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삶을 놓지 않는 인간의 존엄함!
로베르 앙텔므가 말하는 인간, 그리고 인류!!
여기에 내가 겪었던 것을 옮겨 적는다. 그곳의 공포는 거대한 것이 아니었다. 간더스하임에는 가스실도, 시체 소각장도 없었다. 그곳의 공포는 어둠, 지표의 절대적 부재, 고독, 끊이지 않는 억압, 점진적 소멸이었다. 우리 투쟁의 원동력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다는 필사적 요구, 그마저도 거의 언제나 고독한 필사적 요구였다. ― 머리말
역사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은 매우 끔찍한 전쟁이었다. 일본에 떨어진 폭탄으로 인해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폭탄이 남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전쟁이 끝난 후엔 냉전이 시작되어 실상 2차 대전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는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 시 인간에 대한 학살은 꾸준히 실행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은 한 인간이 한 인종을 절멸시키기 위해 그 인종을 마구잡이로 포획해 수용소에서 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는 학살이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끔찍한 범죄의 진행을 자신의 의무라고 규정짓던 사람들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나치가 절멸시키려던 것은 유태인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 한 인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독일은 집시, 어린아이, 레지스탕스, 독일 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까지 수용소에 가둬 놓고, 그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죽기만을 기다렸다(물론 아우슈비츠에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만큼 죽음을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다루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어떤 이들은 죽었고, 어떤 이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끔찍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린비출판사에서는 그 기록 중 하나,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수용소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인류』(L''Espece humaine)를,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1990)의 이야기를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노력해 온 고재정 선생의 번역으로 출간하였다.
로베르 앙텔므는 1943년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1944년 6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45년 4월 다하우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해방되기까지의 수용소 경험을 서술하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후 앙텔므는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 편집에 종사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알제리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1960년)과 68학생운동의 「학생-작가 행동위원회」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인류』는 ‘강제수용소 증언문학’ 가운데에서도 가장 초기(1947년 출간)작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나아가서는 2차 대전 후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인류』를 관통하는 ‘단지 고통 속에 함께 있음으로서의 저항’, ‘타자에 대한 무한한 인정으로서의 우정’ 이라는 앙텔므의 생각은 모리스 블랑쇼, 자크 데리다, 장-뤽 낭시의 정치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대 프랑스 철학에 영감을 제공했다. 특히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유명한 조르조 아감벤도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프리모 레비와 함께 가장 중요한 ‘증언자’로 앙텔므를 들며 『인류』를 읽어 낸 바 있다.
인류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
‘인간은 누구나 다 인간이다’, ‘인류는 하나다’. 이 단순한 말 속에 담긴 고통과 피로, 분노와 혐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인정하는 인간 정신의 힘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인류』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앙텔므가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류』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결론은 “모든 인간은 인류에 속하며 인류는 하나다”라는 단 하나의 주장이다. 이 주장이 단지 선언적인 것이라면 아무런 힘도 없으리라. 앙텔므는 수용소에 있는 동안 죽음에 노출된 채로 드러나는 신체의 변화를 세밀하게 서술한다. 열 달 동안의 그의 수용소 생활에 대한 묘사는 마치 스스로 실험을 하듯 적어내리는 생체 실험 일지와 같다. 그는 피험자인 동시에 관찰자이다. 또한 그 자신이 바로 수용소에서 한 인간에게 보여 준 실험 과정의 생생한 기록이기에 그가 겪었던 고통을 분리될 수 없는 결론으로 받아들일 때, 인류는 하나라는 그의 외침은 비로소 인류 전체의 의미와 힘을 얻게 된다.
수많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인류』의 의미가 특별한 것은 그의 책이 수용소에 대한 증언에 머물지 않고 인간, 나아가 인류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그의 책이 ‘부헨발트수용소’, ‘간더스하임 코만도’, ‘죽음의 열차’ 혹은 ‘다하우 해방의 순간’ 등이 아니라 『인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재구성된 수용소의 일상!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말하고 싶다는 열망, 말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체험 사이의 간극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4월 29일, 다하우수용소를 ‘해방’시킨 미군 병사들은 그 기이한 참상 앞에서 “Frightful”을 연발했다. 그러나 ‘끔찍한’이라는 그 단어로 강제수용소의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미군 병사들 앞에서 앙텔므는 이미 “어떤 무한하고 전달 불가능한 앎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떠올린다. 현장을 목도한 상대에게도 어떻게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자칫 ‘끔찍한’, ‘상상 불가능한’ 등 “허공의 말을 방패삼아” 진실에 다가가지 않을 위험은 증언문학, 특히 강제수용소 증언문학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이 ‘전달 불가능한’, ‘상상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인류』는 우리에게 수용소를 ‘생각’하게 만든다. 가스실도 소각로도 없는 간더스하임 코만도의 경우 죽음은 수용소의 일상 속에, 추위와 굶주림, 구타와 노역, 그리고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산재해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반복되는 그 일상적 위협들 ―시간, 노역, 구타, 굶주림, 추위―을 우리는 앙텔므의 시선을 통해서 보고, 그것들에 대해 성찰하는 앙텔므의 의식 속으로 함께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수용소의 일상은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재구성되고 우리에게 전달된다.
