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로 두 달,
“사태의 열기를 유지하면서 사태를 사고하는” 지젝의 신간
자유주의 좌파는 왜 가짜 좌파인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왜 가짜 근본주의자들인가?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주지하다시피 이슬람 근본주의의 성향을 지닌 두 형제 테러리스트가 풍자 주간신문인 샤를리 에브도 사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했다. 총격 끝에 열두 명이 숨졌다. 이 경악스러운 테러는 언뜻 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만평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샤를리 에브도는 이미 여러 번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실었고, 그 때문에 폭탄 테러나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 게재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가 극단적인 테러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더 사고해야 한다. (…) 이 사건을 감싸는 큰 흐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감싼 큰 흐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더 사고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실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만평이 테러나 방화 사건을 불러왔을 때 잠깐 잘 팔렸을 뿐 늘 적자에 시달리던 인기 없는 신문이었다. 그렇다면 질문. 어째서 두 형제는 이런 한물간 신문에 실린 만평에 ‘분노’를 느꼈을까? 진정한 근본주의자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특징들이 그들에게는 유독 보이지 않는다. 진짜 근본주의자에게는 시기도 원한도 없다. 그는 불신자가 사는 방식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질문을 바꾸자. 어째서 두 형제는 이런 한물간 신문에 실린 만평에 ‘위협’을 느꼈을까? 어째서 그들은 불신자에게 ‘위협’을 느꼈을까?
지젝은 이미 [예수는 괴물이다]나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기독교를 분해하고 비판했다. 이 책은 대상을 이슬람교로 바꾸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이다. 그는 묻는다. 혹시 테러리스트가 보이는 저 열정은 오히려 그에게 진짜 확신이 없음을 증거하는 게 아닐까? 얼마나 믿음이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 말하자면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휘두른 폭력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우리와 비슷하다는 것, 우리가 세운 기준을 슬그머니 이용해 자신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많은 이가 테러에 맞서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를 외치면서 자유롭게 말할 자유를 옹호했지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에 대립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립은 결국 가짜 대립이며, 두 세력은 상대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만들어낸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근대적인가, 근대적인가?
세계 자본이 민족국가의 힘을 잠식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면서 ‘이슬람국가IS’가 나타났다. 그러나 세계 자본이 가져온 경악과 두려움을 똑같이 일으키는 주체가 IS 체제이기도 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바로 이 IS 안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사실 ‘근본주의’라는 말은 아랍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도 서구권, 특히 영어권에서 붙인 이름이다. 원리주의라고도 일컫는 근본주의가 단지 전통과 교리 준수를 중시하는 것이라면 모든 이슬람 종파가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근본주의가 가리키는 것은 테러를 단행하는 등 훨씬 과격한 태도다. 그렇다면 이슬람 근본주의는 단지 전근대적이기만 한 걸까?
이때 벤야민의 오래된 통찰이 여전히 유효하다. “파시즘이 부상한다는 것은 혁명이 실패했음을 입증한다.” 즉 파시즘의 부상은 좌파가 실패했음을 뜻한다. 특히 그것은 좌파가 미처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과 불만이 있었음을 뜻한다. 요컨대 좌파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세계 각국에서 IS에 합류하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프랑스는 9.11 테러 이후 미국처럼 우경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휩싸여 있다. 어째서일까? 이것은 역설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다운 확신이 없었듯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지킬 만큼 강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실제로 내재하는 결함에 대한 반응이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다. 바꾸어 말해 이 순간 근대적 자유주의와 전근대적 근본주의라는 도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슬람 근본주의는 근대적인가? 이 물음은 언뜻 어불성설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말했듯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통 및 교리 준수를 다른 종파보다 훨씬 중시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세계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꼭 전근대적 전통이나 전통적 생활양식에 기댈 필요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근대적 전통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미 근대적 언어로 말하고 있다. 내용은 전통적일지라도 말하는 방식은 근대적이다. 가령 IS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 바그다디의 사진을 보라. 그는 멋진 스위스제 시계를 차고 있다. 이 장면이 말해주는 사실은 이런 것이다. IS는 온라인으로 선전하고 금융거래를 할 만큼 잘 조직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근대화를 극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착적 근대화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그들은 착취당하고 지배당하면서 식민주의가 가하는 폭력과 모욕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서구 유산 가운데 좋다고 여길 만한 것들을 파괴하려는 걸까? 왜 평등주의나 개인의 자유를, 모든 권위에 대한 건강한 조롱과 풍자를 파괴하려는 걸까? “그들은 착취하고 폭력을 행사할뿐더러 상처를 더 후벼 파려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잔인성을 과시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서구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무엇이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가?
