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트릭스터는 세계 도처의 신화와 전설에서 발견된다. “트릭스터는 바보이면서 동시에 체계를 뛰어넘는 자다.” 그중에서도 북아메리카 지역의 트릭스터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며 반인반수의 신성한 존재이고, 어릿광대와 문화영웅의 혼합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트릭스터 이야기』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연구의 대가 리처드 어도스와 알폰소 오르티스가 함께 엮은 100여 편의 트릭스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이거나 익살스럽거나 색정적이기도 한 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라코타 부족이나 호피족 또는 하이다족의 한 사람이 되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고체계와 세계관을 더불어 즐길 수 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50여 개 부족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독자들이 트릭스터 이야기의 배경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긴이 김주관 교수가 정리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도 부록에서 만나볼 수 있다.
보편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의 트릭스터
신화연구에서 어떤 단일한 인물유형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트릭스터는 예외다. 트릭스터는 전 세계 신화연구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이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트릭스터라는 인물유형이 나타내는 보편성과 이중성 때문이다. 독일의 틸 오일렌슈피겔, 프랑스의 여우 레이너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그리스의 카라괴즈, 핫자라고 불리는 터키의 어릿광대 사제 나스르-에딘, 북유럽 신화의 장난꾸러기 하늘 여행자 로키 등이 모두 트릭스터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는 토끼와 호랑이가 트릭스터의 지위를 갖는다. 이처럼 트릭스터라는 인물유형은 거의 모든 지역의 신화나 민담에서 등장한다.
트릭스터가 신화연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건 트릭스터의 두드러진 특징인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트릭스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문화를 가능하게 한 문화영웅이다. 남을 속이는 교활한 인물이면서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바보스러운 인물이다. 트릭스터가 갖는 이러한 모순적인 성격이 신화에 등장하는 다른 평면적인 인물들보다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트릭스터, 아메리카 원주민 구비문학의 중심을 이루다
구대륙의 전설에서 트릭스터의 역할은 미미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의 구비문학에서는 트릭스터가 무대의 중심에 선다. 트릭스터는 갖가지 상황에서 수많은 변형된 모습으로 출현하는데,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구비전승은 트릭스터의 역할을 특히 부각한다. 가령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난꾸러기인 코요테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그 어떤 모습이라도 취한다. 그는 인간의 성격을 이루는 선함과 사악함, 당당함과 옹졸함, 강력함과 연약함, 기쁨과 고통, 영웅적 자질과 비겁함을 겸비한다. 수족의 거미인간인 이크토미는 어떨까. 파인 리지 수족과 로즈버드 수족 출신 사람들은 편저자 어도스와 오르티스에게 이렇게 전했다.
거미는 큰 홍수로 죽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졌다. 이크토는 힘이 없을 수 있으며,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고, 벌레보다 열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창조자일 수도 있으며, 인간보다 훨씬 더 교활할 수도 있다. 힘을 가졌을 때 이크토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는 산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변신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하기도 한다. 그는 기민하게 생각하면서 모든 기회를 유리하게 이용하고, 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못되기도 하다. (…) 그는 인간들에게 화살촉을 가져다주었으며, 전쟁하러 갈 때 검은색 물감을 얼굴에 바르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ㆍ「머리말」, 29-30쪽
누가 보더라도 하찮고 나약한 존재가 고귀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못된 장난을 하고 그들을 속이는 트릭스터 이야기는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의 민속 신화와 전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래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을 발견하며 비로소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ㆍ유럽ㆍ백인들의 세계와 대비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의 방식
트릭스터는 대개 동물이 인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코요테, 거미 이크토미, 갈가마귀, 밍크, 토끼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연과 긴밀한 일체감을 갖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가령 라코타 부족의 모든 의례는 ‘나의 모든 친척’이라는 의미의 ‘미타쿠예 오야신’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의 모든 친척’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가장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동식물을 포함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만이 영혼을 갖는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와 달리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호수 하나도 영혼이나 정신을 가진다고 믿으며 모든 자연을 존중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엄격한 신앙체계가 존재한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든지 특정한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가 있다. 주로 여흥을 위한 트릭스터 구연조차 반드시 전통에 따라 엄격하게 행해져야 한다. 어떤 부족들에서는 이야기가 겨울에만 구연되어야 했다. 여름에 구연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방울뱀에 물린다거나 병에 걸릴 수도 있었다. 어떤 부족에서는 구연자가 기존의 이야기에서 한 단어라도 바꾸거나 생략하는 것이 금지되는 반면, 다른 부족에서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꾸미고 변형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신성한 어릿광대들인 수족의 헤요카는 아무리 당혹스러운 꿈을 꾸더라도 그 꿈을 반드시 공개적으로 실연해야만 했다.
