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인도유럽인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다
선사시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여전히 미미하다. 정규 교과 과정을 통해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 대해서는 상세히 배우고 있다. 또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 그리고 고대 게르만인에 대해서도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중부 유럽인에 대한 시야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서구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아직도 이들 문명 민족들에게만 고정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이 서사시를 지어내고 신정을 세우기 전에 또 로마의 군대들이 세계 정복을 위해 진군하기 전에, 유럽과 서부 아시아 지역은 대체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당시 그곳은 전 지역이 숲과 늪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으며, 주민들은 거친 털가죽으로 몸을 감싼 야만인들이었을까? 유럽인의 역사는 정말로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기원전 800년이나 400년경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일까?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며 “미지의 어두운 대양”과 같은 인도유럽인의 역사를 조명한다.
미아가 된 인도유럽인
그리스인, 로마인, 게르만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켈트인 등이 갈라져 나왔다고 언어학자들이 주장하는, 저 신비에 가득 찬 인도게르만인 또는 인도유럽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정말로 인도유럽인이라는 종족이 존재했을까? 아니면 이는 몇몇 학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단지 허구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원래 공통 언어를 가졌던 사람들이 수천 년 전에 유럽 전역과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유럽인들은 이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얼핏 보면 상당히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이는 오늘날 역사학계가 갖고 있는 커다란 모순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가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이미 200년이나 지난 지금, 이에 대한 방대한 양의 저술들이 모든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도유럽인 관련 연구도 마찬가지다. 학교의 역사 교육에서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치 않은 짧은 시기에 불과한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원시적 목자 겸 농부였던 인도유럽인이 유럽의 동부 지역이나 근동 아시아 지역에서 기원해 사방으로 퍼져 나간 후 점차 인도인,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켈트인, 로마인, 게르만인 등의 수많은 민족들로 발전해 나가는 수천 년간의 시기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초기 인도유럽인들의 출현과 확산의 시기는 세계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시기다. 이는 바로 우리 유럽 선조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모든 유럽인들은 당시 남부 러시아 스텝 지역에서 출발한 이 사람들의 육체적 유전인자뿐만 아니라 정신적 유전인자도 훨씬 더 많이 물려받았다. 현재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거나 적어도 이를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선사시대 이래 이 인도유럽인 종족과 그 종족에서 파생된 종족들에 내재해 있는 신비한 추진력과 돌파력 그리고 창의력 덕분이다.
오늘날 이 유럽의 민족들과 그 외 지역의 인도유럽인 민족들이남긴 많은 중요한 역사, 즉 이들이 기록물이나 웅대한 건축물을 통해 남긴 모든 것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도판이 풍성하게 수록된 많은 책을 통해 일반인들도 인도유럽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는 기본적으로 인도유럽인에 속한 각 종족의 선조들이 기록물을 남기기 이전이나 변변한 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못한 시기에 겪은 운명, 즉 이들 각 종족의 선사시대만을 다루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신비에 싸인 이들 인도유럽인의 역사는 오늘날 고고학자와 언어학자 그리고 기타 여러 분야에 걸친 학자들의 연구로 상당히 알려졌다. 그래서 이들 민족의 이동과 전투 행위, 문화, 교역, 생활 방식, 세계관 등, 4000년 내지 2000년 전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할 정도가 되었고 이 책은 용기 내어 수백 개의 두꺼운 학술서적에 흩어져 있는 이들에 관한 지식들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
1부 초원에서 출발한 종족 B.C.4500~2000
쿠르간이란 터키어로 거대한 언덕을 뜻하는 단어다. 동부 유럽 및 중부 유럽 지역에는 부장품과 함께 시신을 묻은 거대한 봉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리투아니아 출생의 미국의 여류 고고학자인 마리아 김베테이너는 이 봉분들이 분포한 지역들을 쿠르간 문화라 명명하고, 그 문화는 7000년에서 5000년 전에 흑해 북안 지역에 살던 종족이 말을 길들여 강한 무력으로 주위를 정복해 나갔다는 ‘기마민족설’을 제기했다. 그녀의 이론은 한동안 절대적으로 통용되었다. 이 책의 저자도 김베테이너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87년 영국의 고고학자 콜린 렌프류는 인도유럽인이 9000년 전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농경인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최근에는 이 유력한 두 이론을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유전학자 카빌리 스포르짜의 유전자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소아시아에서 유래한 농경민족이 발칸 반도로 들어선 후에 북쪽의 흑해 북안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말을 타는 기마민족이 되어 유럽 각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이들 민족이 인도유럽인이고, 이들이 당시 사용했다고 추정하는 언어가 인도유럽어이다. 이 언어에서 여러 많은 언어들이 파생되어 나와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인도유럽어란 명칭은 그 언어 분포 상 서쪽 끝이 유럽에 동쪽 끝은 인도에 달하여 붙여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중국의 신장성에서 발견된 토카르어도 인도유럽어임이 밝혀졌다.
오늘날 비교언어학을 통해 옛 조상어를 재구성해 내고, 이를 토대로 당시 주민들의 생활환경과 생활문화를 추론해내고 있다. 이른바 언어 고생물학과 언어 문화사적 방법이다. 이는 인도유럽인의 원고향을 찾으려는 시도에 폭넓게 이용되었다. 윌리암 존스, 프란츠 봅 등에 의해 인도유럽어를 대상으로 개발된 비교언어학은 그동안 큰 성과를 거뒀다. 그래서 인도유럽어 사전이 나와 있고, 일부 언어학자들은 인도유럽어로 쓰인 텍스트를 만들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에 대한 신빙성은 상당히 의심받고 있다.
비교언어학은 독일 학자들에 의해 큰 진전을 이뤘다. 그래서 이들이 사용한 ‘인도게르만어’란 명칭이 독일 내에서는 ‘인도유럽어’란 명칭보다 우세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인종 편견의 정책을 사용한 나치 시대에 게르만이란 용어가 남용되면서, 오늘날 독일 내에서는“ 게르만”은 금기된 용어가 되었고, 이는 인도유럽인과 게르만인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위축을 가져와서, 현재 이 분야의 연구는 독일 밖에서 훨씬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쿠르간족이 진출하기 전의 유럽에는 농경을 위주로 한 선주민이 있었다. 이들은 소아시아에서 일단 발칸 반도로 넘어와, 고도의 농경문화를 일으켰던 주민들의 후손이다. 김베테이너가 ‘고유럽인’이라고 칭한 이들은 ‘위대한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 중심사회였다. 이곳에서는 정교한 형태의 금속제품과 다양한 형태의 여러 토기 제품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새겨진 여러 문양과 기호들에는 문자의 흔적이 보이지만, 아직 해독되고 있지는 않다.
2부 전투마차를 몰고 다니던 귀족들 B.C.2000~1200
전투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경마차이다. 여기에 탄 한 병사는 말을 몰고, 다른 하나는 활을 쏘거나 창을 던졌다. 바퀴살을 가진 바퀴가 달린 이 마차는 가벼워서 빠르게 달리면서, 쉽게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전투 병기는 보병으로 구성된 적에게는 지금의 탱크와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여기에서는 이런 전투 경마차를 이용해 강대한 세력을 이뤘던 세 지역을 다루고 있다.
