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현대 프랑스인들에게
‘과거사’란 무엇인가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분열적인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협력과 저항 깊이 읽기
과거사 청산, 우리나라의 경우와 프랑스의 경우
14명과 9만 8,000명
1948년 10월 12일, 일제강점기에 자행되었던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활동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일행각을 벌였던 경찰간부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활동 시작 이후에는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이승만의 견제와 비협조로 인해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활동 기간 동안 특위는 총 취급건수 682건 중 기소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의 성과를 내는 데 그쳤다. 체형은 고작 14명이었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1944년 6월 26일,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는 독일강점기(비시 체제 혹은 비시 프랑스. 독일과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1940년 6월부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까지, 혹은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까지) 나치에 협력했던 대독협력자 처벌을 위해 부역자 재판소Cour de Justice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최고재판소Haute cour de justice, 공민재판부chambre civique 등 새로운 재판소들을 만들어 대규모의 사법적 숙청을 행했다. 해방 직후 대독협력자 처벌을 위해 설치된 이 재판소들에서 대독협력 ‘혐의’자로 서류 검토된 이들만 무려 35만 명이었고, 실제로 유죄가 선고된 자들로 범위를 좁혀도 약 9만 8,000명에 달했다. 이들 재판소들이 설치되기 전에 이미 약식처형된 9,000명, ‘행정숙청’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징계를 받은 공무원, 공기업 직원, 군인 약 4만 2,000명, 공개삭발식이라는 수모를 겪은 여성 부역자 2만 명은 제외한 수치다.
여전히 지속되는 ‘미완’의 과거사
일제강점기가 한국 현대사에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아프고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강점기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복잡하고 분열적인 시기다. 분명 대처 방법은 달랐다. 9만 8,000명과 14명 사이의 간극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강점기’의 기억이 끊임없이 환기되고 분출되고 재분출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현 대통령의 동생의 일제강점기 관련 망언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는 2014~15년 파리 도심 한복판에서 ‘독일강점기 대독협력’을 가리키는 〈협력〉 전시회가 열려 독일강점기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여전히 지속되는 ‘미완’의 과거사다.
여러 해 전부터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대독협력과 레지스탕스 및 전후戰後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연구해온 이용우 교수(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는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독일강점기 프랑스의 협력과 레지스탕스》에서 바로 이 프랑스의 “지나가지 않은 과거” 독일강점기에 주목한다. 저자는 대독협력자와 그에 대한 처벌 문제(1부), 홀로코스트와 그에 대한 비시 정부의 협력 문제(2부), 나치 독일과 대독협력자들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 관련 문제(3부) 등을 살피면서 독일강점기 프랑스 과거 청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킨다.
나아가 이러한 연구가 우리에게도 여전한 ‘과거사 청산’ 문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과거사 청산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문제다. 물론 일제강점기 점령과 협력의 기간, 정도, 성격은 이 지구 반대편 나라와 매우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이 책이 한국 사회의 과거 청산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독협력자, 어떤 처벌을 받았고 어떻게 사면되었나
가장 수치스런 용어 ‘콜라보’
프랑스인들에게 “협력Collaboration”은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대독협력’을 의미한다. 독일강점기는 프랑스인들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암울한 시기”였다. 역사상 여러 차례 유럽 최강국이었고 100년 전만 해도 영국 다음으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나라이자 언제나 문화강국임을 자부하던 프랑스가 이웃나라에게 4~5년간 점령을 당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자 수치였다.