트릭스터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은 ‘인디언의 방식’으로 환기된다.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거리나 시간은 관습적인 유럽 방식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지 않는다. “일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코요테가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이크토미는 여행 중이었다” “언덕이 하나 있었다”로 시작한다. 이야기에서 사건들은 방금 일어났거나,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인디언 전설의 세계는 백인들의 동화 세계보다 이토록 더 ‘사실적’이다. 라코타 부족의 성자 레임 디어가 늘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아니다. 우리는 달리 생각한다.”
코요테의 호색적인 모험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트릭스터들은 분명히 색을 밝힌다. 노골적이고 색정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물론 포르노는 아니다. 순박한 순진무구함이 색정의 이야기들을 감싸고 있으며,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과 어린아이들도 이야기를 함께 즐긴다. 인디언 언어에는 ‘외설적인’ 단어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의 성기는 남성의 성기일 뿐 방망이나 뿌리가 아니다. 여성의 성기도 그냥 여성의 성기일 뿐 구멍이나 조개가 아니다.
트릭스터로서 코요테는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우며 손버릇이 나쁘다. 그는 신과 유사한 창조자, 빛을 가지고 온 자, 괴물을 죽인 자, 도둑, 작고 초라한 사기꾼 등으로 등장하는데, 무엇보다 코요테는 대개 호색한이다.
코요테의 아내가 죽었다. 아내의 시체를 처리하기 전에 코요테는 아내의 성기를 잘라냈다. 그는 아내의 성기를 말린 뒤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아내가 그립고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그는 주머니를 꺼내 가루를 약간 자신의 성기에 뿌렸다. 그럴 때마다 코요테는 성적 만족감을 느꼈다.
ㆍ제3장 ‘코요테의 성적 모험’ 중 「코요테, 죽은 아내의 성기를 보관하다」, 143쪽
코요테의 호색적인 모습은 엽색에 빠진 자, 간음한 자, 강간한 자, 유아성애자 등으로 묘사되는 그리스ㆍ로마 신화의 신들을 연상하게 한다. 전능한 제우스가 셀 수 없을 만큼 혼외정사를 하고 처녀를 유혹하여 농락하기 위해 모습을 바꾼 것은, 수많은 북아메리카 원주민 신화에 나타나는 코요테의 행태이기도 하다.
실제로 코요테가 함정과 독극물, 목동이 쏘는 총알 등에도 살아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가장 대표적인 트릭스터인 코요테는 백인 중심의 미국문화가 범람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로즈버드 수족의 현자이며 전통주의자인 도그가 말했듯이 “코요테 이야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수족의 거미인간 ‘이크토미’
이크토미는 라코타 수족과 다코타 수족의 주요한 트릭스터로, 신성한 초자연적 인물이다. 라코타의 구전에 따르면 때로는 현명한 신이며 때로는 바보인 이크토미는 시간과 공간을 창조했으며, 언어를 고안해냈고,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로서 백인의 출현을 예언했다. 작가인 제임스 워커에 따르면, 이크토미의 기원은 지혜의 신인 크사다. 크사는 라코타 수족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현명하고 낙천적이며, 언어를 고안해냈다. “(운행의 신인) 스칸은 크사의 이름을 이크토미로 지었다. 그리하여 이크토미는 타인들의 비웃음을 자아내는 말썽꾸러기 악동이 되었다.”
이크토미는 음탕하고 야비하지만 신성하다. 또한 코요테와 마찬가지로 이크토미는 항상 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 정력적인 존재는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성기를 1.6킬로미터 정도로 길게 늘이거나 강을 가로질러 걸쳐놓아 건너편 강가에 있는 소녀를 임신시킬 수도 있다.
이크토미는 허리에 두르는 천을 비집고 그들에게 자신의 남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당당하게 일어서 있었다. 토끼를 안고 있던 여자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오랫동안 보았다. “이건 아주 이상한 물건이군.” 그녀가 말했다. “이처럼 생긴 것을 본 적이 없어. 내게는 왜 이런 뿌리가 없지?”
“왜냐하면 난 남자고 당신은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어디에 좋은 거니?” 여자는 알고 싶었다.
“이건 성관계하기에 좋아요.”