히타이트란 명칭은 원래 피정복민의 하나인 하티족에서 나왔다. 즉 문화적으로 앞섰던 피정복민의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이 명칭을 갖게 되었지만, 학계는 그동안의 관례에 따라 이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시리아의 카네시에서 벌인 전투는 ≪성경≫에도 나온다. 이때 쌍방이 맺은 휴전 조약의 사본들이 양측 궁정에서 발견되었다. 또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던 하투샤가 위치했던 보가즈쾨이에서 천여 개의 방대한 토기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들 텍스트에는 당시 근동에서 통용어로 사용되던 아카드어도 함께 나타난 점이, 1915년 체코의 언어학자 베드리히 흐로츠니에가 이 언어를 해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히타이트어에는 음운, 형태 등 여러 문법상 다른 인도유럽어들과 많이 다르다. 그래서 원인도유럽어에서 가장 먼저 떨어져 나온 언어로 간주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히타이트어가 셈 계통 언어라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기원전 1500년과 1200년 사이에 아리안족은 북서쪽 지역으로부터 인도 북서부의 인더스 강 상류 지역에 침입하여, 당시 그곳에서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 여러 기획 도시를 세울 정도로 고도의 문화를 일으킨 흑인 계통의 종족을 학살한다. 이에 원주민들은 인도 아대륙의 동남부로 물러난다. 이들이 드라비다족이다. 아리안족은 카스트란 제도를 만들어 피정복민을 철저히 배제했다. 이들 카스트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브라만은 제사를 주관하고 신들의 말씀인 여러 ≪베다≫를 통째로 외워 후손에게 대대로 전수한다. 이는 기록 방법을 알지 못한 고대 종족에게 자주 보는 현상이다. 히브리족이나 아프리카의 일부 종족에서도 그 예가 보인다.
그리스 지역에서 미케네 문명을 꽃피웠던 이오니아계나 아르카디아계의 종족들은 흑해 북서부 연안으로부터 그리스 반도로 진출해 들어왔다. 당시 이곳에는 예전에“ 위대한 여신”을 믿는 농경민이 살았다(책에서는 이들 원주민을 펠라스고인이라 부르고 있다). 미케네인은 원주민과 타협한 공동 통치의 형태를 만들었다. 즉 위대한 여신을 상징하는 토착민 측의 여왕이 이주자 측의 한 남자를 형식상의 왕으로 내세워 결혼 예식을 행했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왕을 죽여 그 피를 벌판에 뿌려서 풍년을 기원했다. 미케네인은 크레타를 정복하고 해상무역의 강자로 대두한다. 이들의 무역선단은 지중해 동안만 아니라 대서양 서안에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청동기의 주재료인 주석과 구리를 에게 해 지역으로 가져와 청동기의 황금기를 구현한다. 어원상 브리타니카는 주석을, 아이레는 구리의 주산지임을 뜻한다. 트로이 전쟁도 실은 미케네인과 트로이인이 흑해로의 무역로를 확보키 위한 투쟁이었다.
아직 기록이 되지 않던 이 시기의 역사적 진실은 신화 속에 숨어 있다. 제우스, 데메트르는 각기 외부로부터의 이주 세력과 원주민 세력을 대변한다. 또 신화 속 당시 그리스와 에게 해 지역에는 이집트의 셈계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다. 다나오스와 카드모스 전설 등은 이집트와 셈계의 주민들이 그리스 반도에 이주했음을 알려준다.
3부 강도들, 영웅들, 왕들 B.C.1300~500
여기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횡행하며 혼돈에 빠진 유럽과 근동 및 이란 지역에 부침했던 여러 왕국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기록하는 방법을 몰랐다. 따라서 이들의 역사는 문자를 가진 다른 민족들이 접촉하면서 서술한 것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즉 이집트나 그리스다. 이 과정에서 이들 민족들의 일방적 시각에 따라 서술된 역사는 상당히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자신들 외의 모든 민족을 야만인으로 깔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가능성은 아주 높다. 또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가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 책은 실제 사건이 있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나서 작가가 직접 여행하며 본것과 함께 당시에 구전으로 내려온 것을 바탕으로 쓰였다. 따라서 실제와는 다를 가능성이 크다. 확실한 것은 당시 근동의 문화가 그리스보다도 더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점이다.
히타이트 왕국을 멸망시킨 해양민족의 정체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일리리아계 종족을 주축으로 한 그리스인, 사르디니아인, 시칠리아인 등 여러 다민족 연합체로 보고 있다. 이들은 지중해 동안의 여러 해안 지역을 유린하다가 이집트의 람세스 3세에 의해 나일 강 하구에서 패퇴해 와해된다. 이때의 전투 장면이 테베 근처의 메디나트 하부 신전의 벽화에 그려져 있다. 이집트의 기록에서 이들을 ‘하네부’라 불렸는데, 이는 당시 북해 연안에 살던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이집트와 이들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케네 왕국을 멸망시킨 도리아인의 정체도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종족들에 비해 늦게 북쪽에서 그리스에 진출했고, 상대적으로 낮은 문화 수준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책의 저자는 도리아인이 원일리리아인의 후손을 주축으로 디마어, 헬레어, 팜필리어 등 여러 계통의 종족이 융합되어 형성되었고, 전설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도 도리아 계통으로 보고 있다. 외지인의 침입과 기후 변화로 인해, 그리스 본토의 많은 주민들이 에게 해의 섬들과 소아시아 해변 서안 지역으로 이주하여, 후일 헬레네 문화를 일으킬 토대를 마련한다.
그리스는 반도를 가로질러 가는 여러 산맥 때문에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수많은 도시 국가가 생겨났다. 이들을 하나로 통합한 힘은 종교였다. 여기에서 제우스를 주신으로 한 올림푸스 신들은 외지에서 그리스로 들어온 민족들이 믿던 신이다. 반면에 데메트르 위시한 여러 여신들은 그곳에 살던 원주민이 믿던 신들이다. 디오니소스는 당시 독특한 축제로 그리스인의 관심을 끌었던 프리기아족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와 전설을 자세히 살피면 당시 민족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다나오스 전설은 그리스로 이집트인이, 카드모스 전설은 셈계의 종족이 이주해 온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4부 동쪽에서 온 기마인들 B.C.800~A.D.500
카스피 해의 동쪽에 있는 아랄 해 주변 지역은 다양‘한초 원의 기마민족’이 발생한 지역이다. 이 기마민족들은 정주 생활을 하지 않고 말을 타고 다니던 유목민들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재산을 휴대가 간편한 금은 장신구로 바꾸어 말에 매달고 다녔다. 이들이 남긴 동물 형상을 본 따서 만든 금속 공예품들은 그 정교함과 예술적 감각으로 모든 이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들 예술품들이 그들이 직접 만든 것인가, 아니면 외지로부터의 수입이나 약탈로 얻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공예품에서 보이는 모티브상에서 보면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옛 쿠르간 종족처럼 새로운 봉분을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조상들이 남긴 거대한 무덤을 부분적으로 파서 화장한 시신을 석관이나 목관에 넣어 매장했다.
키메르족은 프리기아 왕국과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 도시들에 큰 타격을 입히고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흑해의 크림 반도란 명칭은 이들 종족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스키타이족은 그리스인과 오랜 기간 싸웠기에 이들의 서술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들은 근동의 여러 제국들과 싸우면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진출했다. 또 얼마 전에 알타이 산맥의 동토 지대에서 붉은 머리를 가진 한 무장한 전사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이 전사는 스키타이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스키타이족의 동쪽 지역에서 발흥한 사르마트족은 로마 제국의 강력한 대항 세력이었지만, 또한 이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헝가리, 라인 강 중부 지역, 영국 등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싸웠다. 철제 조각으로 엮어 만든 갑옷을 입은 이들의 기마부대가 대오를 지어 적진으로 돌격하면, 어떠한 보병부대도 이를 막아내기 어려웠다. 이 종족에서는 여성도 군에 편입되어 싸웠다. 그녀들은 적의 목을 하나 따 온 후에야 비로소 결혼할 자격이 주어졌다. 여전사의 무덤에서 많은 장신구와 무기들이 발견되는데, 그 규모나 다양함에서 남전사의 것을 능가한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여성 우위 사회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는 이들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존족으로 보고 있다.
