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역사가들을 매료시킨 역사
역사가를 매혹시킨 역사가들
역사의 즐거움, 역사가에서 찾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How to Read and Understand History》에서 역사 읽기가 따분한 암기 과목이 아닌 즐거운 여가 선용 수단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적 연구 주제로서의 역사가 아니다. …… 내가 다루려는 주제는 쾌락으로서의 역사다. 힘들고 바쁜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여가 시간을 기분 좋고 유익하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역사다. …… 역사가 독자 여러분의 출세나 승진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역사를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역사를 즐기고 역사에 흥미를 느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2003), 《영국 제국의 초상》(2009), 《공장의 역사》(2012) 등을 출간하며 19세기 영국의 사회사, 노동사, 생활사, 사학사 연구를 지속해온 저자 이영석(광주대 사학과 교수)은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에서 역사의 즐거움을 역사가 읽기에서 찾는다. 지난 2006년 출간한 《나를 사로잡은 역사가들》에서 살핀 5명의 역사가 외에 7명의 역사가를 추가한 이 책에서 저자는 한 역사가의 여러 저술을 파노라마처럼 훑기도 하고 특정 저술을 좀 더 깊이 정독하기도 하면서 더욱 풍부한 역사가 읽기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지나치게 전문적인 지식의 나열과 난해한 해석으로 자칫 딱딱하고 정체되기 쉬운 역사학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역사가들에 대한 저자의 기본 태도는 ‘즐거움’이다. 선입견을 제쳐놓은 상태에서, 각 역사가들의 경험과 섬세한 연구 태도를 느껴보려는 자세로 그들의 저작을 탐구한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관심을 가졌던 역사가들에 대한 일종의 인상기다. 한 역사가의 여러 저술을 피상적으로 훑어본 글도 있고, 한 권의 책을 좀 더 깊이 음미하면서 정독한 독후감도 있다. …… 순수한 독서라면 책 읽는 순간에는 다른 강박이 없어야 한다. 아무런 부담감 없이 책의 내용과 논리에 빠져 들어가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저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그의 주장을 다시 음미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독서란 그런 것이다. …… 실제로 나는 이들의 책을 가까이 하면서 글자 그대로 독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그저 책 자체에 빠져들어 스스로 정리하고 느낀 인상만을 담백하게 기술하는 데 힘을 쏟았다.
-〈책머리에〉 중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역사가들 중 몇몇은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즐거운 독서’가 오롯이 담겨 있는 역사가 읽기는 우리를 어색함이 아닌 호기심과 모험으로 이끈다. 다른 모든 분야의 ‘첫걸음’이 으레 그렇듯, 역사 읽기 또한 이 같은 호기심과 모험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실제 삶으로 이어지며, 삶을 통해 깊어지고 넓어진다. 저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다양한 역사가들이 그리는 역사의 풍경에 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사로잡혀보자.
풍경, 가족과 결혼, 감성, 영상 …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채색하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100년 전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는 500년 전 어떤 풍경이었을까. 흥미롭지만 마땅한 답을 내놓기 난감한 이 질문들에 도전한 역사가가 있다. 바로 윌리엄 호스킨스다. 1장 〈윌리엄 호스킨스, 풍경의 역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을 통한 역사 읽기를 시도한 호스킨스에 관한 글이다. 호스킨스의 저작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Landscape》은 영국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한 책이다. 호스킨스는 이를 위해 정주지, 버려진 경지, 인클로저, 둑, 울타리, 마을 등이 남긴 흔적을 추적한다. 하나의 풍경에는 역사적 시간이 중층적으로 담겨 있다는 관점 하에 낯익은 풍경에 대한 해독을 넘어 역사 속 사람들의 삶을 재현한다. 저자는 ‘변화하는 것 가운데에서 지속되는 것, 지속되는 것 속에서 변화하는 것’을 찾아내려는 호스킨스의 작업에서 잃어버린 대상과 그 변화의 과정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읽어낸다. 그리고 묻는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급속하게 뒤바뀐 우리 풍경에 관해 과연 호스킨스와 같은 연구와 탐사가 가능할 것인가.”