오늘날의 프랑스인들에게 누군가를 지칭하는 가장 수치스런 역사적·정치적 용어로 ‘콜라보collabo’가 언급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대독협력자를 가리키는 ‘협력자collaborateur’의 약칭인 ‘콜라보’가 70여 년이 지나도록 수치스런 용어로 남은 것은 그만큼 독일강점기 4년간이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인들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대독협력자, 국민부적격죄 그리고 사면법
1부 〈대독협력자: 인식, 처벌, 사면〉에서는 이러한 대독협력자들의 문제를, 강점기가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시기를 통해 살핀다. 1장 〈협력자, 반역자, 콜라보〉에서는 해당 시기에 대독협력자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당대의 중앙일간지, 시사주간지, 잡지 논설, 법령, 소설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알아본다. 2장 〈새로운 범죄의 탄생: 국민부적격죄〉에서는 해방 후 대독협력자 재판에서 ‘반역죄’나 ‘적과의 내통 죄’에 비해 훨씬 덜 알려졌지만 독특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부과된 죄목인 ‘국민부적격죄’를 분석한다. 3장 〈사법적 망각: 관용이냐, 복권이냐?〉의 주제는 사면이다. 해방 후의 대독협력자 ‘숙청’ 국면을 종결지은 “사법적 망각”에 해당하는 1951년과 1953년의 사면법 제정 과정을 다룬다.
홀로코스트, 비시 정부는 어떻게 협력했나
홀로코스트 정책 협력, 가장 끔찍한 ‘국가적 협력’
독일강점기 4년 내내 비시 정부가 추구한 대독협력 정책을 지칭하는 ‘국가적 협력’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진행되었다. 비시 정부는 ‘의무노동제’를 통해 65만 명의 프랑스 국민을 강제로 독일 공장으로 보냈고, 항독抗獨운동 탄압을 위해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고 준군사조직인 ‘프랑스 민병대’를 창설했으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 정책에 발맞추어 ‘유대인지위법’을 제정하고 ‘유대인문제총국’을 설치했다.
이러한 비시 정부의 국가적 협력이 야기한 최대의 비극이자 가장 끔찍한 측면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정책에 적극 협력한 것이었다. 비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기에 독일군의 점령을 받지 않은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독일 측에 기꺼이 내준 유일한 국가였다. 게다가 독일 측에서 요구하지 않은 16세 미만 유대인들까지 강제이송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 결과 모두 약 7만 3,000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들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비시 정부의 명령으로 프랑스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프랑스 내 수용소들에 수감되었다가 이송된 이들이었다.
비시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문제 그리고 벨디브 사건
2부 〈국가적 협력과 홀로코스트〉는 독일강점기/2차 세계대전기의 경험 가운데 1980년대 이후 특히 주목받게 된 홀로코스트와 그에 대한 비시 정부의 협력에 집중했다. 4장 〈강점기 프랑스의 유대인 박해와 홀로코스트 협력〉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시 정부의 협력뿐만 아니라 강점기 초기의 유대인지위법들에서부터 유대인문제총국, ‘아리안화’, 유대인 수용소들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박해 문제 전반을 살핀다. 5장과 6장은 벨디브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벨디브Vel’ d’Hiv 사건’은 1942년 7월 16~17일 파리 지역의 유대인 약 1만 3,000명을 검거한 사건으로, 규모도 규모지만 점령지구였음에도 게슈타포가 아니라 전적으로 프랑스 경찰력이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단연 가장 충격적이고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5장 〈반세기 만의 단죄: 비시 경찰 총수 부스케〉에서는 이 벨디브 사건의 핵심 책임자였던 비시 정부 경찰 총수 르네 부스케가 해방 후 재판에서 미온적인 판결을 받았다가 반세기 뒤에 다시 고소, 기소되는 과정을 다룬다. 6장 〈반세기 만의 사과: 벨디브 사건〉은 벨디브 사건 50주년을 계기로 공화국 프랑스가 비시 프랑스의 반反유대 범죄에 대한 책임을 공식 인정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분석한다.
