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1. 제주에서 바라본 17세기 동아시아의 바다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예리하게 포착한 귀중한 사료
지금 우리는 언제든 국경을 건널 수 있고 심지어 대륙과 바다를 조망할 수도 있지만, 17세기 조선 그것도 제주라는 섬에 머물러야 했던 어느 학자의 눈에 비친 바다는 건널 수도 내다볼 수도 없는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조선 숙종 대에 활동했던 관료문인 송정규(宋廷奎, 1656~1710)가 제주목사 시절에 제주에서 있었던 표류 사건들을 정리한 책 《해외문견록》은 바깥세상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조선의 관료가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쓴 치열한 기록의 산물이다. 《해외문견록》은 1704년부터 1706년까지 송정규가 제주목사로 지내며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과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으므로 ‘표해록’ 장르에 속하지만, 다른 표류 기록들이 단순히 이국 취향이나 기록 보관을 위해 작성한 것과 달리 실리라는 뚜렷한 목적을 위해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송정규는 동아시아 일대의 사회·경제 제도, 선박과 무기의 제작 방식 등 외지의 문물을 배우려는 의지를 이 책에서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등장하여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자리 잡아가던 때로, 청 조정은 왜구의 소요를 통제하기 위해 ‘천계령’을 내려 해안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취했다. 조선 역시 자유로울 수 없어 바다를 통한 교역이 매우 위축되어 있는 상태에서 외부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으며, 성리학을 중심으로 관념적인 소중화론이 팽배하여 외부의 사정을 무시하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세태 속에 다가올 ‘해양의 시대’를 내다보고 대비하기 위해 송정규는 바깥세상에 대한 기록을 하나하나 모은 것이다.
《해외문견록》에는 1611∼1706년에 발생한 표류사건 9건, 15세기 최부의 ‘표해록’ 요약, 제주의 풍토기에 대한 기록 6건 등 총 16건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 복사본을 보관 중이며 원본은 일본 덴리(天理)대학 이마니시 문고가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별도포에서 왜선을 공격하다〉, 〈서양인 하멜의 표류〉, 〈중국배의 구조〉,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 학술적 의미가 크다. 또한 송정규는 중국에서 의주까지 6개월간의 험난한 중국 탐방기를 담은 최부의 《표해록》을 요약해 기록했는데, 《해외문견록-제주목사 송정규, 바다 건너 경이로운 이야기를 기록하다》에서는 내용에 따라 1부에는 표류 사건을, 2부에는 표해록 요약본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순치 연간 이후 표류한 상인들〉에서는 제주에 표류한 쑤저우 상인 묘진실이 중국 내륙에서 쑤저우, 베트남, 일본으로 연결되는 ‘사각 무역 루트’를 소개하기도 하고, 1678년 청의 천계령이 풀린 뒤 정식으로 상행위 허가를 받고 바다에 나왔다가 표류한 상인 고여상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송정규는 특히 1705년 표류한 대만 상인을 심문하며 동아시아의 바닷길에 대해 상세히 물었는데 어떠한 물품이 어디에서 어디로 유통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지 기록했다. 〈안남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에서는 베트남의 거리 풍경과 생활 풍습을 세밀화처럼 묘사하는 가운데 중국 상인들이 양잠업의 발달로 비단보다 모시가 더 비싸다는 점을 이용해 이문을 취하고 있는 정세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당대 동아시아 해역의 상권과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록들은 근대 이전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왕성한 해상무역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최근 동양사학계에서 부각되는 ‘아시아 교역권론’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송정규는 비록 조선은 그 교역권에서 멀어져 있었지만 송정규는 교역 시장에 뛰어들어야 함을 내비친다. 〈서양인 하멜의 표류〉에서 서양에서는 어린아이들도 동서양의 무역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천하에 이와 같은 풍속의 사람들이 있다니 참으로 대단하도다!” 하고 감탄하고 있다.
강희제 24년(1685, 숙종11)에 천하가 태평해졌기에 육부(六府)에서 의논해 황제께 주청하여, 바다에 인접해 있는 여러 나라에 대해 비로소 통상을 허락하고 모든 항구마다 관소를 두어 세금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세은(稅銀) 60여 냥을 바치고 인표(印表)를 받아 주단과 흰 실, 담요, 약재 등을 싣고 일본에 가서 팔고자 이번 달 14일에 오송구(吳松口)에서 출항했습니다.
-〈순치 연간 이후 표류한 상인들〉(43쪽) 중에서
(안남에서는) 삼베와 모시가 생산되지는 않으나, 모시풀은 산 가까이 습하지 않은 땅에서 자라 1년이면 여섯 차례 거둘 수 있었다. 뱃사람들은 그것으로 밧줄을 만드는데, 그곳 사람들은 길쌈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중국 상인들이 모시 한 필로 화단(花段) 두 필을 바꾸어 갔다. 모시의 귀함이 이와 같았다.