2장 〈로렌스 스톤, 사회사의 지평 넓히기〉에서 살피는 로렌스 스톤 역시 호스킨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낯익은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스톤은 에릭 홉스봄, 에드워드 톰슨과 더불어 사회사의 개념을 수정하고 다시 구성한 세계적인 사회사가다. 다양한 역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스톤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가족과 결혼의 역사다. 《귀족의 위기》와 《열린 엘리트?》를 통해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를 수행한 스톤은 이후 일상적인 삶의 세계로 눈길을 돌린다. 《가족, 성, 결혼》은 이러한 작업의 중간 결산서다. 이 책에서 스톤은 가족관계가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소원한 관계와 복종과 가부장제라는 냉담한 가족관계에서 ‘감성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한 애정적 가족관계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뒤이어 《이혼행로》에서는 16세기 이래 결혼 및 별거와 이혼의 사례들을 다루면서 그 변화 양상을 추적한다. 《가디언》지에서는 스톤이 자신이 몰두했던 과거로 사라진 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톤은 역동적이고 왕성한, 재기 넘치고 부드러우면서도 짓궂은 대가였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사회사를 흥미롭고도 자극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 사회사 연구를 자극하고 고무하면서 새로운 탐구영역과 새로운 사료더미를 들추어냈다는 점에 있다.”
9장에서 다루는 시어도어 젤딘도 저자를 사로잡은 역사가다. 〈시어도어 젤딘, 감성의 역사를 찾아서〉는 ‘감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역사학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인간 내면의 세계를 거침없이 탐사한 젤딘을 조명하고 있다. 원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 특히 나폴레옹 3세 시대를 전공한 실증적 역사가인 젤딘은 1848~1945년 시기의 프랑스인 특유의 정감과 습속을 소개, 해석한 《프랑스 1848~1945》(전5권)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프랑스 1848~1945》는 기존의 역사가들이 중시해온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구조 대신 근대 프랑스의 갖가지 감성이나 정감을 주제로 삼는다. 이후 출간한 《프랑스인》에서는 과거보다 현재 살아 있는 개인의 생애사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역사서술의 형식을 파괴하고자 한다. 이 같은 시도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방법을 취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도 이어진다. 이 일련의 저술에서 젤딘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사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거울이고 교훈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저술에서 역사 지식이 다시금 생명을 얻는 것은 그가 바로 이러한 역사관을 가진 ‘미래의 삶을 위한 역사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8장 〈사이먼 샤마, 영상으로서의 역사〉는 텔레비전의 영상역사물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그 결과물을 다시 책으로 출판해온 사이먼 샤마를 통해 영상언어로 그리는 역사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저자는 샤마가 저명한 역사가의 경계를 넘어 이른바 텔레비전 역사가라는 새로운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감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샤마는 BBC의 대형 역사 다큐멘터리 〈브리튼의 역사〉(총 15부작)를 통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역사가다. 그렇다면 〈브리튼의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샤마 자신이 붙이 제목처럼 〈브리튼의 역사〉는 ‘(영국에 대한) 하나의 역사’ 이상의 형상화를 이룩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저 브리튼의 역사에 대해 지극히 선별적이고 압축적인 내용만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샤마의 〈브리튼의 역사〉는 과거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투사하여 새롭게 청중에게 다가섰다. 한마디로 샤마는 21세기 새로운 역사서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역사가들도 이 새로운 영상역사물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계급, 혁명과 전쟁 … 현대를 낳은 굵직한 역사를 그리다
이 책에서는 현대를 낳은 거대한 운동과 사건들도 만날 수 있다. 4장 〈에드워드 톰슨, 탈계급 시대에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다시 읽다〉에서는 출간 직후부터 시대의 고전이 되어버린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분석하면서 ‘계급’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톰슨은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형성해나간 노동계급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는 산업혁명 초기 수공업 장인들의 세계까지 추적하면서 과거의 전통과 산업화 과정에서 그들이 함께 겪은 경험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스스로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는 장대한 서사를 그려냈다. 톰슨이 보기에, 계급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당연한 결과로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정된 ‘범주’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흐름’이자 ‘현상’이다. 노동계급의 전진에 대한 전망을 거두고 노동의 위축을 시대의 추세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자신의 시대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톰슨이 “후대 사람들의 멸시”에서 구하려고 한 그 대상들을 외면할 수 없다. 계급 중심의 역사를 벗어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느 시대에나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5장 〈에릭 홉스봄, 20세기를 돌아보다〉는 ‘동시대사 서술의 전범’이라 평가받는 홉스봄을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장기 19세기’를 다룬 홉스봄의 대표 저술인 자본주의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가 아니라 파국과 번영의 두 극단을 오간 20세기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극단의 시대》로 눈을 돌린다. 이 책은 종합의 차원을 넘어 진보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역사가의 자전적 체험이 녹아 있는 동시대사 서술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는 지금, 지난 세기를 성찰한 홉스봄의 작업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인식틀을 제공한다. 바로 과거와 전혀 다른 방법이 아니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경고다. 이 홉스봄의 경고를, 저자는 역설적으로 역사 성찰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과거의 그릇된 유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극단의 세기를 좀 더 철저하게 되씹어야 한다는 홉스봄의 역사서술 태도는 20세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현 시기에 더욱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계몽운동과 런던, 제국, 귀족 … 다양한 관점에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들여다보다