샤를리 에브도가 그랬듯, 이슬람교도가 사소한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것을 비웃는 건 쉽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관점 안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강조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도 성차별적·인종차별적 농담을, 심지어 종種차별적 농담을 규제한다. 말하자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우리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에 대립관계가 명확하지 않듯이, ‘이슬람 파시즘’의 부상이 좌파의 실패를 폭로하듯이, 그들은 어떤 거울상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슬람교도가 신성모독을 대면할 때 침묵하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한다면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은가? 기독교의 낙태반대운동에서 똑같은 태도가 나타난다. 매년 태아가 수십만 명 살해되는 상황 앞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침묵하지도, 가만있지도 못했다. 이런 차원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은 종교 근본주의와 유사하다. 정치적 올바름도 나름대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자유지상주의자는 정치적이고 영적인 모든 권위를 비웃고 풍자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타인이 겪는 고통과 모욕에 대한 과민한 반응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2011년 프랑스는 이른바 ‘부르카 금지법’을 만들었고, 이에 대해 파키스탄 출생의 한 여성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제소하기에 이르렀지만 유럽인권재판소는 그것이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두 인종이나 두 종교 집단이 함께 살지만 양립할 수 없는 삶의 규칙을 갖고 있을 때, 이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원래 이 문제를 풀려고 했다. 어떻게? 이를테면 아미시 공동체에 속한 아이들이 미국식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아동에게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정말’ 스스로 선택하려면 아미시 공동체에 길들여져 있는 습성을 제거하고 실제로 아이들을 미국식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이 취하는 태도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컨대 여자 이슬람교도는 종교적 억압 때문이 아니라 개인 신념의 표현으로 혹은 서구에 대항하는 정치적 시위로 부르카를 쓸 수 있다. 그렇지만 부르카를 쓰는 순간 그는 서구 세속사회 안에서 변두리로 내몰리게 된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매도당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이 ‘관용’을 베푸는 “자유로이 선택하는 주체”, 즉 아미시 공동체나 미국식 교육이냐 혹은 부르카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등장하려면 그는 먼저 자기 뿌리와 전통에서 잘려나가고 특수한 생활세계에서 분리되는, 지극히 험한 폭력을 당해야 한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읽어야 하는가?
한데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적어도 이 글에서는 서구식 자유주의에 익숙해진 이들 가령 유럽인이나 미국인을 가리킨다. ‘우리’ 안에 한국인 역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한국 전체 인구 중 무슬림은 0.1%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추모했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으며 “나는 샤를리다”에 동의했다. 그래서 김모 군이 IS에 가담한 사실이 확인됐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충격적이고 낯선 사건으로만 보였다. 혹은 특이한 극소수의 일이라고 치부했다. 이슬람은 여전히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에 머무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중요하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지젝은 아마도 이 질문을 이슬람교 안에서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자유주의의 언어로 이슬람교를 상대하면 상황이 더 나빠지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와 이야기하려면 이슬람교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 질문을 던질 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는 이슬람교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서로를 이간질한다. 이슬람교 앞에서는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자유주의 앞에서는 이슬람교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왜 지젝이 쓴 이 책을 읽는가? 그가 세계적인 석학이라서?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왜 하필이면 이슬람교를 갖고 글을 썼을까? 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많은 부분을 이슬람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비교 서술하는 데에 할애했다. 어째서였을까? 서문에 지젝이 쓴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테러집단이 가한 위협은 기적을 이뤄내고 말았다. 1968년 급진주의자가 낳은 세대를 1968년 급진주의자가 맞섰던 원래의 적과 화해시킨 것이다. 미국의 애국법이 프랑스식으로 실현된 것 같다. 자신을 스스로 감시에 내맡긴 대중이 애국법에 환호하는 꼴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 작가 소개
저 :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 태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 제8대학의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 혹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독일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이론화 하였다. 철학자로는 드물게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최근 인문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각주에 인용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두 차례의 강연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개혁파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의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는 이론과 현실, 문화의 창의적인 결합을 담아 지속적으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SF 소설,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철학과 접목시킨 독특한 문화 비평을 내놓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 『삐딱하게 보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까다로운 주체』, 『신체 없는 기관』, 『혁명이 다가온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HOW TO READ 라캉』, 『죽은 신을 위하여』, 『시차적 관점』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성관계는 없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레닌 재장전』『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공저)등이 있다.
