 신군부 - 서울의 봄
2 참혹한 운명의 날 - 5?17쿠데타
3 기도로 보낸 날들 - 남산 지하실
4 아아, 광주여! 우리 민족의 십자가여! - 광주학살
5 고문으로 조작한 허구 - 내란음모 재판
6 지미 카터부터 미테랑까지 - 구명운동
7 감옥 속의 감옥 - 청주교도소
8 신앙과 사상의 교환 - 옥중서신
9 교도소에 넣은 600권의 책 - 감옥대학
10 독재자의 마수를 뒤로하고 - 미국 망명
11 미국에서 벌인 민주화 투쟁 - 망명활동
12 몸이 다시 무너져 내리다 - 귀국 준비
13 공항 일대를 메운 환영 인파 - 폭풍의 귀국
14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 - 개헌 투쟁
15 야수 정권의 맨얼굴 - 부천서 성고문
16 군부독재의 마지막 발호 - 4?13호헌
17 “불법감금 해제하라” - 6월항쟁
18 마침내 자유의 광장에 서다 - 이한열 장례식
제5부 광장의 시련
1 두 번째 대통령 선거 - 13대 대선
2 패배의 아픔을 딛고 - 4?26총선
3 솟구치는 통일 열기 - 공안탄압
4 평생의 소원을 이루다 - 가족법 개정
5 세 번째 도전에 뛰어들다 - 1992년 대선
6 눈물 속에 받아쓴 정계은퇴서 - 영국 생활
7 햇볕정책의 탄생 - 아태재단
8 ‘반대’에서 ‘이해’로 - 정계복귀
9 김영삼 정부의 파국 - 국민회의 창당
10 IMF 사태와 준비된 대통령 - 15대 대통령 선거
제6부 청와대의 시간
1 감격 어린 평화적 정권교체 - 대통령 당선
2 동교동보다 소박했던 청와대 살림 - 국민의 정부
3 여성과 어린이를 위해 - 금강산 관광
4 소록도 한센인들의 손을 잡다 - 국가조찬기도회
5 분단 반세기의 단절을 넘어 - 남북정상회담
6 “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 - 노벨평화상
7 UN 아동총회 임시의장 - 여성부 탄생
8 슬픔과 기쁨의 이중주 - 한?일 월드컵
제7부 동교동의 날들
1 청와대 5년과 작별하다 - 다시 동교동으로
2 다시 평양에 갈 수 있을까 - 10?4선언
3 민주주의?서민경제?남북관계의 후퇴 - 촛불시위
4 47년 동역자를 보내다 - 이별
5 홀로 다시 다녀온 평양 - 방북
저자 후기
참고문헌
연보
01. 반품기한
- 단순 변심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 신청
- 상품 불량/오배송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3개월 이내, 혹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0일 이내 반품 신청 가능
02. 반품 배송비
반품사유 | 반품 배송비 부담자 |
---|---|
단순변심 | 고객 부담이며, 최초 배송비를 포함해 왕복 배송비가 발생합니다. 또한, 도서/산간지역이거나 설치 상품을 반품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
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03. 배송상태에 따른 환불안내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
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
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