저자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살핀 여러 역사가들의 저술에도 관심을 표한다. 먼저 3장 〈로이 포터, 런던과 계몽된 사회〉에서는 ‘미신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개인이 중심에 서는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계몽운동을 로이 포터가 어떻게 분석했는지 살핀다. 포터는 특히 영국의 계몽운동이 무시받는 현실을 언급하며 번영, 무역, 매체가 영국 계몽운동을 추진한 동력이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포터는 런던의 사회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튜더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런던의 변화를 다룬 《런던의 사회사》에서 포터는 런던이 16세기 이후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다가 19세기 말 이후 성장이 멈춰버렸다고 말한다. 첨단과 번영의 표상이던 런던이 빈곤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영제국의 쇠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포터는 이 같은 런던의 침체와 조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만 난관을 뚫고 영원성을 견지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6장 〈니얼 퍼거슨, 제국과 앵글로벌리즘〉은 영제국의 세계 지배 역사를 살핀 니얼 퍼거슨을 다룬다. 퍼거슨의 《제국》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영제국과 세계화의 관련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퍼거슨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세계화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영제국이 세계화에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영제국의 세계 지배는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선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퍼거슨에 따르면, 영제국은 처음에는 비의도적이고 무계획적으로 형성된, 즉 우연하게 나타난 제국이다. 영제국의 지배는 다른 제국과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한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화는 대부분 영제국이 해외 백인 정착지와 공식적인 제국에 주입한 제도들을 바탕에 두고 촉진된 것이다. 퍼거슨은 이 같은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국이 미국에게 물려준 제국의 유산이 무엇이고, 미국은 영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제기한다.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퍼거슨의 주장은 오늘날 필요한 것이 한 나라의 독주와 헤게모니가 아닌 소통의 모색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7장 〈데이비드 캐너다인, 귀족과 제국〉은 영국 귀족과 영제국의 성격을 규명하려 한 데이비드 캐너다인의 저술을 살핀다. 19세기까지 영국 사회에는 귀족과 젠트리의 지배구조가 뿌리 깊이 잔존해 있었다. 캐너다인은 개별 귀족 가문 관련 자료와 귀족의 회고록을 집중 분석해 188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기까지 “귀족의 쇠퇴와 몰락, 분영과 무질서”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캐너다인은 오늘날 영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과거의 전통 또는 “국가 유산에 대한 과도한 열광”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캐너다인은 유럽의 북서쪽에 자리 잡은 작은 섬 영국이 어떻게 세계 육지의 20퍼센트를 지배하는 거대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 분석한다. 그는 백인 정착지 대부분과 식민지 사회가 영제국의 전통과 사회적 위계를 충실히 따르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영제국의 세계 지배의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결론 내린다.
서양인이 본 동아시아, 한국인의 눈에 비친 서구 … ‘다른’ 눈으로 ‘다른’ 대상을 바라보다
역사는 ‘다른’ 눈으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여행이다. 역사가들은 주로 사료더미를 파헤치면서 이 여행길에 나선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여정을 선보인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료더미가 아닌 자신의 발걸음으로 여행길을 떠나고 그 결과물을 사료로 남기기도 한다. 이 책에서 살피는 아놀드 토인비와 이순탁이 그런 경우다. 10장 〈아놀드 토인비와 동아시아〉는 《역사의 연구》(전12권)으로 유명한 아놀드 토인비가 1929년 아시아대륙을 여행하면서 쓴 《중국으로의 여행》을 살핀 글이다. 토인비는 격년으로 열리는 ‘태평양연구소’ 국제학술회의에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초청받아 일본 교토를 방문할 기회를 얻자 아시아대륙 횡단 계획을 세우고 일찍 출발한다. 여행기에서 남아시아 및 동아시아에 관한 토인비의 서술은 영국령 항구도시, 일본, 조선, 그리고 만주를 포함한 중국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여행기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토인비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중국인에게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중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같은 토인비의 관점이 일정부분 《역사의 연구》에서 전개한 문명론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러면서 만일 생존했다면 그가 현재 중국의 재부상을 극동문명의 새로운 이행, 즉 새로운 문명의 탄생과 발전의 징후로 여겼을지 묻는다. 물론 이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11장 〈식민지 조선인의 눈에 비친 영제국〉은 한국인 최초의 세계여행기 《최근세계일주기》(1934)를 쓴 이순탁에 대한 분석이다. 연희전문학교 경제학 교수 이순탁은 1933년 4월안식년을 맞아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최근세계일주기》는 이때 쓴 여행기를 모은 책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순탁이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파시즘의 위험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세계공황이 파시스트 국가들의 재무장을 촉발해 전쟁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음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순탁에 따르면, 이러한 국제정치와 세계경제의 혼란은 영제국의 쇠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세계제국으로서 영국의 역할이 흔들리고 위상이 떨어지면서 정치?경제적으로 세계가 균형을 상실한 것이다. 그는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경제블록 간의 경쟁이 겹쳐지면 제2의 유럽대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불과 7년 후에 현실로 나타났다.