『인류』에는 마르고 굶주리는 몸과 그런 몸을 바라보는 의식에 대한 하루하루의 기록이 있다. 빵이 삼켜져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애타는 일인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배고픈 일인지, 텅 빈 입과 텅 빈 위의 강박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추위와 노역이 어떻게 몸을 마모시키는지, 그 마모가 어떻게 돌이킬 길 없이 죽음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의미하는지를 우리는 언어를 통해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실사에 가까운 수용소 일상의 재구성이 증언문학으로서 『인류』의 기본 자산이라면, 이미 앞서 강조한 수용소의 조직과 사회, 인간관계와 인간성에 대한 성찰은 『인류』에게 철학과 문학의 힘을 더해 준다.
수용소 안의 죽음, 죽음에 대한 무례함
죽음의 일상화
누구 한 명이 죽는다. 그의 친구들은 그 사실을 더 특별하게 느끼겠지만, 이내 잊을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고,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다. 그가 죽는다, 점호다. 그가 죽는다, 수프 시간이다. 그가 죽는다, 우리는 얻어맞는다. 그는 홀로 죽는다.(147
수용소는 죽음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절멸수용소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강제수용소 역시 핵심은 마찬가지다. 동물, 인간, 자연, 문명을 나누는 경계 어딘가에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다. 두 달을 지낸 부헨발트수용소를 떠나면서 앙텔므는 그곳을 단적으로 이렇게 요약한다. “산 자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죽음 앞에서는 무심한 세계”, “이곳에서 죽음은 매 순간 삶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부엌의 굴뚝 옆에서 나란히 시체 소각장의 굴뚝이 연기를 피워 올렸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 산 자들의 수프에 죽은 자들의 뼈가 들어 있었고, 죽은 자 입안의 금은 산 자의 빵과 교환되었다. 죽음은 일상적 삶의 회로에 경악스러울 만큼 끼어들어 와 있었다.”
부헨발트를 떠난 후 도착한 간더스하임의 비행기 조립 공장에서 주검은 매장의 표식을 남기지 못하고 묻혀 사라져야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만연해 있지만, 죽음은 하등 특별한 사건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내가 죽을 자리를 내줘
회한은 아니다. 분노라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은 혐오감이다. 무섭지도 않은 이 앉아 있는 시신, 지난밤 사경을 헤매기 시작할 때 우리들에게 발길질당했던 시신이 모든 생명들 앞에 몸을 곤두세웠다.(415
죽음에 대한 무례함은 퇴각하는 ‘죽음의 행렬’에서 더 노골화된다. “하다못해 범죄의 엄숙함이나 비밀스러움마저도 없이” 행렬을 이루는 목숨들은 사살당했으며, 행렬 속의 수감자들은 “무작위로 죽도록 지명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13일 동안 갇혀서 달린 ‘죽음의 열차’에 뒤엉킨 사람들은 “내가 죽을 수 있는 자리를 내줘……”라고 애원하며 앉아서 죽어 간다. 삶에 대한 예의보다 죽음에 대한 예의가 사라질 때 인간의 존엄성이 더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사실을 수용소는 보여 주었다. 죽음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면 인간관계는 붕괴하고 사회는 와해된다. 2015년 2월 우리 주변은 어떤가, ‘죽음을 기억하라’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예의를 간직하라’고 새겨야 할 시간이다.
무지, 또 다른 공모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 사태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어떤 역할을 한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인도 위에 있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 아니면 우리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이 역사 안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이 있다. 그들 모두는 우리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한다. …… 우리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우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보여 준다.”(365~366
지난 2014년 우리는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또한 많은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교통사고”를 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하냐고 묻는 국회의원이 있었는가 하면, 아무 연고도 없는 많은 시민들은 진상 규명을 위한 단식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무참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음의 책임을 묻는다. 그것은 다시 그것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가슴 아픈 절규이기도 하다.
