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군사 일을 봄놀이 하듯 한다면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징비록』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순식간에 나라가 부수어지고, 임금은 살기 위해 도망가 굴욕적으로 무릎 꿇고, 백성들은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굶주림을 참다못해 육신을 목구멍으로 넣는 일까지 발생한다. 류성룡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돌이키지 못할 비극이 발생했을 때 단지 ‘참담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다’라고 심정을 밝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엄 있는 군주가 아닌 불안에 벌벌 떨며 자리에 연연하는 왕, 역시 자기 이익을 채우는 길이 어디인가를 따라가는 관료들, 방위 사업을 귀찮아하는 백성들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으나, 그럼에도 비극의 가장 큰 책임은 최고 결정권자인 수장의 몫일 수밖에 없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기록한 연유는 과거를 회한하며 죄책감을 덜고자 함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류성룡이 지은 제목 그대로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징계하며 앞날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외침의 역사는 비단 임진왜란뿐만이 아니나 정치, 경제, 군사의 중책을 맡아 나라의 요직에 앉았던 인물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 『징비록』의 가치가 있다. 류성룡은 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전쟁의 실황, 군사 기무의 정리, 여러 사건의 논평 등을 기록하여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남겨 놓았고, 거기에 더해 당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문물제도까지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전란 발발 이후 7년간의 기승전결과, 그 안에서 오간 대화의 기록들은 전쟁문학의 고전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하늘이 낸 큰 인물에게 주어지는 신묘함과 그 책임
전란 발발 이전 류성룡이 불길하게 느낀 조짐들은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첨단을 달리는 지금의 시대라도 무시하지 못할 그리고 무시해서는 안 될 자연적 암시는 존재한다. 그처럼 류성룡은 하늘의 기미들과 세간에서 드러나는 기미들을 보고 느꼈다.
그중 하나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꾼 꿈이다. 경복궁 연추문에 불이 나 그가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누군가가 나타나 “다시 지을 때는 조금 높여 인근 산에 가까운 높이로 해야 한다”라고 말해 준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난 류성룡은 이 불길한 꿈 이야기를 차마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다가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온 뒤에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그리하여 임금이 피란하고, 백성들은 처참히 목숨을 잃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가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고 여기며 자포자기하자, 류성룡은 지난 꿈을 언급하며 “꿈속에서 궁궐의 고쳐 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니 반드시 나라가 회복되리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류성룡은 평생토록 꾼 꿈 중에 징후를 경험한 바가 많았음을 스스로 밝힌 사실이 있다.
『징비록』 본문에 나와 있듯이 전쟁이 터지기 전 류성룡을 불길하게 만든 일들은 여럿이고 현실은 이미 끝나 버린 듯 비참했지만, 그날의 꿈은 분명 류성룡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현실을 기어이 헤쳐 낼 수 있게 한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류성룡의 해석처럼 왜적은 결국 물러갔다. 비록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나라의 패망으로 가는 이런 일 저런 일
우리나라는 태평한 세월이 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다보니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왜적이 쳐들어오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온 국토가 넋을 잃고 말았다. 왜적은 파죽지세로 불과 열흘 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쳐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전략을 도모할 수가 없었고, 용감한 사람도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민심 또한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었으니 서울을 빼앗는 교묘한 계책이 달리 필요치 않았다.
한심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용궁 현감 우복룡이란 자는 자기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가다가 방어사에 예속된 군사 수백 명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간단 이유로 모두 죽여 버렸고, 순찰사 김수는 이 행동에 공이 있다고 임금에게 알려서 승진되도록 하였다. 파벌 싸움에 몰두하였던 지사 신잡은 나라를 잃고 임금이 피란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수복할 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께서는 마땅히 영변으로 떠나셔야 합니다. 그곳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간장이 없는 것이옵니다”라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말을 하였다.
안타까운 죽음도 있다. 평복으로 바꿔 입고 도망다니는 다른 관원들과 달리, 경기 감사 심대는 위험한 곳을 피하지 않고 왜적이 알도록 먼저 공문을 띄워 알렸으며 내응할 사람도 모집하였다. 그러다 첩자의 말을 진짜로 믿고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참혹함을 겪은 부끄러운 우리의 지난날을 현실에 결부시켜 다시 살피면서, 앞날을 바로잡는 일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한번 읽기를 권한다.