12장 〈역사가와 그의 시대〉는 한국 서양사학계의 제1세대 원로학자인 노명식 교수에 대한 글이다. 토인비나 이순탁에 대한 글과 달리 노명식 교수에 대한 글은 여행기 분석이 아닌 고인에 대한 추도사에 가깝다. 노명식 교수는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연구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착과 제도화 과정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가 일찍이 서양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서구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근대성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으며, 한국에서도 이전의 좌절을 넘어 이러한 제도화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가 자생적인 근대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근대 콤플렉스’는 한국 서양사학계 제1세대가 공유하는 역사인식이었다. 근대 콤플렉스의 극복, 더 나아가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역사상을 정립하는 일은 후대 역사가들이 짊어진 과제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영석
광주대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케임브리지대 클레어홀과 울프슨칼리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서양사학회와 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2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 우수학자로 선정되었다. 그동안 19세기 영국 사회사, 노동사, 생활사, 사학사 분야의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지은 책으로는 《산업혁명과 노동정책》(1994), 《다시 돌아본 자본의 시대》(1999),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2003), 《사회사의 유혹》(전2권, 2006), 《영국 제국의 초상》(2009), 《공장의 역사: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2012), 《지식인과 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2014),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공저, 1997)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영국민중사》(1988), 《역사학을 위한 변론》(1999), 《옥스퍼드 유럽 현대사》(공역, 2003), 《자연과학을 모르는 역사가는 왜 근대를 말할 수 없는가》(2004),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2007)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1장 윌리엄 호스킨스, 풍경의 역사
정주의 잔흔: 개간과 촌락|울타리와 문명|풍경 속의 농가와 저택|산업화의 영향|풍경의 해체|남은 이야기
2장 로렌스 스톤, 사회사의 지평 넓히기
귀족 사회, 위기와 존속|감성적 개인주의와 가족의 변화|역사 속의 결혼과 이혼|스톤을 위한 묘비명
3장 로이 포터, 런던과 계몽된 사회
새로운 전설|영원한 도시 런던|계몽운동과 행복의 추구|다산성을 다시 생각한다
4장 에드워드 톰슨, 탈계급 시대에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다시 읽다
생애와 학문|노동계급 ‘형성’의 배경|노동계급 ‘형성’의 서사|논점과 비판|톰슨의 유산
5장 에릭 홉스봄, 20세기를 돌아보다
20세기의 풍경화|사회주의와 자본주의|사회문화적 변동|동아시아를 보는 눈|성찰 뒤에 남는 것
6장 니얼 퍼거슨, 제국과 앵글로벌리즘
영제국의 형성|제국 지배의 공과|앵글로벌리즘과 미국의 역할|비판과 성찰|남은 이야기
7장 데이비드 캐너다인, 귀족과 제국
학문 이력|귀족의 몰락|제국을 보는 시각|진행형의 역사가
8장 사이먼 샤마, 영상으로서의 역사
영상언어와 문자언어|19세기의 형상화: 영상역사물 〈브리튼의 역사〉 분석|영상물과 역사서술의 거리|텔레비전 역사의 가능성과 한계
9장 시어도어 젤딘, 감성의 역사를 찾아서
프랑스인의 감성|서술의 새로운 형식|만남, 대화 그리고 인간의 이해|미래의 삶을 위한 역사
10장 아놀드 토인비와 동아시아
토인비의 동아시아 여정|만주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경쟁|문명과 동아시아의 ‘근대’|토인비와 ‘세계사’
11장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눈에 비친 영제국
식민지 시기 이순탁의 활동과 세계일주|유럽 대륙의 여정|대불황기 영제국의 인상|제국의 사회문화와 세계화|영제국의 미래
12장 역사가와 그의 시대
삶의 궤적과 한국 현대사|고난으로서의 역사|근대 프랑스를 보는 시각|노역사가의 마지막 청소
주석
찾아보기
역사가들을 매료시킨 역사
역사가를 매혹시킨 역사가들