강제수용소의 비극은 누구의 책임일까? 앙텔므는 그 책임을 히틀러와 군 수뇌부, 직속부하들에게만 귀속시키지 않는다. 앙텔므에게 강제수용소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라는 개념 자체의 결정적 부재”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삶의 붕괴에 대한 성향”이다. 이러한 성향과 “가스실로 귀결되는 논리에 투항하기”가 결합한 상태는 독일의 “심층적 본질”을 형성하였으며, 다수의 독일인들도 그것을 공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강제수용소가 유지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수백만 명의 인간들과 그들의 체제가 바라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앙텔므는 코만도 인근 농가 주민들의 동조와 무관심을 주목한다. 철조망 너머 노역하는 수감자들을 보며 무심히 지나가는 행인들도 묘사한다. 공장에서 구타당하는 수감자들을 보며 키득거리는 독일 여인들도 놓치지 않는다. 수감자들이 행렬을 지어 이동하며 통과하는 도시와 그 도시 사람들, “이 도시 사람들의 무지와 덧창 뒤에서 매일 저녁 반복되는 이 잠의 무지 앞에서 진저리 쳤다”. 외면하는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몰라도 되는 것일까? 앙텔므는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간의 일을 알아야 할 책무에 대해 말한다. 모든 개인은 역사 앞에서, 그 거대한 흐름 안에서 나름의 위치와 책임이 있다. 전쟁이 다가올 때,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못 봤다, 나는 몰랐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모두는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할 것이다.
강제수용소, 타자에 대한 경멸
앙텔므의 성찰적 의식은 그토록 비정상적인 강제수용소가 인간이 만든 ‘정상적’ 사회라는 ‘저곳’ 바깥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곳 수용소에서 백일하에 드러나는 차별의 원리는 저곳 바깥 세계에서 은폐된 채 유지하고 관리되는 조직과 권력의 작동 원리와 동일한 것이다.
앙텔므는 ‘의도적으로’ 『인류』를 10월 1일, 간더스하임으로 이송되는 날부터 시작한다. 부헨발트수용소에 수감된 8월부터도, 그가 체포되었던 6월부터도 아니고, 신설 코만도로 떠나는 그 순간부터를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코만도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성되고 카포들이 지명되는 과정, 권력과 차별의 생성 과정을 응시하면서, 차별이 어떻게 경멸, 구타, 학살을 정당화하는지 보게 되고, 수용소 귀족이라는 특권층의 존재는 다수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과, 생기지 않아야 할 계급이 생겼을 때 그 세계가 얼마나 부패하고 왜곡되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이 추가로 먹는 빵, 마가린, 마른 소시지, 그리고 몇 리터, 또 몇 리터씩의 수프, 그것은 우리들의 것, 우리에게서 훔친 것이다. 역할은 분배되었다. 그들이 살고 살찌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일하고, 배고파 죽고, 매를 맞아야 한다.” 뼈만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탱탱한 얼굴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상스러운 일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장 전적인 존경과 가장 결정적인 경멸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혐오를 그 어디에서보다도 완전한 확신 속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178센티미터의 몸이 35킬로그램에 이르도록 굶주리고, 노역으로 마모되고 구타당하며, 퇴각하는 행렬에서는 언제라도 ‘너’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임의 사살될 위험에 처해지고, 닫힌 객차에 물도 빵도 없이 실려 주검과 뒤섞여 죽음을 견뎌야 했던 “상상 불가능한” 일을 겪은 뒤 생환하여 쏟아 내듯이 써낸 책의 결론이라면 ‘그들’에 대한 고발인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물론 『인류』에는 강제수용소에 대한 고발이 엄존한다. 친위대의 체계화된 폭력에 대한 혐오, 노역하는 수감자들을 구타하면서 애국 훈장이라도 다는 듯 여기는 독일 민간인들에 대한 증오는 강렬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수용소의 상황은 “인종과 계층에 따른 구분”을 당연시하며 돌아가는 세상사를 “확대하고 극단적으로 희화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제수용소는 단지 “타자를 경멸하는 인류에게 완전히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다.