▣ 작가 소개
저자 : 류성룡
1564년(명종 19) 관직에 입문한 다음 승승장구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는 영의정에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임금을 호종하고 군사를 총지휘하는 등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이순신ㆍ권율과 같은 명장도 류성룡으로 인해 등용될 수 있었고, 군대 양성ㆍ군비 확충ㆍ무기 제조 등의 국방 강화, 면천법ㆍ호포법ㆍ작미법의 추진을 통한 사회적 부조리 개선에 대한 역할도 크게 했다. 물론 전란 이후 사대부들의 힘에 의해 류성룡의 개혁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류성룡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북인의 무고한 탄핵과 그에 동조한 선조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야 했다. 마음을 돌린 선조가 수차례 류성룡을 불러올리기 위해 정성을 보였으나 모두 거절하고 은거하였다. 그 기간 동안 『징비록』을 집필하여 전란이 있기까지 조선의 실상을 담담하면서도 자세하게 반성하며 ‘지난 일을 징계하고 뒷날을 돌보는’ 디딤돌로 삼고자 하였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서, 그가 계층 간 부조리를 해소하고 고통받는 백성을 위한 정책들을 끊임없이 내놓은 배경은 그 근본 사상에 있다 할 것이다. 1542년(중종 37... ) 태어나 1607년(선조 40) 서거하였다. 류성룡의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역자 : 장윤철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북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를 기반으로 중국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을 중국에 소개하는 한ㆍ중 문화 교류가 꿈이며 또한 전쟁과 혼돈의 중심을 산 지도자 조조의 삶과 재능에 관심을 갖고 그를 연구하여 복잡한 현대를 사는 삶의 지혜를 얻고자 했다.
전작으로 왕경국 박사와 편저한 『유식의 즐거움』 『조조 같은 놈』 『조조 같은 놈 매뉴얼』 『내 안에 적을 깨워라』가 있으며 편역서로 『조조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 『조조의 용병술』이 있다. 편저로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심리학의 재발견: 소소한 일상의 심리학 사용법』 『강자를 이기는 최소한의 공부: 고전에서 찾아낸 생존의 전략』 『조조의 진면목』 『단숨에 읽는 서유기 1ㆍ2』 『단숨에 읽는 수호지 1ㆍ2』 『단숨에 읽는 요재지이 1ㆍ2』 『단숨에 읽는 홍루몽 1ㆍ2』 『단숨에 읽는 삼국지 1ㆍ2』 『초한지 1~5』 외 다수가 있다.
▣ 주요 목차
류성룡은 어떤 인물인가
류성룡의 일생
전란 직후부터 막바지까지
이순신의 성정 그리고 류성룡과의 인연
전란 중 나온 류성룡의 혁신적인 제안들
류성룡의 성장기와 정치적 입지
징비록을 저술한 그의 말년과 학문 세계
류성룡과 선조의 관계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지난 일을 징계하며 뒷일을 삼가다
재상 류성룡의 참회록
징비록의 생생한 사실 기록
징비록의 간행 역사
징비록이 후대에 주는 메시지
이 글에 덧붙이는 말
류성룡의 자서(自序)
징비록 제1권
1. 일본 국사 다치바나 야스히로 다녀가다
2. 일본 국사 요시토시 등이 오다
3. 우리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 다녀오다
4. 명나라를 치겠다는 일본 국서가 말썽이 되다
5. 다급한 군비
6. 이순신의 발탁
7. 신립 장군의 사람됨
8.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9. 영남 여러 성의 함락
10. 급보가 연잇고, 신립 등이 달려 내려가다
11. 김성일의 논죄 문제
12. 김늑의 민심 수습
13. 상주 싸움에서 이일이 패주하다
14. 서울의 수비와 파천 문제
15. 신립이 충주에서 크게 패하다
16.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오르다
17.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고 임금은 평양에 도착하다
18. 삼도군이 용인 싸움에서 무너지다
19. 신각의 승리와 억울한 죽음
20.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다
21. 왜적이 함경도로 들어오고 두 왕자가 잡히다
22. 이일이 평양으로 쫓겨 오다
23. 명나라 사자가 오고, 평양성 수비가 논란되다
24. 임금이 평양성을 떠나다
25. 왜적이 평양성에 들어오다
26. 임금은 정주ㆍ선천으로 향하고 민심도 어지러워지다
27. 임금이 의주에 이르고, 명나라 구원병을 오게 하다
28. 명나라 구원병 5천 명이 먼저 달려오다
29. 명나라 구원병이 평양성을 치다가 실패하다
30.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왜적을 격파하다