-〈안남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54쪽) 중에서
송정규는 해상무역에서 나아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외국 문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에 이르렀다. 〈중국배의 구조〉에서는 중국배에 대한 정보를 재료와 수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고 “중국배의 법식을 두루 물어 여기에 기록해두니, 앞으로 일을 맡은 자들이 따라 만들 수 있도록 대비하려 함이다.” 하고 후대에게 당부하며 글을 맺는다. 원양 항해가 가능한 중국 배의 건조 기술을 참고해 조선의 선박 건조 기술을 발전시켜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송정규는 해외교역뿐 아니라 중국의 구휼제도·도량형·조세제도 등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살폈고(〈산동에서 표류해 온 상인〉), 제주 관아에 보관하고 있던 하멜 일행의 무기를 정밀하게 실측한 뒤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다(〈서양인 하멜의 표류〉). 중국 강남에서 의주까지 6개월의 탐방기를 통해 중국의 지리와 문화를 상세하게 담은 2부 〈표해록 약절-최부의 험난한 중국 탐방기〉 역시, 중국의 정세와 풍물에 촉각을 세웠던 송정규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2. 제주목사 송정규, 실리적이고 경세적인 관료문인의 시선
《해외문견록》을 남긴 송정규의 자는 문경(文卿)·유문(幼文), 호는 이호(梨湖)·우수(迂?)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는 조광조와 정치적 견해를 같이했던 5대조인 송호지(宋好智, 1474~1526)부터 소북계 정치인이었던 증조부 송일(宋馹, 1557~1640), 경기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송시길(宋時吉, 1597~1656)로 이어지는 명망 있는 가문의 후예다. 송정규는 1688년 황해도 장연 현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벼슬에 나서서 2년 뒤 사간원 정원을, 1694년 시강원 사서를 지내다가 여러 관직을 거쳐 1701년 고부단사로 연경에 다녀왔고, 몇몇 고을의 지방관을 거쳐 1704년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송정규는 평생 관료로 지냈으나 학문을 향한 열정이 매우 커서 제자백가를 섭렵함은 물론 실용적 학문과 산학, 의약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송정규는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으나 제주도의 현지 사정을 존중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문화를 조성하고자 했으며, 목장과 보를 확충해 군비를 갖추고자 했다. 종조카 송질(宋瓆)은 〈행장(行狀)〉에서 송정규의 치적을 정리하며 그가 탐라지와 탐라지도를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일반적인 지리지로 추정되는 탐라지는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해외문견록》이 탐라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리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한중일을 누비며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던 조선 초기와 달리, 송정규가 살았던 17세기는 외부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던 때였다. 실학파는 당대의 폐쇄적인 경향에 문제제기하며 중국과 일본과 서양의 학술 및 세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성호(星湖)-연암(燕巖)-다산(茶山)으로 이어졌던 실학파의 흐름보다 앞선 세대인 송정규는 《해외문견록》에 드러난 실용적이고 경세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선구적으로 문제제기를 했고,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실학이라는 시대정신에 공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송정규가 《해외문견록》에 그려 놓았던 ‘해양의 시대’ 속 조선이라는 큰 그림은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이고 19세기까지 실현되지 않았으나, 천리 길을 너무도 쉽게 오가며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은 그가 전망하고 대비하고자 한 그 그림과 다르지 않다.