근동의 폭군이었던 아시리아 왕국은 기원전 614년에 멸망한다. 그 후 여러 왕국들이 근동에서 부침하다가 페르시아 왕국에 의해 통일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인도에까지 진출한다. 이때 그를 따라왔던 그리스인이 세운 박트리아 왕국에서 불교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이 생긴다. 그리스의 신상에서 보이는 섬세한 인물 조각 방식은 이곳의 불상 조각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불상 형태는 불교의 포교와 더불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도달한다.
이 책은 인도 북부지역에서 중국의 신장성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쿠샨 왕국을 옛취(일명 월지)와 동일시하고 있다. 또 유럽 지역에서 이주해 온 토카르족과도 동일시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아직도 회의적으로 본다. 1890년 중국 신장성에서 토카르어는 A와 B의 두 개 방언으로 기록된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이 중 후자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실제 사용된 언어로 보인다.
5부 중부 유럽의 발흥 B.C.2000~A.D.400
기원전 20~14세기까지의 유럽 내륙의 기후는 순조롭고 사회는 평화로왔다. 지중해 동안과 북해 연안 사이에는 육상과 해상으로 정기적인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 지역에서의 청동기 제조 기술은 발칸 반도의 도나우 강 중하류에 살던 주민들에게서 배운 것이었지만, 이들이 생산한 제품들은 곧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여 역시 교역의 주요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3세기에 이르면 유럽 대륙의 기후는 다시 악화되면서 인구 과밀화로 농경지를 둘러싼 다툼이 심해진다. 이때 장례 관습이 크게 변한다. 즉 기존의 매장방식에서 시신을 부장품과 함께 화장해 그 재를 용기에 담아 묻는 화장방식으로 변한다. 이는 당시 횡행한 도굴로부터 망자의 물건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훈족의 아틸라가 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유럽 대륙은 여러 기마민족에 시달렸다. 키메르족이 8세기에 유럽 중앙부를 거쳐 프랑스에까지 진출했고, 그 이후 스키타이족이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지에 출몰했다. 그 흔적은 이들이 사용한 각종 무기류, 말의 재갈 및 이들만의 특유한 금속 세공품에서 발견된다. 이때 주민이 땅속에 묻고 피난 갔다가 주인이 피살되어 남겨진 ‘숨겨진 보물’들은 고고학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교역 활동의 마비로 청동 원료의 공급이 원활치 않게 되자, 사람들은 제련은 힘들지만 훨씬 더 단단한 철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할슈타트 문화는 이러한 초기 철기시대의 산물이다. 이 문화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켈트족으로 보고 있으나, 이 책의 저자는 이를 원일리리어인의 것으로 보고 있다.
켈트족은 최초로 유럽 대륙을 지배했다. 이들은 386년 로마 도시를 정복하고, 후에 그리스의 델피 신전을 약탈했다. 그리고 소아시아로 건너가서 갈라티아 왕국도 세웠다. 또 서쪽으로는 브리타니아 섬과 아일랜드 섬을 정복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통일된 국가와 통치 체제는 갖추지 못했다. 드루이드 사제가 정신적 지도자로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인도의 브라만 사제와 비슷하다. 이들의 무덤에서는 아주 정교하고 뛰어난 예술 감각을 보이는 금속 세공품이 많이 발견된다. 라텐느 시기의 이들 부장품이 이들이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에트루리아 등 외지에서의 수입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탈리아 중부의 라티움 지역의 한 작은 마을이었던 로마는 늑대 토템을 믿는 한 씨족이 다스렸으나, 상당 기간 이탈리아 북부에 살던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았다. 우리가 로마의 산물로 알고 있는 상당수가 실은 에트루리아의 것이다. 원형극장, 상수도 시설을 위시한 거대한 건축물, 마차 경주놀이 등이 로마인이 에트루리아인에게 배운 것이다. 티베르 강변의 교역 중심지로서 부각되어 점차 세력을 키워간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의 강자가 된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는 인도유럽인 계통의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살았다. 이 중 삼니트인들 중심의 반란은 로마를 한때 크게 위협했다.
기원전 5세기에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덴마크 지역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은 375년에 시작된 ‘게르만족 대이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훈족에게 밀린 고트족은 그동안 섬겨 온 동로마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다. 이에 격분한 이들이 제국 영내로 침입해 약탈을 시작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해일이나 폭풍우로 농경지가 파괴되면, 이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대규모로 고향을 떠나곤 했다. 그 한 예가 기원전 113년 킴버족과 튜턴족 연합체가 로마와 크게 충돌한 일이다. 이때 로마는 이들 때문에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벗어난다.
기원전 42년 갈리아 지역 로마 사령관 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아르미니아가 이끄는 게르만 군대에 몰살된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날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게르만족 출신이 아니라, 당시 북부 독일 지역에 살던 ‘북서 블록’ 종족 출신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종족 외에 게르만의 여러 종족을 규합해 로마 군대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만들었다는 것이
6부 후발주자들 A.D.500~1400
6부에서는 인도유럽인 중에서 늦게 활동을 시작한 슬라브인과 발트인을 다루고 있다.
불가리아족은 수수께끼 종족이다. 이들은 흔히 슬라브계 종족으로 알려졌으나, 학계는 대체로 아시아계에서 찾고 있다. 최근 이들이 파밀 고원에서 기원하여, 흑해 북안을 중간 기착지로 했다가 발칸 반도로 들어온 이란계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들은 680년 동로마 제국을 크게 패퇴시킨 후에 한때 발칸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이들은 피지배층인 슬라브족의 언어를 받아들여 급속도로 슬라브화한다.
흑해 북쪽에 있는 침엽수와 소택지의 지대에서 기원한 슬라브족은 점차 발칸 전역을 석권했다. 그리고 더욱 서쪽으로 진출해, 폴란드, 체코 등은 물론이고 중세시대에는 독일 깊숙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엘베 강 동쪽 지역 전체는 물론이고, 한 때는 유틀란드 반도의 뤼벡에도 살았다. 이 중 오보드리텐족은 프랑켄제국의 칼대제와 동맹을 맺어 게르만의 작센족에 대항할 정도로 강력했다. 오늘날의 독일 내에 사는 소르벤인이란 슬라브족의 독특한 민속춤은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862년 노브고로드의 슬라브인은 불안정한 교역로를 안정시키고자 스웨덴의 바레거 출신 루릭을 통치자로 초빙한다. 이것이 러시아 왕국의 시작이다. 이 루릭의 아들 이고르의 아내 올가가 비잔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러시아 왕국은 그리스 정교회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그리스도교의 수장은 러시아 왕국의 차르에게 돌아간다.