31. 조호익의 충의
32. 전주 방어전과 의병 정담 등의 용맹함
33. 평양성을 공격해 보다
34. 명나라 심유경의 강화 회담
35. 경기 감사 심대의 죽음
36. 원호가 왜적을 쳐부수다
37. 권응수 등이 영천을 수복하다
38.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39. 의병이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다
40. 이일이 순변사가 되다
41. 왜적의 첩자 김순량 등을 잡아 죽이다
징비록 제2권
42. 평양성을 수복하다
43. 이일 대신 이빈을 순변사로 임명하다
44. 명나라 군사가 벽제 싸움에 지고 개성으로 물러서다
45. 권율의 행주대첩
46.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다
47. 심유경의 적극 강화책
48. 서울이 수복되다
49. 왜적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함락하다
50. 임금이 서울로 돌아오고 사신들이 일본에 왕래하다
51. 이순신을 하옥시키다
52. 명나라 군사의 도움을 받다
53. 원균이 패하여 한산도 수군이 무너지다
54. 황석산성이 함락되다
55.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다
56. 왜적이 남원성을 함락시키다
57.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에서 왜적을 쳐부수다
58.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가다
59. 명나라 장수들의 전황
60. 최후의 결전
61. 이순신의 인품
62. 군신(軍神) 이순신의 계엄
녹후잡기
1. 임진왜란의 조짐
2. 괴이한 일들
3. 왜적의 간사하고 교묘한 꾀
4. 지세 이용이 승패를 좌우한다
5. 성을 굳게 지키는 묘법
6. 진주성 포루의 역사 문제
7. 왜적을 막아 낼 방도를 강구하다
8. 임진강에 부교를 가설하다
9. 훈련 도독을 설치하다
10. 심유경에 관한 이런 저런 일
부록 - 조선시대 관직
조선시대 관청
군사 일을 봄놀이 하듯 한다면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징비록』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순식간에 나라가 부수어지고, 임금은 살기 위해 도망가 굴욕적으로 무릎 꿇고, 백성들은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굶주림을 참다못해 육신을 목구멍으로 넣는 일까지 발생한다. 류성룡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돌이키지 못할 비극이 발생했을 때 단지 ‘참담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다’라고 심정을 밝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엄 있는 군주가 아닌 불안에 벌벌 떨며 자리에 연연하는 왕, 역시 자기 이익을 채우는 길이 어디인가를 따라가는 관료들, 방위 사업을 귀찮아하는 백성들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으나, 그럼에도 비극의 가장 큰 책임은 최고 결정권자인 수장의 몫일 수밖에 없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기록한 연유는 과거를 회한하며 죄책감을 덜고자 함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류성룡이 지은 제목 그대로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징계하며 앞날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외침의 역사는 비단 임진왜란뿐만이 아니나 정치, 경제, 군사의 중책을 맡아 나라의 요직에 앉았던 인물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 『징비록』의 가치가 있다. 류성룡은 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전쟁의 실황, 군사 기무의 정리, 여러 사건의 논평 등을 기록하여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남겨 놓았고, 거기에 더해 당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문물제도까지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전란 발발 이후 7년간의 기승전결과, 그 안에서 오간 대화의 기록들은 전쟁문학의 고전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하늘이 낸 큰 인물에게 주어지는 신묘함과 그 책임
전란 발발 이전 류성룡이 불길하게 느낀 조짐들은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첨단을 달리는 지금의 시대라도 무시하지 못할 그리고 무시해서는 안 될 자연적 암시는 존재한다. 그처럼 류성룡은 하늘의 기미들과 세간에서 드러나는 기미들을 보고 느꼈다.