강제수용소 ‘이후’를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임이 분명한 이런 생각, ‘친위대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만일 친위대와 우리 사이에,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큰 간극이 벌어진 이 순간에, 한쪽의 예속의 극한과 다른 쪽의 권력의 극한이 초자연적인 관계 속에서 고착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자연과 죽음 앞에서 친위대와 우리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는 인류는 단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이 통일성을 은폐하는 모든 것, 존재들을 착취당하고 예속당하는 자의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류의 존재를 전제하는 모든 것은 허위이자 광기이다. 여기 우리가 그 증거를, 절대 반박 불가능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최악의 희생자로서 우리가, 박해자의 힘이 가장 악질적으로 행사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 힘은 인간의 힘들 중 하나인 살해의 힘일 뿐임을 확인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박해자는 인간을 죽일 수는 있지만, 인간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는 못한다.(339
나치즘의 패망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간 등급설’의 패망으로 기록되어야 하며, 따라서 강제수용소에 대한 기억과 기록도 인간에 대해 차별과 등급을 적용하려는 모든 시도의 허위와 광기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을 때 사태의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치즘은 그들이 등급 외로 취급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였지만, 그들이 증명한 것은 인간성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다른 전쟁의 패전과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앙텔므는 말한다. 전쟁이 상대를 적으로 인정하여 싸우려는 행위라면 나치즘은 상대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아 없애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적군, 폭탄, 그것은 잔인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붉은 피를 흐르게 만들고, 신문의 기삿거리가 된다. 전쟁, 그것은 하나의 제도이며, 독일어로는 Krieg(전쟁)라고 한다.” “이 전쟁은 건전한 패배로 끝날 수 없었다. 독일이 스스로 썩어 가는 것을 목도하여야만 했다. 나치즘은 분명한 현실이고, 나치즘이 그 표식을 이 종말에 찍어야만 했다. 그들의 병사들의 얼굴이나 신체에 갓 생긴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 속에서 썩어 가는 우리들의 뼈만 남은 얼굴 주위의 파리 떼들도 있다.” 독일이 패전에 따른 결과와 나치즘의 광기와 허위에 따른 결과를 수용해야 하는 것처럼 인류 또한 “인간 역사의 한 극단적 순간에 지나지 않는” 강제수용소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패주하는 독일군, 공습경보가 울리는 독일 소도시, 수감자들을 끌고 우왕좌왕하는 친위대, 그 친위대의 총 끝에 여전히 목숨이 매달린 채 내지르는 “인류는 단 하나”라는 앙텔므의 말은 물론 두루뭉술한 용서와 화합의 제언이 아니다. 인간을 등급화함으로써 인류의 단일성을 문제 삼으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라는 경고이자 다짐이다. 동시에 그 말은 차별과 예속, 착취에서 벗어나야 하는 “인류 전체의 해방의 전망”을 담고 있는 말이다.
* * *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과 자유, 연대와 책임이라는 사회적 책무는 물이나 공기, 식량처럼 생명유지의 필수 요소이며 무엇보다도 공생의 필수 요건이다. 구체적 관찰과 성찰적 의식의 공존, 수용소 내부 현실에 멈추지 않고 수용소의 안과 밖, 수용소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연결 지어 바라보는 시선, 더불어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적 시선도 시종일관 함께한다는 점이 『인류』가 다른 증언문학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기억ㅇ하고 기술한 인간 의식과 정신의 불멸의 승리의 기록이 되는 역설이 바로 『인류』가 주는 감동의 원천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년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1990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1944년 6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부헨발트수용소에 수감된다. 1945년 4월 다하우로 이송되어 해방되기까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류』를 집필하였다. 『인류』는 현대 프랑스 문학?철학?사회정치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서, 앙텔므는 이 한 권의 책으로 프랑스 지성사에 이름을 남겼다. 생환 이후 앙텔므는 갈리마르사의 플레이아드 총서 편집에 종사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알제리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 68운동의 「학생-작가 행동위원회」를 주도하였다. 또한 그의 전처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가 살던 파리 6구 생-브누아 5번지는 디오니스 마스콜로, 에드가 모랭, 모리스 블랑쇼, 클로드 루아 등 작가, 지식인들의 회합 장소로서, 이들은 1940~1960년대 ‘생-브누아 그룹’을 형성하여 교류하고, 활동하였다. ‘단지 고통 속에 함께 있음으로서의 저항’, ‘타자에 대한 무한한 인정으로서의 우정’이라는 앙텔므의 생각은 블랑쇼, 데리다, 낭시의 정치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로 변주되어 현대 프랑스 철학에 영감을 제공하였다
역자 : 고재정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에서 누보로망 연구로 석사학위를, 파리-낭테르대학교에서 모리스 블랑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미디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주요 목차
머리말
1부_ 간더스하임
2부_ 길
3부_ 끝
옮긴이후기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삶을 놓지 않는 인간의 존엄함!