역사의 즐거움, 역사가에서 찾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How to Read and Understand History》에서 역사 읽기가 따분한 암기 과목이 아닌 즐거운 여가 선용 수단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적 연구 주제로서의 역사가 아니다. …… 내가 다루려는 주제는 쾌락으로서의 역사다. 힘들고 바쁜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여가 시간을 기분 좋고 유익하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역사다. …… 역사가 독자 여러분의 출세나 승진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역사를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역사를 즐기고 역사에 흥미를 느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2003), 《영국 제국의 초상》(2009), 《공장의 역사》(2012) 등을 출간하며 19세기 영국의 사회사, 노동사, 생활사, 사학사 연구를 지속해온 저자 이영석(광주대 사학과 교수)은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에서 역사의 즐거움을 역사가 읽기에서 찾는다. 지난 2006년 출간한 《나를 사로잡은 역사가들》에서 살핀 5명의 역사가 외에 7명의 역사가를 추가한 이 책에서 저자는 한 역사가의 여러 저술을 파노라마처럼 훑기도 하고 특정 저술을 좀 더 깊이 정독하기도 하면서 더욱 풍부한 역사가 읽기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지나치게 전문적인 지식의 나열과 난해한 해석으로 자칫 딱딱하고 정체되기 쉬운 역사학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역사가들에 대한 저자의 기본 태도는 ‘즐거움’이다. 선입견을 제쳐놓은 상태에서, 각 역사가들의 경험과 섬세한 연구 태도를 느껴보려는 자세로 그들의 저작을 탐구한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관심을 가졌던 역사가들에 대한 일종의 인상기다. 한 역사가의 여러 저술을 피상적으로 훑어본 글도 있고, 한 권의 책을 좀 더 깊이 음미하면서 정독한 독후감도 있다. …… 순수한 독서라면 책 읽는 순간에는 다른 강박이 없어야 한다. 아무런 부담감 없이 책의 내용과 논리에 빠져 들어가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저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그의 주장을 다시 음미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독서란 그런 것이다. …… 실제로 나는 이들의 책을 가까이 하면서 글자 그대로 독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그저 책 자체에 빠져들어 스스로 정리하고 느낀 인상만을 담백하게 기술하는 데 힘을 쏟았다.
-〈책머리에〉 중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역사가들 중 몇몇은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즐거운 독서’가 오롯이 담겨 있는 역사가 읽기는 우리를 어색함이 아닌 호기심과 모험으로 이끈다. 다른 모든 분야의 ‘첫걸음’이 으레 그렇듯, 역사 읽기 또한 이 같은 호기심과 모험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실제 삶으로 이어지며, 삶을 통해 깊어지고 넓어진다. 저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다양한 역사가들이 그리는 역사의 풍경에 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사로잡혀보자.
풍경, 가족과 결혼, 감성, 영상 …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채색하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100년 전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는 500년 전 어떤 풍경이었을까. 흥미롭지만 마땅한 답을 내놓기 난감한 이 질문들에 도전한 역사가가 있다. 바로 윌리엄 호스킨스다. 1장 〈윌리엄 호스킨스, 풍경의 역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을 통한 역사 읽기를 시도한 호스킨스에 관한 글이다. 호스킨스의 저작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Landscape》은 영국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한 책이다. 호스킨스는 이를 위해 정주지, 버려진 경지, 인클로저, 둑, 울타리, 마을 등이 남긴 흔적을 추적한다. 하나의 풍경에는 역사적 시간이 중층적으로 담겨 있다는 관점 하에 낯익은 풍경에 대한 해독을 넘어 역사 속 사람들의 삶을 재현한다. 저자는 ‘변화하는 것 가운데에서 지속되는 것, 지속되는 것 속에서 변화하는 것’을 찾아내려는 호스킨스의 작업에서 잃어버린 대상과 그 변화의 과정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읽어낸다. 그리고 묻는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급속하게 뒤바뀐 우리 풍경에 관해 과연 호스킨스와 같은 연구와 탐사가 가능할 것인가.”
