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몸젠의 《로마사》, 로마사 연구의 고전이자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
몸젠의 《로마사》, 가장 위대한 고전들 중 하나
‘서양 인문학 전공자들의 필독서’, ‘실증주의에 입각한 탁월한 고대 연구서’, ‘역사적 저작들의 가장 위대한 고전 중 하나’.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1817~1903)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그린 역사서 몸젠의 《로마사》는 기존의 로마사 연구서와 달리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좀 더 실증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몸젠은 1902년 12월 이 《로마사》로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역사 연구서가 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은 《로마사》가 가진 의미, 즉 《로마사》가 역사 연구서를 넘어서는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이탈리아 통일 후 카르타고 전쟁을 겪는 로마
《몸젠의 로마사 제3권―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는 지난 2013년 4월, 10년 내 완역본 출간을 목표로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출간한 후 선보이는 세 번째 결실이다.
로마의 탄생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원서 제1권 제1책),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2권―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원서 제1권 제2책)에 이어 제3권(원서 제1권 제3책 1장~7장)에서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성장한 페니키아 인들과 로마 인들의 전쟁을 다룬다.
로마, 카르타고와 충돌하다
로마, 시킬리아를 확보하다―제1차 카르타고 전쟁
소아시아와 쉬리아 고원과 이집트로 둘러싸인 가나안Ganaan(‘들판’이라는 뜻을 가짐. 희랍인은 ‘자주색 땅’ 또는 ‘구릿빛 사람들의 땅’이란 뜻의 ‘페니키아’라고 부름)에 정착한 페니키아 인(이탈리아 인은 ‘포에니 인’으로 부름)은 무역에 더없이 유리한 땅이던 가나안에서 무역을 발전시키고 동서를 연결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 부었다. ‘신新도시’라는 뜻의 카르타고Carthago는 바로 이 지역에서 발전한 페니키아 도시들 중 다른 식민 도시를 압도한 도시였다.
쉴 새 없이 서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희랍 식민지의 물결에 완전히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방어가 필요했던 페니키아 인들은 카르타고의 주도 아래 희랍인의 전진을 막아낸다. 로마 건국 200년까지 이어진 이런 중요한 성과 덕분에 지중해 남서부 지역은 페니키아 인이 장악할 수 있었고, 성공을 이끈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민족을 이끌 패권은 물론 리뷔아와 지중해 일부를 장악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반면 주변 지역을 점차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정치적으로 통합하여 연방체의 통일 이탈리아를 완성한 로마(《몸젠의 로마사》 제2권)는 시킬리아의 로마 연방 편입을 꾀한다. 그러나 시킬리아에는 오랜 시간 시킬리아를 양분했던 카르타고와 쉬라쿠사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로마는 메사나를 에워싼 싸움을 계기로 이 두 세력 중 카르타고와 전쟁에 돌입한다. 제1차 카르타고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시킬리아에서의 승리를 발판 삼아 나선 아프리카 원정에서 패배의 쓴 맛을 보기는 했지만, 로마는 여러 차례 해전에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카르타고의 시킬리아 이양과 전쟁배상금 지불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로마는 전 이탈리아를 로마화하게 된다.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 로마 침공에 나서다―제2차 카르타고 전쟁(한니발 전쟁)
로마 건국 513년(기원전 241년)에 있었던 로마와의 강화조약으로 카르타고 인은 평화를 얻었다. 그러나 동지중해에서 서지중해에 이르는 해상 노선 독점이 무너지면서 카르타고 무역 정책 전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국가의 존립이 로마의 재량에 좌우될 위험이 상존하게 된 것이다. 이는 카르타고가 다시금 전쟁 준비에 들어가도록 재촉했다.
용병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로 진출, 카르타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공동체를 카르타고의 속주로 만든 것이다. 히스파니아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속하고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한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의 군대를 하밀카르의 장남 한니발에게 맡긴다. 한니발은 취임 직후(로마 건국 534년, 기원전 220년 봄) 개전을 결정하고 공격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이 카르타고의 속국인 토르볼레타를 침략하자 로마 건국 535년(기원전 219년) 봄 로마와 동맹한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제2차 카르타고 전쟁의 발발이었다.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을 맞설 로마 장군은 없었다. 알프스를 넘어 감행한 이탈리아 침공 작전은 한니발의 천재성과 추진력을 증명한다. 노장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고집스러운 지연 전술이 로마의 유일한 대처 방법이었다. 한니발은 무력시위를 벌이며 이탈리아 반도를 돌아다녔다. 로마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면 로마 연방이 스스로 해체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면서 천재 전략가는 고립되었다. 경제적 이득이 보장되기만 하면 투쟁보다 굴종을 택하던 카르타고 인들은 한니발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칸나이 전투 등에서의 찬란한 승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니발의 로마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로마의 게릴라 전법은 전선을 교착상태로 몰아넣었고,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히스파니아 원정은 카르타고의 거점 도시 신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성과를 낳았다.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면서 결국 카르타고로 귀환한 한니발은 카르타고 애국 당파의 정전협정 무력화에 반발하며 침공한 스키피오와 자마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자마 전투는 카르타고군의 전멸로 끝나고, 한니발은 몇 사람만 데리고 하드루멘툼으로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한다.