독일인이 슬라브족 거주지를 정복하고 이곳에 독일 농부와 수공업자들을 이주시킨 ‘동방식민정책’은 9세기에 시작되어 14세기에 피크에 달한다. 독일 제후들은 새로운 정복지에서 절대 다수였던 피지배층 슬라브족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독일 각처에서 이주민을 모집했다. 당시 뛰어난 농경 기술을 보유하였던 독일 농부들은 소택지였던 이곳에 운하를 만들어 배수를 해서 물을 빼내어 농경에 적합한 토지를 얻어냈다. 상당 기간의 세금 면제 등 여러 인센티브를 제공하자, 독일인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슬라브 지역은 급속히 독일화된다. 그리고 여러 지역 출신 독일인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되면서, 당시 지역별로 방언화가 극도로 심했던 독일어가 통일된 언어로 가는 데 크게 기여한다
발트족은 일찍부터 발트 해 연안의 외진 지역에 살았기에 인도유럽어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들 지역을 인도유럽인의 기원지로 생각하기도 했다. 슬라브족이 이들 지역에 점차 진출하면서 쌍방 간에 많은 충돌이 생겼고, 이 와중에 발트족은 점차 슬라브화한다. 발트족의 성직자들은 켈트족의 드루이드 사제, 인도의 브라만 사제들처럼 주민들의 높은 존경을 받았다. 문자의 사용이 상당히 늦은 것은 이의 사용이 독립성을 잃고 독일화되는 첩경이라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이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1230년 독일기사단이 발트 해 연안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발트족은 20여년간 독일인과 피나는 전쟁을 치루지만 결국은 이들에 정복당한다. 이에 독일인은 상층계급으로 군림하여,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는 독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발트족의 일원인 리투아니아인은 한때 폴란드까지 포함한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여 러시아를 압도했다. 이민족의 종교에 관대했던 이 왕국은 유럽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온 많은 유대인을 받아들여, 나치의 탄압으로 많이 줄어들었던 유대인이 전후에 다시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상상력을 동원한 힘 있는 글쓰기-역사연구 방법에서의 새로운 시도들
이 책의 저자인 라인하르트 쉬메켈은 인종학과 인도게르만학에 정통한 학자다. 여기에 과거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경험이 더해져 저자의 글은 상상력을 동원한 힘 있는 글쓰기에 정교한 해석이 돋보인다. 저자는 이런 솜씨로 정통 역사만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미지의 어둠 속 대양과 같은 인도유럽인에 대해 희미하나마 새로운 불빛을 비춰주고, 이 인도유럽인에서 기원한 여러 종족들 간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또 이들이 이뤄낸 주요 핵심 문화들을 짚어내면서 그동안의 역사 서술 과정상에 나타난 일방적 편향성을 수정한다. 그렇다고 선사시대를 다룬 여느 책들처럼 문화사, 예술사, 언어사 전반을 전달한다거나, 또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 민족들을 구분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도자기의 다양한 형태나 이에 새겨진 문양에 대한 세세한 서술은 없다.
그보다 저자는 여러 종족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즉 이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자신의 선주민이나 이웃 종족들과 생리학적, 문화적으로 어떤 관련성이 있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또 이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어떠한 문화와 업적을 남겨놓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주제는 고고학자와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깊이 관여하기를 상당히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 문제에 대해 오직 추측에만 근거해 답을 주려 하겠는가?
각 장에는 임의로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마치 다큐멘터리의 재연 드라마처럼 들어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의 특별한 상황과 상태를 돋보기로 보듯 묘사해 학문적으로 밝혀낸 무미건조한 내용을 딱딱하게 서술해서 생길 수 있는 독자들의 지루함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소설가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정밀한 연구 결과로 밝혀진 역사적 상황을 근거로 실제 일어났을 법한 개연성에 바탕을 두고 높은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이야기다.
순수 학문 연구자들은 이러한 픽션을 첨가하는 서술 방식을 비학문적 행위로 간주하면서 경멸의 시선을 보낼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된 역사의 이전 시대를 이해하는 데 큰 장애를 주는 두꺼운 벽에 틈새를 만들어내고, 또 그 틈새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많은 주석이 달린 두툼한 학술 논문보다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더 유용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곳저곳에 생긴 여러 작은 틈새들을 좀더 넓혀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라인하르트 쉬메켈
Reinhard Schmoeckel
1928년 8월 27일에 베를린에서 출생한 라인하르트 쉬메켈 박사는 인종학 및 인도게르만학에 정통한 학자이다. 또한 독일 현대 정치학, 특히 정당사에 대한 저서도 낸 행정연구가이도 하다. 처음에 베스트팔렌의 한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독일 본 대학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기자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또 본에 소재한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실과 대통령실에서 고위 관료로 40년간 재직하면서, 독일과 유럽 및 근동아시아 지역의 선사시대와 고대시대에 대한 다양한 저서들을 펴내서 대중적 인기를 모았다. ‘디트리히 본 베른 학회’의 회장으로서 독일의 고대 전설에 숨어 있는 역사성을 캐내는 데 진력하고 있으며, 현재 본에 살고 있다.
역자 : 한국 게르만어 학회
1994년 역사언어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전문 학술공동체이다. 매월 1회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고트어, 고대독어, 고대작센어 등 게르만 제 언어로 쓰인 텍스트를 강독하거나 관련 논문들을 읽어가며 이들 언어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다. 아울러 인도유럽어 전반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 최근에는 역사언어학을 역사, 민속, 전설, 고고학, 유전학 등 여러 학문 분야와 관련시키면서 다각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김영중 : 한국외국어대학교 네델란드어학과 교수이다.
김재명 : 강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김희자 : 순천향대학교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이다.
류종경 : 충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윤혜준 :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연구교수이다.
정정권 : 인천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 주요 목차
I. 초원에서 출발한 종족 B.C.4500~2000
1장 젊은 희생자들의 행렬: 원原인도유럽인의 확산
2장 언어학자들, 인도유럽인을 발견하다: Vater-pater-peter(아버지)
3장 정치가 학문의 목을 조르다: “게르만”이란 용어가 금기어가 된 이유
4장 버려진 아이: 수천 년에 걸친 쿠르간족의 형성 과정
5장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 쿠르간 유목민의 문화와 5000년 전 유럽 문화들
II. 전투마차를 몰고 다니던 귀족들 B.C.2000~1200
6장 잊혀진 대제국: 히타이트 제국
7장 북쪽에서 온 귀족들: 인도의 정복자 아리아인들
8장 호메로스의 영웅들: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III. 강도들, 영웅들, 왕들 B.C.1300~500
9장 행진하는 민족들: 일리리아인의 이동과 해양민족 펠리시테인
10장 옛 영웅을 노래하다: 도리아인, 이오니아인, 그리고 그리스의 암흑기
11장 종족의 용광로: 소아시아의 2차 인도유럽인의 물결
IV. 동쪽에서 온 기마인들 B.C.800~A.D.500
12장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 1차 훈족의 침입
13장 유목민의 우두머리에서 세계적 제국의 지배자로: 최초로 인도유럽인 대제국을 세운 메디아와 페르시아
14장 “세계의 지붕” 주변: 인도유럽인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다
V. 중부 유럽의 발흥 B.C.2000~A.D.400
15장 황금기: 청동기시대의 유럽
16장 역사가 없는 민족들: 유럽 대륙의 절반에서 사라진 선조들
17장 유럽의 첫 주인들: 로마인 전에 켈트족이 유럽 대륙을 지배했다
18장 늑대와 황소: 인도유럽인 이주민들의 패권 다툼
19장 구세계의 새 지배자들: 게르만족의 등장
VI. 후발주자들 A.D.500~1400
20장 거인이 깨어나다: 슬라브인들의 동유럽 지역 영토 획득
21장 멸망과 승리: 선사시대 발트족의 다양한 행로
인도유럽인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다
선사시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여전히 미미하다. 정규 교과 과정을 통해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 대해서는 상세히 배우고 있다. 또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 그리고 고대 게르만인에 대해서도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중부 유럽인에 대한 시야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서구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아직도 이들 문명 민족들에게만 고정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이 서사시를 지어내고 신정을 세우기 전에 또 로마의 군대들이 세계 정복을 위해 진군하기 전에, 유럽과 서부 아시아 지역은 대체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당시 그곳은 전 지역이 숲과 늪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으며, 주민들은 거친 털가죽으로 몸을 감싼 야만인들이었을까? 유럽인의 역사는 정말로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기원전 800년이나 400년경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일까?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며 “미지의 어두운 대양”과 같은 인도유럽인의 역사를 조명한다.