2장 〈로렌스 스톤, 사회사의 지평 넓히기〉에서 살피는 로렌스 스톤 역시 호스킨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낯익은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스톤은 에릭 홉스봄, 에드워드 톰슨과 더불어 사회사의 개념을 수정하고 다시 구성한 세계적인 사회사가다. 다양한 역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스톤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가족과 결혼의 역사다. 《귀족의 위기》와 《열린 엘리트?》를 통해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를 수행한 스톤은 이후 일상적인 삶의 세계로 눈길을 돌린다. 《가족, 성, 결혼》은 이러한 작업의 중간 결산서다. 이 책에서 스톤은 가족관계가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소원한 관계와 복종과 가부장제라는 냉담한 가족관계에서 ‘감성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한 애정적 가족관계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뒤이어 《이혼행로》에서는 16세기 이래 결혼 및 별거와 이혼의 사례들을 다루면서 그 변화 양상을 추적한다. 《가디언》지에서는 스톤이 자신이 몰두했던 과거로 사라진 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톤은 역동적이고 왕성한, 재기 넘치고 부드러우면서도 짓궂은 대가였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사회사를 흥미롭고도 자극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 사회사 연구를 자극하고 고무하면서 새로운 탐구영역과 새로운 사료더미를 들추어냈다는 점에 있다.”
9장에서 다루는 시어도어 젤딘도 저자를 사로잡은 역사가다. 〈시어도어 젤딘, 감성의 역사를 찾아서〉는 ‘감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역사학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인간 내면의 세계를 거침없이 탐사한 젤딘을 조명하고 있다. 원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 특히 나폴레옹 3세 시대를 전공한 실증적 역사가인 젤딘은 1848~1945년 시기의 프랑스인 특유의 정감과 습속을 소개, 해석한 《프랑스 1848~1945》(전5권)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프랑스 1848~1945》는 기존의 역사가들이 중시해온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구조 대신 근대 프랑스의 갖가지 감성이나 정감을 주제로 삼는다. 이후 출간한 《프랑스인》에서는 과거보다 현재 살아 있는 개인의 생애사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역사서술의 형식을 파괴하고자 한다. 이 같은 시도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방법을 취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도 이어진다. 이 일련의 저술에서 젤딘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사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거울이고 교훈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저술에서 역사 지식이 다시금 생명을 얻는 것은 그가 바로 이러한 역사관을 가진 ‘미래의 삶을 위한 역사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8장 〈사이먼 샤마, 영상으로서의 역사〉는 텔레비전의 영상역사물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그 결과물을 다시 책으로 출판해온 사이먼 샤마를 통해 영상언어로 그리는 역사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저자는 샤마가 저명한 역사가의 경계를 넘어 이른바 텔레비전 역사가라는 새로운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감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샤마는 BBC의 대형 역사 다큐멘터리 〈브리튼의 역사〉(총 15부작)를 통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역사가다. 그렇다면 〈브리튼의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샤마 자신이 붙이 제목처럼 〈브리튼의 역사〉는 ‘(영국에 대한) 하나의 역사’ 이상의 형상화를 이룩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저 브리튼의 역사에 대해 지극히 선별적이고 압축적인 내용만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샤마의 〈브리튼의 역사〉는 과거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투사하여 새롭게 청중에게 다가섰다. 한마디로 샤마는 21세기 새로운 역사서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역사가들도 이 새로운 영상역사물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계급, 혁명과 전쟁 … 현대를 낳은 굵직한 역사를 그리다
이 책에서는 현대를 낳은 거대한 운동과 사건들도 만날 수 있다. 4장 〈에드워드 톰슨, 탈계급 시대에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다시 읽다〉에서는 출간 직후부터 시대의 고전이 되어버린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분석하면서 ‘계급’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톰슨은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형성해나간 노동계급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는 산업혁명 초기 수공업 장인들의 세계까지 추적하면서 과거의 전통과 산업화 과정에서 그들이 함께 겪은 경험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스스로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는 장대한 서사를 그려냈다. 톰슨이 보기에, 계급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당연한 결과로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정된 ‘범주’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흐름’이자 ‘현상’이다. 노동계급의 전진에 대한 전망을 거두고 노동의 위축을 시대의 추세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자신의 시대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톰슨이 “후대 사람들의 멸시”에서 구하려고 한 그 대상들을 외면할 수 없다. 계급 중심의 역사를 벗어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느 시대에나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5장 〈에릭 홉스봄, 20세기를 돌아보다〉는 ‘동시대사 서술의 전범’이라 평가받는 홉스봄을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장기 19세기’를 다룬 홉스봄의 대표 저술인 자본주의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가 아니라 파국과 번영의 두 극단을 오간 20세기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극단의 시대》로 눈을 돌린다. 이 책은 종합의 차원을 넘어 진보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역사가의 자전적 체험이 녹아 있는 동시대사 서술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는 지금, 지난 세기를 성찰한 홉스봄의 작업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인식틀을 제공한다. 바로 과거와 전혀 다른 방법이 아니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경고다. 이 홉스봄의 경고를, 저자는 역설적으로 역사 성찰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과거의 그릇된 유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극단의 세기를 좀 더 철저하게 되씹어야 한다는 홉스봄의 역사서술 태도는 20세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현 시기에 더욱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계몽운동과 런던, 제국, 귀족 … 다양한 관점에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들여다보다
