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재야의 선비 안정복, 역사에 탐닉하다
안정복의 집안은 당시 조정에서 세력을 잃었던 남인南人이었기에 관직에 나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안정복은 좌절하지 않았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여유로운 시간에 그는 모든 역량을 학문과 저술에 집중한다.
안정복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경학經學과 역사歷史, 시詩나 예禮 이외에 음양陰陽·성력星曆·의약醫藥·복서卜筮에 대한 서책 및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兵書, 불가佛家·도가道家의 서책, 패승稗乘 패관이 기록한 역사물이나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글자가 생긴 이래 나온 문헌이란 문헌은 두루 다 구해 읽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15세 무렵부터 이미 박식하다고 소문이 난다.
그중에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아 어릴 때 이미 역대 제왕의 계통을 그린「치통도治統圖」와 역대 성현의 계통을 그린「도통도道統圖」를 직접 만들며 역사 인식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심이 결국 『동사강목』의 저술로 이어진다.
순암이 『동사강목』을 편찬한 시기는 45세 때인 1756년영조32부터 1759년경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간단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로 계속 교정과 수정을 반복한다. 1778년이 되어서야 정리된 필사본이 완성된다. 이는 워낙 분량이 방대하다 보니 종이가 많이 필요한데 막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여유가 없다 보니 늦어진 것이다. 그러다 정조 임금과의 만남이 다시 수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궁 시절에 정조는『동사강목』에 대해 듣고 순암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안정복은 1781년에 필사본을 다시 수정하여 정조에게 올렸고, 17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 우리가 보는 형태의 『동사강목』이 완성된다.
『동사강목』은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이다. 안정복은 이어서 바로 『열조통기列朝通紀』 편찬을 시작한다. 이 책은 『동사강목』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순암이 남긴 귀중한 역사서 중 하나이다. 총 25권인 『열조통기』는 실록 같은 편년체 역사서로 조선 건국에서 영조 대까지를 다룬 책이다. 그러나 편년체 방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주요한 사건을 연도별로 편집하면서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있으면 비록 후대의 것이라도 함께 수록하여 이해를 도왔다. 『동사강목』과 『열조통기』, 두 책의 저술을 통해 안정복은 단군조선에서부터 자신이 사는 당시까지 모든 시기의 우리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왜 역사를 기록하는가? 안정복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천하에 하루라도 역사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어지러운 때에도 역사 기록을 멈춘 적이 없었다. 춘추 시대의 여러 나라나 동진東晉과 서진西晉 사이의 여러 나라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혼란기에도 그랬으니, 평상시야 어땠겠는가? (중략) 그런데 후세에 야사를 금지하면서부터 수십 년만 지나도 선행과 악행의 증거가 모두 없어져 악을 행하는 자가 꺼리는 것이 없게 되고,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君子에게는 불행이요, 소인小人에게는 다행이란 것이다. 『동사강목』 제13하
안정복은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선행과 악행의 증거를 남기고 악을 행하는 자들과 난신적자들이 꺼리고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안정복의 인식을 ‘떠든 아이 효과’로 설명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떠들던 아이들도 반장이 나와서 이름을 적으면 조용해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름을 적는 행위만으로도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름을 적어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서 역사기록의 효용을 찾는 것을 동아시아 유가의 전통으로 본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전통이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역사’라는 말은 ‘기록 행위’와 ‘역사 서술’의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고 하면서 실록을 마치 근대 역사 서술의 결과물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 이 때문에 시작된다고 말한다. 기록 행위는 어떤 매체나 방식을 통해 경험을 적어서 남기는 것이고, 역사 서술은 그 기록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일기 같은 기록 행위의 결과인 실록은 ‘한국사 교과서’와 같은 역사 서술의 결과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사강목』은 어디에 해당할까?