카르타고 전쟁 후 로마의 변화
카르타고 전쟁을 겪으면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밖의 영토를 획득한다. 따라서 국가 체제와 군사 제도의 변경이 불가피했다. 집정관을 대신할 대리자가 해외 영토에 행정관으로 파견되었고, 전쟁 중에 임기가 종료되어 자주 교체되는 집정관직의 불합리를 극복할 군사령관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해군도 창설되었다. 원로원은 현명하며 유능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와 혁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변모하고 쇄신했다. 그들은 전례가 없다는 또는 법체계가 흔들린다는 이유를 들면서, 더는 목적대로 기능하지 않는 제도와 장치를 유지하려는 어리석은 일관성을 고수하지 않았다. 초법적인 임시조치였을지라도 시간을 두고 법체계 내에서 그것을 소화해내는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제4권에서는 카르타고 전쟁의 연장선에서 로마가 마케도니아와 갈등을 빚으며 희랍 세계까지 세력권을 확장하는 과정과, 카르타고 전쟁 및 마케도니아 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로마의 국가 체제 변화 양상이 종합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테오도어 몸젠
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독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 주로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4년간 알토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1837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학위를 받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관된 로마시대의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장래 연구방향의 큰 틀을 잡았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몇 년을 외국에서 머물다가 185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베를린 대학의 로마사 교수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863-66년, 1873-79년의 시기 동안 프러시아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비스마르크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유당과 사민당이 연정을 구성할 것을 충고하였다. 1879년 대학 동료가 유대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자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그의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 대출한 고문서들이 함께 재가 되었다. 1902년 로마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소수에 해당된다. 그는 1500여 개의 연구작업을 통해 로마사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마련했다. 그의 걸작은 1854년부터 56년까지 저술한 『로마사』 3권으로 이 책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카이사르의 통치를 19세기 말의 시기와 비교 해석하였다.
그는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소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스스로 기억할만한 업적으로는 ''로마헌법''의 저술을 꼽고 있다.
역 : 김남우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희랍서정시를 공부하였고, 독일 마인츠에서 로마서정시를 공부하였다. 정암학당 연구원이며, 서울대학교와 철학아카데미에서 희랍어와 라틴어, 희랍문학과 라틴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마틴 호제의『 희랍문학사』,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에라스무스의『 격언집』,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몸젠의 로마사』(공역) 등을 번역하였다.
역 : 김동훈
서울대학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희랍 문학과 로마 문학, 특히 로마 수사학을 공부했고,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총신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장 보댕의 《국가에 관한 6권의 책》 중에서 라티움 어와 히브리 어 부분을 번역했다. 현재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서고원 : 서양사 고전 원강’을 이끌고 있으며,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희랍어 원전을 번역하고 있다.
역 : 성중모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고전기 로마의 ‘소유물 반환 청구’(rei vindicatio)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로마법사와 서양법사 분야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는 《시민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인 〈유스티니아누스 법학제요Institutiones Iustiniani〉를 최초로 라티움 어에서 한국어로 직역하여 곧 출판을 앞두고 있다.