미아가 된 인도유럽인
그리스인, 로마인, 게르만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켈트인 등이 갈라져 나왔다고 언어학자들이 주장하는, 저 신비에 가득 찬 인도게르만인 또는 인도유럽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정말로 인도유럽인이라는 종족이 존재했을까? 아니면 이는 몇몇 학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단지 허구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원래 공통 언어를 가졌던 사람들이 수천 년 전에 유럽 전역과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유럽인들은 이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얼핏 보면 상당히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이는 오늘날 역사학계가 갖고 있는 커다란 모순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가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이미 200년이나 지난 지금, 이에 대한 방대한 양의 저술들이 모든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도유럽인 관련 연구도 마찬가지다. 학교의 역사 교육에서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치 않은 짧은 시기에 불과한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원시적 목자 겸 농부였던 인도유럽인이 유럽의 동부 지역이나 근동 아시아 지역에서 기원해 사방으로 퍼져 나간 후 점차 인도인,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켈트인, 로마인, 게르만인 등의 수많은 민족들로 발전해 나가는 수천 년간의 시기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초기 인도유럽인들의 출현과 확산의 시기는 세계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시기다. 이는 바로 우리 유럽 선조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모든 유럽인들은 당시 남부 러시아 스텝 지역에서 출발한 이 사람들의 육체적 유전인자뿐만 아니라 정신적 유전인자도 훨씬 더 많이 물려받았다. 현재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거나 적어도 이를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선사시대 이래 이 인도유럽인 종족과 그 종족에서 파생된 종족들에 내재해 있는 신비한 추진력과 돌파력 그리고 창의력 덕분이다.
오늘날 이 유럽의 민족들과 그 외 지역의 인도유럽인 민족들이남긴 많은 중요한 역사, 즉 이들이 기록물이나 웅대한 건축물을 통해 남긴 모든 것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도판이 풍성하게 수록된 많은 책을 통해 일반인들도 인도유럽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는 기본적으로 인도유럽인에 속한 각 종족의 선조들이 기록물을 남기기 이전이나 변변한 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못한 시기에 겪은 운명, 즉 이들 각 종족의 선사시대만을 다루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신비에 싸인 이들 인도유럽인의 역사는 오늘날 고고학자와 언어학자 그리고 기타 여러 분야에 걸친 학자들의 연구로 상당히 알려졌다. 그래서 이들 민족의 이동과 전투 행위, 문화, 교역, 생활 방식, 세계관 등, 4000년 내지 2000년 전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할 정도가 되었고 이 책은 용기 내어 수백 개의 두꺼운 학술서적에 흩어져 있는 이들에 관한 지식들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
1부 초원에서 출발한 종족 B.C.4500~2000
쿠르간이란 터키어로 거대한 언덕을 뜻하는 단어다. 동부 유럽 및 중부 유럽 지역에는 부장품과 함께 시신을 묻은 거대한 봉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리투아니아 출생의 미국의 여류 고고학자인 마리아 김베테이너는 이 봉분들이 분포한 지역들을 쿠르간 문화라 명명하고, 그 문화는 7000년에서 5000년 전에 흑해 북안 지역에 살던 종족이 말을 길들여 강한 무력으로 주위를 정복해 나갔다는 ‘기마민족설’을 제기했다. 그녀의 이론은 한동안 절대적으로 통용되었다. 이 책의 저자도 김베테이너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87년 영국의 고고학자 콜린 렌프류는 인도유럽인이 9000년 전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농경인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최근에는 이 유력한 두 이론을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유전학자 카빌리 스포르짜의 유전자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소아시아에서 유래한 농경민족이 발칸 반도로 들어선 후에 북쪽의 흑해 북안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말을 타는 기마민족이 되어 유럽 각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이들 민족이 인도유럽인이고, 이들이 당시 사용했다고 추정하는 언어가 인도유럽어이다. 이 언어에서 여러 많은 언어들이 파생되어 나와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인도유럽어란 명칭은 그 언어 분포 상 서쪽 끝이 유럽에 동쪽 끝은 인도에 달하여 붙여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중국의 신장성에서 발견된 토카르어도 인도유럽어임이 밝혀졌다.
오늘날 비교언어학을 통해 옛 조상어를 재구성해 내고, 이를 토대로 당시 주민들의 생활환경과 생활문화를 추론해내고 있다. 이른바 언어 고생물학과 언어 문화사적 방법이다. 이는 인도유럽인의 원고향을 찾으려는 시도에 폭넓게 이용되었다. 윌리암 존스, 프란츠 봅 등에 의해 인도유럽어를 대상으로 개발된 비교언어학은 그동안 큰 성과를 거뒀다. 그래서 인도유럽어 사전이 나와 있고, 일부 언어학자들은 인도유럽어로 쓰인 텍스트를 만들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에 대한 신빙성은 상당히 의심받고 있다.
비교언어학은 독일 학자들에 의해 큰 진전을 이뤘다. 그래서 이들이 사용한 ‘인도게르만어’란 명칭이 독일 내에서는 ‘인도유럽어’란 명칭보다 우세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인종 편견의 정책을 사용한 나치 시대에 게르만이란 용어가 남용되면서, 오늘날 독일 내에서는“ 게르만”은 금기된 용어가 되었고, 이는 인도유럽인과 게르만인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위축을 가져와서, 현재 이 분야의 연구는 독일 밖에서 훨씬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쿠르간족이 진출하기 전의 유럽에는 농경을 위주로 한 선주민이 있었다. 이들은 소아시아에서 일단 발칸 반도로 넘어와, 고도의 농경문화를 일으켰던 주민들의 후손이다. 김베테이너가 ‘고유럽인’이라고 칭한 이들은 ‘위대한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 중심사회였다. 이곳에서는 정교한 형태의 금속제품과 다양한 형태의 여러 토기 제품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새겨진 여러 문양과 기호들에는 문자의 흔적이 보이지만, 아직 해독되고 있지는 않다.
2부 전투마차를 몰고 다니던 귀족들 B.C.2000~1200
전투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경마차이다. 여기에 탄 한 병사는 말을 몰고, 다른 하나는 활을 쏘거나 창을 던졌다. 바퀴살을 가진 바퀴가 달린 이 마차는 가벼워서 빠르게 달리면서, 쉽게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전투 병기는 보병으로 구성된 적에게는 지금의 탱크와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여기에서는 이런 전투 경마차를 이용해 강대한 세력을 이뤘던 세 지역을 다루고 있다.