레지스탕스, 신화에서 논쟁의 대상으로
저항하고 투쟁하는 프랑스도 존재했다
4년간의 독일강점기 프랑스가 오직 ‘대독협력 프랑스’, ‘콜라보 프랑스’, ‘비시 프랑스’로만 기억된다면 해방 후 프랑스의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과업도, 강점기 대독협력자들에 대한 단죄라는 과업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강점기 프랑스에는 협력자 프랑스, 체념하고 순응하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저항하고 투쟁하는 프랑스도 존재했다. 1940년 6월의 패전을 최종적인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고, 대독협력을 거부하고, 점령당국과 비시 정부에 끝까지 맞서 저항한 ‘레지스탕스’가 존재했기에, 게다가 그러한 레지스탕스가 1944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의 해방 전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기에, 프랑스는 그러한 저항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 자신 있고도 순탄하게, 그리고 외세의 개입 없이 과거와의 단절과 새 국가 건설을 수행할 수 있었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프랑스인들은 모두 몇 명이었을까? 범위나 시기 등의 문제로 인해 ‘레지스탕스’를 정의하기란 ‘대독협력’ 못지않게 어렵다. 게다가 레지스탕스가 지하활동이었다는 점에서 대독협력자보다도 인원수를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편이다. 하지만 대략 30~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해방 직후 숙청재판소들에서 서류가 검토된 대독협력‘혐의’자의 수 35만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규모다. 그러나 해방 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프랑스의 공식적인 담론이었던 ‘2차 세계대전기 전 국민의 일치단결한 레지스탕스’라는 이미지에는 현격히 못 미치는 수치였다. 이 때문인지 1970년대 초부터 이른바 ‘레지스탕스 신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20세기 말에 이르면 거꾸로 레지스탕스 ‘흑역사’라 할 만한 측면들이 부각되는 조짐을 보였다.
레지스탕스, 저항의 상징인가 기억의 조작인가
3부 〈레지스탕스: 역사, 기억, 논쟁〉은 이처럼 나치 독일과 대독협력자들에 맞서 끝까지 싸운 레지스탕스, 그리고 그러한 ‘레지스탕스 신화’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다. 7장과 8장이 독일강점기 초기의 레지스탕스를 다루었다면, 9장은 레지스탕스 내부의 배반이 의심되는 사건과 그에 대한 전후戰後 재판들을, 10장과 11장은 1990년대 들어 레지스탕스의 주요 인물들을 둘러싸고 제기된 의혹과 논쟁들을 각각 분석했다. 7장 〈레지스탕스의 탄생: ‘인류박물관’과 ‘북부해방’을 중심으로〉는 ‘인류박물관’과 ‘북부해방’을 통해 점령지구 프랑스의 초기 레지스탕스를 살핀다. 8장부터 11장까지는 ‘레지스탕스 신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기억과 논쟁을 분석한다. 8장 〈초기 레지스탕스의 비시-페탱 인식〉에서는 비시 정부가 대독협력 정부였으므로 항독행위인 레지스탕스는 응당 반反비시여야 할 텐데 초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1940~41)는 비시에 대해 모호하거나 페탱에 우호적인 성향이 꽤 컸다는 점을 밝힌다. 9장 〈칼뤼르 사건과 아르디 재판〉은 레지스탕스 자체 내의 배반 내지 실책으로 장 물랭이 체포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최대의 비극적 사건으로 손꼽히는 칼뤼르 사건을 다룬다. 10장 〈1993년의 장 물랭 사건〉은 레지스탕스 최대의 영웅인 장 물랭에 대한 ‘소련첩자설’ 제기와 이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다. 11장 〈1997년의 오브락 사건〉은 모범적 레지스탕스 부부로 꼽히던 오브락 부부가 칼뤼르 사건 전후 행했던 모호한 행적을 둘러싼 논쟁을 살핀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용우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여러 해 전부터 독일강점기 프랑스(1940~1944)의 대독협력과 레지스탕스 및 전후戰後의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해 십수 편의 논문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 《20세기 프랑스 대파업 연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가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제1부 대독협력자: 인식, 처벌, 사면
1장 협력자, 반역자, 콜라보
2장 새로운 범죄의 탄생: 국민부적격죄
3장 사법적 망각: 관용이냐, 복권이냐?