▣ 작가 소개
김용태
성균관대학교에서 〈옥수 조면호의 한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 한국 한문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조선후기의 실학이 개화파와 연결되는 지점에 중점을 두고 연구했으며, 동아시아 한문학으로 관심 범위를 넓히고 있다. 지은 책으로 《19세기 조선 한시사의 탐색》이 있으며, 실시학사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완역 이옥 전집》 외 다수의 고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김새미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한문을 배우기 위해 섬을 떠나 태동고전연구소, 한국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공부했으며, 겨우 옥편 찾을 정도의 실력으로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연천 홍석주 산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명문화재단 태동고전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며, 성균관대학교와 제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관한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서설 제주에서 바라본 17세기 동아시아의 바다
1부 제주에 표류한 사람들
1 별도포에서 왜선을 공격하다
2 유구의 사신
3 서양인 하멜의 표류
4 순치 연간 이후 표류한 상인들
5 안남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6 중국배의 구조
7 산동에서 표류해온 상인
8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9 유구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10 그 밖의 이야기
2부 표해록 약절-최부의 험난한 중국 탐방기
1 13일간의 표류
2 귀국길에 접한 중국의 풍경
3 여정을 정리하다
원문
1. 제주에서 바라본 17세기 동아시아의 바다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예리하게 포착한 귀중한 사료
지금 우리는 언제든 국경을 건널 수 있고 심지어 대륙과 바다를 조망할 수도 있지만, 17세기 조선 그것도 제주라는 섬에 머물러야 했던 어느 학자의 눈에 비친 바다는 건널 수도 내다볼 수도 없는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조선 숙종 대에 활동했던 관료문인 송정규(宋廷奎, 1656~1710)가 제주목사 시절에 제주에서 있었던 표류 사건들을 정리한 책 《해외문견록》은 바깥세상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조선의 관료가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쓴 치열한 기록의 산물이다. 《해외문견록》은 1704년부터 1706년까지 송정규가 제주목사로 지내며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과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으므로 ‘표해록’ 장르에 속하지만, 다른 표류 기록들이 단순히 이국 취향이나 기록 보관을 위해 작성한 것과 달리 실리라는 뚜렷한 목적을 위해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송정규는 동아시아 일대의 사회·경제 제도, 선박과 무기의 제작 방식 등 외지의 문물을 배우려는 의지를 이 책에서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등장하여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자리 잡아가던 때로, 청 조정은 왜구의 소요를 통제하기 위해 ‘천계령’을 내려 해안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취했다. 조선 역시 자유로울 수 없어 바다를 통한 교역이 매우 위축되어 있는 상태에서 외부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으며, 성리학을 중심으로 관념적인 소중화론이 팽배하여 외부의 사정을 무시하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세태 속에 다가올 ‘해양의 시대’를 내다보고 대비하기 위해 송정규는 바깥세상에 대한 기록을 하나하나 모은 것이다.
《해외문견록》에는 1611∼1706년에 발생한 표류사건 9건, 15세기 최부의 ‘표해록’ 요약, 제주의 풍토기에 대한 기록 6건 등 총 16건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 복사본을 보관 중이며 원본은 일본 덴리(天理)대학 이마니시 문고가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별도포에서 왜선을 공격하다〉, 〈서양인 하멜의 표류〉, 〈중국배의 구조〉,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 학술적 의미가 크다. 또한 송정규는 중국에서 의주까지 6개월간의 험난한 중국 탐방기를 담은 최부의 《표해록》을 요약해 기록했는데, 《해외문견록-제주목사 송정규, 바다 건너 경이로운 이야기를 기록하다》에서는 내용에 따라 1부에는 표류 사건을, 2부에는 표해록 요약본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순치 연간 이후 표류한 상인들〉에서는 제주에 표류한 쑤저우 상인 묘진실이 중국 내륙에서 쑤저우, 베트남, 일본으로 연결되는 ‘사각 무역 루트’를 소개하기도 하고, 1678년 청의 천계령이 풀린 뒤 정식으로 상행위 허가를 받고 바다에 나왔다가 표류한 상인 고여상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송정규는 특히 1705년 표류한 대만 상인을 심문하며 동아시아의 바닷길에 대해 상세히 물었는데 어떠한 물품이 어디에서 어디로 유통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지 기록했다. 〈안남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에서는 베트남의 거리 풍경과 생활 풍습을 세밀화처럼 묘사하는 가운데 중국 상인들이 양잠업의 발달로 비단보다 모시가 더 비싸다는 점을 이용해 이문을 취하고 있는 정세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당대 동아시아 해역의 상권과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록들은 근대 이전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왕성한 해상무역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최근 동양사학계에서 부각되는 ‘아시아 교역권론’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송정규는 비록 조선은 그 교역권에서 멀어져 있었지만 송정규는 교역 시장에 뛰어들어야 함을 내비친다. 〈서양인 하멜의 표류〉에서 서양에서는 어린아이들도 동서양의 무역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천하에 이와 같은 풍속의 사람들이 있다니 참으로 대단하도다!” 하고 감탄하고 있다.
강희제 24년(1685, 숙종11)에 천하가 태평해졌기에 육부(六府)에서 의논해 황제께 주청하여, 바다에 인접해 있는 여러 나라에 대해 비로소 통상을 허락하고 모든 항구마다 관소를 두어 세금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세은(稅銀) 60여 냥을 바치고 인표(印表)를 받아 주단과 흰 실, 담요, 약재 등을 싣고 일본에 가서 팔고자 이번 달 14일에 오송구(吳松口)에서 출항했습니다.
-〈순치 연간 이후 표류한 상인들〉(43쪽) 중에서
(안남에서는) 삼베와 모시가 생산되지는 않으나, 모시풀은 산 가까이 습하지 않은 땅에서 자라 1년이면 여섯 차례 거둘 수 있었다. 뱃사람들은 그것으로 밧줄을 만드는데, 그곳 사람들은 길쌈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중국 상인들이 모시 한 필로 화단(花段) 두 필을 바꾸어 갔다. 모시의 귀함이 이와 같았다.