역자 : 배성민
경북대 박사과정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예수는 괴물이다』(공역) 『광기』 『다윈의 경건한 생각』 『우리는 왜 아플까』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시작하며
1장 이슬람교는 생활이다
2장 이슬람교의 기록보관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옮긴이의 말
주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로 두 달,
“사태의 열기를 유지하면서 사태를 사고하는” 지젝의 신간
자유주의 좌파는 왜 가짜 좌파인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왜 가짜 근본주의자들인가?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주지하다시피 이슬람 근본주의의 성향을 지닌 두 형제 테러리스트가 풍자 주간신문인 샤를리 에브도 사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했다. 총격 끝에 열두 명이 숨졌다. 이 경악스러운 테러는 언뜻 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만평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샤를리 에브도는 이미 여러 번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실었고, 그 때문에 폭탄 테러나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 게재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가 극단적인 테러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더 사고해야 한다. (…) 이 사건을 감싸는 큰 흐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감싼 큰 흐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더 사고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실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만평이 테러나 방화 사건을 불러왔을 때 잠깐 잘 팔렸을 뿐 늘 적자에 시달리던 인기 없는 신문이었다. 그렇다면 질문. 어째서 두 형제는 이런 한물간 신문에 실린 만평에 ‘분노’를 느꼈을까? 진정한 근본주의자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특징들이 그들에게는 유독 보이지 않는다. 진짜 근본주의자에게는 시기도 원한도 없다. 그는 불신자가 사는 방식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질문을 바꾸자. 어째서 두 형제는 이런 한물간 신문에 실린 만평에 ‘위협’을 느꼈을까? 어째서 그들은 불신자에게 ‘위협’을 느꼈을까?
지젝은 이미 [예수는 괴물이다]나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기독교를 분해하고 비판했다. 이 책은 대상을 이슬람교로 바꾸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이다. 그는 묻는다. 혹시 테러리스트가 보이는 저 열정은 오히려 그에게 진짜 확신이 없음을 증거하는 게 아닐까? 얼마나 믿음이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 말하자면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휘두른 폭력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우리와 비슷하다는 것, 우리가 세운 기준을 슬그머니 이용해 자신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많은 이가 테러에 맞서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를 외치면서 자유롭게 말할 자유를 옹호했지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에 대립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립은 결국 가짜 대립이며, 두 세력은 상대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만들어낸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근대적인가, 근대적인가?
세계 자본이 민족국가의 힘을 잠식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면서 ‘이슬람국가IS’가 나타났다. 그러나 세계 자본이 가져온 경악과 두려움을 똑같이 일으키는 주체가 IS 체제이기도 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바로 이 IS 안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사실 ‘근본주의’라는 말은 아랍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도 서구권, 특히 영어권에서 붙인 이름이다. 원리주의라고도 일컫는 근본주의가 단지 전통과 교리 준수를 중시하는 것이라면 모든 이슬람 종파가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근본주의가 가리키는 것은 테러를 단행하는 등 훨씬 과격한 태도다. 그렇다면 이슬람 근본주의는 단지 전근대적이기만 한 걸까?
이때 벤야민의 오래된 통찰이 여전히 유효하다. “파시즘이 부상한다는 것은 혁명이 실패했음을 입증한다.” 즉 파시즘의 부상은 좌파가 실패했음을 뜻한다. 특히 그것은 좌파가 미처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과 불만이 있었음을 뜻한다. 요컨대 좌파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세계 각국에서 IS에 합류하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프랑스는 9.11 테러 이후 미국처럼 우경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휩싸여 있다. 어째서일까? 이것은 역설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다운 확신이 없었듯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지킬 만큼 강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실제로 내재하는 결함에 대한 반응이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다. 바꾸어 말해 이 순간 근대적 자유주의와 전근대적 근본주의라는 도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슬람 근본주의는 근대적인가? 이 물음은 언뜻 어불성설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말했듯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통 및 교리 준수를 다른 종파보다 훨씬 중시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세계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꼭 전근대적 전통이나 전통적 생활양식에 기댈 필요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근대적 전통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미 근대적 언어로 말하고 있다. 내용은 전통적일지라도 말하는 방식은 근대적이다. 가령 IS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 바그다디의 사진을 보라. 그는 멋진 스위스제 시계를 차고 있다. 이 장면이 말해주는 사실은 이런 것이다. IS는 온라인으로 선전하고 금융거래를 할 만큼 잘 조직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근대화를 극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착적 근대화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그들은 착취당하고 지배당하면서 식민주의가 가하는 폭력과 모욕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서구 유산 가운데 좋다고 여길 만한 것들을 파괴하려는 걸까? 왜 평등주의나 개인의 자유를, 모든 권위에 대한 건강한 조롱과 풍자를 파괴하려는 걸까? “그들은 착취하고 폭력을 행사할뿐더러 상처를 더 후벼 파려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잔인성을 과시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서구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무엇이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가?