ㆍ제6장 ‘사랑에 빠진 거미인간’ 중 「너무 많은 여자」, 229쪽
트릭스터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지닌 유일한 신화적 인물이다. 서구에서는 신화를 넘어 문학비평이나 예술비평까지 범위를 확장해 트릭스터를 논한다. 트릭스터에 대한 국내 연구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 연구의 역사가 짧은 탓에 아직까지는 한국의 구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의 트릭스터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연구가 주로 시도되고 있다. 가령 「토끼전」과 북아메리카 원주민 설화에 나타난 트릭스터를 비교 연구하는 식이다(나수호, 2002). 트릭스터나 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 문화와 관련한 읽을거리가 희소한 우리나라에 『북아메리카 원주민 트릭스터 이야기』는 연구자들에게 실로 단비와도 같은 자료다. 비교적 낯선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를 쉽고 흥미로운 우화를 통해 대중에게 생생하게 소개해줄 교양서로 손색이 없다.
▣ 작가 소개
편저자 : 리처드 어도스(Richard Erdoes)
1912-2008.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사진가이며, 서부 아메리카에 관해 2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대표작으로는 『라코타 여인』(Lakota Woman, 1991)과 『레임 디어』(Lame Deer: Seeker of Wisdom, 1972) 등이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빈 ? 베를린 ? 파리 등지에서 자랐고, 이후 미국 뉴멕시코 주 샌타페이에서 지냈다. 그의 사진들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라이프』 등 여러 잡지에 실렸다. 1960년대 후반 우연한 기회에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 매료된 그는 원주민 문화의 보존과 원주민들의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편저자 : 알폰소 오르티스(Alfonso Ortiz)
1939-1997. 푸에블로 원주민인 오르티스는 미국 뉴멕시코 주에서 테와어를 사용하는 부족 가운데 하나인 산 후안(San Juan) 출신으로, 뉴멕시코대학교 인류학과에서 특별대우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테와의 세계』(The Tewa World)가 있으며, 스미스소니언 협회에서 펴낸 『북아메리카 인디언 핸드북』 (Handbook of North American Indians, 전 17권) 가운데 남서부편인 제9?10권에 객원 편집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푸에블로 부족을 연구하고 대변하는 학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원주민들에게 학자의 길을 가라고 독려하는 데 힘썼다. 1982년 맥아더 펠로(MacArthur Fellow) 상을 받았다.
역자 : 김주관(金周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이어서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데이비스 소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지금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근대민중생활사 읽기』가 있으며, 언어인류학과 한국문화교육 및 문화자료 아카이브 등과 관련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트릭스터는 세계 도처의 신화와 전설에서 발견된다. “트릭스터는 바보이면서 동시에 체계를 뛰어넘는 자다.” 그중에서도 북아메리카 지역의 트릭스터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며 반인반수의 신성한 존재이고, 어릿광대와 문화영웅의 혼합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트릭스터 이야기』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연구의 대가 리처드 어도스와 알폰소 오르티스가 함께 엮은 100여 편의 트릭스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이거나 익살스럽거나 색정적이기도 한 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라코타 부족이나 호피족 또는 하이다족의 한 사람이 되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고체계와 세계관을 더불어 즐길 수 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50여 개 부족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독자들이 트릭스터 이야기의 배경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긴이 김주관 교수가 정리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도 부록에서 만나볼 수 있다.
보편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의 트릭스터
신화연구에서 어떤 단일한 인물유형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트릭스터는 예외다. 트릭스터는 전 세계 신화연구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이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트릭스터라는 인물유형이 나타내는 보편성과 이중성 때문이다. 독일의 틸 오일렌슈피겔, 프랑스의 여우 레이너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그리스의 카라괴즈, 핫자라고 불리는 터키의 어릿광대 사제 나스르-에딘, 북유럽 신화의 장난꾸러기 하늘 여행자 로키 등이 모두 트릭스터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는 토끼와 호랑이가 트릭스터의 지위를 갖는다. 이처럼 트릭스터라는 인물유형은 거의 모든 지역의 신화나 민담에서 등장한다.
트릭스터가 신화연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건 트릭스터의 두드러진 특징인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트릭스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문화를 가능하게 한 문화영웅이다. 남을 속이는 교활한 인물이면서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바보스러운 인물이다. 트릭스터가 갖는 이러한 모순적인 성격이 신화에 등장하는 다른 평면적인 인물들보다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트릭스터, 아메리카 원주민 구비문학의 중심을 이루다
구대륙의 전설에서 트릭스터의 역할은 미미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의 구비문학에서는 트릭스터가 무대의 중심에 선다. 트릭스터는 갖가지 상황에서 수많은 변형된 모습으로 출현하는데,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구비전승은 트릭스터의 역할을 특히 부각한다. 가령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난꾸러기인 코요테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그 어떤 모습이라도 취한다. 그는 인간의 성격을 이루는 선함과 사악함, 당당함과 옹졸함, 강력함과 연약함, 기쁨과 고통, 영웅적 자질과 비겁함을 겸비한다. 수족의 거미인간인 이크토미는 어떨까. 파인 리지 수족과 로즈버드 수족 출신 사람들은 편저자 어도스와 오르티스에게 이렇게 전했다.