▣ 주요 목차
옮긴이 서문
제1장 카르타고
페니키아 인|무역|페니키아 인들의 재능|페니키아 인의 정치 의식|카르타고|카르타고의 패권|카르타고의 아프리카 영토|페니키아계 리뷔아|카르타고의 해상 패권|히스파니아|사르디니아|시킬리아|해상 패권|쉬라쿠사이와의 경쟁|카르타고의 국체: 원로회의와 관리들|판관단|시민|정부의 성격|카르타고의 자본력|로마와 카르타고의 비교|국가체제|민중에 대한 태도|국가 재정|군사 체계
제2장 로마와 카르타고의 시킬리아 쟁탈전
시킬리아의 상황|캄파니아 용병|마메르 용병|쉬라쿠사이의 히에론|마메르 용병의 이탈리아 연방 가입|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히에론과의 강화|아크라가스 함락|해전의 시작: 로마 해군 함대의 편성|뮐라이 해전|시킬리아 해전과 사르디니아 해전|아프리카 침공 작전|헛된 강화 요구|카르타고의 준비|레굴루스의 패배|아프리카에서의 철군|소강 국면: 시킬리아에서 전쟁의 재발|해전 중지, 파노르무스에서 로마군 승리|릴뤼바이움 포위 공격|드레파눔 앞바다에서 로마 함대의 패배|당황한 로마 인들|시킬리아의 소규모 전투|로마 함대|강화조약의 체결|제1차 카르타고 전쟁의 회고
제3장 자연 경계까지 확대된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자연 경계|시킬리아|사르디니아|해외 정복지 정책|속주의 법무관|속주 행정|1할세와 관세|이탈리아와 속주|아드리아 해의 상황|일뤼리아의 해적; 스코드라 원정|일뤼리아 영토의 획득|켈트족과의 전쟁|텔라몬 전투|공격받는 켈트족의 영토|로마에 정복된 켈트족|전 이탈리아의 로마화
제4장 하밀카르와 한니발
강화 이후 카르타고|카르타고의 주화파(主和派)|총사령관 하밀카르|하밀카르의 전략|카르타고 정부와 바르카스 집안|로마 정부와 바르카스 집안|한니발|로마와 카르타고의 갈등|이탈리아로의 진격 준비|공격 방법|한니발의 출발|로마의 상황|갈리아에 도착한 한니발|마살리아의 스키피오|로다누스 강을 통과하다|한니발의 알프스 통과|결과
제5장 칸나이 전투까지의 한니발 전쟁
한니발과 이탈리아 켈트족 |북부 이탈리아의 주인이 된 한니발|한니발의 군사 정치적 상황|한니발의 아펜니노 산맥 통과|플라미니우스|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이탈리아 동해안의 한니발|남부 이탈리아 전쟁: 파비우스|카푸아 진격과 아풀리아 전쟁|파비우스와 미누키우스|로마의 새로운 전쟁 준비|칸나이 전투|칸나이 전투의 결과|히스파니아로부터 병력 지원 실패|아프리카로부터 병력 지원|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의 동맹|카르타고와 쉬라쿠사이의 동맹|한니발의 카푸아와 남부 이탈리아 지배|로마군의 태도
제6장 칸나이에서 자마에 이르는 한니발 전쟁
위기|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한니발의 캄파니아 무력시위|새로운 캄파니아 전투|한니발의 방어전|일시적으로 좌절된 지원|시킬리아 전쟁의 종결|쉬라쿠사이의 정복|시킬리아 유격전|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성과 없는 전쟁|필립포스와 희랍 도시국가들의 강화조약|필립포스와 로마와의 강화|히스파니아 전쟁|스키피오 부자(父子)의 성공|이베르 강 이남 히스파니아|푸블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의 히스파니아 원정|안달루시아 공략|히스파니아 점령|가데스 함락|이탈리아 전쟁|군대의 주둔 상황|남부 이탈리아의 충돌|로마군의 아르피 수복|한니발의 타렌툼 함락|카푸아 주변의 전투|한니발이 로마로 진군하다|카푸아의 무조건 항복|로마 인의 우세|한니발의 수세|전쟁의 압박|동맹들|하스드루발의 접근|새로운 무장: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의 진군|메타우로스 강 전투: 하스드루발의 죽음|한니발: 브루티움으로 퇴각|소강상태의 이탈리아 전쟁|마고의 이탈리아 상륙|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아프리카의 대비|스키피오의 해군 진영|카르타고 진영에 대한 기습 공격|강화협정|한니발의 아프리카 귀환|전투 재개|자마 전투|강화협정|전쟁의 결과|이탈리아 외부|이탈리아 내부
제7장 한니발 전쟁에서 제3차 카르타고 전쟁까지
파두스 강 유역의 정복|알프스 이북 켈트족의 유입|파두스 강 이남의 식민화|리구리아|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카르타고|한니발|카르타고에 계속되는 로마의 도발|누미디아 인|마시니사|누미디아의 확장과 문명화|히스파니아의 상황|로마 인과 히스파니아 인의 전쟁|로마의 히스파니아 주둔군|히스파니아의 행정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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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로마사 연구의 고전이자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
몸젠의 《로마사》, 가장 위대한 고전들 중 하나
‘서양 인문학 전공자들의 필독서’, ‘실증주의에 입각한 탁월한 고대 연구서’, ‘역사적 저작들의 가장 위대한 고전 중 하나’.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1817~1903)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그린 역사서 몸젠의 《로마사》는 기존의 로마사 연구서와 달리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좀 더 실증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몸젠은 1902년 12월 이 《로마사》로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역사 연구서가 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은 《로마사》가 가진 의미, 즉 《로마사》가 역사 연구서를 넘어서는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이탈리아 통일 후 카르타고 전쟁을 겪는 로마
《몸젠의 로마사 제3권―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는 지난 2013년 4월, 10년 내 완역본 출간을 목표로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출간한 후 선보이는 세 번째 결실이다.