샤를리 에브도가 그랬듯, 이슬람교도가 사소한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것을 비웃는 건 쉽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관점 안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강조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도 성차별적·인종차별적 농담을, 심지어 종種차별적 농담을 규제한다. 말하자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우리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에 대립관계가 명확하지 않듯이, ‘이슬람 파시즘’의 부상이 좌파의 실패를 폭로하듯이, 그들은 어떤 거울상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슬람교도가 신성모독을 대면할 때 침묵하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한다면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은가? 기독교의 낙태반대운동에서 똑같은 태도가 나타난다. 매년 태아가 수십만 명 살해되는 상황 앞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침묵하지도, 가만있지도 못했다. 이런 차원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은 종교 근본주의와 유사하다. 정치적 올바름도 나름대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자유지상주의자는 정치적이고 영적인 모든 권위를 비웃고 풍자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타인이 겪는 고통과 모욕에 대한 과민한 반응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2011년 프랑스는 이른바 ‘부르카 금지법’을 만들었고, 이에 대해 파키스탄 출생의 한 여성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제소하기에 이르렀지만 유럽인권재판소는 그것이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두 인종이나 두 종교 집단이 함께 살지만 양립할 수 없는 삶의 규칙을 갖고 있을 때, 이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원래 이 문제를 풀려고 했다. 어떻게? 이를테면 아미시 공동체에 속한 아이들이 미국식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아동에게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정말’ 스스로 선택하려면 아미시 공동체에 길들여져 있는 습성을 제거하고 실제로 아이들을 미국식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이 취하는 태도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컨대 여자 이슬람교도는 종교적 억압 때문이 아니라 개인 신념의 표현으로 혹은 서구에 대항하는 정치적 시위로 부르카를 쓸 수 있다. 그렇지만 부르카를 쓰는 순간 그는 서구 세속사회 안에서 변두리로 내몰리게 된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매도당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이 ‘관용’을 베푸는 “자유로이 선택하는 주체”, 즉 아미시 공동체나 미국식 교육이냐 혹은 부르카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등장하려면 그는 먼저 자기 뿌리와 전통에서 잘려나가고 특수한 생활세계에서 분리되는, 지극히 험한 폭력을 당해야 한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읽어야 하는가?
한데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적어도 이 글에서는 서구식 자유주의에 익숙해진 이들 가령 유럽인이나 미국인을 가리킨다. ‘우리’ 안에 한국인 역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한국 전체 인구 중 무슬림은 0.1%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추모했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으며 “나는 샤를리다”에 동의했다. 그래서 김모 군이 IS에 가담한 사실이 확인됐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충격적이고 낯선 사건으로만 보였다. 혹은 특이한 극소수의 일이라고 치부했다. 이슬람은 여전히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에 머무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중요하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지젝은 아마도 이 질문을 이슬람교 안에서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자유주의의 언어로 이슬람교를 상대하면 상황이 더 나빠지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와 이야기하려면 이슬람교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 질문을 던질 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는 이슬람교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서로를 이간질한다. 이슬람교 앞에서는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자유주의 앞에서는 이슬람교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왜 지젝이 쓴 이 책을 읽는가? 그가 세계적인 석학이라서?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왜 하필이면 이슬람교를 갖고 글을 썼을까? 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많은 부분을 이슬람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비교 서술하는 데에 할애했다. 어째서였을까? 서문에 지젝이 쓴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테러집단이 가한 위협은 기적을 이뤄내고 말았다. 1968년 급진주의자가 낳은 세대를 1968년 급진주의자가 맞섰던 원래의 적과 화해시킨 것이다. 미국의 애국법이 프랑스식으로 실현된 것 같다. 자신을 스스로 감시에 내맡긴 대중이 애국법에 환호하는 꼴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 작가 소개
저 :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 태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 제8대학의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 혹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독일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이론화 하였다. 철학자로는 드물게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최근 인문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각주에 인용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두 차례의 강연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개혁파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의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는 이론과 현실, 문화의 창의적인 결합을 담아 지속적으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SF 소설,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철학과 접목시킨 독특한 문화 비평을 내놓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 『삐딱하게 보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까다로운 주체』, 『신체 없는 기관』, 『혁명이 다가온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HOW TO READ 라캉』, 『죽은 신을 위하여』, 『시차적 관점』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성관계는 없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레닌 재장전』『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공저)등이 있다.
역자 : 배성민
경북대 박사과정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예수는 괴물이다』(공역) 『광기』 『다윈의 경건한 생각』 『우리는 왜 아플까』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시작하며
1장 이슬람교는 생활이다
2장 이슬람교의 기록보관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옮긴이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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