『삼국사기』는 소략하면서 사실과 다르고, 『고려사』는 번잡하면서 요점이 적고, 『동국통감』은 범례가 많이 어그러졌고, 『여사제강』과 『여사회강』은 필법筆法이 더러 어긋난 경우도 있다. 오류가 그대로 답습 된 것은 모든 책이 비슷하였다. 내가 그것을 읽고 개탄스러워 마침내 바로잡을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 중에서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널리 취하여 주자朱子가 만든 원칙과 방법에 따라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동사강목』 「서序」
안정복은 이전에 나온 역사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주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면서 세운 역사서술의 원칙과 방법에 따라 새로운 역사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치통감강목』은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史書이면서, 주자가 새롭게 창안한 ‘강목체’를 사용한 사서이기도 하다. ‘강목체’ 사서는 간추린 핵심 내용 또는 해당 사실의 제목인 강, 강의 원인과 결과 및 정황 설명인 목, 그리고 편찬자의 고증이나 평가를 기록한 사론史論으로 구성된다. 주자는 강목체로 역사기록의 큰 뼈대를 만들고, 18범주의 [범례]를 통해 세부적인 서술의 원칙을 규정하였다. 이처럼 강과 목, 범례와 본문 기사, 강목과 사론을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사실대로의 기술과 역사적 평가라는 역사학의 과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저자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저술하면서 큰 틀은 주자의 방식을 따르되 우리 역사에 맞는 새로운 역사서술의 체계를 세웠다고 하고, 『동사강목』 [범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동사강목』만의 역사서술 원칙과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동사강목』으로 다시 쓴 우리 역사
2부에서 저자는 『동사강목』의 내용을 안정복 이전의 역사 인식이나 현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 비교하면서 안정복의 역사 인식이 드러내는 특별한 성격과 의의를 보여준다. 그중 우리 역사의 기원, 즉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단군이 먼저 나와 나라를 다스리고, 기자가 처음으로 문물을 흥성하게 하였으니, 각각 1천여 년 동안의 신묘하고 성스러운 정치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데, 『동국통감』에서 “역사서에 전하지 않아 외기에 편집해 실었다.”고 하였다. (중략)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실이 사라지기는 하였으나, 어찌 이런 경우와 동일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동사강목』 [범례]
안정복은 『동국통감』에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을 외기에 실어 역사가 아닌 전설이나 신화 성격의 이야기로 치부한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우리 역사의 가장 처음에 단군과 기자의 사적을 기록했다. 저자는 안정복의 이러한 역사 인식을 두고, 그가 중국에서 온 기자가 세웠다는 이유로 기자 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안정복은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이 역사적으로 명백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시대가 앞서는 단군보다 기자를 먼저 서술하고,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을 매우 신중하게 다루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안정복에게서 합리적인 역사학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하면서도, 나름의 역사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는 단군 관련 신화와 전설을 누락시킨 것에 아쉬움을 표한다.
저자는 같은 방식으로 ‘민족’, ‘정치’, ‘민생’, ‘사상’, ‘국제’ 등 5개 주제와 관련된 『동사강목』의 기록을 분석하여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제시되는 안정복의 역사 인식을 꼼꼼히 살피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백성들에게는 너그럽게 권력을 잡은 신하들에게는 엄격하게 법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 주장,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 허황된 미신과 소문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 경계한 것, 적에게 대항할 힘을 갖추지 못한 채 주장하는 화친이 결국 농락과 능멸을 불러온다고 한 주장 등, 예리하고 공정한 시선으로 각종 역사적 사건과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낸 안정복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펼처보기
▣ 작가 소개
저자 : 오항녕
고려대학교에서 조선시대 사관 제도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공부하고 있으며, 인간의 기억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고전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조선시대 학자의 문집, 추안推案 등 역사 기록을 번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밀양 인디언, 역사가 말할 때』,『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朝鮮初期 性理學과 歷史學 - 기억의 복원, 좌표의 성찰』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대학연의』, 『사통』, 『영종대왕실록청의궤』, 『문곡집』, 『존재집』 등이 있다.
감수 : 김건우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교육원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문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근대 공문서의 탄생』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승정원일기』, 『존재집』, 『문곡집』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_역사 공부 안 해도 된다, 다만
동사강목을 읽기에 앞서_역사가 안정복
제1부 조선 역사학의 저력을 보여준 책, 『동사강목』
제1장 역사, 기록의 힘
- 『동사강목』 서문
- 역사 편찬에서 중요한 세 가지
제2장 강목, 기록의 방식
- 역사학도 역사성이 있다
- 『자치통감강목』에 따라 범례를 만들다
제2부 『동사강목』으로 다시 보는 우리 역사
제1장 민족
- 이 땅의 역사, 기자 조선
- 단군 조선에 대한 인식
- 기자의 8조 금법
- 단군 이후 역사 전개에 대한 견해
제2장 정치
- 정치 활동에 주목하다
- 무리한 궁궐 공사를 비판하다
-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조짐이 있다
- 환관의 폐단을 지적하다
- 형정刑政의 운용을 말하다
- 국왕과 세자의 관계를 헤아리다
제3장 민생
- 경제 정책을 논하다
- 복지 제도를 살피다
- 나라는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
- 노비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
제4장 사상
-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 불교의 폐해를 밝히다
제5장 국제
- 대외 관계 서술의 원칙
- 주체적 사대가 가능하다
- 능동적 외교 전략의 조건
참고 자료
사진 자료 제공처
재야의 선비 안정복, 역사에 탐닉하다
안정복의 집안은 당시 조정에서 세력을 잃었던 남인南人이었기에 관직에 나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안정복은 좌절하지 않았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여유로운 시간에 그는 모든 역량을 학문과 저술에 집중한다.