로마의 탄생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원서 제1권 제1책),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2권―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원서 제1권 제2책)에 이어 제3권(원서 제1권 제3책 1장~7장)에서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성장한 페니키아 인들과 로마 인들의 전쟁을 다룬다.
로마, 카르타고와 충돌하다
로마, 시킬리아를 확보하다―제1차 카르타고 전쟁
소아시아와 쉬리아 고원과 이집트로 둘러싸인 가나안Ganaan(‘들판’이라는 뜻을 가짐. 희랍인은 ‘자주색 땅’ 또는 ‘구릿빛 사람들의 땅’이란 뜻의 ‘페니키아’라고 부름)에 정착한 페니키아 인(이탈리아 인은 ‘포에니 인’으로 부름)은 무역에 더없이 유리한 땅이던 가나안에서 무역을 발전시키고 동서를 연결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 부었다. ‘신新도시’라는 뜻의 카르타고Carthago는 바로 이 지역에서 발전한 페니키아 도시들 중 다른 식민 도시를 압도한 도시였다.
쉴 새 없이 서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희랍 식민지의 물결에 완전히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방어가 필요했던 페니키아 인들은 카르타고의 주도 아래 희랍인의 전진을 막아낸다. 로마 건국 200년까지 이어진 이런 중요한 성과 덕분에 지중해 남서부 지역은 페니키아 인이 장악할 수 있었고, 성공을 이끈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민족을 이끌 패권은 물론 리뷔아와 지중해 일부를 장악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반면 주변 지역을 점차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정치적으로 통합하여 연방체의 통일 이탈리아를 완성한 로마(《몸젠의 로마사》 제2권)는 시킬리아의 로마 연방 편입을 꾀한다. 그러나 시킬리아에는 오랜 시간 시킬리아를 양분했던 카르타고와 쉬라쿠사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로마는 메사나를 에워싼 싸움을 계기로 이 두 세력 중 카르타고와 전쟁에 돌입한다. 제1차 카르타고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시킬리아에서의 승리를 발판 삼아 나선 아프리카 원정에서 패배의 쓴 맛을 보기는 했지만, 로마는 여러 차례 해전에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카르타고의 시킬리아 이양과 전쟁배상금 지불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로마는 전 이탈리아를 로마화하게 된다.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 로마 침공에 나서다―제2차 카르타고 전쟁(한니발 전쟁)
로마 건국 513년(기원전 241년)에 있었던 로마와의 강화조약으로 카르타고 인은 평화를 얻었다. 그러나 동지중해에서 서지중해에 이르는 해상 노선 독점이 무너지면서 카르타고 무역 정책 전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국가의 존립이 로마의 재량에 좌우될 위험이 상존하게 된 것이다. 이는 카르타고가 다시금 전쟁 준비에 들어가도록 재촉했다.
용병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로 진출, 카르타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공동체를 카르타고의 속주로 만든 것이다. 히스파니아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속하고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한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의 군대를 하밀카르의 장남 한니발에게 맡긴다. 한니발은 취임 직후(로마 건국 534년, 기원전 220년 봄) 개전을 결정하고 공격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이 카르타고의 속국인 토르볼레타를 침략하자 로마 건국 535년(기원전 219년) 봄 로마와 동맹한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제2차 카르타고 전쟁의 발발이었다.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을 맞설 로마 장군은 없었다. 알프스를 넘어 감행한 이탈리아 침공 작전은 한니발의 천재성과 추진력을 증명한다. 노장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고집스러운 지연 전술이 로마의 유일한 대처 방법이었다. 한니발은 무력시위를 벌이며 이탈리아 반도를 돌아다녔다. 로마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면 로마 연방이 스스로 해체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면서 천재 전략가는 고립되었다. 경제적 이득이 보장되기만 하면 투쟁보다 굴종을 택하던 카르타고 인들은 한니발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칸나이 전투 등에서의 찬란한 승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니발의 로마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로마의 게릴라 전법은 전선을 교착상태로 몰아넣었고,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히스파니아 원정은 카르타고의 거점 도시 신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성과를 낳았다.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면서 결국 카르타고로 귀환한 한니발은 카르타고 애국 당파의 정전협정 무력화에 반발하며 침공한 스키피오와 자마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자마 전투는 카르타고군의 전멸로 끝나고, 한니발은 몇 사람만 데리고 하드루멘툼으로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한다.