히타이트란 명칭은 원래 피정복민의 하나인 하티족에서 나왔다. 즉 문화적으로 앞섰던 피정복민의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이 명칭을 갖게 되었지만, 학계는 그동안의 관례에 따라 이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시리아의 카네시에서 벌인 전투는 ≪성경≫에도 나온다. 이때 쌍방이 맺은 휴전 조약의 사본들이 양측 궁정에서 발견되었다. 또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던 하투샤가 위치했던 보가즈쾨이에서 천여 개의 방대한 토기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들 텍스트에는 당시 근동에서 통용어로 사용되던 아카드어도 함께 나타난 점이, 1915년 체코의 언어학자 베드리히 흐로츠니에가 이 언어를 해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히타이트어에는 음운, 형태 등 여러 문법상 다른 인도유럽어들과 많이 다르다. 그래서 원인도유럽어에서 가장 먼저 떨어져 나온 언어로 간주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히타이트어가 셈 계통 언어라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기원전 1500년과 1200년 사이에 아리안족은 북서쪽 지역으로부터 인도 북서부의 인더스 강 상류 지역에 침입하여, 당시 그곳에서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 여러 기획 도시를 세울 정도로 고도의 문화를 일으킨 흑인 계통의 종족을 학살한다. 이에 원주민들은 인도 아대륙의 동남부로 물러난다. 이들이 드라비다족이다. 아리안족은 카스트란 제도를 만들어 피정복민을 철저히 배제했다. 이들 카스트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브라만은 제사를 주관하고 신들의 말씀인 여러 ≪베다≫를 통째로 외워 후손에게 대대로 전수한다. 이는 기록 방법을 알지 못한 고대 종족에게 자주 보는 현상이다. 히브리족이나 아프리카의 일부 종족에서도 그 예가 보인다.
그리스 지역에서 미케네 문명을 꽃피웠던 이오니아계나 아르카디아계의 종족들은 흑해 북서부 연안으로부터 그리스 반도로 진출해 들어왔다. 당시 이곳에는 예전에“ 위대한 여신”을 믿는 농경민이 살았다(책에서는 이들 원주민을 펠라스고인이라 부르고 있다). 미케네인은 원주민과 타협한 공동 통치의 형태를 만들었다. 즉 위대한 여신을 상징하는 토착민 측의 여왕이 이주자 측의 한 남자를 형식상의 왕으로 내세워 결혼 예식을 행했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왕을 죽여 그 피를 벌판에 뿌려서 풍년을 기원했다. 미케네인은 크레타를 정복하고 해상무역의 강자로 대두한다. 이들의 무역선단은 지중해 동안만 아니라 대서양 서안에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청동기의 주재료인 주석과 구리를 에게 해 지역으로 가져와 청동기의 황금기를 구현한다. 어원상 브리타니카는 주석을, 아이레는 구리의 주산지임을 뜻한다. 트로이 전쟁도 실은 미케네인과 트로이인이 흑해로의 무역로를 확보키 위한 투쟁이었다.
아직 기록이 되지 않던 이 시기의 역사적 진실은 신화 속에 숨어 있다. 제우스, 데메트르는 각기 외부로부터의 이주 세력과 원주민 세력을 대변한다. 또 신화 속 당시 그리스와 에게 해 지역에는 이집트의 셈계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다. 다나오스와 카드모스 전설 등은 이집트와 셈계의 주민들이 그리스 반도에 이주했음을 알려준다.
3부 강도들, 영웅들, 왕들 B.C.1300~500
여기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횡행하며 혼돈에 빠진 유럽과 근동 및 이란 지역에 부침했던 여러 왕국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기록하는 방법을 몰랐다. 따라서 이들의 역사는 문자를 가진 다른 민족들이 접촉하면서 서술한 것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즉 이집트나 그리스다. 이 과정에서 이들 민족들의 일방적 시각에 따라 서술된 역사는 상당히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자신들 외의 모든 민족을 야만인으로 깔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가능성은 아주 높다. 또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가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 책은 실제 사건이 있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나서 작가가 직접 여행하며 본것과 함께 당시에 구전으로 내려온 것을 바탕으로 쓰였다. 따라서 실제와는 다를 가능성이 크다. 확실한 것은 당시 근동의 문화가 그리스보다도 더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점이다.
히타이트 왕국을 멸망시킨 해양민족의 정체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일리리아계 종족을 주축으로 한 그리스인, 사르디니아인, 시칠리아인 등 여러 다민족 연합체로 보고 있다. 이들은 지중해 동안의 여러 해안 지역을 유린하다가 이집트의 람세스 3세에 의해 나일 강 하구에서 패퇴해 와해된다. 이때의 전투 장면이 테베 근처의 메디나트 하부 신전의 벽화에 그려져 있다. 이집트의 기록에서 이들을 ‘하네부’라 불렸는데, 이는 당시 북해 연안에 살던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이집트와 이들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케네 왕국을 멸망시킨 도리아인의 정체도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종족들에 비해 늦게 북쪽에서 그리스에 진출했고, 상대적으로 낮은 문화 수준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책의 저자는 도리아인이 원일리리아인의 후손을 주축으로 디마어, 헬레어, 팜필리어 등 여러 계통의 종족이 융합되어 형성되었고, 전설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도 도리아 계통으로 보고 있다. 외지인의 침입과 기후 변화로 인해, 그리스 본토의 많은 주민들이 에게 해의 섬들과 소아시아 해변 서안 지역으로 이주하여, 후일 헬레네 문화를 일으킬 토대를 마련한다.
그리스는 반도를 가로질러 가는 여러 산맥 때문에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수많은 도시 국가가 생겨났다. 이들을 하나로 통합한 힘은 종교였다. 여기에서 제우스를 주신으로 한 올림푸스 신들은 외지에서 그리스로 들어온 민족들이 믿던 신이다. 반면에 데메트르 위시한 여러 여신들은 그곳에 살던 원주민이 믿던 신들이다. 디오니소스는 당시 독특한 축제로 그리스인의 관심을 끌었던 프리기아족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와 전설을 자세히 살피면 당시 민족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다나오스 전설은 그리스로 이집트인이, 카드모스 전설은 셈계의 종족이 이주해 온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4부 동쪽에서 온 기마인들 B.C.800~A.D.500
카스피 해의 동쪽에 있는 아랄 해 주변 지역은 다양‘한초 원의 기마민족’이 발생한 지역이다. 이 기마민족들은 정주 생활을 하지 않고 말을 타고 다니던 유목민들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재산을 휴대가 간편한 금은 장신구로 바꾸어 말에 매달고 다녔다. 이들이 남긴 동물 형상을 본 따서 만든 금속 공예품들은 그 정교함과 예술적 감각으로 모든 이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들 예술품들이 그들이 직접 만든 것인가, 아니면 외지로부터의 수입이나 약탈로 얻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공예품에서 보이는 모티브상에서 보면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옛 쿠르간 종족처럼 새로운 봉분을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조상들이 남긴 거대한 무덤을 부분적으로 파서 화장한 시신을 석관이나 목관에 넣어 매장했다.
키메르족은 프리기아 왕국과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 도시들에 큰 타격을 입히고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흑해의 크림 반도란 명칭은 이들 종족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스키타이족은 그리스인과 오랜 기간 싸웠기에 이들의 서술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들은 근동의 여러 제국들과 싸우면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진출했다. 또 얼마 전에 알타이 산맥의 동토 지대에서 붉은 머리를 가진 한 무장한 전사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이 전사는 스키타이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스키타이족의 동쪽 지역에서 발흥한 사르마트족은 로마 제국의 강력한 대항 세력이었지만, 또한 이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헝가리, 라인 강 중부 지역, 영국 등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싸웠다. 철제 조각으로 엮어 만든 갑옷을 입은 이들의 기마부대가 대오를 지어 적진으로 돌격하면, 어떠한 보병부대도 이를 막아내기 어려웠다. 이 종족에서는 여성도 군에 편입되어 싸웠다. 그녀들은 적의 목을 하나 따 온 후에야 비로소 결혼할 자격이 주어졌다. 여전사의 무덤에서 많은 장신구와 무기들이 발견되는데, 그 규모나 다양함에서 남전사의 것을 능가한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여성 우위 사회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는 이들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존족으로 보고 있다.