제2부 국가적 협력과 홀로코스트
4장 강점기 프랑스의 유대인 박해와 홀로코스트 협력
5장 반세기 만의 단죄: 비시 경찰 총수 부스케
6장 반세기 만의 사과: 벨디브 사건
제3부 레지스탕스: 역사, 기억, 논쟁
7장 레지스탕스의 탄생: ‘인류박물관’과 ‘북부해방’을 중심으로
8장 초기 레지스탕스의 비시-페탱 인식
9장 칼뤼르 사건과 아르디 재판
10장 1993년의 장 물랭 사건
11장 1997년의 오브락 사건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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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랑스인들에게
‘과거사’란 무엇인가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분열적인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협력과 저항 깊이 읽기
과거사 청산, 우리나라의 경우와 프랑스의 경우
14명과 9만 8,000명
1948년 10월 12일, 일제강점기에 자행되었던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활동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일행각을 벌였던 경찰간부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활동 시작 이후에는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이승만의 견제와 비협조로 인해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활동 기간 동안 특위는 총 취급건수 682건 중 기소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의 성과를 내는 데 그쳤다. 체형은 고작 14명이었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1944년 6월 26일,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는 독일강점기(비시 체제 혹은 비시 프랑스. 독일과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1940년 6월부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까지, 혹은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까지) 나치에 협력했던 대독협력자 처벌을 위해 부역자 재판소Cour de Justice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최고재판소Haute cour de justice, 공민재판부chambre civique 등 새로운 재판소들을 만들어 대규모의 사법적 숙청을 행했다. 해방 직후 대독협력자 처벌을 위해 설치된 이 재판소들에서 대독협력 ‘혐의’자로 서류 검토된 이들만 무려 35만 명이었고, 실제로 유죄가 선고된 자들로 범위를 좁혀도 약 9만 8,000명에 달했다. 이들 재판소들이 설치되기 전에 이미 약식처형된 9,000명, ‘행정숙청’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징계를 받은 공무원, 공기업 직원, 군인 약 4만 2,000명, 공개삭발식이라는 수모를 겪은 여성 부역자 2만 명은 제외한 수치다.
여전히 지속되는 ‘미완’의 과거사
일제강점기가 한국 현대사에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아프고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강점기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복잡하고 분열적인 시기다. 분명 대처 방법은 달랐다. 9만 8,000명과 14명 사이의 간극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강점기’의 기억이 끊임없이 환기되고 분출되고 재분출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현 대통령의 동생의 일제강점기 관련 망언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는 2014~15년 파리 도심 한복판에서 ‘독일강점기 대독협력’을 가리키는 〈협력〉 전시회가 열려 독일강점기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여전히 지속되는 ‘미완’의 과거사다.
여러 해 전부터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대독협력과 레지스탕스 및 전후戰後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연구해온 이용우 교수(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는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독일강점기 프랑스의 협력과 레지스탕스》에서 바로 이 프랑스의 “지나가지 않은 과거” 독일강점기에 주목한다. 저자는 대독협력자와 그에 대한 처벌 문제(1부), 홀로코스트와 그에 대한 비시 정부의 협력 문제(2부), 나치 독일과 대독협력자들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 관련 문제(3부) 등을 살피면서 독일강점기 프랑스 과거 청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킨다.
나아가 이러한 연구가 우리에게도 여전한 ‘과거사 청산’ 문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과거사 청산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문제다. 물론 일제강점기 점령과 협력의 기간, 정도, 성격은 이 지구 반대편 나라와 매우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이 책이 한국 사회의 과거 청산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독협력자, 어떤 처벌을 받았고 어떻게 사면되었나
가장 수치스런 용어 ‘콜라보’
프랑스인들에게 “협력Collaboration”은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대독협력’을 의미한다. 독일강점기는 프랑스인들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암울한 시기”였다. 역사상 여러 차례 유럽 최강국이었고 100년 전만 해도 영국 다음으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나라이자 언제나 문화강국임을 자부하던 프랑스가 이웃나라에게 4~5년간 점령을 당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자 수치였다.