카르타고 전쟁 후 로마의 변화
카르타고 전쟁을 겪으면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밖의 영토를 획득한다. 따라서 국가 체제와 군사 제도의 변경이 불가피했다. 집정관을 대신할 대리자가 해외 영토에 행정관으로 파견되었고, 전쟁 중에 임기가 종료되어 자주 교체되는 집정관직의 불합리를 극복할 군사령관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해군도 창설되었다. 원로원은 현명하며 유능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와 혁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변모하고 쇄신했다. 그들은 전례가 없다는 또는 법체계가 흔들린다는 이유를 들면서, 더는 목적대로 기능하지 않는 제도와 장치를 유지하려는 어리석은 일관성을 고수하지 않았다. 초법적인 임시조치였을지라도 시간을 두고 법체계 내에서 그것을 소화해내는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제4권에서는 카르타고 전쟁의 연장선에서 로마가 마케도니아와 갈등을 빚으며 희랍 세계까지 세력권을 확장하는 과정과, 카르타고 전쟁 및 마케도니아 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로마의 국가 체제 변화 양상이 종합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테오도어 몸젠
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독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 주로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4년간 알토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1837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학위를 받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관된 로마시대의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장래 연구방향의 큰 틀을 잡았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몇 년을 외국에서 머물다가 185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베를린 대학의 로마사 교수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863-66년, 1873-79년의 시기 동안 프러시아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비스마르크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유당과 사민당이 연정을 구성할 것을 충고하였다. 1879년 대학 동료가 유대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자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그의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 대출한 고문서들이 함께 재가 되었다. 1902년 로마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소수에 해당된다. 그는 1500여 개의 연구작업을 통해 로마사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마련했다. 그의 걸작은 1854년부터 56년까지 저술한 『로마사』 3권으로 이 책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카이사르의 통치를 19세기 말의 시기와 비교 해석하였다.
그는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소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스스로 기억할만한 업적으로는 ''로마헌법''의 저술을 꼽고 있다.
역 : 김남우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희랍서정시를 공부하였고, 독일 마인츠에서 로마서정시를 공부하였다. 정암학당 연구원이며, 서울대학교와 철학아카데미에서 희랍어와 라틴어, 희랍문학과 라틴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마틴 호제의『 희랍문학사』,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에라스무스의『 격언집』,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몸젠의 로마사』(공역) 등을 번역하였다.
역 : 김동훈
서울대학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희랍 문학과 로마 문학, 특히 로마 수사학을 공부했고,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총신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장 보댕의 《국가에 관한 6권의 책》 중에서 라티움 어와 히브리 어 부분을 번역했다. 현재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서고원 : 서양사 고전 원강’을 이끌고 있으며,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희랍어 원전을 번역하고 있다.
역 : 성중모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고전기 로마의 ‘소유물 반환 청구’(rei vindicatio)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로마법사와 서양법사 분야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는 《시민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인 〈유스티니아누스 법학제요Institutiones Iustiniani〉를 최초로 라티움 어에서 한국어로 직역하여 곧 출판을 앞두고 있다.