저자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살핀 여러 역사가들의 저술에도 관심을 표한다. 먼저 3장 〈로이 포터, 런던과 계몽된 사회〉에서는 ‘미신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개인이 중심에 서는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계몽운동을 로이 포터가 어떻게 분석했는지 살핀다. 포터는 특히 영국의 계몽운동이 무시받는 현실을 언급하며 번영, 무역, 매체가 영국 계몽운동을 추진한 동력이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포터는 런던의 사회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튜더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런던의 변화를 다룬 《런던의 사회사》에서 포터는 런던이 16세기 이후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다가 19세기 말 이후 성장이 멈춰버렸다고 말한다. 첨단과 번영의 표상이던 런던이 빈곤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영제국의 쇠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포터는 이 같은 런던의 침체와 조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만 난관을 뚫고 영원성을 견지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6장 〈니얼 퍼거슨, 제국과 앵글로벌리즘〉은 영제국의 세계 지배 역사를 살핀 니얼 퍼거슨을 다룬다. 퍼거슨의 《제국》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영제국과 세계화의 관련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퍼거슨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세계화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영제국이 세계화에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영제국의 세계 지배는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선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퍼거슨에 따르면, 영제국은 처음에는 비의도적이고 무계획적으로 형성된, 즉 우연하게 나타난 제국이다. 영제국의 지배는 다른 제국과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한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화는 대부분 영제국이 해외 백인 정착지와 공식적인 제국에 주입한 제도들을 바탕에 두고 촉진된 것이다. 퍼거슨은 이 같은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국이 미국에게 물려준 제국의 유산이 무엇이고, 미국은 영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제기한다.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퍼거슨의 주장은 오늘날 필요한 것이 한 나라의 독주와 헤게모니가 아닌 소통의 모색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7장 〈데이비드 캐너다인, 귀족과 제국〉은 영국 귀족과 영제국의 성격을 규명하려 한 데이비드 캐너다인의 저술을 살핀다. 19세기까지 영국 사회에는 귀족과 젠트리의 지배구조가 뿌리 깊이 잔존해 있었다. 캐너다인은 개별 귀족 가문 관련 자료와 귀족의 회고록을 집중 분석해 188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기까지 “귀족의 쇠퇴와 몰락, 분영과 무질서”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캐너다인은 오늘날 영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과거의 전통 또는 “국가 유산에 대한 과도한 열광”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캐너다인은 유럽의 북서쪽에 자리 잡은 작은 섬 영국이 어떻게 세계 육지의 20퍼센트를 지배하는 거대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 분석한다. 그는 백인 정착지 대부분과 식민지 사회가 영제국의 전통과 사회적 위계를 충실히 따르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영제국의 세계 지배의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결론 내린다.
서양인이 본 동아시아, 한국인의 눈에 비친 서구 … ‘다른’ 눈으로 ‘다른’ 대상을 바라보다
역사는 ‘다른’ 눈으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여행이다. 역사가들은 주로 사료더미를 파헤치면서 이 여행길에 나선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여정을 선보인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료더미가 아닌 자신의 발걸음으로 여행길을 떠나고 그 결과물을 사료로 남기기도 한다. 이 책에서 살피는 아놀드 토인비와 이순탁이 그런 경우다. 10장 〈아놀드 토인비와 동아시아〉는 《역사의 연구》(전12권)으로 유명한 아놀드 토인비가 1929년 아시아대륙을 여행하면서 쓴 《중국으로의 여행》을 살핀 글이다. 토인비는 격년으로 열리는 ‘태평양연구소’ 국제학술회의에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초청받아 일본 교토를 방문할 기회를 얻자 아시아대륙 횡단 계획을 세우고 일찍 출발한다. 여행기에서 남아시아 및 동아시아에 관한 토인비의 서술은 영국령 항구도시, 일본, 조선, 그리고 만주를 포함한 중국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여행기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토인비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중국인에게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중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같은 토인비의 관점이 일정부분 《역사의 연구》에서 전개한 문명론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러면서 만일 생존했다면 그가 현재 중국의 재부상을 극동문명의 새로운 이행, 즉 새로운 문명의 탄생과 발전의 징후로 여겼을지 묻는다. 물론 이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11장 〈식민지 조선인의 눈에 비친 영제국〉은 한국인 최초의 세계여행기 《최근세계일주기》(1934)를 쓴 이순탁에 대한 분석이다. 연희전문학교 경제학 교수 이순탁은 1933년 4월안식년을 맞아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최근세계일주기》는 이때 쓴 여행기를 모은 책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순탁이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파시즘의 위험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세계공황이 파시스트 국가들의 재무장을 촉발해 전쟁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음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순탁에 따르면, 이러한 국제정치와 세계경제의 혼란은 영제국의 쇠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세계제국으로서 영국의 역할이 흔들리고 위상이 떨어지면서 정치?경제적으로 세계가 균형을 상실한 것이다. 그는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경제블록 간의 경쟁이 겹쳐지면 제2의 유럽대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불과 7년 후에 현실로 나타났다.