그중 하나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꾼 꿈이다. 경복궁 연추문에 불이 나 그가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누군가가 나타나 “다시 지을 때는 조금 높여 인근 산에 가까운 높이로 해야 한다”라고 말해 준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난 류성룡은 이 불길한 꿈 이야기를 차마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다가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온 뒤에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그리하여 임금이 피란하고, 백성들은 처참히 목숨을 잃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가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고 여기며 자포자기하자, 류성룡은 지난 꿈을 언급하며 “꿈속에서 궁궐의 고쳐 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니 반드시 나라가 회복되리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류성룡은 평생토록 꾼 꿈 중에 징후를 경험한 바가 많았음을 스스로 밝힌 사실이 있다.
『징비록』 본문에 나와 있듯이 전쟁이 터지기 전 류성룡을 불길하게 만든 일들은 여럿이고 현실은 이미 끝나 버린 듯 비참했지만, 그날의 꿈은 분명 류성룡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현실을 기어이 헤쳐 낼 수 있게 한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류성룡의 해석처럼 왜적은 결국 물러갔다. 비록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나라의 패망으로 가는 이런 일 저런 일
우리나라는 태평한 세월이 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다보니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왜적이 쳐들어오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온 국토가 넋을 잃고 말았다. 왜적은 파죽지세로 불과 열흘 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쳐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전략을 도모할 수가 없었고, 용감한 사람도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민심 또한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었으니 서울을 빼앗는 교묘한 계책이 달리 필요치 않았다.
한심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용궁 현감 우복룡이란 자는 자기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가다가 방어사에 예속된 군사 수백 명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간단 이유로 모두 죽여 버렸고, 순찰사 김수는 이 행동에 공이 있다고 임금에게 알려서 승진되도록 하였다. 파벌 싸움에 몰두하였던 지사 신잡은 나라를 잃고 임금이 피란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수복할 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께서는 마땅히 영변으로 떠나셔야 합니다. 그곳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간장이 없는 것이옵니다”라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말을 하였다.
안타까운 죽음도 있다. 평복으로 바꿔 입고 도망다니는 다른 관원들과 달리, 경기 감사 심대는 위험한 곳을 피하지 않고 왜적이 알도록 먼저 공문을 띄워 알렸으며 내응할 사람도 모집하였다. 그러다 첩자의 말을 진짜로 믿고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참혹함을 겪은 부끄러운 우리의 지난날을 현실에 결부시켜 다시 살피면서, 앞날을 바로잡는 일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한번 읽기를 권한다.
▣ 작가 소개
저자 : 류성룡
1564년(명종 19) 관직에 입문한 다음 승승장구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는 영의정에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임금을 호종하고 군사를 총지휘하는 등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이순신ㆍ권율과 같은 명장도 류성룡으로 인해 등용될 수 있었고, 군대 양성ㆍ군비 확충ㆍ무기 제조 등의 국방 강화, 면천법ㆍ호포법ㆍ작미법의 추진을 통한 사회적 부조리 개선에 대한 역할도 크게 했다. 물론 전란 이후 사대부들의 힘에 의해 류성룡의 개혁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류성룡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북인의 무고한 탄핵과 그에 동조한 선조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야 했다. 마음을 돌린 선조가 수차례 류성룡을 불러올리기 위해 정성을 보였으나 모두 거절하고 은거하였다. 그 기간 동안 『징비록』을 집필하여 전란이 있기까지 조선의 실상을 담담하면서도 자세하게 반성하며 ‘지난 일을 징계하고 뒷날을 돌보는’ 디딤돌로 삼고자 하였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서, 그가 계층 간 부조리를 해소하고 고통받는 백성을 위한 정책들을 끊임없이 내놓은 배경은 그 근본 사상에 있다 할 것이다. 1542년(중종 37... ) 태어나 1607년(선조 40) 서거하였다. 류성룡의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역자 : 장윤철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북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를 기반으로 중국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을 중국에 소개하는 한ㆍ중 문화 교류가 꿈이며 또한 전쟁과 혼돈의 중심을 산 지도자 조조의 삶과 재능에 관심을 갖고 그를 연구하여 복잡한 현대를 사는 삶의 지혜를 얻고자 했다.
전작으로 왕경국 박사와 편저한 『유식의 즐거움』 『조조 같은 놈』 『조조 같은 놈 매뉴얼』 『내 안에 적을 깨워라』가 있으며 편역서로 『조조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 『조조의 용병술』이 있다. 편저로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심리학의 재발견: 소소한 일상의 심리학 사용법』 『강자를 이기는 최소한의 공부: 고전에서 찾아낸 생존의 전략』 『조조의 진면목』 『단숨에 읽는 서유기 1ㆍ2』 『단숨에 읽는 수호지 1ㆍ2』 『단숨에 읽는 요재지이 1ㆍ2』 『단숨에 읽는 홍루몽 1ㆍ2』 『단숨에 읽는 삼국지 1ㆍ2』 『초한지 1~5』 외 다수가 있다.