로베르 앙텔므가 말하는 인간, 그리고 인류!!
여기에 내가 겪었던 것을 옮겨 적는다. 그곳의 공포는 거대한 것이 아니었다. 간더스하임에는 가스실도, 시체 소각장도 없었다. 그곳의 공포는 어둠, 지표의 절대적 부재, 고독, 끊이지 않는 억압, 점진적 소멸이었다. 우리 투쟁의 원동력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다는 필사적 요구, 그마저도 거의 언제나 고독한 필사적 요구였다. ― 머리말
역사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은 매우 끔찍한 전쟁이었다. 일본에 떨어진 폭탄으로 인해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폭탄이 남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전쟁이 끝난 후엔 냉전이 시작되어 실상 2차 대전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는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 시 인간에 대한 학살은 꾸준히 실행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은 한 인간이 한 인종을 절멸시키기 위해 그 인종을 마구잡이로 포획해 수용소에서 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는 학살이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끔찍한 범죄의 진행을 자신의 의무라고 규정짓던 사람들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나치가 절멸시키려던 것은 유태인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 한 인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독일은 집시, 어린아이, 레지스탕스, 독일 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까지 수용소에 가둬 놓고, 그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죽기만을 기다렸다(물론 아우슈비츠에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만큼 죽음을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다루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어떤 이들은 죽었고, 어떤 이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끔찍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린비출판사에서는 그 기록 중 하나,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수용소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인류』(L''Espece humaine)를,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1990)의 이야기를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노력해 온 고재정 선생의 번역으로 출간하였다.
로베르 앙텔므는 1943년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1944년 6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45년 4월 다하우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해방되기까지의 수용소 경험을 서술하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후 앙텔므는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 편집에 종사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알제리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1960년)과 68학생운동의 「학생-작가 행동위원회」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인류』는 ‘강제수용소 증언문학’ 가운데에서도 가장 초기(1947년 출간)작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나아가서는 2차 대전 후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인류』를 관통하는 ‘단지 고통 속에 함께 있음으로서의 저항’, ‘타자에 대한 무한한 인정으로서의 우정’ 이라는 앙텔므의 생각은 모리스 블랑쇼, 자크 데리다, 장-뤽 낭시의 정치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대 프랑스 철학에 영감을 제공했다. 특히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유명한 조르조 아감벤도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프리모 레비와 함께 가장 중요한 ‘증언자’로 앙텔므를 들며 『인류』를 읽어 낸 바 있다.
인류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
‘인간은 누구나 다 인간이다’, ‘인류는 하나다’. 이 단순한 말 속에 담긴 고통과 피로, 분노와 혐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인정하는 인간 정신의 힘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인류』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앙텔므가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류』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결론은 “모든 인간은 인류에 속하며 인류는 하나다”라는 단 하나의 주장이다. 이 주장이 단지 선언적인 것이라면 아무런 힘도 없으리라. 앙텔므는 수용소에 있는 동안 죽음에 노출된 채로 드러나는 신체의 변화를 세밀하게 서술한다. 열 달 동안의 그의 수용소 생활에 대한 묘사는 마치 스스로 실험을 하듯 적어내리는 생체 실험 일지와 같다. 그는 피험자인 동시에 관찰자이다. 또한 그 자신이 바로 수용소에서 한 인간에게 보여 준 실험 과정의 생생한 기록이기에 그가 겪었던 고통을 분리될 수 없는 결론으로 받아들일 때, 인류는 하나라는 그의 외침은 비로소 인류 전체의 의미와 힘을 얻게 된다.
수많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인류』의 의미가 특별한 것은 그의 책이 수용소에 대한 증언에 머물지 않고 인간, 나아가 인류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그의 책이 ‘부헨발트수용소’, ‘간더스하임 코만도’, ‘죽음의 열차’ 혹은 ‘다하우 해방의 순간’ 등이 아니라 『인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재구성된 수용소의 일상!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말하고 싶다는 열망, 말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체험 사이의 간극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4월 29일, 다하우수용소를 ‘해방’시킨 미군 병사들은 그 기이한 참상 앞에서 “Frightful”을 연발했다. 그러나 ‘끔찍한’이라는 그 단어로 강제수용소의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미군 병사들 앞에서 앙텔므는 이미 “어떤 무한하고 전달 불가능한 앎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떠올린다. 현장을 목도한 상대에게도 어떻게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자칫 ‘끔찍한’, ‘상상 불가능한’ 등 “허공의 말을 방패삼아” 진실에 다가가지 않을 위험은 증언문학, 특히 강제수용소 증언문학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이 ‘전달 불가능한’, ‘상상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인류』는 우리에게 수용소를 ‘생각’하게 만든다. 가스실도 소각로도 없는 간더스하임 코만도의 경우 죽음은 수용소의 일상 속에, 추위와 굶주림, 구타와 노역, 그리고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산재해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반복되는 그 일상적 위협들 ―시간, 노역, 구타, 굶주림, 추위―을 우리는 앙텔므의 시선을 통해서 보고, 그것들에 대해 성찰하는 앙텔므의 의식 속으로 함께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수용소의 일상은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재구성되고 우리에게 전달된다.