거미는 큰 홍수로 죽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졌다. 이크토는 힘이 없을 수 있으며,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고, 벌레보다 열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창조자일 수도 있으며, 인간보다 훨씬 더 교활할 수도 있다. 힘을 가졌을 때 이크토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는 산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변신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하기도 한다. 그는 기민하게 생각하면서 모든 기회를 유리하게 이용하고, 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못되기도 하다. (…) 그는 인간들에게 화살촉을 가져다주었으며, 전쟁하러 갈 때 검은색 물감을 얼굴에 바르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ㆍ「머리말」, 29-30쪽
누가 보더라도 하찮고 나약한 존재가 고귀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못된 장난을 하고 그들을 속이는 트릭스터 이야기는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의 민속 신화와 전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래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을 발견하며 비로소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ㆍ유럽ㆍ백인들의 세계와 대비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의 방식
트릭스터는 대개 동물이 인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코요테, 거미 이크토미, 갈가마귀, 밍크, 토끼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연과 긴밀한 일체감을 갖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가령 라코타 부족의 모든 의례는 ‘나의 모든 친척’이라는 의미의 ‘미타쿠예 오야신’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의 모든 친척’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가장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동식물을 포함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만이 영혼을 갖는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와 달리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호수 하나도 영혼이나 정신을 가진다고 믿으며 모든 자연을 존중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엄격한 신앙체계가 존재한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든지 특정한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가 있다. 주로 여흥을 위한 트릭스터 구연조차 반드시 전통에 따라 엄격하게 행해져야 한다. 어떤 부족들에서는 이야기가 겨울에만 구연되어야 했다. 여름에 구연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방울뱀에 물린다거나 병에 걸릴 수도 있었다. 어떤 부족에서는 구연자가 기존의 이야기에서 한 단어라도 바꾸거나 생략하는 것이 금지되는 반면, 다른 부족에서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꾸미고 변형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신성한 어릿광대들인 수족의 헤요카는 아무리 당혹스러운 꿈을 꾸더라도 그 꿈을 반드시 공개적으로 실연해야만 했다.
트릭스터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은 ‘인디언의 방식’으로 환기된다.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거리나 시간은 관습적인 유럽 방식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지 않는다. “일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코요테가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이크토미는 여행 중이었다” “언덕이 하나 있었다”로 시작한다. 이야기에서 사건들은 방금 일어났거나,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인디언 전설의 세계는 백인들의 동화 세계보다 이토록 더 ‘사실적’이다. 라코타 부족의 성자 레임 디어가 늘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아니다. 우리는 달리 생각한다.”
코요테의 호색적인 모험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트릭스터들은 분명히 색을 밝힌다. 노골적이고 색정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물론 포르노는 아니다. 순박한 순진무구함이 색정의 이야기들을 감싸고 있으며,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과 어린아이들도 이야기를 함께 즐긴다. 인디언 언어에는 ‘외설적인’ 단어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의 성기는 남성의 성기일 뿐 방망이나 뿌리가 아니다. 여성의 성기도 그냥 여성의 성기일 뿐 구멍이나 조개가 아니다.
트릭스터로서 코요테는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우며 손버릇이 나쁘다. 그는 신과 유사한 창조자, 빛을 가지고 온 자, 괴물을 죽인 자, 도둑, 작고 초라한 사기꾼 등으로 등장하는데, 무엇보다 코요테는 대개 호색한이다.
코요테의 아내가 죽었다. 아내의 시체를 처리하기 전에 코요테는 아내의 성기를 잘라냈다. 그는 아내의 성기를 말린 뒤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아내가 그립고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그는 주머니를 꺼내 가루를 약간 자신의 성기에 뿌렸다. 그럴 때마다 코요테는 성적 만족감을 느꼈다.
ㆍ제3장 ‘코요테의 성적 모험’ 중 「코요테, 죽은 아내의 성기를 보관하다」, 143쪽
코요테의 호색적인 모습은 엽색에 빠진 자, 간음한 자, 강간한 자, 유아성애자 등으로 묘사되는 그리스ㆍ로마 신화의 신들을 연상하게 한다. 전능한 제우스가 셀 수 없을 만큼 혼외정사를 하고 처녀를 유혹하여 농락하기 위해 모습을 바꾼 것은, 수많은 북아메리카 원주민 신화에 나타나는 코요테의 행태이기도 하다.