오늘날의 프랑스인들에게 누군가를 지칭하는 가장 수치스런 역사적·정치적 용어로 ‘콜라보collabo’가 언급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대독협력자를 가리키는 ‘협력자collaborateur’의 약칭인 ‘콜라보’가 70여 년이 지나도록 수치스런 용어로 남은 것은 그만큼 독일강점기 4년간이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인들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대독협력자, 국민부적격죄 그리고 사면법
1부 〈대독협력자: 인식, 처벌, 사면〉에서는 이러한 대독협력자들의 문제를, 강점기가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시기를 통해 살핀다. 1장 〈협력자, 반역자, 콜라보〉에서는 해당 시기에 대독협력자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당대의 중앙일간지, 시사주간지, 잡지 논설, 법령, 소설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알아본다. 2장 〈새로운 범죄의 탄생: 국민부적격죄〉에서는 해방 후 대독협력자 재판에서 ‘반역죄’나 ‘적과의 내통 죄’에 비해 훨씬 덜 알려졌지만 독특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부과된 죄목인 ‘국민부적격죄’를 분석한다. 3장 〈사법적 망각: 관용이냐, 복권이냐?〉의 주제는 사면이다. 해방 후의 대독협력자 ‘숙청’ 국면을 종결지은 “사법적 망각”에 해당하는 1951년과 1953년의 사면법 제정 과정을 다룬다.
홀로코스트, 비시 정부는 어떻게 협력했나
홀로코스트 정책 협력, 가장 끔찍한 ‘국가적 협력’
독일강점기 4년 내내 비시 정부가 추구한 대독협력 정책을 지칭하는 ‘국가적 협력’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진행되었다. 비시 정부는 ‘의무노동제’를 통해 65만 명의 프랑스 국민을 강제로 독일 공장으로 보냈고, 항독抗獨운동 탄압을 위해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고 준군사조직인 ‘프랑스 민병대’를 창설했으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 정책에 발맞추어 ‘유대인지위법’을 제정하고 ‘유대인문제총국’을 설치했다.
이러한 비시 정부의 국가적 협력이 야기한 최대의 비극이자 가장 끔찍한 측면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정책에 적극 협력한 것이었다. 비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기에 독일군의 점령을 받지 않은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독일 측에 기꺼이 내준 유일한 국가였다. 게다가 독일 측에서 요구하지 않은 16세 미만 유대인들까지 강제이송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 결과 모두 약 7만 3,000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들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비시 정부의 명령으로 프랑스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프랑스 내 수용소들에 수감되었다가 이송된 이들이었다.
비시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문제 그리고 벨디브 사건
2부 〈국가적 협력과 홀로코스트〉는 독일강점기/2차 세계대전기의 경험 가운데 1980년대 이후 특히 주목받게 된 홀로코스트와 그에 대한 비시 정부의 협력에 집중했다. 4장 〈강점기 프랑스의 유대인 박해와 홀로코스트 협력〉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시 정부의 협력뿐만 아니라 강점기 초기의 유대인지위법들에서부터 유대인문제총국, ‘아리안화’, 유대인 수용소들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박해 문제 전반을 살핀다. 5장과 6장은 벨디브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벨디브Vel’ d’Hiv 사건’은 1942년 7월 16~17일 파리 지역의 유대인 약 1만 3,000명을 검거한 사건으로, 규모도 규모지만 점령지구였음에도 게슈타포가 아니라 전적으로 프랑스 경찰력이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단연 가장 충격적이고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5장 〈반세기 만의 단죄: 비시 경찰 총수 부스케〉에서는 이 벨디브 사건의 핵심 책임자였던 비시 정부 경찰 총수 르네 부스케가 해방 후 재판에서 미온적인 판결을 받았다가 반세기 뒤에 다시 고소, 기소되는 과정을 다룬다. 6장 〈반세기 만의 사과: 벨디브 사건〉은 벨디브 사건 50주년을 계기로 공화국 프랑스가 비시 프랑스의 반反유대 범죄에 대한 책임을 공식 인정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분석한다.