『인류』에는 마르고 굶주리는 몸과 그런 몸을 바라보는 의식에 대한 하루하루의 기록이 있다. 빵이 삼켜져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애타는 일인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배고픈 일인지, 텅 빈 입과 텅 빈 위의 강박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추위와 노역이 어떻게 몸을 마모시키는지, 그 마모가 어떻게 돌이킬 길 없이 죽음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의미하는지를 우리는 언어를 통해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실사에 가까운 수용소 일상의 재구성이 증언문학으로서 『인류』의 기본 자산이라면, 이미 앞서 강조한 수용소의 조직과 사회, 인간관계와 인간성에 대한 성찰은 『인류』에게 철학과 문학의 힘을 더해 준다.
수용소 안의 죽음, 죽음에 대한 무례함
죽음의 일상화
누구 한 명이 죽는다. 그의 친구들은 그 사실을 더 특별하게 느끼겠지만, 이내 잊을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고,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다. 그가 죽는다, 점호다. 그가 죽는다, 수프 시간이다. 그가 죽는다, 우리는 얻어맞는다. 그는 홀로 죽는다.(147
수용소는 죽음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절멸수용소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강제수용소 역시 핵심은 마찬가지다. 동물, 인간, 자연, 문명을 나누는 경계 어딘가에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다. 두 달을 지낸 부헨발트수용소를 떠나면서 앙텔므는 그곳을 단적으로 이렇게 요약한다. “산 자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죽음 앞에서는 무심한 세계”, “이곳에서 죽음은 매 순간 삶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부엌의 굴뚝 옆에서 나란히 시체 소각장의 굴뚝이 연기를 피워 올렸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 산 자들의 수프에 죽은 자들의 뼈가 들어 있었고, 죽은 자 입안의 금은 산 자의 빵과 교환되었다. 죽음은 일상적 삶의 회로에 경악스러울 만큼 끼어들어 와 있었다.”
부헨발트를 떠난 후 도착한 간더스하임의 비행기 조립 공장에서 주검은 매장의 표식을 남기지 못하고 묻혀 사라져야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만연해 있지만, 죽음은 하등 특별한 사건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내가 죽을 자리를 내줘
회한은 아니다. 분노라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은 혐오감이다. 무섭지도 않은 이 앉아 있는 시신, 지난밤 사경을 헤매기 시작할 때 우리들에게 발길질당했던 시신이 모든 생명들 앞에 몸을 곤두세웠다.(415
죽음에 대한 무례함은 퇴각하는 ‘죽음의 행렬’에서 더 노골화된다. “하다못해 범죄의 엄숙함이나 비밀스러움마저도 없이” 행렬을 이루는 목숨들은 사살당했으며, 행렬 속의 수감자들은 “무작위로 죽도록 지명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13일 동안 갇혀서 달린 ‘죽음의 열차’에 뒤엉킨 사람들은 “내가 죽을 수 있는 자리를 내줘……”라고 애원하며 앉아서 죽어 간다. 삶에 대한 예의보다 죽음에 대한 예의가 사라질 때 인간의 존엄성이 더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사실을 수용소는 보여 주었다. 죽음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면 인간관계는 붕괴하고 사회는 와해된다. 2015년 2월 우리 주변은 어떤가, ‘죽음을 기억하라’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예의를 간직하라’고 새겨야 할 시간이다.
무지, 또 다른 공모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 사태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어떤 역할을 한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인도 위에 있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 아니면 우리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이 역사 안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이 있다. 그들 모두는 우리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한다. …… 우리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우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보여 준다.”(365~366
지난 2014년 우리는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또한 많은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교통사고”를 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하냐고 묻는 국회의원이 있었는가 하면, 아무 연고도 없는 많은 시민들은 진상 규명을 위한 단식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무참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음의 책임을 묻는다. 그것은 다시 그것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가슴 아픈 절규이기도 하다.