안정복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경학經學과 역사歷史, 시詩나 예禮 이외에 음양陰陽·성력星曆·의약醫藥·복서卜筮에 대한 서책 및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兵書, 불가佛家·도가道家의 서책, 패승稗乘 패관이 기록한 역사물이나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글자가 생긴 이래 나온 문헌이란 문헌은 두루 다 구해 읽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15세 무렵부터 이미 박식하다고 소문이 난다.
그중에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아 어릴 때 이미 역대 제왕의 계통을 그린「치통도治統圖」와 역대 성현의 계통을 그린「도통도道統圖」를 직접 만들며 역사 인식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심이 결국 『동사강목』의 저술로 이어진다.
순암이 『동사강목』을 편찬한 시기는 45세 때인 1756년영조32부터 1759년경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간단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로 계속 교정과 수정을 반복한다. 1778년이 되어서야 정리된 필사본이 완성된다. 이는 워낙 분량이 방대하다 보니 종이가 많이 필요한데 막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여유가 없다 보니 늦어진 것이다. 그러다 정조 임금과의 만남이 다시 수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궁 시절에 정조는『동사강목』에 대해 듣고 순암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안정복은 1781년에 필사본을 다시 수정하여 정조에게 올렸고, 17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 우리가 보는 형태의 『동사강목』이 완성된다.
『동사강목』은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이다. 안정복은 이어서 바로 『열조통기列朝通紀』 편찬을 시작한다. 이 책은 『동사강목』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순암이 남긴 귀중한 역사서 중 하나이다. 총 25권인 『열조통기』는 실록 같은 편년체 역사서로 조선 건국에서 영조 대까지를 다룬 책이다. 그러나 편년체 방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주요한 사건을 연도별로 편집하면서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있으면 비록 후대의 것이라도 함께 수록하여 이해를 도왔다. 『동사강목』과 『열조통기』, 두 책의 저술을 통해 안정복은 단군조선에서부터 자신이 사는 당시까지 모든 시기의 우리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왜 역사를 기록하는가? 안정복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천하에 하루라도 역사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어지러운 때에도 역사 기록을 멈춘 적이 없었다. 춘추 시대의 여러 나라나 동진東晉과 서진西晉 사이의 여러 나라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혼란기에도 그랬으니, 평상시야 어땠겠는가? (중략) 그런데 후세에 야사를 금지하면서부터 수십 년만 지나도 선행과 악행의 증거가 모두 없어져 악을 행하는 자가 꺼리는 것이 없게 되고,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君子에게는 불행이요, 소인小人에게는 다행이란 것이다. 『동사강목』 제13하
안정복은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선행과 악행의 증거를 남기고 악을 행하는 자들과 난신적자들이 꺼리고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안정복의 인식을 ‘떠든 아이 효과’로 설명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떠들던 아이들도 반장이 나와서 이름을 적으면 조용해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름을 적는 행위만으로도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름을 적어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서 역사기록의 효용을 찾는 것을 동아시아 유가의 전통으로 본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전통이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역사’라는 말은 ‘기록 행위’와 ‘역사 서술’의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고 하면서 실록을 마치 근대 역사 서술의 결과물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 이 때문에 시작된다고 말한다. 기록 행위는 어떤 매체나 방식을 통해 경험을 적어서 남기는 것이고, 역사 서술은 그 기록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일기 같은 기록 행위의 결과인 실록은 ‘한국사 교과서’와 같은 역사 서술의 결과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사강목』은 어디에 해당할까?