-〈안남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54쪽) 중에서
송정규는 해상무역에서 나아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외국 문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에 이르렀다. 〈중국배의 구조〉에서는 중국배에 대한 정보를 재료와 수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고 “중국배의 법식을 두루 물어 여기에 기록해두니, 앞으로 일을 맡은 자들이 따라 만들 수 있도록 대비하려 함이다.” 하고 후대에게 당부하며 글을 맺는다. 원양 항해가 가능한 중국 배의 건조 기술을 참고해 조선의 선박 건조 기술을 발전시켜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송정규는 해외교역뿐 아니라 중국의 구휼제도·도량형·조세제도 등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살폈고(〈산동에서 표류해 온 상인〉), 제주 관아에 보관하고 있던 하멜 일행의 무기를 정밀하게 실측한 뒤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다(〈서양인 하멜의 표류〉). 중국 강남에서 의주까지 6개월의 탐방기를 통해 중국의 지리와 문화를 상세하게 담은 2부 〈표해록 약절-최부의 험난한 중국 탐방기〉 역시, 중국의 정세와 풍물에 촉각을 세웠던 송정규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2. 제주목사 송정규, 실리적이고 경세적인 관료문인의 시선
《해외문견록》을 남긴 송정규의 자는 문경(文卿)·유문(幼文), 호는 이호(梨湖)·우수(迂?)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는 조광조와 정치적 견해를 같이했던 5대조인 송호지(宋好智, 1474~1526)부터 소북계 정치인이었던 증조부 송일(宋馹, 1557~1640), 경기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송시길(宋時吉, 1597~1656)로 이어지는 명망 있는 가문의 후예다. 송정규는 1688년 황해도 장연 현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벼슬에 나서서 2년 뒤 사간원 정원을, 1694년 시강원 사서를 지내다가 여러 관직을 거쳐 1701년 고부단사로 연경에 다녀왔고, 몇몇 고을의 지방관을 거쳐 1704년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송정규는 평생 관료로 지냈으나 학문을 향한 열정이 매우 커서 제자백가를 섭렵함은 물론 실용적 학문과 산학, 의약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송정규는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으나 제주도의 현지 사정을 존중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문화를 조성하고자 했으며, 목장과 보를 확충해 군비를 갖추고자 했다. 종조카 송질(宋瓆)은 〈행장(行狀)〉에서 송정규의 치적을 정리하며 그가 탐라지와 탐라지도를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일반적인 지리지로 추정되는 탐라지는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해외문견록》이 탐라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리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한중일을 누비며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던 조선 초기와 달리, 송정규가 살았던 17세기는 외부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던 때였다. 실학파는 당대의 폐쇄적인 경향에 문제제기하며 중국과 일본과 서양의 학술 및 세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성호(星湖)-연암(燕巖)-다산(茶山)으로 이어졌던 실학파의 흐름보다 앞선 세대인 송정규는 《해외문견록》에 드러난 실용적이고 경세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선구적으로 문제제기를 했고,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실학이라는 시대정신에 공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송정규가 《해외문견록》에 그려 놓았던 ‘해양의 시대’ 속 조선이라는 큰 그림은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이고 19세기까지 실현되지 않았으나, 천리 길을 너무도 쉽게 오가며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은 그가 전망하고 대비하고자 한 그 그림과 다르지 않다.
▣ 작가 소개
김용태
성균관대학교에서 〈옥수 조면호의 한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 한국 한문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조선후기의 실학이 개화파와 연결되는 지점에 중점을 두고 연구했으며, 동아시아 한문학으로 관심 범위를 넓히고 있다. 지은 책으로 《19세기 조선 한시사의 탐색》이 있으며, 실시학사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완역 이옥 전집》 외 다수의 고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김새미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한문을 배우기 위해 섬을 떠나 태동고전연구소, 한국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공부했으며, 겨우 옥편 찾을 정도의 실력으로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연천 홍석주 산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명문화재단 태동고전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며, 성균관대학교와 제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관한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 주요 목차
서설 제주에서 바라본 17세기 동아시아의 바다
1부 제주에 표류한 사람들
1 별도포에서 왜선을 공격하다
2 유구의 사신
3 서양인 하멜의 표류
4 순치 연간 이후 표류한 상인들
5 안남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6 중국배의 구조
7 산동에서 표류해온 상인
8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9 유구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들 10 그 밖의 이야기
2부 표해록 약절-최부의 험난한 중국 탐방기
1 13일간의 표류
2 귀국길에 접한 중국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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