강제수용소의 비극은 누구의 책임일까? 앙텔므는 그 책임을 히틀러와 군 수뇌부, 직속부하들에게만 귀속시키지 않는다. 앙텔므에게 강제수용소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라는 개념 자체의 결정적 부재”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삶의 붕괴에 대한 성향”이다. 이러한 성향과 “가스실로 귀결되는 논리에 투항하기”가 결합한 상태는 독일의 “심층적 본질”을 형성하였으며, 다수의 독일인들도 그것을 공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강제수용소가 유지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수백만 명의 인간들과 그들의 체제가 바라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앙텔므는 코만도 인근 농가 주민들의 동조와 무관심을 주목한다. 철조망 너머 노역하는 수감자들을 보며 무심히 지나가는 행인들도 묘사한다. 공장에서 구타당하는 수감자들을 보며 키득거리는 독일 여인들도 놓치지 않는다. 수감자들이 행렬을 지어 이동하며 통과하는 도시와 그 도시 사람들, “이 도시 사람들의 무지와 덧창 뒤에서 매일 저녁 반복되는 이 잠의 무지 앞에서 진저리 쳤다”. 외면하는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몰라도 되는 것일까? 앙텔므는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간의 일을 알아야 할 책무에 대해 말한다. 모든 개인은 역사 앞에서, 그 거대한 흐름 안에서 나름의 위치와 책임이 있다. 전쟁이 다가올 때,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못 봤다, 나는 몰랐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모두는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할 것이다.
강제수용소, 타자에 대한 경멸
앙텔므의 성찰적 의식은 그토록 비정상적인 강제수용소가 인간이 만든 ‘정상적’ 사회라는 ‘저곳’ 바깥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곳 수용소에서 백일하에 드러나는 차별의 원리는 저곳 바깥 세계에서 은폐된 채 유지하고 관리되는 조직과 권력의 작동 원리와 동일한 것이다.
앙텔므는 ‘의도적으로’ 『인류』를 10월 1일, 간더스하임으로 이송되는 날부터 시작한다. 부헨발트수용소에 수감된 8월부터도, 그가 체포되었던 6월부터도 아니고, 신설 코만도로 떠나는 그 순간부터를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코만도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성되고 카포들이 지명되는 과정, 권력과 차별의 생성 과정을 응시하면서, 차별이 어떻게 경멸, 구타, 학살을 정당화하는지 보게 되고, 수용소 귀족이라는 특권층의 존재는 다수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과, 생기지 않아야 할 계급이 생겼을 때 그 세계가 얼마나 부패하고 왜곡되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이 추가로 먹는 빵, 마가린, 마른 소시지, 그리고 몇 리터, 또 몇 리터씩의 수프, 그것은 우리들의 것, 우리에게서 훔친 것이다. 역할은 분배되었다. 그들이 살고 살찌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일하고, 배고파 죽고, 매를 맞아야 한다.” 뼈만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탱탱한 얼굴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상스러운 일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장 전적인 존경과 가장 결정적인 경멸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혐오를 그 어디에서보다도 완전한 확신 속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178센티미터의 몸이 35킬로그램에 이르도록 굶주리고, 노역으로 마모되고 구타당하며, 퇴각하는 행렬에서는 언제라도 ‘너’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임의 사살될 위험에 처해지고, 닫힌 객차에 물도 빵도 없이 실려 주검과 뒤섞여 죽음을 견뎌야 했던 “상상 불가능한” 일을 겪은 뒤 생환하여 쏟아 내듯이 써낸 책의 결론이라면 ‘그들’에 대한 고발인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물론 『인류』에는 강제수용소에 대한 고발이 엄존한다. 친위대의 체계화된 폭력에 대한 혐오, 노역하는 수감자들을 구타하면서 애국 훈장이라도 다는 듯 여기는 독일 민간인들에 대한 증오는 강렬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수용소의 상황은 “인종과 계층에 따른 구분”을 당연시하며 돌아가는 세상사를 “확대하고 극단적으로 희화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제수용소는 단지 “타자를 경멸하는 인류에게 완전히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다.