12장 〈역사가와 그의 시대〉는 한국 서양사학계의 제1세대 원로학자인 노명식 교수에 대한 글이다. 토인비나 이순탁에 대한 글과 달리 노명식 교수에 대한 글은 여행기 분석이 아닌 고인에 대한 추도사에 가깝다. 노명식 교수는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연구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착과 제도화 과정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가 일찍이 서양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서구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근대성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으며, 한국에서도 이전의 좌절을 넘어 이러한 제도화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가 자생적인 근대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근대 콤플렉스’는 한국 서양사학계 제1세대가 공유하는 역사인식이었다. 근대 콤플렉스의 극복, 더 나아가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역사상을 정립하는 일은 후대 역사가들이 짊어진 과제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영석
광주대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케임브리지대 클레어홀과 울프슨칼리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서양사학회와 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2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 우수학자로 선정되었다. 그동안 19세기 영국 사회사, 노동사, 생활사, 사학사 분야의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지은 책으로는 《산업혁명과 노동정책》(1994), 《다시 돌아본 자본의 시대》(1999),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2003), 《사회사의 유혹》(전2권, 2006), 《영국 제국의 초상》(2009), 《공장의 역사: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2012), 《지식인과 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2014),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공저, 1997)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영국민중사》(1988), 《역사학을 위한 변론》(1999), 《옥스퍼드 유럽 현대사》(공역, 2003), 《자연과학을 모르는 역사가는 왜 근대를 말할 수 없는가》(2004),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2007)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1장 윌리엄 호스킨스, 풍경의 역사
정주의 잔흔: 개간과 촌락|울타리와 문명|풍경 속의 농가와 저택|산업화의 영향|풍경의 해체|남은 이야기
2장 로렌스 스톤, 사회사의 지평 넓히기
귀족 사회, 위기와 존속|감성적 개인주의와 가족의 변화|역사 속의 결혼과 이혼|스톤을 위한 묘비명
3장 로이 포터, 런던과 계몽된 사회
새로운 전설|영원한 도시 런던|계몽운동과 행복의 추구|다산성을 다시 생각한다
4장 에드워드 톰슨, 탈계급 시대에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다시 읽다
생애와 학문|노동계급 ‘형성’의 배경|노동계급 ‘형성’의 서사|논점과 비판|톰슨의 유산
5장 에릭 홉스봄, 20세기를 돌아보다
20세기의 풍경화|사회주의와 자본주의|사회문화적 변동|동아시아를 보는 눈|성찰 뒤에 남는 것
6장 니얼 퍼거슨, 제국과 앵글로벌리즘
영제국의 형성|제국 지배의 공과|앵글로벌리즘과 미국의 역할|비판과 성찰|남은 이야기
7장 데이비드 캐너다인, 귀족과 제국
학문 이력|귀족의 몰락|제국을 보는 시각|진행형의 역사가
8장 사이먼 샤마, 영상으로서의 역사
영상언어와 문자언어|19세기의 형상화: 영상역사물 〈브리튼의 역사〉 분석|영상물과 역사서술의 거리|텔레비전 역사의 가능성과 한계
9장 시어도어 젤딘, 감성의 역사를 찾아서
프랑스인의 감성|서술의 새로운 형식|만남, 대화 그리고 인간의 이해|미래의 삶을 위한 역사
10장 아놀드 토인비와 동아시아
토인비의 동아시아 여정|만주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경쟁|문명과 동아시아의 ‘근대’|토인비와 ‘세계사’
11장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눈에 비친 영제국
식민지 시기 이순탁의 활동과 세계일주|유럽 대륙의 여정|대불황기 영제국의 인상|제국의 사회문화와 세계화|영제국의 미래
12장 역사가와 그의 시대
삶의 궤적과 한국 현대사|고난으로서의 역사|근대 프랑스를 보는 시각|노역사가의 마지막 청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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