근동의 폭군이었던 아시리아 왕국은 기원전 614년에 멸망한다. 그 후 여러 왕국들이 근동에서 부침하다가 페르시아 왕국에 의해 통일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인도에까지 진출한다. 이때 그를 따라왔던 그리스인이 세운 박트리아 왕국에서 불교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이 생긴다. 그리스의 신상에서 보이는 섬세한 인물 조각 방식은 이곳의 불상 조각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불상 형태는 불교의 포교와 더불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도달한다.
이 책은 인도 북부지역에서 중국의 신장성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쿠샨 왕국을 옛취(일명 월지)와 동일시하고 있다. 또 유럽 지역에서 이주해 온 토카르족과도 동일시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아직도 회의적으로 본다. 1890년 중국 신장성에서 토카르어는 A와 B의 두 개 방언으로 기록된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이 중 후자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실제 사용된 언어로 보인다.
5부 중부 유럽의 발흥 B.C.2000~A.D.400
기원전 20~14세기까지의 유럽 내륙의 기후는 순조롭고 사회는 평화로왔다. 지중해 동안과 북해 연안 사이에는 육상과 해상으로 정기적인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 지역에서의 청동기 제조 기술은 발칸 반도의 도나우 강 중하류에 살던 주민들에게서 배운 것이었지만, 이들이 생산한 제품들은 곧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여 역시 교역의 주요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3세기에 이르면 유럽 대륙의 기후는 다시 악화되면서 인구 과밀화로 농경지를 둘러싼 다툼이 심해진다. 이때 장례 관습이 크게 변한다. 즉 기존의 매장방식에서 시신을 부장품과 함께 화장해 그 재를 용기에 담아 묻는 화장방식으로 변한다. 이는 당시 횡행한 도굴로부터 망자의 물건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훈족의 아틸라가 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유럽 대륙은 여러 기마민족에 시달렸다. 키메르족이 8세기에 유럽 중앙부를 거쳐 프랑스에까지 진출했고, 그 이후 스키타이족이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지에 출몰했다. 그 흔적은 이들이 사용한 각종 무기류, 말의 재갈 및 이들만의 특유한 금속 세공품에서 발견된다. 이때 주민이 땅속에 묻고 피난 갔다가 주인이 피살되어 남겨진 ‘숨겨진 보물’들은 고고학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교역 활동의 마비로 청동 원료의 공급이 원활치 않게 되자, 사람들은 제련은 힘들지만 훨씬 더 단단한 철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할슈타트 문화는 이러한 초기 철기시대의 산물이다. 이 문화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켈트족으로 보고 있으나, 이 책의 저자는 이를 원일리리어인의 것으로 보고 있다.
켈트족은 최초로 유럽 대륙을 지배했다. 이들은 386년 로마 도시를 정복하고, 후에 그리스의 델피 신전을 약탈했다. 그리고 소아시아로 건너가서 갈라티아 왕국도 세웠다. 또 서쪽으로는 브리타니아 섬과 아일랜드 섬을 정복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통일된 국가와 통치 체제는 갖추지 못했다. 드루이드 사제가 정신적 지도자로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인도의 브라만 사제와 비슷하다. 이들의 무덤에서는 아주 정교하고 뛰어난 예술 감각을 보이는 금속 세공품이 많이 발견된다. 라텐느 시기의 이들 부장품이 이들이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에트루리아 등 외지에서의 수입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탈리아 중부의 라티움 지역의 한 작은 마을이었던 로마는 늑대 토템을 믿는 한 씨족이 다스렸으나, 상당 기간 이탈리아 북부에 살던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았다. 우리가 로마의 산물로 알고 있는 상당수가 실은 에트루리아의 것이다. 원형극장, 상수도 시설을 위시한 거대한 건축물, 마차 경주놀이 등이 로마인이 에트루리아인에게 배운 것이다. 티베르 강변의 교역 중심지로서 부각되어 점차 세력을 키워간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의 강자가 된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는 인도유럽인 계통의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살았다. 이 중 삼니트인들 중심의 반란은 로마를 한때 크게 위협했다.
기원전 5세기에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덴마크 지역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은 375년에 시작된 ‘게르만족 대이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훈족에게 밀린 고트족은 그동안 섬겨 온 동로마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다. 이에 격분한 이들이 제국 영내로 침입해 약탈을 시작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해일이나 폭풍우로 농경지가 파괴되면, 이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대규모로 고향을 떠나곤 했다. 그 한 예가 기원전 113년 킴버족과 튜턴족 연합체가 로마와 크게 충돌한 일이다. 이때 로마는 이들 때문에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벗어난다.
기원전 42년 갈리아 지역 로마 사령관 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아르미니아가 이끄는 게르만 군대에 몰살된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날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게르만족 출신이 아니라, 당시 북부 독일 지역에 살던 ‘북서 블록’ 종족 출신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종족 외에 게르만의 여러 종족을 규합해 로마 군대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만들었다는 것이
6부 후발주자들 A.D.500~1400
6부에서는 인도유럽인 중에서 늦게 활동을 시작한 슬라브인과 발트인을 다루고 있다.
불가리아족은 수수께끼 종족이다. 이들은 흔히 슬라브계 종족으로 알려졌으나, 학계는 대체로 아시아계에서 찾고 있다. 최근 이들이 파밀 고원에서 기원하여, 흑해 북안을 중간 기착지로 했다가 발칸 반도로 들어온 이란계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들은 680년 동로마 제국을 크게 패퇴시킨 후에 한때 발칸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이들은 피지배층인 슬라브족의 언어를 받아들여 급속도로 슬라브화한다.
흑해 북쪽에 있는 침엽수와 소택지의 지대에서 기원한 슬라브족은 점차 발칸 전역을 석권했다. 그리고 더욱 서쪽으로 진출해, 폴란드, 체코 등은 물론이고 중세시대에는 독일 깊숙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엘베 강 동쪽 지역 전체는 물론이고, 한 때는 유틀란드 반도의 뤼벡에도 살았다. 이 중 오보드리텐족은 프랑켄제국의 칼대제와 동맹을 맺어 게르만의 작센족에 대항할 정도로 강력했다. 오늘날의 독일 내에 사는 소르벤인이란 슬라브족의 독특한 민속춤은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862년 노브고로드의 슬라브인은 불안정한 교역로를 안정시키고자 스웨덴의 바레거 출신 루릭을 통치자로 초빙한다. 이것이 러시아 왕국의 시작이다. 이 루릭의 아들 이고르의 아내 올가가 비잔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러시아 왕국은 그리스 정교회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그리스도교의 수장은 러시아 왕국의 차르에게 돌아간다.