강제수용소 ‘이후’를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임이 분명한 이런 생각, ‘친위대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만일 친위대와 우리 사이에,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큰 간극이 벌어진 이 순간에, 한쪽의 예속의 극한과 다른 쪽의 권력의 극한이 초자연적인 관계 속에서 고착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자연과 죽음 앞에서 친위대와 우리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는 인류는 단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이 통일성을 은폐하는 모든 것, 존재들을 착취당하고 예속당하는 자의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류의 존재를 전제하는 모든 것은 허위이자 광기이다. 여기 우리가 그 증거를, 절대 반박 불가능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최악의 희생자로서 우리가, 박해자의 힘이 가장 악질적으로 행사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 힘은 인간의 힘들 중 하나인 살해의 힘일 뿐임을 확인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박해자는 인간을 죽일 수는 있지만, 인간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는 못한다.(339
나치즘의 패망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간 등급설’의 패망으로 기록되어야 하며, 따라서 강제수용소에 대한 기억과 기록도 인간에 대해 차별과 등급을 적용하려는 모든 시도의 허위와 광기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을 때 사태의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치즘은 그들이 등급 외로 취급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였지만, 그들이 증명한 것은 인간성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다른 전쟁의 패전과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앙텔므는 말한다. 전쟁이 상대를 적으로 인정하여 싸우려는 행위라면 나치즘은 상대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아 없애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적군, 폭탄, 그것은 잔인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붉은 피를 흐르게 만들고, 신문의 기삿거리가 된다. 전쟁, 그것은 하나의 제도이며, 독일어로는 Krieg(전쟁)라고 한다.” “이 전쟁은 건전한 패배로 끝날 수 없었다. 독일이 스스로 썩어 가는 것을 목도하여야만 했다. 나치즘은 분명한 현실이고, 나치즘이 그 표식을 이 종말에 찍어야만 했다. 그들의 병사들의 얼굴이나 신체에 갓 생긴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 속에서 썩어 가는 우리들의 뼈만 남은 얼굴 주위의 파리 떼들도 있다.” 독일이 패전에 따른 결과와 나치즘의 광기와 허위에 따른 결과를 수용해야 하는 것처럼 인류 또한 “인간 역사의 한 극단적 순간에 지나지 않는” 강제수용소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패주하는 독일군, 공습경보가 울리는 독일 소도시, 수감자들을 끌고 우왕좌왕하는 친위대, 그 친위대의 총 끝에 여전히 목숨이 매달린 채 내지르는 “인류는 단 하나”라는 앙텔므의 말은 물론 두루뭉술한 용서와 화합의 제언이 아니다. 인간을 등급화함으로써 인류의 단일성을 문제 삼으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라는 경고이자 다짐이다. 동시에 그 말은 차별과 예속, 착취에서 벗어나야 하는 “인류 전체의 해방의 전망”을 담고 있는 말이다.
* * *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과 자유, 연대와 책임이라는 사회적 책무는 물이나 공기, 식량처럼 생명유지의 필수 요소이며 무엇보다도 공생의 필수 요건이다. 구체적 관찰과 성찰적 의식의 공존, 수용소 내부 현실에 멈추지 않고 수용소의 안과 밖, 수용소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연결 지어 바라보는 시선, 더불어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적 시선도 시종일관 함께한다는 점이 『인류』가 다른 증언문학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기억ㅇ하고 기술한 인간 의식과 정신의 불멸의 승리의 기록이 되는 역설이 바로 『인류』가 주는 감동의 원천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년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1990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1944년 6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부헨발트수용소에 수감된다. 1945년 4월 다하우로 이송되어 해방되기까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류』를 집필하였다. 『인류』는 현대 프랑스 문학?철학?사회정치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서, 앙텔므는 이 한 권의 책으로 프랑스 지성사에 이름을 남겼다. 생환 이후 앙텔므는 갈리마르사의 플레이아드 총서 편집에 종사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알제리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 68운동의 「학생-작가 행동위원회」를 주도하였다. 또한 그의 전처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가 살던 파리 6구 생-브누아 5번지는 디오니스 마스콜로, 에드가 모랭, 모리스 블랑쇼, 클로드 루아 등 작가, 지식인들의 회합 장소로서, 이들은 1940~1960년대 ‘생-브누아 그룹’을 형성하여 교류하고, 활동하였다. ‘단지 고통 속에 함께 있음으로서의 저항’, ‘타자에 대한 무한한 인정으로서의 우정’이라는 앙텔므의 생각은 블랑쇼, 데리다, 낭시의 정치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로 변주되어 현대 프랑스 철학에 영감을 제공하였다
역자 : 고재정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에서 누보로망 연구로 석사학위를, 파리-낭테르대학교에서 모리스 블랑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미디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주요 목차
머리말
1부_ 간더스하임
2부_ 길
3부_ 끝
옮긴이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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