▣ 주요 목차
옮긴이 서문
제1장 카르타고
페니키아 인|무역|페니키아 인들의 재능|페니키아 인의 정치 의식|카르타고|카르타고의 패권|카르타고의 아프리카 영토|페니키아계 리뷔아|카르타고의 해상 패권|히스파니아|사르디니아|시킬리아|해상 패권|쉬라쿠사이와의 경쟁|카르타고의 국체: 원로회의와 관리들|판관단|시민|정부의 성격|카르타고의 자본력|로마와 카르타고의 비교|국가체제|민중에 대한 태도|국가 재정|군사 체계
제2장 로마와 카르타고의 시킬리아 쟁탈전
시킬리아의 상황|캄파니아 용병|마메르 용병|쉬라쿠사이의 히에론|마메르 용병의 이탈리아 연방 가입|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히에론과의 강화|아크라가스 함락|해전의 시작: 로마 해군 함대의 편성|뮐라이 해전|시킬리아 해전과 사르디니아 해전|아프리카 침공 작전|헛된 강화 요구|카르타고의 준비|레굴루스의 패배|아프리카에서의 철군|소강 국면: 시킬리아에서 전쟁의 재발|해전 중지, 파노르무스에서 로마군 승리|릴뤼바이움 포위 공격|드레파눔 앞바다에서 로마 함대의 패배|당황한 로마 인들|시킬리아의 소규모 전투|로마 함대|강화조약의 체결|제1차 카르타고 전쟁의 회고
제3장 자연 경계까지 확대된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자연 경계|시킬리아|사르디니아|해외 정복지 정책|속주의 법무관|속주 행정|1할세와 관세|이탈리아와 속주|아드리아 해의 상황|일뤼리아의 해적; 스코드라 원정|일뤼리아 영토의 획득|켈트족과의 전쟁|텔라몬 전투|공격받는 켈트족의 영토|로마에 정복된 켈트족|전 이탈리아의 로마화
제4장 하밀카르와 한니발
강화 이후 카르타고|카르타고의 주화파(主和派)|총사령관 하밀카르|하밀카르의 전략|카르타고 정부와 바르카스 집안|로마 정부와 바르카스 집안|한니발|로마와 카르타고의 갈등|이탈리아로의 진격 준비|공격 방법|한니발의 출발|로마의 상황|갈리아에 도착한 한니발|마살리아의 스키피오|로다누스 강을 통과하다|한니발의 알프스 통과|결과
제5장 칸나이 전투까지의 한니발 전쟁
한니발과 이탈리아 켈트족 |북부 이탈리아의 주인이 된 한니발|한니발의 군사 정치적 상황|한니발의 아펜니노 산맥 통과|플라미니우스|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이탈리아 동해안의 한니발|남부 이탈리아 전쟁: 파비우스|카푸아 진격과 아풀리아 전쟁|파비우스와 미누키우스|로마의 새로운 전쟁 준비|칸나이 전투|칸나이 전투의 결과|히스파니아로부터 병력 지원 실패|아프리카로부터 병력 지원|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의 동맹|카르타고와 쉬라쿠사이의 동맹|한니발의 카푸아와 남부 이탈리아 지배|로마군의 태도
제6장 칸나이에서 자마에 이르는 한니발 전쟁
위기|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한니발의 캄파니아 무력시위|새로운 캄파니아 전투|한니발의 방어전|일시적으로 좌절된 지원|시킬리아 전쟁의 종결|쉬라쿠사이의 정복|시킬리아 유격전|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성과 없는 전쟁|필립포스와 희랍 도시국가들의 강화조약|필립포스와 로마와의 강화|히스파니아 전쟁|스키피오 부자(父子)의 성공|이베르 강 이남 히스파니아|푸블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의 히스파니아 원정|안달루시아 공략|히스파니아 점령|가데스 함락|이탈리아 전쟁|군대의 주둔 상황|남부 이탈리아의 충돌|로마군의 아르피 수복|한니발의 타렌툼 함락|카푸아 주변의 전투|한니발이 로마로 진군하다|카푸아의 무조건 항복|로마 인의 우세|한니발의 수세|전쟁의 압박|동맹들|하스드루발의 접근|새로운 무장: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의 진군|메타우로스 강 전투: 하스드루발의 죽음|한니발: 브루티움으로 퇴각|소강상태의 이탈리아 전쟁|마고의 이탈리아 상륙|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아프리카의 대비|스키피오의 해군 진영|카르타고 진영에 대한 기습 공격|강화협정|한니발의 아프리카 귀환|전투 재개|자마 전투|강화협정|전쟁의 결과|이탈리아 외부|이탈리아 내부
제7장 한니발 전쟁에서 제3차 카르타고 전쟁까지
파두스 강 유역의 정복|알프스 이북 켈트족의 유입|파두스 강 이남의 식민화|리구리아|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카르타고|한니발|카르타고에 계속되는 로마의 도발|누미디아 인|마시니사|누미디아의 확장과 문명화|히스파니아의 상황|로마 인과 히스파니아 인의 전쟁|로마의 히스파니아 주둔군|히스파니아의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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