독일인이 슬라브족 거주지를 정복하고 이곳에 독일 농부와 수공업자들을 이주시킨 ‘동방식민정책’은 9세기에 시작되어 14세기에 피크에 달한다. 독일 제후들은 새로운 정복지에서 절대 다수였던 피지배층 슬라브족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독일 각처에서 이주민을 모집했다. 당시 뛰어난 농경 기술을 보유하였던 독일 농부들은 소택지였던 이곳에 운하를 만들어 배수를 해서 물을 빼내어 농경에 적합한 토지를 얻어냈다. 상당 기간의 세금 면제 등 여러 인센티브를 제공하자, 독일인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슬라브 지역은 급속히 독일화된다. 그리고 여러 지역 출신 독일인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되면서, 당시 지역별로 방언화가 극도로 심했던 독일어가 통일된 언어로 가는 데 크게 기여한다
발트족은 일찍부터 발트 해 연안의 외진 지역에 살았기에 인도유럽어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들 지역을 인도유럽인의 기원지로 생각하기도 했다. 슬라브족이 이들 지역에 점차 진출하면서 쌍방 간에 많은 충돌이 생겼고, 이 와중에 발트족은 점차 슬라브화한다. 발트족의 성직자들은 켈트족의 드루이드 사제, 인도의 브라만 사제들처럼 주민들의 높은 존경을 받았다. 문자의 사용이 상당히 늦은 것은 이의 사용이 독립성을 잃고 독일화되는 첩경이라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이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1230년 독일기사단이 발트 해 연안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발트족은 20여년간 독일인과 피나는 전쟁을 치루지만 결국은 이들에 정복당한다. 이에 독일인은 상층계급으로 군림하여,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는 독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발트족의 일원인 리투아니아인은 한때 폴란드까지 포함한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여 러시아를 압도했다. 이민족의 종교에 관대했던 이 왕국은 유럽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온 많은 유대인을 받아들여, 나치의 탄압으로 많이 줄어들었던 유대인이 전후에 다시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상상력을 동원한 힘 있는 글쓰기-역사연구 방법에서의 새로운 시도들
이 책의 저자인 라인하르트 쉬메켈은 인종학과 인도게르만학에 정통한 학자다. 여기에 과거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경험이 더해져 저자의 글은 상상력을 동원한 힘 있는 글쓰기에 정교한 해석이 돋보인다. 저자는 이런 솜씨로 정통 역사만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미지의 어둠 속 대양과 같은 인도유럽인에 대해 희미하나마 새로운 불빛을 비춰주고, 이 인도유럽인에서 기원한 여러 종족들 간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또 이들이 이뤄낸 주요 핵심 문화들을 짚어내면서 그동안의 역사 서술 과정상에 나타난 일방적 편향성을 수정한다. 그렇다고 선사시대를 다룬 여느 책들처럼 문화사, 예술사, 언어사 전반을 전달한다거나, 또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 민족들을 구분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도자기의 다양한 형태나 이에 새겨진 문양에 대한 세세한 서술은 없다.
그보다 저자는 여러 종족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즉 이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자신의 선주민이나 이웃 종족들과 생리학적, 문화적으로 어떤 관련성이 있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또 이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어떠한 문화와 업적을 남겨놓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주제는 고고학자와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깊이 관여하기를 상당히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 문제에 대해 오직 추측에만 근거해 답을 주려 하겠는가?
각 장에는 임의로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마치 다큐멘터리의 재연 드라마처럼 들어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의 특별한 상황과 상태를 돋보기로 보듯 묘사해 학문적으로 밝혀낸 무미건조한 내용을 딱딱하게 서술해서 생길 수 있는 독자들의 지루함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소설가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정밀한 연구 결과로 밝혀진 역사적 상황을 근거로 실제 일어났을 법한 개연성에 바탕을 두고 높은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이야기다.
순수 학문 연구자들은 이러한 픽션을 첨가하는 서술 방식을 비학문적 행위로 간주하면서 경멸의 시선을 보낼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된 역사의 이전 시대를 이해하는 데 큰 장애를 주는 두꺼운 벽에 틈새를 만들어내고, 또 그 틈새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많은 주석이 달린 두툼한 학술 논문보다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더 유용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곳저곳에 생긴 여러 작은 틈새들을 좀더 넓혀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라인하르트 쉬메켈
Reinhard Schmoeckel
1928년 8월 27일에 베를린에서 출생한 라인하르트 쉬메켈 박사는 인종학 및 인도게르만학에 정통한 학자이다. 또한 독일 현대 정치학, 특히 정당사에 대한 저서도 낸 행정연구가이도 하다. 처음에 베스트팔렌의 한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독일 본 대학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기자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또 본에 소재한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실과 대통령실에서 고위 관료로 40년간 재직하면서, 독일과 유럽 및 근동아시아 지역의 선사시대와 고대시대에 대한 다양한 저서들을 펴내서 대중적 인기를 모았다. ‘디트리히 본 베른 학회’의 회장으로서 독일의 고대 전설에 숨어 있는 역사성을 캐내는 데 진력하고 있으며, 현재 본에 살고 있다.
역자 : 한국 게르만어 학회
1994년 역사언어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전문 학술공동체이다. 매월 1회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고트어, 고대독어, 고대작센어 등 게르만 제 언어로 쓰인 텍스트를 강독하거나 관련 논문들을 읽어가며 이들 언어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다. 아울러 인도유럽어 전반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 최근에는 역사언어학을 역사, 민속, 전설, 고고학, 유전학 등 여러 학문 분야와 관련시키면서 다각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김영중 : 한국외국어대학교 네델란드어학과 교수이다.
김재명 : 강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김희자 : 순천향대학교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이다.
류종경 : 충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윤혜준 :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연구교수이다.
정정권 : 인천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다.
▣ 주요 목차
I. 초원에서 출발한 종족 B.C.4500~2000
1장 젊은 희생자들의 행렬: 원原인도유럽인의 확산
2장 언어학자들, 인도유럽인을 발견하다: Vater-pater-peter(아버지)
3장 정치가 학문의 목을 조르다: “게르만”이란 용어가 금기어가 된 이유
4장 버려진 아이: 수천 년에 걸친 쿠르간족의 형성 과정
5장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 쿠르간 유목민의 문화와 5000년 전 유럽 문화들
II. 전투마차를 몰고 다니던 귀족들 B.C.2000~1200
6장 잊혀진 대제국: 히타이트 제국
7장 북쪽에서 온 귀족들: 인도의 정복자 아리아인들
8장 호메로스의 영웅들: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III. 강도들, 영웅들, 왕들 B.C.1300~500
9장 행진하는 민족들: 일리리아인의 이동과 해양민족 펠리시테인
10장 옛 영웅을 노래하다: 도리아인, 이오니아인, 그리고 그리스의 암흑기
11장 종족의 용광로: 소아시아의 2차 인도유럽인의 물결
IV. 동쪽에서 온 기마인들 B.C.800~A.D.500
12장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 1차 훈족의 침입
13장 유목민의 우두머리에서 세계적 제국의 지배자로: 최초로 인도유럽인 대제국을 세운 메디아와 페르시아
14장 “세계의 지붕” 주변: 인도유럽인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다
V. 중부 유럽의 발흥 B.C.2000~A.D.400
15장 황금기: 청동기시대의 유럽
16장 역사가 없는 민족들: 유럽 대륙의 절반에서 사라진 선조들
17장 유럽의 첫 주인들: 로마인 전에 켈트족이 유럽 대륙을 지배했다
18장 늑대와 황소: 인도유럽인 이주민들의 패권 다툼
19장 구세계의 새 지배자들: 게르만족의 등장
VI. 후발주자들 A.D.500~1400
20장 거인이 깨어나다: 슬라브인들의 동유럽 지역 영토 획득
21장 멸망과 승리: 선사시대 발트족의 다양한 행로
01. 반품기한
- 단순 변심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 신청
- 상품 불량/오배송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3개월 이내, 혹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0일 이내 반품 신청 가능
02. 반품 배송비
반품사유 | 반품 배송비 부담자 |
---|---|
단순변심 | 고객 부담이며, 최초 배송비를 포함해 왕복 배송비가 발생합니다. 또한, 도서/산간지역이거나 설치 상품을 반품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
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03. 배송상태에 따른 환불안내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
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
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