『삼국사기』는 소략하면서 사실과 다르고, 『고려사』는 번잡하면서 요점이 적고, 『동국통감』은 범례가 많이 어그러졌고, 『여사제강』과 『여사회강』은 필법筆法이 더러 어긋난 경우도 있다. 오류가 그대로 답습 된 것은 모든 책이 비슷하였다. 내가 그것을 읽고 개탄스러워 마침내 바로잡을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 중에서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널리 취하여 주자朱子가 만든 원칙과 방법에 따라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동사강목』 「서序」
안정복은 이전에 나온 역사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주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면서 세운 역사서술의 원칙과 방법에 따라 새로운 역사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치통감강목』은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史書이면서, 주자가 새롭게 창안한 ‘강목체’를 사용한 사서이기도 하다. ‘강목체’ 사서는 간추린 핵심 내용 또는 해당 사실의 제목인 강, 강의 원인과 결과 및 정황 설명인 목, 그리고 편찬자의 고증이나 평가를 기록한 사론史論으로 구성된다. 주자는 강목체로 역사기록의 큰 뼈대를 만들고, 18범주의 [범례]를 통해 세부적인 서술의 원칙을 규정하였다. 이처럼 강과 목, 범례와 본문 기사, 강목과 사론을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사실대로의 기술과 역사적 평가라는 역사학의 과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저자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저술하면서 큰 틀은 주자의 방식을 따르되 우리 역사에 맞는 새로운 역사서술의 체계를 세웠다고 하고, 『동사강목』 [범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동사강목』만의 역사서술 원칙과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동사강목』으로 다시 쓴 우리 역사
2부에서 저자는 『동사강목』의 내용을 안정복 이전의 역사 인식이나 현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 비교하면서 안정복의 역사 인식이 드러내는 특별한 성격과 의의를 보여준다. 그중 우리 역사의 기원, 즉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단군이 먼저 나와 나라를 다스리고, 기자가 처음으로 문물을 흥성하게 하였으니, 각각 1천여 년 동안의 신묘하고 성스러운 정치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데, 『동국통감』에서 “역사서에 전하지 않아 외기에 편집해 실었다.”고 하였다. (중략)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실이 사라지기는 하였으나, 어찌 이런 경우와 동일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동사강목』 [범례]
안정복은 『동국통감』에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을 외기에 실어 역사가 아닌 전설이나 신화 성격의 이야기로 치부한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우리 역사의 가장 처음에 단군과 기자의 사적을 기록했다. 저자는 안정복의 이러한 역사 인식을 두고, 그가 중국에서 온 기자가 세웠다는 이유로 기자 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안정복은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이 역사적으로 명백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시대가 앞서는 단군보다 기자를 먼저 서술하고,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을 매우 신중하게 다루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안정복에게서 합리적인 역사학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하면서도, 나름의 역사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는 단군 관련 신화와 전설을 누락시킨 것에 아쉬움을 표한다.
저자는 같은 방식으로 ‘민족’, ‘정치’, ‘민생’, ‘사상’, ‘국제’ 등 5개 주제와 관련된 『동사강목』의 기록을 분석하여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제시되는 안정복의 역사 인식을 꼼꼼히 살피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백성들에게는 너그럽게 권력을 잡은 신하들에게는 엄격하게 법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 주장,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 허황된 미신과 소문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 경계한 것, 적에게 대항할 힘을 갖추지 못한 채 주장하는 화친이 결국 농락과 능멸을 불러온다고 한 주장 등, 예리하고 공정한 시선으로 각종 역사적 사건과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낸 안정복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펼처보기
▣ 작가 소개
저자 : 오항녕
고려대학교에서 조선시대 사관 제도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공부하고 있으며, 인간의 기억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고전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조선시대 학자의 문집, 추안推案 등 역사 기록을 번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밀양 인디언, 역사가 말할 때』,『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朝鮮初期 性理學과 歷史學 - 기억의 복원, 좌표의 성찰』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대학연의』, 『사통』, 『영종대왕실록청의궤』, 『문곡집』, 『존재집』 등이 있다.
감수 : 김건우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교육원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문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근대 공문서의 탄생』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승정원일기』, 『존재집』, 『문곡집』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_역사 공부 안 해도 된다, 다만
동사강목을 읽기에 앞서_역사가 안정복
제1부 조선 역사학의 저력을 보여준 책, 『동사강목』
제1장 역사, 기록의 힘
- 『동사강목』 서문
- 역사 편찬에서 중요한 세 가지
제2장 강목, 기록의 방식
- 역사학도 역사성이 있다
- 『자치통감강목』에 따라 범례를 만들다
제2부 『동사강목』으로 다시 보는 우리 역사
제1장 민족
- 이 땅의 역사, 기자 조선
- 단군 조선에 대한 인식
- 기자의 8조 금법
- 단군 이후 역사 전개에 대한 견해
제2장 정치
- 정치 활동에 주목하다
- 무리한 궁궐 공사를 비판하다
-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조짐이 있다
- 환관의 폐단을 지적하다
- 형정刑政의 운용을 말하다
- 국왕과 세자의 관계를 헤아리다
제3장 민생
- 경제 정책을 논하다
- 복지 제도를 살피다
- 나라는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
- 노비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
제4장 사상
-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 불교의 폐해를 밝히다
제5장 국제
- 대외 관계 서술의 원칙
- 주체적 사대가 가능하다
- 능동적 외교 전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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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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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