실제로 코요테가 함정과 독극물, 목동이 쏘는 총알 등에도 살아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가장 대표적인 트릭스터인 코요테는 백인 중심의 미국문화가 범람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로즈버드 수족의 현자이며 전통주의자인 도그가 말했듯이 “코요테 이야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수족의 거미인간 ‘이크토미’
이크토미는 라코타 수족과 다코타 수족의 주요한 트릭스터로, 신성한 초자연적 인물이다. 라코타의 구전에 따르면 때로는 현명한 신이며 때로는 바보인 이크토미는 시간과 공간을 창조했으며, 언어를 고안해냈고,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로서 백인의 출현을 예언했다. 작가인 제임스 워커에 따르면, 이크토미의 기원은 지혜의 신인 크사다. 크사는 라코타 수족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현명하고 낙천적이며, 언어를 고안해냈다. “(운행의 신인) 스칸은 크사의 이름을 이크토미로 지었다. 그리하여 이크토미는 타인들의 비웃음을 자아내는 말썽꾸러기 악동이 되었다.”
이크토미는 음탕하고 야비하지만 신성하다. 또한 코요테와 마찬가지로 이크토미는 항상 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 정력적인 존재는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성기를 1.6킬로미터 정도로 길게 늘이거나 강을 가로질러 걸쳐놓아 건너편 강가에 있는 소녀를 임신시킬 수도 있다.
이크토미는 허리에 두르는 천을 비집고 그들에게 자신의 남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당당하게 일어서 있었다. 토끼를 안고 있던 여자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오랫동안 보았다. “이건 아주 이상한 물건이군.” 그녀가 말했다. “이처럼 생긴 것을 본 적이 없어. 내게는 왜 이런 뿌리가 없지?”
“왜냐하면 난 남자고 당신은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어디에 좋은 거니?” 여자는 알고 싶었다.
“이건 성관계하기에 좋아요.”
ㆍ제6장 ‘사랑에 빠진 거미인간’ 중 「너무 많은 여자」, 229쪽
트릭스터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지닌 유일한 신화적 인물이다. 서구에서는 신화를 넘어 문학비평이나 예술비평까지 범위를 확장해 트릭스터를 논한다. 트릭스터에 대한 국내 연구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 연구의 역사가 짧은 탓에 아직까지는 한국의 구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의 트릭스터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연구가 주로 시도되고 있다. 가령 「토끼전」과 북아메리카 원주민 설화에 나타난 트릭스터를 비교 연구하는 식이다(나수호, 2002). 트릭스터나 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 문화와 관련한 읽을거리가 희소한 우리나라에 『북아메리카 원주민 트릭스터 이야기』는 연구자들에게 실로 단비와도 같은 자료다. 비교적 낯선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를 쉽고 흥미로운 우화를 통해 대중에게 생생하게 소개해줄 교양서로 손색이 없다.
▣ 작가 소개
편저자 : 리처드 어도스(Richard Erdoes)
1912-2008.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사진가이며, 서부 아메리카에 관해 2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대표작으로는 『라코타 여인』(Lakota Woman, 1991)과 『레임 디어』(Lame Deer: Seeker of Wisdom, 1972) 등이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빈 ? 베를린 ? 파리 등지에서 자랐고, 이후 미국 뉴멕시코 주 샌타페이에서 지냈다. 그의 사진들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라이프』 등 여러 잡지에 실렸다. 1960년대 후반 우연한 기회에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 매료된 그는 원주민 문화의 보존과 원주민들의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편저자 : 알폰소 오르티스(Alfonso Ortiz)
1939-1997. 푸에블로 원주민인 오르티스는 미국 뉴멕시코 주에서 테와어를 사용하는 부족 가운데 하나인 산 후안(San Juan) 출신으로, 뉴멕시코대학교 인류학과에서 특별대우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테와의 세계』(The Tewa World)가 있으며, 스미스소니언 협회에서 펴낸 『북아메리카 인디언 핸드북』 (Handbook of North American Indians, 전 17권) 가운데 남서부편인 제9?10권에 객원 편집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푸에블로 부족을 연구하고 대변하는 학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원주민들에게 학자의 길을 가라고 독려하는 데 힘썼다. 1982년 맥아더 펠로(MacArthur Fellow) 상을 받았다.
역자 : 김주관(金周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이어서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데이비스 소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지금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근대민중생활사 읽기』가 있으며, 언어인류학과 한국문화교육 및 문화자료 아카이브 등과 관련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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