▣ 주요 목차
류성룡은 어떤 인물인가
류성룡의 일생
전란 직후부터 막바지까지
이순신의 성정 그리고 류성룡과의 인연
전란 중 나온 류성룡의 혁신적인 제안들
류성룡의 성장기와 정치적 입지
징비록을 저술한 그의 말년과 학문 세계
류성룡과 선조의 관계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지난 일을 징계하며 뒷일을 삼가다
재상 류성룡의 참회록
징비록의 생생한 사실 기록
징비록의 간행 역사
징비록이 후대에 주는 메시지
이 글에 덧붙이는 말
류성룡의 자서(自序)
징비록 제1권
1. 일본 국사 다치바나 야스히로 다녀가다
2. 일본 국사 요시토시 등이 오다
3. 우리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 다녀오다
4. 명나라를 치겠다는 일본 국서가 말썽이 되다
5. 다급한 군비
6. 이순신의 발탁
7. 신립 장군의 사람됨
8.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9. 영남 여러 성의 함락
10. 급보가 연잇고, 신립 등이 달려 내려가다
11. 김성일의 논죄 문제
12. 김늑의 민심 수습
13. 상주 싸움에서 이일이 패주하다
14. 서울의 수비와 파천 문제
15. 신립이 충주에서 크게 패하다
16.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오르다
17.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고 임금은 평양에 도착하다
18. 삼도군이 용인 싸움에서 무너지다
19. 신각의 승리와 억울한 죽음
20.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다
21. 왜적이 함경도로 들어오고 두 왕자가 잡히다
22. 이일이 평양으로 쫓겨 오다
23. 명나라 사자가 오고, 평양성 수비가 논란되다
24. 임금이 평양성을 떠나다
25. 왜적이 평양성에 들어오다
26. 임금은 정주ㆍ선천으로 향하고 민심도 어지러워지다
27. 임금이 의주에 이르고, 명나라 구원병을 오게 하다
28. 명나라 구원병 5천 명이 먼저 달려오다
29. 명나라 구원병이 평양성을 치다가 실패하다
30.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왜적을 격파하다
31. 조호익의 충의
32. 전주 방어전과 의병 정담 등의 용맹함
33. 평양성을 공격해 보다
34. 명나라 심유경의 강화 회담
35. 경기 감사 심대의 죽음
36. 원호가 왜적을 쳐부수다
37. 권응수 등이 영천을 수복하다
38.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39. 의병이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다
40. 이일이 순변사가 되다
41. 왜적의 첩자 김순량 등을 잡아 죽이다
징비록 제2권
42. 평양성을 수복하다
43. 이일 대신 이빈을 순변사로 임명하다
44. 명나라 군사가 벽제 싸움에 지고 개성으로 물러서다
45. 권율의 행주대첩
46.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다
47. 심유경의 적극 강화책
48. 서울이 수복되다
49. 왜적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함락하다
50. 임금이 서울로 돌아오고 사신들이 일본에 왕래하다
51. 이순신을 하옥시키다
52. 명나라 군사의 도움을 받다
53. 원균이 패하여 한산도 수군이 무너지다
54. 황석산성이 함락되다
55.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다
56. 왜적이 남원성을 함락시키다
57.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에서 왜적을 쳐부수다
58.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가다
59. 명나라 장수들의 전황
60. 최후의 결전
61. 이순신의 인품
62. 군신(軍神) 이순신의 계엄
녹후잡기
1. 임진왜란의 조짐
2. 괴이한 일들
3. 왜적의 간사하고 교묘한 꾀
4. 지세 이용이 승패를 좌우한다
5. 성을 굳게 지키는 묘법
6. 진주성 포루의 역사 문제
7. 왜적을 막아 낼 방도를 강구하다
8. 임진강에 부교를 가설하다
9. 훈련 도독을 설치하다
10. 심유경에 관한 이런 저런 일
부록 - 조선시대 관직
조선시대 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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