레지스탕스, 신화에서 논쟁의 대상으로
저항하고 투쟁하는 프랑스도 존재했다
4년간의 독일강점기 프랑스가 오직 ‘대독협력 프랑스’, ‘콜라보 프랑스’, ‘비시 프랑스’로만 기억된다면 해방 후 프랑스의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과업도, 강점기 대독협력자들에 대한 단죄라는 과업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강점기 프랑스에는 협력자 프랑스, 체념하고 순응하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저항하고 투쟁하는 프랑스도 존재했다. 1940년 6월의 패전을 최종적인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고, 대독협력을 거부하고, 점령당국과 비시 정부에 끝까지 맞서 저항한 ‘레지스탕스’가 존재했기에, 게다가 그러한 레지스탕스가 1944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의 해방 전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기에, 프랑스는 그러한 저항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 자신 있고도 순탄하게, 그리고 외세의 개입 없이 과거와의 단절과 새 국가 건설을 수행할 수 있었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프랑스인들은 모두 몇 명이었을까? 범위나 시기 등의 문제로 인해 ‘레지스탕스’를 정의하기란 ‘대독협력’ 못지않게 어렵다. 게다가 레지스탕스가 지하활동이었다는 점에서 대독협력자보다도 인원수를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편이다. 하지만 대략 30~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해방 직후 숙청재판소들에서 서류가 검토된 대독협력‘혐의’자의 수 35만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규모다. 그러나 해방 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프랑스의 공식적인 담론이었던 ‘2차 세계대전기 전 국민의 일치단결한 레지스탕스’라는 이미지에는 현격히 못 미치는 수치였다. 이 때문인지 1970년대 초부터 이른바 ‘레지스탕스 신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20세기 말에 이르면 거꾸로 레지스탕스 ‘흑역사’라 할 만한 측면들이 부각되는 조짐을 보였다.
레지스탕스, 저항의 상징인가 기억의 조작인가
3부 〈레지스탕스: 역사, 기억, 논쟁〉은 이처럼 나치 독일과 대독협력자들에 맞서 끝까지 싸운 레지스탕스, 그리고 그러한 ‘레지스탕스 신화’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다. 7장과 8장이 독일강점기 초기의 레지스탕스를 다루었다면, 9장은 레지스탕스 내부의 배반이 의심되는 사건과 그에 대한 전후戰後 재판들을, 10장과 11장은 1990년대 들어 레지스탕스의 주요 인물들을 둘러싸고 제기된 의혹과 논쟁들을 각각 분석했다. 7장 〈레지스탕스의 탄생: ‘인류박물관’과 ‘북부해방’을 중심으로〉는 ‘인류박물관’과 ‘북부해방’을 통해 점령지구 프랑스의 초기 레지스탕스를 살핀다. 8장부터 11장까지는 ‘레지스탕스 신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기억과 논쟁을 분석한다. 8장 〈초기 레지스탕스의 비시-페탱 인식〉에서는 비시 정부가 대독협력 정부였으므로 항독행위인 레지스탕스는 응당 반反비시여야 할 텐데 초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1940~41)는 비시에 대해 모호하거나 페탱에 우호적인 성향이 꽤 컸다는 점을 밝힌다. 9장 〈칼뤼르 사건과 아르디 재판〉은 레지스탕스 자체 내의 배반 내지 실책으로 장 물랭이 체포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최대의 비극적 사건으로 손꼽히는 칼뤼르 사건을 다룬다. 10장 〈1993년의 장 물랭 사건〉은 레지스탕스 최대의 영웅인 장 물랭에 대한 ‘소련첩자설’ 제기와 이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다. 11장 〈1997년의 오브락 사건〉은 모범적 레지스탕스 부부로 꼽히던 오브락 부부가 칼뤼르 사건 전후 행했던 모호한 행적을 둘러싼 논쟁을 살핀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용우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여러 해 전부터 독일강점기 프랑스(1940~1944)의 대독협력과 레지스탕스 및 전후戰後의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해 십수 편의 논문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 《20세기 프랑스 대파업 연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가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제1부 대독협력자: 인식, 처벌, 사면
1장 협력자, 반역자, 콜라보
2장 새로운 범죄의 탄생: 국민부적격죄
3장 사법적 망각: 관용이냐, 복권이냐?
제2부 국가적 협력과 홀로코스트
4장 강점기 프랑스의 유대인 박해와 홀로코스트 협력
5장 반세기 만의 단죄: 비시 경찰 총수 부스케
6장 반세기 만의 사과: 벨디브 사건
제3부 레지스탕스: 역사, 기억, 논쟁
7장 레지스탕스의 탄생: ‘인류박물관’과 ‘북부해방’을 중심으로
8장 초기 레지스탕스의 비시-페탱 인식
9장 칼뤼르 사건과 아르디 재판
10장 1993년의 장 물랭 사건
11장 1997년의 오브락 사건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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